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하운드-5
준은, 때 이른 점심시간이 되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책상 위에는 새벽부터 지금까지 읽었던 책들이 쌓였다.
경제학 강의,
단백질체학,
지구공학,
커피 상인,
인간 옷을 입다,
벗지 않는 유혹의 기술,
미쳐야 인생이다,
나노 인체해부학-뇌,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입자가속기,
중국 기공 클리닉,
제3의 종족 여자 ···.
“이걸 반나절 만에 다 봤어?”
덩치 큰 남자가 다가왔다.
머리가 짧고, 목은 두꺼웠다.
손목시계는 방수형 타입으로 강한 충격에도 제대로 기능하는 특수 부대용 제품이었다.
실버 드래곤에서 준을 감시하려 내보낸 사냥개 1호였다.
그는 방금 도서실의 암묵적인 규칙을 깬 셈이었다.
규칙1. 준을 방해하지 말 것.
준은 남자를 힐끔 쳐다보았다.
감정이 실리지 않은 눈빛은 고요했다.
한마디도 하지 않고, 시선을 거둬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건방진 녀석!”
쌍소리를 내뱉던 남자는 숨을 삼켰다.
도서관에 있는 사람 전부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십자포화처럼 강렬하고 집중적인 살기였다.
‘뭐지? 이 분위기는?’
“놀라셨죠. 여기가 좀 그래요. 커피 한잔 하실래요?”
줄리아가 기회를 낚아챘다.
남자는 갑자기 나타난 미모의 여인을 보고, 놀랐다.
‘이런 여자가 왜 도서관에? 패션쇼나 영화 촬영장 뭐 이런 데 있어야 할 여잔데.’
가만 보니, 항상 준 주위에서 책을 읽던 여자였다.
지금 줄리아는 미소 짓고 있었다.
웃는 줄리아와 그냥 책만 보는 줄리아는 전혀 다른 인격체였다.
*
최근에 사들인 저택은 도서관에서 30분 거리였다.
소나무 길과 단풍나무 길이 교대로 나오고, 맛집이 즐비한 골목을 통과하면 어느덧 인적이 드물어졌다.
킹스덤 블루 스트릿은 이른 나이에 성공한 젊은이들의 거리였다.
천재 예술가,
타고난 영화배우,
그리고 준과 같은 벤처 사업가가 그곳의 저택을 소유했다.
블루 스트릿는 조용했다.
집주인들은 항상 바빴고, 외국에 나가 있는 일도 허다했다.
조깅 코스에서 표범 같은 체형의 여자들과 타잔 같은 남자들이 달렸다.
베이킹파우더를 넣고 구운 설탕처럼 구릿빛 피부였다.
길 건너편에 낡은 트럭이 보였다.
킹스덤 블루 스트릿과 어울리지 않는 차종이었다.
준은 그 트럭을 보고 누군가 정원에 놔둘 헝가리 자연석을 주문했겠거니 생각했다.
문 앞에서 멈칫했다. 못 보던 진흙이 보였다. 짙은 갈색.
진흙 형태로 보아, 들어간 흔적은 있었지만 나온 흔적은 없었다.
준은 못 본 척 지나쳐서, 길 끝에 모퉁이에 앉았다.
스마트 폰으로 집안 보안상태를 확인했다.
깨진 유리창도 없고, 억지로 침입한 흔적도 없다.
마지막으로 문 열렸던 시간은 준이 나왔던 시간이었다. 하지만 문 앞에서 본 진흙이 신경 쓰였다.
보안시스템을 입맛대로 조작할 수 있는 뛰어난 도둑이 진흙이 묻은 신발을 신었다? 친환경을 모토로 하는 그룹인가?
길 건너에 주차한 트럭에도 진흙이 묻어 있었다.
머리 위 그늘을 만들어주던 도토리나무에서 잔가지가 떨어졌다.
준은 어깨에 떨어진 나뭇잎과 잔가지를 털어내고, 집으로 들어갔다.
*
희미한 사람 냄새 - 운동을 많이 하고, 술과 담배도 피우는 사람이다. 로션과 샴푸는 밀크 향을 주로 사용한다.
거실에 난 발자국을 보면, 최소 두 명.
한 명의 키는 180 정도, 다른 한 명은 153.
걸음걸이를 보면 둘 다 남자다. 그리고 그들은 ···. 아직 집 안에 있다.
준은 주방으로 가서 카르티에 정수기에서 냉수를 마셨다.
냉수에는 실핏줄 같은 얼음 알갱이가 섞여 있었다.
불청객들은 몸을 숨긴 채 나타나지 않았다.
준은 사이드 제로 냉장고를 열었다.
역시! 냉장고 안에는 잘린 염소의 머리가 들어 있었다. 모조품이 아닐까? 싶었지만, 확실하게 진짜 염소였다.
냉장고를 닫고 뒤돌아 보니, 덩치 큰 남자가 버티고 있었다.
“놀랐지?”
덩어리는 짙은 갈색 진흙이 묻은 워커를 신고 있었다.
그는 내심 준이 뒤로 벌렁 넘어지며 새 된 비명을 지를 거로 기대했지만, 준은 차분했다.
“또 한 명은 어딨어?”
준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 있지. 소문에 천재라고 하더니, 정말이네. 자 그럼 비밀 금고가 있는 곳을 알려주실까?”
작은 방으로 이어지는 복도에서 허스키한 소리가 났다. 153의 사내가 그곳에 있었다.
객관적으로 볼 때, 돈보다는 성장호르몬이 절실해 보였다. 준은 키다리와 난쟁이의 역할분담을 파악했다.
행동 - 키다리 덩치
생각 - 난쟁이 홀쭉이
흥분 - 키다리 덩치
분석 - 난쟁이 홀쭉이
“비밀 금고? 너희는 도둑이 아니잖아?”
준이 잘라 말하자, 난쟁이가 덩치에게 신호를 보냈다. 키 큰 덩치는 권총을 꺼내서, 준의 머리를 겨눴다.
“머리에 바람구멍이 뚫리면 생각이 날까?”
“무단 침입을 하고, 냉장고에 털도 안 뽑은 날고기를 넣고, 비밀 금고 운운하더니, 이제 총을 겨눠? 새로 개발한 노이즈 마케팅이야?”
노이즈 마케팅이라는 표현이 나오자, 덩치와 난쟁이는 당황했다. 정보가 새나간 건가? 하지만 어디서?
“우리가 도둑이 아닌 건 어떻게 알았지?”
“너무 뻔했어.”
“치밀하게 준비한 거야. 품질 향상을 위한 친절한 설명을 부탁하지.”
난쟁이는 주방 의자에 앉았다.
준은 물 한 모금을 마시며,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거대한 덩치,
테이블에 걸터앉은 준,
그리고 의자에 앉은 난쟁이. 묘한 3중주였다.
*
사냥개 1호의 이름은 ‘곤잘로’이었다.
줄리아는 그와 커피를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준에 대한 정보를 조금씩 흘리며, 곤잘로의 마음을 열었다.
곤잘로는 특수훈련을 받은 요원이었지만, 그녀의 눈웃음과 애교에 그대로 무너졌다.
“하늘을 나는 콘도르가 토끼를 감시하는 거지.”
그는 으스댔지만, 내용만 놓고 보자면 준이 누구를 만나고 무슨 일을 하는지 기록하는 가벼운 임무였다.
“나쁘네요! 당신처럼 멋진 사람에게 그렇게 시시한 일을 시키다니!”
그녀의 손끝이 남자의 손등을 스쳤다.
줄리아의 눈부신 미소와 신체접촉은 마법 효과를 냈다.
“시시한 일이 아니야. 콘도르처럼 높게 날고, 시력도 아주 좋아야 해. 그런 걸 제대로 해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
“하지만 당신이라면, 더 대단한 일을 해낼 수 있잖아요. 안 그래요?”
빤한 아첨이었지만, 줄리아가 하면 위력적이었다.
곤잘로는 거미줄에 걸린 날파리였다.
“피 묻히는 작업은 다른 팀이 해. 나는 아직은 하늘을 날고 싶어.”
“이해해요. 진짜 남자라면 그래야죠. 곤잘로. 같이 다니던 동료는 어딨어요?”
줄리아는 눈 부신 태양을 바라보듯이 그를 보았다.
“그 녀석은 나와 달리 땅개 체질이야. 냄새를 따라가고 있겠지. 준에 대한 정보 정말 고마워. 그래서 말인데 ···. 줄리아. 이건 비밀인데, 굿데이에 투자하지 마. 굿데이는 망할 거야.”
“네. 그렇게 할게요. 그런데 왜요?”
“우리가 굿데이를 벗겨 먹을 거야!”
“어쩜 그렇게 멋진 말을!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녀는 황홀한 표정으로 대화를 이끌었다.
“우리 펀드 투자자 중에서 굿데이로 옮겨 타려는 사람이 많아서, 본때를 보여주는 거지. 이 세계가 배신자에게 냉혹하거든.”
그는 서부 총잡이 같은 표정으로 나불댔다.
줄리아는 그를 보면서, 남자는 정말 가엾을 정도로 단순하구나. 싶었다.
*
호수를 따라 만든 산책로를 걸을 때, 노려보는 눈초리를 느꼈다.
나에게도 붙었구나.
에바에게 붙은 꼬리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
남자였다면 경찰에게 스토커로 신고할 수 있었는데 ···.
상대는 노련했다.
눈이 마주쳤는데도, 눈웃음을 지으며 몸짓 인사를 건넸다. 탄탄한 몸매, 예리한 눈빛, 중간 보스 정도의 자신감,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몸매였다.
에바는 풍경 사진 안에 상대의 모습을 담았다.
청바지와 운동화 셔츠차림의 시티걸이었다. 시티걸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에바가 얼굴 추적 프로그램을 돌리는 동안, 시티걸이 다가왔다.
에바는 재빨리 스마트 폰을 가방에 넣었다. 시티걸은 상냥하게 말했다.
“나중에 봐요.”
“벌써?”
“근무시간이 끝났거든요. 좋은 가방이네요.”
시티걸은 샤모아 가죽으로 만든 가방을 탐스럽게 보았다.
“고마워요. 그쪽 와이어 팔찌도 좋아 보이네요.”
에티켓으로 한 말이었는데, 시티걸이 팔찌를 벗었다.
“가지세요.”
“정말요? 고마워요.”
에바는 거절하지 않았다. 상대의 정보가 많을수록 좋았다. 팔찌에는 시티걸의 생물학적 증거가 가득 있을 것이다.
시티걸은 뒤돌아보지 않고, 제 갈 길을 갔다. 에바의 얼굴추적 프로그램은 헛돌았다.
“여자들은 이게 문제야. 성형수술 때문에 ···.”
에바는 프로그램의 정확도를 90%로 낮췄다. 그러자 이천 명이 넘는 명단이 생겼다.
거주지와 나이, 키 그리고 인종과 실버 드래곤을 키워드로 필터링하자, 한 명으로 압축되었다.
이제 상대가 누군지 안다.
‘경찰에게 알릴까?’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사설 보안업체는 법 테두리 안에서 일 처리를 해낸다.
그들은 지역 경찰보다 더 뛰어나고, 범죄조직보다 우수하다.
맘만 먹는다면 증거도 남기지 않고, 표적을 제거한다.
실버 드래곤이 고용할 정도라면, 마피아의 보스를 조용히 처리할 수도 있다.
‘비빌 언덕이 없네.’
에바는 입을 삐쭉거렸다.
국가 파산 전문 기업 ···. 실버 드래곤이라니. 상대가 너무 벅차다.
*
“블루 스트릿은 가로등마다 보안카메라가 있고, 밤에는 적외선 드론이 지붕을 맴돌아. 오가는 차량도 모두 체크 하고, 걸어 다니는 사람도 마찬가지야. 집이 비었다고 해서, 넘볼 수 있는 곳이 아니야. 가정 도우미나 간호인이 저지르는 도난사건은 있지만, 외지인이 몰래 들어와서 조용히 털고 나가는 식의 특수도난 사건은 없어. 이곳 보안시스템에 접근할 실력이라면, 하찮은 좀도둑보다 거창한 사업을 꾸미겠지. 진흙으로 좀도둑 흉내를 냈지만, 덕분에 문제풀이가 더 쉬워졌어.”
“우리가 여기에 있는 줄 알고도 들어왔단 거야?”
“그래. 너희 작전은 너무 단순했어. 멍청하게 그냥 들어와서 냉장고를 열고 놀라든지, 아니면 진흙을 보고 경찰을 부르는 거지. 만일 내가 경찰을 불렀다면, 그 경찰도 너희 패거리였겠지. 그 경찰 밖에서 기다릴 텐데, 와서 물이라도 마시라고 해.”
“신경 쓸 거 없어. 기다리게 놔둬.”
“여자구나.”
준은 단숨에 경찰의 성별을 맞췄다.
난쟁이 눈 밑이 씰룩거렸다.
어디서 정보가 샜나 했더니 ···.
“···. 아는 사이였군.”
“전혀.”
“그런데 여자라는 걸 어떻게 알았는데?”
“이 상황과 너의 반응, 그냥 느껴졌어.”
준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제대로 설명하려면 너무 길었다.
난쟁이와 덩치는 뛰어난 준의 직감이 두려울 지경이었다. 이 녀석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기에, 이렇게 겁이 없고 똑똑한 거지?
“경찰의 역할은 널 유혹하는 거였어.”
“알아. 냉장고를 확실하게 열게 해야 하니깐.”
“좋아. 네놈이 다 알았다고 인정해주지. 그럼 우리가 누군지도 알아? 우리의 목적을 아느냐고? 우리가 목격자를 살려둘 정도로 허술해 보여?”
난쟁이가 신호하자, 덩치는 총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