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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 준-6화 (6/141)

헬하운드-3

“반대네.”

“나도 반대야.”

“준 회장! 절대 그러면 안 돼!”

평가자들은 준의 결정을 반대했다.

찬란하고 화려하고 옹골진 인재 중에서 가장 거칠고 썩어빠진 에바를 고르다니! 현대 인사평가 이론으로 보면, 소행성 충돌에 맞먹는 재앙이었다.

“그녀는 돈을 훔칠 거야.”

전직 경찰이 말했다.

“훔칠 기회를 주지 않겠어요.”

“다른 사람도 생각해야지. 에바는 팀워크를 망쳐.”

심리학자가 말했다.

“팀워크를 망칠 말은 하지 않았어요.”

준의 말은 사실이었다.

심리학자는 감정적인 판단에 이끌려서, 에바를 평가했다. 에바의 거친 표현은 오히려 팀워크를 강하게 할 수 있다. 운동선수의 말투처럼.

“투자자가 그녀를 좋아할까?”

“그들이 원하는 건 수익이죠.”

“우리 의견을 듣지 않겠다면, 이런 회의가 무슨 의미가 있나?”

“제가 에바를 선택한 게 아니에요. 그녀가 굿데이를 선택한 거죠. 그녀의 자소서를 읽어보셨나요? 다른 곳에 지원한 적이 없었어요.”

“자격 요건이 모자랐겠지. 떨어질 게 뻔하니깐, 시도도 하지 않은 거야.”

“그래서 이곳에 지원했겠죠. 뻔하게 합격할 줄 안 겁니다.”

“준 회장을 이 새끼 저 새끼라고 불렀어!”

“네. 그렇게 강력한 메시지 전달은 처음이에요. 정말 놀라웠죠.”

준의 담담한 표정 밑으로 경이로움이 스쳤다.

에바가 쌍소리를 했을 때, 준은 결심했다. ‘저년을 놓치면 안 되겠다!’

“자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한 명 더 뽑는 게 어떻겠나?”

“제가 고른 올리브나무가 뿌리 내리기도 전에 다른 나무를 심을 순 없죠.”

“도대체 에바의 어떤 점이 그렇게 맘에 들었나?”

“전부요. 정말 궁금한 것은 굿데이의 어느 점이 그녀 맘에 들었나? 하는 겁니다.”

*

길버트는 도넛 한 개와 커피 한 잔으로 아침을 때웠다. 도서관에 들어설 때, 느낌이 왔다. ‘준이 없다.’

직접 보지 않아도, 느낌만으로 알 수 있다.

준의 존재감은 도서관을 꽉 채운다.

존재감이 강할 때에는 도서관 밖에서도 느껴진다.

그는 준의 빈자리를 직접 확인하고, 어제 준이 읽었던 책 목록을 훑었다.

알고리즘 트레이딩, 파생상품론, 기후와 역사, 화폐 경제학, 돈의 역사, 인간의 역사, 진화론, 분자의 기억 ···. 지구과학, 인문학, 건축예술, 온갖 분야를 넘나들었다.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 같군.”

길버트는 코끝을 긁적였다.

단테의 지옥,

불교의 지옥,

성경에서 말하는 지옥,

최근에는 지옥에 관한 책들이 유독 많았다.

“이게 뭐지? 자기장으로 활짝 여는 헬게이트?”

섬뜩해졌다.

서둘러 ‘자기장으로 활짝 여는 헬게이트’라는 책을 찾아봤다. 말 그대로 헬게이트를 여는 방법론을 다룬 책이었다.

과학의 탈을 쓴 흥밋거리에 불과했지만, 불길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준이 이런 책을 읽다니.

“아니겠지. 아닐 거야.”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과학 만능 시대라고 하지만, ‘헬게이트’ 같은 게 가능할 리 없다.

*

준은 오후가 지나 도서관에 왔다.

몸에서 희미한 보디 샴푸 냄새가 났다.

시험기간 중이어서 도서관은 꽉 찼다. 그러나 늘 앉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준보다 먼저 그 자리를 맴돌던 학생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뭐지? 왜 자리에 안 앉았지?’

혹시나 하는 맘으로 자리를 살폈다.

함정이나, 오물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평범하게 남아 있는 자리였다.

뭔가 이상했다.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몰래 카메라의 주인공이 된 느낌이었다.

모두 알고 있지만, 혼자 모르는 기분이었다.

“널 존경하고 있어.”

길버트가 테이블 모퉁이에 걸터앉았다.

준은 눈을 깜빡였다.

“······.”

“네 별명이 뭔지 알아?”

“돌핀?”

“왜?”

길버트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 녀석, 수영에도 엄청난 재능이 있는 걸까? 아니면 초음파 감지 능력?’

“돌핀 아이큐가 75 거든.”

“그래?”

길버트는 돌고래 아이큐 75가 진화론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너의 별명은 붓다야. 책 읽는 붓다. 학생들은 널 방해하고 않으려고 모른 척하지만, 널 좋아하고 있어. 네 자리를 남겨두는 건 존경의 표현이지.”

“존경? 나를?”

수학공부, 기후예측모형, 굿데이 ···. 모두 먹고살려고 한 짓이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를 위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전혀 상관없는 타인이 나를 존경하다니?

학생들은 고개를 들어 준을 보았다.

오늘도 그가 왔다.

우리는 함께 공부한다.

그들은 작은 감동을 억누르며, 성지순례 하며 기도하듯, 책에 집중했다.

남학생들은 한 단계 더 나아갔다. 그가 오면 ···. 그녀들도 온다.

*

굿데이 사무실은 휑했다.

금융거래는 전산으로 이뤄졌고, 투자금 모집도 인터넷이었다. 사무실이 화려할 이유는 없지만 ···.

‘이건 좀 너무하네.’

에바는 사무실을 둘러보며, 심호흡했다. 할 일이 많았다.

준은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고, 사무실에 오지 않았다.

모든 일을 혼자 알아서 해야 했다.

굿데이 심볼을 만들고, 투자 모집 문구를 작성하고, 사무실을 실용적인 공간으로 꾸몄다.

걸레질도 직접 했지만, 누가 뭐래도 굿데이 넘버 2였다.

손등의 문신은 뒷골목 상징이었지만, 넘버 2가 되면서 성공과 가능성의 상징으로 재해석되었다.

많은 사람이 그녀에게 접촉해왔다.

준이 어떤 사람인지, 캐묻고, 굿데이의 일정도 궁금해했다. 그녀는 먼지를 털어내듯이, 상식적인 수준에서 대답했다.

‘연락처를 남겨주세요.’

굿데이에 거금을 맡기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은 굿데이가 비공개 방식으로 투자금을 모을까 봐, 걱정했다.

“굿데이 펀드에 투자하게 해주면, 따로 사례하겠소.”

중년 남자는 두툼한 봉투를 건넸다.

에바는 흥미로운 눈길로 봉투를 바라보았다.

새로운 곤충을 발견한 곤충학자의 눈빛이었다.

이 남자는 굿데이 펀드에 돈을 넣으면, 큰 수익을 낸다고 강하게 믿는다. 부러울 정도로 확고한 믿음이었다. 나에게도 이런 믿음이 있을까?

“이 봉투는 받을 수 없어요. 하지만 제가 굿데이에 합격한 이유를 알려드리죠.”

남자는 편한 자세로 이야기를 기다렸다.

“굿데이가 망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굿데이가 파루시아로 큰돈을 벌었지만, 그때에는 세상이 파루시아를 믿지 않았죠. 이제 굿데이는 헬하운드로 돈을 벌려고 하는데, 세상 모두가 헬하운드를 믿고 있어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연락처를 남겨주세요.”

“굿데이가 망할 거라면, 연락처를 남길 이유가 있나?”

“망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면, 제가 연락하겠습니다.”

사람이 찾아오지 않는 늦은 오후가 되자, 그녀는 보안 시스템을 모두 끄고, 굿데이 시스템에 접속했다.

암호화된 파일에서 기후예측모형과 문서 몇 개를 골랐다.

에바는 주위를 살피고, 손가락 스트레칭을 하고, 빠르게 키보드를 두들겼다.

손끝에서 나오는 철자 하나하나는 닫힌 성을 공격하는 대포였다.

준이 사용한 암호화 방식은 평범했다.

기후예측모형을 지키는 성은 쉽게 허물어졌다.

그녀는 기후예측모형을 카피하고, 로그 파일을 지우고, 다시 암호화시켰다.

에바는 전파 탐지기로 숨겨진 보안 카메라가 없는 것을 확인했다.

혹시나 싶어서 추적용 프로그램을 검색했지만, 없었다.

‘확실히 준은 애송이야. 너무 허술해.’

*

“투자자가 왔는데, 사무실이 작은 걸 보고 곧바로 거만해졌어. 굿데이를 인수하겠다고 하길래, ‘꺼져!’라고 해줬지.”

그녀는 준의 눈치를 살폈다.

기업 인수는 큰돈이 오가는 거래였다.

직원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니다. 큰돈을 챙길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그냥 날린 셈이었다. 과연 준의 반응은?

“내가 할 일인데,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 이렇게 하면 어떨까?”

준은 A4 용지에 글자를 적었다.

‘인수 제안 거절, 투자요청 사절, 기후예측모형 안 팝니다.’

“이걸 문 앞에 붙여두면, 일이 좀 줄지 않을까?”

감자를 캐는 농부처럼 순박한 표정이었다.

에바는 심호흡했다.

확실히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이런 내용을 문 앞에 붙여놔도 될까? 안될 이유도 없지만 ···.

“표현이 너무 평범해. 사람들은 특별한 걸 기대한다고!”

“문구를 추가하면 어때?”

준은 용지 밑에 문장 하나를 넣었다.

‘인수 제안 거절, 투자요청 사절, 기후예측모형 안 팝니다. 사나운 여직원이 있어요.’

에바의 눈매가 얇아졌다. 그녀는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부족해.”

준은 에바의 눈치를 보며, 문구를 고쳤다.

‘인수 제안 거절, 투자요청 사절, 기후예측모형 안 팝니다. 사나운 여직원이 있어요. 바닥 핏자국 주의.’

“딱 좋아.”

에바는 흡족해했다.

그녀는 빨간 립스틱으로 핏자국을 강조했다.

*

빌딩 입구,

코발트 합금으로 만들어진 용은 숨결이 붙은 듯이 정교했다.

빌딩 옆 주차장에는 잡지에서나 볼 수 있는 고급 승용차가 즐비했다.

트리탄은 마시던 커피잔을 꾸겨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는 헤지펀드계의 실력자였고, 여러 개의 별명이 있었다. ‘드래곤의 주인’도 그중 하나였다.

럭비 선수였을 때에는 상대 선수 뼈를 자주 부러트려서 ‘파괴자’로 통했다.

그에겐 고통을 주는 것이 승리보다 중요했다.

뼈를 부러트리는 것이 우선이었고, 승리는 전리품에 불과했다.

그의 실버 드래곤 헤지펀드는 잘 훈련된 군대였다.

수익은 승리였고, 손실은 패배다.

실버 드래곤 헤지 펀드는 ‘학살자’로 통했다.

국가와 기업들을 파산시켰고, 풋옵션과 디폴트 스왑으로 엄청난 수익을 일궜다.

단기 이익을 노린다면, 기업을 키우는 것보다 기업을 파괴하는 게 더 쏠쏠했다.

기업 파괴를 통한 수익창출. 창조적 파괴에 빗대어서, 트리탄이 만들어낸, ‘파괴적 수익 이론’이었다.

실버 드래곤 헤지펀드는 파루시아로 유럽이 비명을 지를 때에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남유럽 국가와 기업들을 쥐어짰다.

굿데이보다 좋은 포지션을 잡지 못했지만, 파산 전문가답게 악랄하게 물고 늘어져서 수익을 뜯어냈다.

트리탄은 2m. 120kg.

그의 금속광택 정장이 갑옷처럼 보였다.

“왜 자꾸 투자금이 빠져나가지!”

쇠 방망이처럼 무거운 목소리였다.

투자금은 그의 병사였다.

“굿데이로 옮긴답니다.”

“200명이 넘는 투자전문가와 퀀트가 굴리는 펀드에서 돈을 빼서, 신출내기에게 투자한다고?”

“뉴스에서 굿데이 창업자를 예언가처럼 소개해요. 숫자를 키우는 농부라던가? 돈을 구원하러 온 신이라던가?”

“웃기는군. 창업자가 몇 살이야?”

“아직 대학생이죠.”

“젊군. 지금쯤 난잡한 파티나 하고 있겠지. 굿데이의 최근 포지션은?”

“없습니다. 파루시아 이후, 휴면기에 들어갔어요.”

“휴면기는 개뿔, 흥청망청 놀고 있겠지. 이참에 굿데이를 인수해. 우리 쪽 투자금이 빠져나가는 것보다 인수하는 게 더 나아.”

“이미 접촉해봤는데, 보기 좋게 거절당했습니다.”

“뭘 믿고 거절한 거지? 우리 제안을 거절하고 살아남은 투자회사가 있어?”

“없습니다. 그런데 ···. 굿데이는 다른 투자회사와 달리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기후예측모형을 보유하고 있어요.”

“웃기는군. 날씨는 우리 할머니도 잘 맞췄어. 금융시장은 방정식 몇 개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우리 제안을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지 맛을 보여주라고.”

“어떤 식으로 보여줄까요?”

“기자 섭외해서 흥청망청 노는 걸 까발려. 어디선가 그룹섹스나 하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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