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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 준-11화 (11/141)

헬하운드-8

“알았어. 페니실린 발견부터 시작할 게.”

“제약회사에서 나오신 분들이야.”

“그렇진 않아.”

준은 방어적인 태도를 보였다.

로켈은 준과 에바의 흥미로운 권력구조를 간파했다.

준이 밀림의 왕 사자라면, 에바는 사자를 가르치는 조련사였다.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쇼를 완성하려면 서로가 필요한 그런 관계였다.

에바는 작게 푸념하고 로켈에게 직접 물었다.

그녀가 보기에도 로켈이 중심인물 같았다.

“직접 말해주세요. 어디서 오셨죠?”

“준 회장님께서 대답해주실 겁니다.”

준을 향한 비열한 웃음.

에바는 더는 용납하지 않기로 했다.

“이름은 모르니깐, 그냥 난쟁이라고 할게. 난쟁이야. 직접 말해보렴. 넌 어디서 왔니?”

로켈의 표정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감히 난쟁이라고 부르다니! 저년을 지금 죽여버릴까? 난쟁이라는 말에 토그와 디아나의 태도도 달라졌다.

그들은 신호를 기다리는 사냥개처럼 에바를 쳐다보았다.

톡톡.

준이 손끝으로 테이블을 두들겼다.

“이것부터 처리하자.” 준의 손에는 투명한 테이프가 들려 있었다. “노겐이 붙이고 간 도청 테이프인데, 냉장고와 현관문에도 붙어 있을 거야. 그리고 ···.”

준은 에바의 가방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가방끈과 밑에도 위치추적기를 겸한 도청 테이프가 숨겨있었다.

디아나가 전파탐지기로 나머지 도청 테이프를 찾아내서, 찢어버렸다.

도청 테이프의 존재는 모두를 조용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약속한 듯 준을 쳐다보았다.

“이제 된 거 같아. 에바는 어쩌다가 스티커가 묻었어?”

“공원에서 꼬리를 만났어.”

“꼬리라면?”

“감시자.”

그녀는 실버 드래곤이라는 배경을 생략했다.

로켈 일당의 정체를 알기 전까지, 정보를 아껴야 한다.

그런데 ···. 준은 어떻게 도청 테이프를 찾아냈지? 얇고 투명해서 눈에 띄지도 않는데 ···. 그러나 지금은 로켈 일당의 정체를 확인하는 게 먼저였다.

준은 그녀의 생각을 모조리 읽어냈다.

“이쪽은 시온에서 오신 분들이야.”

시온 - 순간 로켈의 비열한 얼굴이 허물어졌다.

“어떻게 우리 조직의 이름을?”

믿을 수 없었다.

시온은 비밀 조직이었다. ‘선택받은 사람’ 중에서도 권능자 레벨이 되어야 겨우 이름을 접한다.

“힘들었어. 우주 탄생과 태양계, 40억 년 전의 지구, 유인원이 인간으로 진화되는 역사를 일일이 되짚어야 했거든. 공룡 대멸종 부분에서 막힐 뻔했지. 핵심 사건은 최근에 일어났지만, 인체 면역시스템은 생명의 역사를 ···.”

“그러니깐, 너 혼자 힘으로 ···. 그것도 상상력만으로 우리 조직의 이름을 알아냈다는 거야?”

로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게 말이 돼?

“사실, 마지막까지 결정하기 힘들었어. 시그마와 시온 둘 중 하나일 거 같았는데 ···. 시그마보다는 시온일 거 같더라고. 시그마라는 이름을 가졌다면, 갈색 진흙을 묻히지 않았을 것 같더라고.”

로켈은 눈앞에 있는 바다가 갈라지는 착각이 들었다.

“난쟁이가 충격받은 거 같네.”

에바가 말했다.

“내 이름은 로켈이다. 키가 작은 건 사실이지만, 난쟁이라고 부르지 말아줘. 레즈 아가씨.”

“그러죠. 당신 같은 남자를 볼 때마다 내가 레즈라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남의 약점을 통해서 자부심을 얻다니, 우울한 아가씨군.”

로켈은 최후를 앞둔 암환자처럼 무기력하게 준을 보았다. 생각만으로 시온의 이름을 알아내다니.

상상을 초월하는 통찰력이다.

“과연 ‘선택받은 사람’답군. 정식으로 내 소개를 하지. 시온의 그림자 기사단 로켈입니다.”

“저는 디아나예요.”

토그가 뒤따라 말했다.

“배고파.”

“냉장고에 먹을 게 있어.”

준이 말하자, 토그는 기쁜 표정으로 주방으로 향했다. 토그의 뒤통수에 대고 준이 다시 말했다.

“염소 머리는 쓰레기통에 버려줘.”

“준짱. 시온이 어떤 조직인지 알고 있습니까?”

로켈의 말투는 완전히 달라졌다. 짱은 최고를 뜻하는 호칭이었다.

“어렴풋이 ···.”

“그것도 생각만으로 알아내신 겁니까?”

“그거 말고 다른 게 있어?”

“말씀해 주십시오. 에바 양도 궁금해할 겁니다.”

그는 에바에게 화해의 몸짓을 보였다.

일이 시작되면 그녀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글로벌한 영재 프로그램 같은 거야. 시작은 아마도 페니실린일 거야.”

“왜?”

에바가 물었다.

“세균에 대한 인체 면역 진화과정에는 관심이 없을 테고 ···. 아버지를 잃은 아들이 있었어. 딸일 수도 있는데, 일단은 아들이라고 할 게. 아버지가 숨진 이유는 장미 가시에 얼굴을 살짝 긁혔기 때문이야. 얼굴이 아니라, 발바닥일 수도 있지만, 왠지 얼굴일 거 같아. 그 상처가 곪았는데, 약이 없었지. 페니실린이 발견되기 전이었거든. 아버지는 아주 흉측한 고통을 받다가 숨졌어. 얼굴 전체가 고름으로 가득 차서 인간의 모습을 잃었지. 그 후 아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똑같은 일을 겪었지. 다리를 긁혔는데, 손등일 수도 있는데, 그냥 다리라고 할게. 긁힌 다리가 썩기 시작했지. 하지만 아들은 며칠 만에 깨끗하게 나았어. 페니실린이 있었거든. 아들은 페니실린을 발견한 과학자에게 노벨상도 주고, 많은 걸 해줬지. 그러다가, 페니실린이 300년 전에 개발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300년 전 이름 없는 여자가 곰팡이에서 항생제를 추출해서 많은 사람을 구했던 거야. 그 여자에겐 비극적인 일이었지.”

“왜?”

“마녀로 몰려서 화형당했거든. 페니실린으로 목숨을 구한 아들은 이 세상의 천재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게 바로 시온의 시작이야.”

“다시 묻겠습니다. 준짱. 그 모든 것을 생각만으로 알아낸 겁니까?”

로켈의 말투는 부드럽고 순종적이었다.

“디테일한 부분은 많이 틀렸을 거 같은데?”

“아들이 아니라, 딸입니다. 그리고 다리를 긁힌 게 아니라, 얼굴이었습니다. 항생제로 목숨은 구했지만, 이미 얼굴이 망가진 후였죠. 그분은 평생 혼자 사셨죠. 시온은 그분의 뜻을 이어받은 분들이 이끌고 있습니다. 저는 당신을 보호하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기후예측모형은 오픈되었지만, 그 사용법을 아는 것은 당신뿐이죠. 당신은 앞으로 인류를 위해 많은 일을 하시게 될 겁니다. 미련한 사람들 때문에 악마로 낙인찍힐 수도 있겠죠. 집안에 무단침입한 것은 ···.”

“세상이 위험하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겠지.”

“네. 그런데 이미 알고 계셨군요. 하지만 그런 거 치곤 너무 허술합니다. 누군가 당신을 해치려 한다면, 쉽게 성공했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 누군가 날 해치려 한다면, 그전에 징후를 읽고 대비했을 거야.”

“도청 테이프는 어떻게 알았어?”

에바가 물었다. 아까부터 그 점이 궁금했다.

“노겐이 너무 쉽게 밖으로 나갔거든. 로켈의 정체가 궁금했을 텐데, 캐묻지도 않았어. 우리 대화를 엿들을 생각이었겠지.”

“도청 테이프는 쉽게 찾아낼 수 있는 물건이 아니야.”

“노겐의 행동반경을 알면 그렇게 어렵지도 않아.”

“내 가방에 붙어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네가 들어올 때 봤어. 가방끈과 밑바닥이 다른 부위보다 더 반짝거렸거든.”

“겨우 그런 걸로?”

“그 정도면 엄청나게 충분해.”

*

찰스는 실버 드래곤의 특급 설계자였다.

태국 바트화를 공격해서 아시아 전체를 달러 가뭄으로 몰아넣은 것도 그의 작품이었다.

수많은 아시아 국가들이 부도위기를 맞았다.

실버 드래곤은 10년 동안 벌어들일 수익을 단 6개월 만에 거둬들였다.

그에게 떨어진 임무는 굿데이를 파산시키는 것이었다.

‘반나절 안에 설계를 끝내주지.’

간단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도록 견적을 뽑아내지 못했다.

굿데이는 파루시아 이후 휴면기에 들어갔고, 투자금도 모으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굿데이를 상대로 설계는 무의미했다. 할 수 있는 것은 기초적인 동향 파악 정도였다.

“한 달에 한 번 기후예측 보고서를 발간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캘리포니아 옥수수 곡창 지역의 가뭄을 예측했죠.”

모니터 요원이 설명했다.

“옥수수 곡창지역의 가뭄이라, 옥수수 가격 상승에 베팅했으면 돈 좀 벌었겠군. 예측 보고서는 누가 볼 수 있지?”

“오픈 사이트라서 누구나 볼 수 있습니다.”

“옥수수 가격 추이는?”

“그게 ···. 예상과 달리 하락했습니다.”

“가뭄인데도?”

“가뭄 발생, 한 달 전에 보고서가 발간되었고, 한 달 동안 대대적인 가뭄 준비 작업이 있었습니다. 강물과 지하수를 끌어 올려서 가뭄에 대비한 거죠.”

“사냥개들이 물어온 건 없나?”

“주변에 괴짜들이 꾀이고 있습니다. 집안에서 정체불명의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들의 신원을 조회 중입니다.”

“굿데이의 투자 전략은?”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정보팀에서 해킹을 해봤지만, 투자 전략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해킹으로 다음 주부터 투자일정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이걸 말하나?”

찰스는 모니터 요원에게 굿데이에서 보낸 안내문을 보여주었다. 다음 주부터 투자금 모집을 시작한다는 내용이었다.

“네.”

모니터 요원은 뻘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구체적인 투자전략을 세웠을 거야. 엄청난 자금이 몰릴 텐데, 그 자금을 굴리려면 옵션게임으로는 답이 없어. 굿데이에 자산운용전문가가 있나?”

“없습니다.”

“전문 인력도 없이, 투자금을 모아서 어떻게 할 생각일까?”

“투자금만 모으고 자산운용은 다른 업체에 맡기려는 거 아닐까요? 수수료만 받아도 남는 장사잖아요.”

“준의 성격을 보면 그건 아니야. 놈은 평소에 할 일 없이 보여도, 일단 일이 시작되면 자신만의 스타일로 밀어붙이는 타입이지. 정보가 너무 부족해. 주변 인물을 포섭은 어떻게 되고 있지?”

“준 주변에는 몇 명 없을뿐더러 충성도도 높습니다.”

“어디는 안 그럴 거 같나?”

“네?”

“태국, 캐나다, 아일랜드, 러시아, 영국 작전이 성공했던 것은 설계가 좋아서가 아니야! 설계가 아무리 좋아도, 내부자 거래 없이 성공 못 해. 아무리 웃긴 설계라도 내부자 거래를 확보하면 성공하는 법이지. 쑤시면 뚫리는 게 사람이야. 더 쑤셔!”

*

지옥의 문지기 헬하운드가 런던을 물어뜯었다.

런던은 느닷없는 겨울철 폭염으로 삼천 명이 숨졌다.

두툼한 점퍼와 양털 스웨터로 겨울을 준비하던 영국인들은 갑작스러운 폭염에 속수무책이었다.

매스컴은 융단폭격, 행성충돌, 화산폭발, 핵전쟁, 아마겟돈에 비유했다.

40도가 넘는 뜨거운 열기는 얼음과 눈을 순식간에 녹였고, 사람의 생명까지 증발시켰다.

때아닌 열기로 소, 돼지, 닭, 칠면조, 염소, 양들이 떼죽음 당했다.

예외가 있다면 타조 농장 정도였다.

동면에서 깨어난 곰들도 어쩔 줄 몰라 했다. 얼었던 산이 갑자기 녹으면서 허물어졌고, 강물이 불어나 도시 절반이 물에 잠겼다.

뜨거운 거리를 걸으면 아무리 건강한 어른일지라도 술에 취한 듯 비틀거렸다. 일사병으로 정신 나간 사람이 알몸으로 거리를 누볐다.

행인들은 알몸 쇼를 환각으로 생각했다. 너무 더워서 헛것이 보이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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