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하운드-2
책 읽는 준의 모습은 대리석 조각처럼 단단했다. 몇천 년을 버틴 피라미드 같았다.
여자는 눈웃음을 곁들이며 상큼하게 다가왔다.
“시간 있어?”
준의 시선은 책을 떠나지 않았다.
“내 말이 안 들려?”
줄리아는 자신 있었다.
그동안 점찍었던 남자들은 그녀에게 굴복했다.
타고난 외모, 갈고 닦은 말솜씨, 남자를 사귀면서 터득한 통찰력까지.
그녀의 뇌쇄적인 눈빛은 살아 있는 큐피드 화살이었다.
‘내 남자로 만들겠어!’
줄리아는 자신했다.
드디어 준이 책에서 눈을 떼고, 그녀를 보았다.
“오늘 시간 있느냐고 물었어. 여자에게 같은 말을 하게 하는 건, 실례야.”
그녀는 허리를 숙이고 양손으로 테이블을 짚었는데, 가슴이 살짝 드러나 보였다.
그녀는 보았다. 준의 시선이 그녀의 가슴에 잠깐 머무는 것을!
‘걸렸어!’
그녀 눈빛이 반짝였다.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귀를 보였다.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신체 부위였다.
흑진주로 만든 귀걸이가 시선을 끌었다.
“인간의 역사? 재밌겠다. 무슨 내용이야?”
그녀는 손끝으로 책을 짚었다.
준은 표정 변화 없이 자세를 바르게 했다.
요즘 들어 여자들이 자주 접근했다.
새로운 형태의 괴롭힘일까?
그녀들에겐 특징이 있다.
쓸데없는 질문을 던지고, 눈웃음을 짓고, 가슴골을 못 보여줘서 안달이었다.
준이 찾아낸 대응방법은 ···. 무시하는 것이었다.
무심함의 극치가 깃든 표정,
허리가 곧게 펴진 자세,
그 앞에 놓인 글자 빼곡한 책,
도서관 특유의 분위기가 아우러지면서, 준의 무심함은 요새가 되었다.
두려움과 공허감을 피해, 달아나지 않은 남자.
공허감을 길들인 남자 ···. 준에겐 특별한 아우라가 있었다.
‘뭐지 이 남자!’
지금까지 상대했던 애송이 클래스가 아니었다.
준은 남자를 뛰어넘은 그 어떤 존재였다.
줄리아는 나직하게 감탄했다.
‘무너지지 않다니!’
혹시 게이인가? 그럴 리는 없다.
그녀의 육감 레이더는 게이를 알아낸다.
변태라든지 발기불능 같은 신체 콤플렉스도 바로바로 캐치한다.
그녀의 육감 분석은 준이 아주 건강한 남자임을 보증했다. A+ 등급의 남자, 평생 잊지 못할 그런 밤을 만들 수 있는 능력자가 분명했다.
평생 함께한다면, 죽는 그 날까지 남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남자였다.
“나중에 봐.”
그녀는 조용히 빠져나오는, 작전상 후퇴를 선택했다.
‘잠깐 내가 방금 퇴짜 맞은 건가?’
자존심은 무너졌지만, 인생 목표가 세워졌다. ‘꼭 내 남자로 만들겠어!’
출구에서 도서관 사서 길버트가 그녀를 불렀다.
‘그럼 그렇지. 내 인기가 녹슬지 않았어.’
줄리아는 화사한 미소를 보였다.
“무슨 일이죠?”
“12번이에요.”
“네?”
“준을 낚으려는 여자가 많아요. 학생들이 그녀들에게 번호를 붙여주었죠. 당신 번호는 12번이고요. 성공하면 베팅에 따라 상금을 받게 될 겁니다.”
“상금이라니?”
“누가 성공할지 돈을 걸었거든요. 현재 3번이 가장 유력해요. 3번은 가족 전체가 나섰죠. 수수료를 내면 제가 팀원을 구해주죠.”
*
중앙서고 마감 시간이 다가오고 학생들이 나갔지만, 준에겐 골든 키가 있었다.
골든 키가 있으면 24시간 내내 중앙서고를 사용할 수 있다.
준은 수학문제를 풀 듯이 인간 심리와 감정 그리고 문학을 파고들었다.
조금씩 보통사람의 본성과 본능 그리고 성격이 이해되었다.
‘그래서 그때 그랬구나.’
‘인간은 이런 존재구나.’
그동안 준은 인간을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분류했다. 잘해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었고, 그렇지 않으면 나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분류는 너무 얇다.
굿데이로 큰돈을 벌자, 나쁜 사람 대부분이 뇌수술을 받은 것처럼 좋은 사람이 되었다.
당황스러운 반전이었지만, 인간의 본성을 깨닫자, 자연스럽게 이해되었다.
인간은 좋고 나쁨을 따지지 않는다. - 오직 강함과 약함을 따질 뿐.
굿데이가 성공했을 때, 준은 강해졌다.
‘사랑’이라는 챕터를 읽다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평범한 아이를 키웠다면, 자주 들었을 표현, ‘사랑합니다.’
준은 책을 덮고, 잠시 고민하다가 결속력 강화 차원에서, 자동차를 타고 집으로 갔다.
밤늦은 시간에 준이 오자, 데이빗과 에밀리는 놀랐다.
준은 무표정하게 데이빗과 에밀리를 껴안으며 말했다.
“사랑해요.”
표정만큼이나 평평한 말투였다.
준은 뒤돌아 보지 않고, 차를 타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쟤가 왜 저러지?”
데이빗은 멀어져가는 자동차를 보며 곁에 있는 아내에게 물었다.
밤 공기가 차가웠다.
뭐였지? 무심했던 그 표정은? 귀신이었나?
“그러게 ···. 깜깜한 밤에 갑자기 와서 사랑한다니깐, 괜히 으스스하네.”
에밀리는 데이빗에게 달라붙었다.
자동차 유리 왼쪽에 데이빗의 이미지가 뜨고, 목소리가 들렸다.
“아들아. 방금 뭐냐?”
“책 보고 알았어요. 자식은 부모에게 사랑한다 말한다면서요? 다음에는 ‘고맙습니다.’ 해드릴게요.”
“별 ···.” 데이빗은 욕 나오는 것을 참을 뻔했다. “이 미친놈아! 깜짝 놀랐잖아! 다른 사람 흉낼 내려면 제대로 하던지! 또 그러면 멀리 이사 간다.”
*
면접이 시작되었다.
어떤 사람을 뽑아야 할지 막막했지만, 킹스덤 벤처 지원 본부가 도와주었다.
지원 본부는 지원자들을 평가해줄, 세 명의 전문가를 붙여주었다.
전직 경찰,
심리학자,
데스먼드 학과장이었다.
인터뷰는 킹스덤 대학의 굿데이 사무실에서 진행되었다.
굿데이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기후예측 모형을 보유한 떠오르는 벤처기업이었다.
언론은 준을 타고난 예언가이자 전략가로 묘사했고, 굿데이의 미래에 선명한 장미꽃잎을 잔뜩 뿌려주었다.
인터넷을 떠도는 푸리에 구조 방정식 문제도 유명세를 더했다.
푸리에 구조 방정식이 솔로가 솔로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엄청난 인재들이 지원했다.
4개 국어에 능통한 사람,
수석 졸업생,
세계를 여행한 물리학자,
상원의원의 외동딸,
재정기획실 출신,
변리사와 공인회계사처럼 전문 자격증 소유자들도 많았다.
대기업에 지원해도, 충분히 합격할 능력자들이었고, 몇 명은 이미 대기업에서 러브콜을 받은, 검증된 인물이었다.
“지원 동기가 뭡니까?”
“굿데이의 가능성은 활짝 열려있습니다. 그 가능성의 일부가 되고 싶습니다.”
“굿데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굿데이는 기후예측에 특화되었습니다. 예측 통계 기반으로 보험업에 진출해야 합니다.”
어떤 질문을 던져도 놀랍도록 뛰어난 대답이 돌아왔다.
준은 지원자들의 나이가 걱정이었다.
“당신의 나이를 보고 지원한 것이 아닙니다. 리더쉽과 능력에 이끌린 것입니다.” 모두 교과서적인 답변이었고, 가끔 유머가 따라 붙었다. “만일, 나이가 필요하시면 제 나이를 드리겠습니다.”
평가자들과 면접자는 웃었지만, 준은 웃지 않았다.
“나이를 나눠주려면, 시공간을 분할 해야 하는데, 어떤 응답함수를 사용하실 거죠?”
인사평가 전문가들은 한목소리로 상원의원 외동딸을 추천했다.
학업 성적도 우수했고,
의회 인턴 과정도 거쳤고,
보험계리사 자격증도 있었다.
외모도 빼어났다. 그녀의 배경은 굿데이의 날개가 될 것이다.
준이 말했다.
“아직 한 명 남았는데요?”
“의미 없어. 시스템 오류로 잘못 뽑힌 거야.” 데스먼드가 말했다. “면접비 주면 그냥 갈 거야.”
에바는 그냥 가지 않았다.
그녀는 손등에 문신이 있고, 낡은 청바지와 속옷이 비치는 하얀 셔츠를 입었다.
신발은 낡은 운동화였다.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괜찮은 몸매의 자유로운 젊음이었지만, 고전발레처럼 형식미를 중요시하는 취업 면접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전직 경찰은 그녀의 몸짓에서 뒷골목 특유의 악센트를 찾아냈다.
심리학자는 그녀의 표정에서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반항기를 엿봤다.
데스먼드는 그녀의 모든 것이 맘에 들지 않았다.
“시립대를 중퇴하셨군. 이유가 뭐죠?”
“학교가 구렸죠.”
순간 모든 평가자가 몸을 뒤로하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냈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모호한 표현을 사용했죠. 구체적인 단어를 썼어야 했는데 ···. 학교는 생선 썩은 내가 났어요. 종류는 청어였던 거 같아요.”
“내세울 만한 경력이 없는데, 서류 심사를 통과할 거로 생각했나요?”
“당근이죠.”
뻔뻔할 정도로 당당했다.
평가자들은 이 여자가 제정신일까? 의심했다.
“오천오백 명이 지원했고, 그중 30명만 서류심사를 통과했습니다. 단 한 명만 합격합니다. 당신이 합격할까요?”
“네.”
너무나 당당해서 이유를 묻는 게 굉장한 실례처럼 느껴졌다.
“죄송하지만 ···. 이유를 설명해주시겠어요?”
“나는 레즈비언이에요!”
에바는 굉장한 특권인 냥 말했다. 방금 막 쥐를 잡은 고양이 같았다.
평가자들은 발을 헛디딘 것처럼 휘청거렸다.
준은 에바가 사람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다고 평가했다. 보기 드문 재능이었다.
“성 취향과 굿데이가 뭔 상관이야?”
데스먼드는 자물쇠 같은 팔짱을 했다.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면접은 처음이었다. ‘이 아가씨야! 여긴 룸살롱이 아니야!’ 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빌어먹을 시스템 오류!
“도서관에 있는 준을 본 적이 있나요?”
그녀는 차근차근 한 명씩 눈을 마주쳤다.
전직 경찰, 심리학자, 데스먼드 학과장은 희미하게 침묵했다.
“암캐들이 준에게 꼬리 쳐요. 이제 아시겠어요?”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람?’
전직 경찰은 눈살을 찌푸렸고, 심리학자는 시선을 돌렸다. 데스먼드는 넋 나간 모습이었다.
혼돈에서 빠져나올, 정확한 질문을 던진 것은 준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실 거죠?”
“암캐들에게 말하겠어. 꺼져! 이년들아!”
공교롭게 그녀의 시선은 강아지 브로치를 한 심리학자에게 향했다. 어찌나 크게 말했는지, 벽면이 울렸고, 작은 메아리가 울렸다. ‘이년들아! 이년들아!’
준은 리듬에 맞춰 되물었다.
“그리고요?”
“당신은 대화에 서툴죠? 모든 것을 혼자 하는 경향도 강하고 ···. 잘못된 방향에 들어설 때, ‘멍청아! 정신 차려!’라고 해주죠.”
“예를 들면?”
“굿데이는 날씨 예측으로 돈을 벌었어요. ‘헬하운드’ 가뭄이 오면 다시 돈벌이를 시작할 거죠?”
에바는 눈짓으로 준에게 확인했다.
‘OK.’ - 준은 흐름을 끊지 않으려고 작은 움직임으로 말했다.
“헬하운드 같은 건 비밀이어야 해요. 인터뷰에서 너무 많이 지껄였어요. 굿데이 옷을 홀딱 벗긴 거죠. 굿데이는 가혹하게 강간당할 거예요.”
“콜-록! 단어 선택에 신경 써 주세요.”
심리학자는 서둘러 물 한잔을 마셨다.
그녀는 에바가 놀라웠다.
취업 면접에서 암캐, 레즈비언, 강간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다니! 저년이 또 무슨 소릴 할지 무서웠다.
“준은 이렇게 말해야 알아들어요. 평범하게 말해주면, 딴생각하죠.”
에바는 대범하게 손가락으로 준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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