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 준-13화 (13/141)

헬하운드-10

데스먼드는 괜한 싸움에 말려든 기분이었다. 그는 광대처럼 웃었다.

광대 웃음- 학생들은 볼 수 없는 ‘총장 접대용 미소’였다.

“총장님,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는 발을 뺐다. 현명한 처신이었다.

‘준도 나이를 먹고, 세상을 알았다면 나처럼 행동했을 텐데.’

처세술의 기본은 쓸데없는 논쟁을 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준은 오히려 논쟁을 지피고 있었다. ‘죽음을 없애겠다니!’ 스티븐 교수가 준을 미워한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해괴한 소리가 또 나오기 전에 ···. 그는 서둘러 화제를 바꿨다.

“준, 총장님께서는 굿데이에 투자도 하고 자네를 도와주고 싶어 하시네. 이미 많은 투자금이 모였다던데, 어떤 식으로 수익을 낼 텐가?”

총장을 내세웠지만, 사실 그도 궁금했다. 이미 사학연금 대출까지 당겨서, 굿데이에 올인했다.

“스피드입니다.”

충분한 대답이 되었을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브라이언 총장이 미소를 보였다.

그는 준의 독특한 성격, 너무 머리가 좋아서, 쉽게 설명하지 못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스피드 좋지. 스피드를 위해 커피 한잔 해야겠군.” 브라이언 총장은 인터폰을 누르며 밖에 있는 비서에게 말했다. “에티오피아 카파 커피를 가져오게.”

카파 커피는 일반인에게 알려지지 않은, 최상류층만이 즐기는 커피였다.

브라이언 총장은 커피가 올 때까지, 선반에 진열된 예술품을 설명했다.

그에게 돈은 중요하지 않았다.

킹스덤 대학교의 최종 책임자로서 최근 일어난 들뜬 분위기의 정체를 알아야 했다.

굿데이가 대단한 건 알겠는데, 킹스덤 전체를 붕 뜨게 할 정도로 대단한가?

굿데이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만큼 해낼 수 있을까?

파루시아 시즌에 굴렀던 투자금 규모와 이번에 굴려야 할 투자금 규모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파루시아 버전이 조약돌 규모였다면, 헬하운드는 히말라야 같은 크기였다.

“스케일이 달라지면, 적용되는 규칙도 달라지지.”

브라이언 총장은 아프리카 토우 족의 점토 가면을 설명하면서 말했다.

점토 가면은 본래 마을 입구에 모셔지거나, 용맹한 용사의 방패를 장식하던 것이었다.

준은 브라이언의 마음속이 환히 읽혔다.

준이 읽은, 브라이언의 진심은 이랬다.

‘킹스덤 대학교 학생들과 직원들 심지어 근처 가게 주인들과 윤락가의 콜걸들이 굿데이에 투자했어. 내 친구들이 말하기를 굿데이를 노리는 실력자들이 많다는 거야. 실력자들의 머니 파워는 상상력을 뛰어넘어. 세상 모든 것이 그들의 뜻대로 움직이지. 그런 실력자들이 굿데이를 짓밟겠다고 선언했어. 살아남을 수 있겠니? 굿데이가 망하면, 학생들은 등록금과 수업료를 잃고, 직원들은 저축과 연금을 잃고, 집까지 거덜 나겠지. 킹스덤 대학교는 그야말로 엄청난 망신을 당하고, 삼류로 추락할 거야. 널 도와주고 싶은데,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모르겠구나. 네가 망한다면 망하는 거지만, 그래서 내 옷과 얼굴에도 구정물이 튀는 건 싫구나.’

구구절절한 브라이언 총장의 속마음이었다.

준은 그가 애처롭게 느껴졌다. 그리고 조금은 맘에 들었다. 얼굴을 보아하니 요 며칠 밤잠을 설친 게 분명했다.

총장 체면에 준의 발목을 잡을 수 없고, 앞길을 가로막을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두기에는 칼날을 벼르는 실력자들의 소문이 두려웠다.

준은 겉으로 태연한 척하며 예술품을 설명하지만, 속으로는 만신창이가 된 총장을 보며, 자신의 과거를 보는 것 같았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할까 봐, 노숙자가 될까 봐, 전전긍긍하던 시절, 스티브 교수에게 미운털이 박혔던 시절.

이제 먹고 살 길이 열렸지만,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여전히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고 있고,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

위험은 사라지지 않고, 위기는 계속된다.

브라이언 총장이 사막 유목민에게 얻은 장미 석영을 설명할 때, 준이 말했다.

“걱정할 거 없어요.”

“뭐라고?”

브라이언은 갑작스럽게 끼어든 준을 쳐다보았다.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언어와 대화를 뛰어넘는 강렬한 느낌. 뭔지 모르겠지만, 준이 말이 맞을 것이다. 걱정할 거 없다. 갑자기 속마음을 들킨 것처럼 부끄러워졌다. 아니, 준 앞에서 작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사실 그 말이 듣고 싶었네.”

그는 예술품과 수집품을 장황하게 설명하던 것을 그만두었다. 방법은 모르겠지만, 모든 것이 다 제대로 전달되었고, 준이 응답했다.

“자네 종교를 만들 생각은 없나?”

“종교요? 세금 공제도 되고, 괜찮은 돈벌이죠.”

“그런 뜻이 아니야. 자네에겐 특별한 카리스마가 있어. 사람의 생각을 꿰뚫어 볼 줄도 알고. 기후예측모형을 개발한 것도 수학 실력보다는 그런 카리스마가 작용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종교 창설은 저보다 스티브 교수님이 한 수 위예요. 그분의 강의를 들으면, 통계학이 평균, 표준편차, 정규분포가 삼위일체가 되는 종교처럼 들리거든요.”

*

카파 커피 향에는 희미한 박하 향과 꽃향기가 섞여 있었다.

준은 시간을 들여, 브라이언 총장과 데스먼드 학과장의 방해를 받지 않고, 커피 맛을 음미했다.

놀랍도록 섬세한 맛이었다.

“금융계는 중세시대 같은 계급 사회죠. 중세시대의 왕처럼 화폐 공급을 독점하는 중앙은행이 있고, 중앙은행 밑의 은행들은 중세시대 영주죠. 나머지 기업들은 기사나 일꾼이죠. 그들은 서로 싸워야 하죠. 끊임없이 싸워서 돈을 벌고 이자를 내죠. 모든 것은 왕과 영주의 몫이고요. 그런 계급 사회에서 굿데이가 취할 수 있는 포지션은 하나밖에 없어요.”

준은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하고, 입을 다물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어떻게 설명해야 브라이언 총장과 데스먼드 학과장이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 고민했었다.

그러나 브라이언과 데스먼드는 하나밖에 없다는 그 포지션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 포지션이 뭔가?”

데스먼드 학과장이 준을 채근했다.

준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거까지 직접 말해야 하나?

“굿데이는 암살자가 될 겁니다. 그래서 스피드가 중요합니다. 그래야 굿데이를 노리는 다른 암살자와 기사 그리고 군대를 따돌리죠.”

“암살자라니 ···. 으스스하군. 자네는 아무리 봐도 암살자 같지 않아. 소문으로 들리는 헬하운드는 뭔가? 다들 그걸로 굿데이가 돈을 벌 거라던데?”

“암살자가 데리고 다니는 사냥개죠.”

“사냥개의 이름이 헬하운드라 ···. 암살자에게도 이름이 있겠군.”

*

곤잘로는 줄리아에게 헌 돈이 가득 든 명품 가방을 건넸다.

그는 그녀에게 실버 드래곤의 정규직 자리까지 약속했다.

“굿데이의 투자 전략이 필요해.”

“정말 급한 가 보네요. 저에게 이런 부탁을 하다니. 지난번에 자신 있게 말했잖아요. 굿데이는 제대로 망할 거라고.”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굿데이의 파산은 필연이야. 어차피 가야 할 길을 좀 더 쉽게,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사이좋게 가려는 거야.”

“준은 여자에게 눈길도 주지 않아요. 미인계는 통하지 않아요.”

“그래? 준이 게이였어?”

“그렇지 않아요.”

“어떻게 알아?”

“남자에게도 마찬가지거든요.”

“다행이군.”

“왜요?”

“게이였으면, 내가 나서야 했거든.”

그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줄리아! 넌 해낼 수 있어. 우리는 네가 준과 저녁 식사 약속을 한 걸 알아.”

“통화를 도청했군요.”

그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에바와의 통화 내용을 알고 있다면, 그녀가 곤잘로에게 정보를 캐서, 굿데이에 넘긴 것도 안다는 뜻이었다.

“우리는 다 알아. 이제 확실하게 편을 정할 때야. 양다리는 사절이야.”

“저녁 식사를 할 때, 투자 전략을 물어봐 줄 순 있어요. 하지만 몸을 팔아서까지 캐낼 자신은 없네요.”

“자신감을 가져. 고작 커피 한 잔으로 나에게 정보를 캐냈잖아.”

“준에 대한 정보도 넘겼잖아요. 기브앤테이크였죠. 하지만 준에겐 제가 줄 정보가 없어요.”

“준이 관심 있어 할 정보는 아주 많아. 그건 우리에게 맡겨. 너는 하루빨리 준과 저녁 식사 약속을 잡아.”

*

찰스는 일본 부동산 폭락을 설계할 때를 떠올렸다.

일본 통화 위원회와 중앙은행 간부들에게 빼낸, 정보를 바탕으로 설계를 시작했었다. 요리책을 펼쳐놓고 요리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실버 드래곤이 원한대로 일본 부동산은 개박살났다.

부동산 가치가 하락하자, 부동산을 담보로 돈을 빌렸던 사람들은 대출을 갚지 못해, 재산을 압류당했다.

많은 사람이 목숨을 끊었다.

어제만 하더라도 자동차 두 대를 굴리고, 일 년에 두 번씩 외국에서 휴가를 보냈던 가정들이 빚쟁이가 되어 길거리로 쫓겨났다.

찰스는 자신의 설계에 만족했다.

큰돈을 벌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즐거워했고, 다른 사람이 절규할 때 환호했다.

양심의 가책? 그런 건 겁쟁이나 하는 소리다.

그날 밤, 그는 빌딩 옥상에 올라가서 맘껏 소리쳤다. 나는 위대하다! 나는 악마다!

세계 경제를 요동치게 했던 그였지만, 굿데이는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느껴졌다.

어마어마한 투자금이 굿데이로 몰렸는데도, 굿데이의 투자전략을 알 수 없었다.

굿데이의 주거래 은행인, 로이니 은행을 통해서 투자금의 정확한 액수를 파악했다.

대학생들과 직원, 지역 상인들의 금액을 모두 합쳐봐야 별거 없었지만, 큰손들의 투자금은 메이저 투자은행에서 취급하는 단위였다.

큰손들 ···. 분명 비공식 채널로 경고했건만, 그들은 기어이 굿데이에게 투자했다.

이제 남은 것은 전쟁뿐이었다.

승자에겐 영광과 수익이, 패자에겐 교훈과 손실이 쥐어질 것이다.

당장, 다음 주부터 굿데이의 투자가 시작된다. 그런데 어디서? 어떻게? 어느 방향으로 돈을 굴릴지 알 수 없었다.

최고로 뛰어난 해커들이 굿데이의 컴퓨터를 털었지만, 투자 전략 따윈 나오지 않았다.

그래픽 품질이 후진 게임 몇 개를 찾아낸 게 고작이었다.

“최근에 준은 ···. 악마와 지옥에 대한 책을 주로 봤어요. 그의 노트에서 유진이라는 이름을 봤는데, 흑사병을 일으킨 악마의 이름이죠.”

길버트는 소곤소곤 속삭였다.

그는 준의 정보를 넘기고 돈을 받기로 했다.

준의 정보를 넘기는 것은 아르바이트 같은 거였다. 기자에게도 정보를 팔았고, 준을 스카우트하려는 기업과 헤드헌터에게도 정보를 팔았다.

덕분에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준's 전문가’로 인정받았다.

“투자전략에 대한 힌트는 없었나?”

“그거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잖아요. 헬하운드라고 하죠.”

“그놈의 지긋지긋한 헬하운드. 그건 이름에 불과해. 나에게 필요한 건 내용이야.”

“어차피 다음 주가 되면 알게 되지 않을까요?”

“그 전에 알아야 해. 머니 게임은 길거리 싸움이야. 선방을 날리는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하지.”

“제가 전화해서 물어볼까요?”

길버트는 별거 아니라는 투였다.

“준에게?”

“그 녀석은 제대로 대답하지 않아요. 에바에게 전화할 겁니다.”

길버트는 스마트 폰을 스피커 통화로 해서, 에바에게 전화했다.

갑자기 궁금해서 전화했는데 ···. 투자 전략이 뭐야? 지난번에 설명해준 거 같기도 하고 ···. 그냥 궁금해서. 네가 예전에 그랬잖아. 안전마진이 가능할 때만 투자금을 모집할 거라고. 어떤 안전마진인지 알고 싶어.

길버트는 주저리주저리 매력 없이 용건을 늘어놨다.

“아! 그거!” 에바는 설명할 기회를 얻어서 기뻐하는 눈치였다. “지옥에서 악마를 스카우트했어. 많이 늦었네. 빨리 자라. 좋은 꿈 꾸고.” 달깍.

뚜-뚜

통화 종료 음이 들렸다.

“들으셨죠. 실력 좋은 악마를 고용했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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