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 준-10화 (10/141)

헬하운드-7

에바가 굿데이를 처음 알게 된 것은 파루시아 투자금을 모을 때였다.

인터넷 투자는 간단했다.

금융상품 디자인과 설계방식 그리고 보장 수익 따위가 적힌 품질보증서를 읽고, 맘에 드는 것을 골라, 결제하면 된다.

굿데이의 상품 이름은 좀 길었다.

‘푸리에 구조방정식이 알려주는 날씨 - 지중해 초대형 허리케인 발생 가능성을 응용한 포지션 설정과 예상 효과.’

지랄 같은 제목만으로는 부족했는지, 방정식과 함수가 잔뜩 등장했다.

믿음보다는 짜증을 유발하는 설명서였다.

에바가 여윳돈을 투자한 이유는 투자기간이 짧았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인 투자상품은 짧아도 1년 정도 돈이 묶였지만, 굿데이가 내건 기간은 1개월이었다.

다른 투자자들도 길고 지루한 수학방정식에 이끌려 투자한 것이 아니라, 투자기간이 짧다는 이유로 돈을 넣었다.

큰 기대를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스무 배가 넘는 수익이 확정되자, 오히려 사기당한 느낌을 받았을 정도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집어넣는 건데! 그 망할 수학기호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어!’

에바의 관심은 여기까지였다.

굿데이에서 일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나중에 굿데이가 다시 투자금을 모은다면, 더 많이 투자할 생각이었지만, 굿데이를 직장으로 생각하진 않았다.

그녀는 똑똑하고 아름다웠지만, 레즈비언으로 사는 건 힘든 일이었다.

멀쩡한 여자들이 얼간이 같은 남자에게 매달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 아팠다.

여자를 이해하는 건 여자뿐이고, 여자를 사랑하는 것도 여자뿐이다.

남자들이 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 소유와 지배에 불과하다. 그들은 어리석고 잔인하며 무책임하다. 예외는 없었다.

오직 단 한 명.

킹스덤 중앙도서관의 준은 달랐다.

도서관 구석에서 책을 읽는 남자가 굿데이의 창업자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바닥이 무너진 것처럼 놀랐다.

자수성가한 유명인이 구석진 자리에서 책을 읽어?

도서관에 떨어진 돈을 주우러 왔나?

아름다운 여자가 관심을 보이고, 가끔은 대놓고 애걸했는데도 준은 흔들리지 않았다.

세상에 저런 남자가 있다니!

생각해보니, 이상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

준은 성공을 위한 필수 코스, 인맥 형성을 위한 1% 사교모임에도 나가지 않았다.

도서관에서 시답지 않은 잡학 서적을 뒤적거리는 것보다 투자자를 만나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타고난 책벌레인가?

그것도 아니었다.

준에게 있어 독서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었다.

준에겐 절박한 무언가가 있었다.

너무나 절박해서 아름다운 여자와 즐거운 파티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다.

도대체 뭐지?

성공도 했고, 명예도 얻고, 나이도 젊다.

인생을 즐길 법도 한데 ···. 에바는 의심의 눈길로 준을 관찰했다.

‘다르다.’

이것이 결론이었다.

준은 다르다.

다른 남자와 다르고, 보통 인간과도 다르다. 그래서 ···. ‘위험’하다.

논리적인 추론이 아니라, 레즈비언 특유의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준도 스스로 느끼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파루시아로 깨달았을 것이다.

그가 곧바로 돈벌이에 나서지 않은 이유는 ···. 자신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지키기 위함이다. 살아남기 위함이다.

갑자기 그녀의 시야가 밝아졌다.

준이 위험하다는 사실이 그녀를 흥분케 했다.

저따위가 위험한 남자라니! 그것도 이 세상 그 어떤 새끼보다 위험하다니! 이 세상 모든 남자야! 너희는 너무 시시해. 와서 준을 봐라! 이 세상의 재앙을! 너희가 숭배하게 될 재난을! 네놈들의 절망을!

그녀는 굿데이에 지원했다.

준이 완전체가 되는 걸 보고 싶었다.

준은 위험하지만, 아직 약하다.

울타리가 필요하다.

그를 지켜줄 누군가 있어야 한다.

에바는 그 누군가가 그녀라고 정했다.

굿데이의 컴퓨터를 해킹해서, 서류 심사를 통과했다.

굿데이 컴퓨터를 해킹하는 것은 현금 인출기 터는 것보다 쉬웠다.

면접이 문제였지만, 준이라면 정확한 선택을 할 것이다.

정말 그럴까?

그녀는 생전 처음으로 남자에게 그녀의 운명을 맡겼고 ···. 구원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준을 믿을 수 없었다.

만일 하나 굿데이에서 쫓겨나게 된다면 ···. 그녀는 보험 삼아 기후예측모형 프로그램을 카피했다.

일이 틀어지면, 카피한 기후예측모형은 퇴직금이 될 것이다.

그 다음 날, 준은 평소와 다르게 업무 지시를 했다.

기후예측모형을 무료로 내려받기한 것이다.

정부와 기업에 사용료를 받는다는 조건이었고, 특정 알고리즘을 특허로 등록했지만, 타이밍이 절묘했다.

이제 기후예측모형을 카피는 불법이 아니었다. 뭐랄까? 다시 한 번 구원받은 느낌이었다.

“기후예측모형을 오픈하면 어떻게 돈을 벌어?”

에바가 따졌다.

“돈이라니?” 준은 에바를 빤히 쳐다보다가, 늦게 말해서 미안하다는 투로 덧붙였다. “굿데이에 온 순간, 돈을 위해 사는 삶은 끝난 거야.”

“뭔 소리야?”

“앞으로는 돈이 우리를 따를 거야.”

준은 무료로 내려받을 수 있는 기후예측모형을, 굳이 돈을 주고 사겠다는 꾼이 나타나면, 꾼이 원하는 대로 해주라고 했다. 매매계약서도 써주고, 영수증도 끊어주라고.

“무료로 내려받을 수 있는데? 돈을 내고 산다고? 그런 멍청이들이 있을까?”

많았다.

*

실버 드래곤 ···. 어쩌면 당연한 사건이었다.

세상이 준을 그냥 놔둘 리 없다.

길들이거나, 잡아먹거나. 둘 중 하나였다.

냉정하게 본다면, 길들인 다음에 잡혀먹힐 확률이 높았다.

“상대가 너무 나빠.”

길버트는 도서관 네트워크로 실버 드래곤의 자료를 뽑아냈다.

실버 드래곤이 파산시킨 기업은 천 개가 넘었다.

자금흐름 압박은 기본이었고, 길고 지루한 소모적인 법률 분쟁까지 수법도 다양했다.

“놈들의 표적이 되고, 멀쩡한 기업이 없어. 모두 입고 있던 팬티까지 벗겨지고, 살가죽까지 뜯겼어.”

그는 에바에게 커피잔을 내밀었다.

에바는 자연스럽게 잔을 받았다.

그녀의 생각도 길버트와 다르지 않았다.

실버 드래곤은 수익 달성을 위해서, 전쟁도 마다치 않는다. 반란군들에게 뒷돈과 무기를 대주었고, 어쩌면 테러범들을 지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실버 드래곤에 소속된 전문가들은 금융수학자만이 아니라, 전문 킬러도 많았다.

“정부 고위직 중에도 실버 드래곤 멤버가 있고, 정보국의 특수팀은 아예 대놓고 실버 드래곤의 뒤처리를 해. 준은 뭐래?”

“이제 말해야지.”

“꼭 말해야 할까?”

“그게 무슨?”

“아직 어리잖아. 세상 경험도 많지 않고 ···. 네가 부드럽게 처리할 수 있잖아.”

“부드럽게? 어떻게?”

“그들이 원하는 걸 줘.”

“굿데이를 넘기라고?”

“세상에 맞서지 마. 굿데이가 네 목숨이나 인생보다 소중해?”

“길버트, 너답지 않게 왜 이렇게 감정적이야?”

“모르겠어. 오늘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셨나 봐.”

*

노겐의 비명은 착륙하는 비행기처럼 낮아졌다.

덧없이 홀로 아리아를 부른 기분이었다.

난쟁이,

덩치,

가짜 경찰, 그리고 준.

누구 하나 비명에 응답하지 않았다.

노겐은 맥주와 젤라토 그리고 음료수를 한가득 안고, 보보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냉장고에 ···.”

노겐의 대화 호흡은 짧았다.

준이 호흡을 이어줬다.

“염소 대가리가 있지. 치아를 보면 방목으로 키워진 늙은 암컷이야. 눈동자가 또렷한 걸 보면, 자연사가 아니라, 도살당했어.”

“왜 냉장고에 ···.”

노겐의 단어 표현력은 냉장고를 벗어나지 못했다.

작전 지역에서 험한 꼴을 많이 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연기가 피어오르고 사격 좌표가 난무하는 그런 곳이었다.

킹스덤 블루 스트릿 저택에 있는 사이드 제로 냉장고처럼, 안전하고 정갈한 곳에서 원망 가득한 눈빛의 염소대가리라니! 극단적인 문화 충격이었다.

로켈은 흐뭇하게 노겐을 지켜보았다.

그가 원하는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로켈은 왠지 노겐이 맘에 들었다. 반면, 놀라지도 않고 염소의 성장 배경과 나이 그리고 성별까지 맞추는 준은 얄미웠다.

“마인드 해킹용이지. 일종의 충격요법이야. 네 이름이?”

“내 이름은 노겐이야.”

“그래. 그렇게 쉽게 말하잖아. 거짓말을 생각해낼 틈도 없이 바로 대답하잖아.”

로켈은 아이를 칭찬하듯이 말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준을 바라보았다.

어서 네가 할 일을 하라는 압력이 담긴 시선이었다.

준이 노겐에게 말했다.

“노겐, 우리끼리 할 이야기 있는데 ···. 맥주는 가져가도 돼.”

“지금, 나더러 나가라고?”

그는 여자 경찰, 키다리, 난쟁이, 준을 차례로 쳐다보았다. 보면 볼수록 희한한 조합이었다.

“노겐 여기서 있던 일은 비밀로 해. 정신을 잃고, 나랑 같이 피자를 먹은 게 알려지면, 나는 괜찮은데 ···.”

그 후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았지만, 노겐은 핵심을 파악했다. 능력과 실력을 의심받게 될 것이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준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

노겐은 정체를 들켰다는 것만으로도 동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노겐은 조용히 물러났다.

암묵적인 합의가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이곳에 온 적도 없고, 피자도 먹은 적도 없고, 염소 대가리도 모른다.

이것은 비밀이다.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로켈도 눈짓으로 동의했다.

디아나도 따라 했다. 토그는 아무 생각 없었다.

노겐이 현관문을 열자, 새로운 난관이 나타났다.

현관문 앞에는 에바가 서 있었다. 에바의 눈썰미는 날카로웠다.

“어라! 당신은 실버 드래곤의 보안요원이죠? 여기서 무슨 짓을 하는 거죠?”

*

노겐은 에바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정신을 잃고, 염소 대가리에 놀라고, 모든 것이 잘 봉합되려는 찰나였는데 ···. 모든 것이 처음으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다시 정신을 잃어야 하나?

노겐을 내보낸 에바는 거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테이블에는 피자 포장지,

맥주캔,

젤라토,

자몽주스 따위가 널려 있었다 ···. 준의 친구들인가? 하지만 방금 나간 노겐은 실버 드래곤의 하수인이었는데? 그녀는 로켈 일당의 정체를 짐작할 수 없었다.

실버 드래곤의 또 다른 하수인? 어찌 보면 연극 동호회 모임 같기도 했다.

제목은 복잡한 나라의 앨리스.

“저는 에바예요. 굿데이 스태프입니다.”

“반갑습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는 준 회장님이 설명해주실 겁니다.”

로켈의 표정에서 야비한 미소가 번득거렸다.

‘준, 이제 어떻게 할 테냐? 정말로 우리가 누구인지 에바에게 제대로 설명할 수 있겠냐? 염소 대가리를 보고 놀라지 않고, 총을 겨눠도 꿈쩍하지도 않고, 총소리에도 겁내지 않았었지. 이 상황을 어떻게 정리하는지 지켜보겠어.’

그는 보았다.

준이 ‘이건 반칙!’이라는 투로 찡그리는 모습을 ···. 준은 귓불을 만지며 천천히 입을 뗐다.

“우선은 ···. 우주의 창조부터 시작할 게.”

“잠깐! 천문학 스터디 모임이야?”

에바가 물었다.

“아니.”

“그런데 왜?”

“우주가 창조되지 않았다면, 우린 여기 없었을 테니깐.”

“그냥 건너뛰어.”

그녀는 능숙하게 잘라냈다.

“그럼 힉스 입자부터 시작할까? 힉스 입자의 자발적 붕괴가 없었다면 ···.”

“안 돼!”

“태양계?”

“그것도 너무 멀어.”

“생명의 탄생.”

“다세포 생명이 나오기 전에 죽여주지.”

에바는 살기를 띄웠다. 욕을 퍼붓고 싶었지만, 로켈 일당 정체가 드러날 때까지 참기로 했다.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