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 준-2화 (2/141)

파루시아-2

준은 다른 아이에 비해 말문이 늦고, 유치원에서도 혼자 놀았다. 유치원 선생님은 정밀 진단을 권했다.

“감정결핍 증후군입니다.”

준을 진단한 전문의는 에밀리와 데이빗을 번갈아 보았다. 그는 에밀리와 데이빗의 언발런스한 외모를 보고, 데이빗이 상당한 재산가라고 넘겨 짚었다.

데이빗에겐 익숙한 오해였다.

“그게 뭐죠?”

“보통 사람이 100의 기쁨이나 슬픔을 느낀다면, 결핍 증후군은 10 이하의 감정을 느낍니다.”

“오오. 이런!”

데이빗은 이마를 짚었다.

공기가 사라진 것처럼 숨쉬기 어려웠다.

에밀리는 머리가 멍해졌다. 감정 없는 아이라니! 그제야 아이의 무심한 표정이 이해되었다.

그것은 위대함의 징후가 아니라, 무료함의 표현이었다.

“감정결핍 증후군은 장애로 보지 않습니다.”

“감정을 못 느끼는데, 장애가 아니라뇨?”

“차이죠. 그냥 다른 겁니다.”

“약 같은 건 없나요?”

“있지만 권하진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결핍 증후군은 성향입니다. 원숭이 같은 사람도 있고, 거북이 같은 사람도 있죠. 결핍 증후군은 스릴을 좋아해서 탐험가와 예술가가 많죠. 평범한 걸 참지 못하거든요. 통계적으로 보면, 보통 사람보다 노벨상 받을 확률도 높아요.”

데이빗은 어리둥절했다. ‘방금 감정 결핍이 엄청난 장점처럼 들렸는데? 제대로 들은 건가?’ 확실히 해둬야 했다.

“당신 아이가 감정결핍 증후군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냥 받아들이죠.”

전문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에밀리가 슬며시 끼어들었다.

“사이코패스도 감정이 메말랐다던데?”

“그게 ···. 구별할 방법이 없습니다. 사이코패스는 결핍 증후군이지만, 모든 결핍 증후군이 사이코패스는 아닙니다. 그리고 사이코패스 모두가 사회 부적응자는 아닙니다. 일반인 그룹보다 대학교수와 전문직 그룹의 사이코패스 비율이 높죠.”

“사이코패스가 좋은 것처럼 들리네요.”

“요점은, 원숭이로 태어난 사람은 원숭이처럼 살아야 행복하고, 세상에는 원숭이에게 맞는 자리가 있다는 겁니다.”

*

준의 아이큐는 75로 저능아 수준이었다. 유치한 만화책을 좋아했고, 컴퓨터 게임에 푹 빠졌다.

데이빗은 게임 캐릭터 디자이너 겸 프로그래머였다. 게임매력과 중독성을 높이는 것이 그의 일이지만 ···. 아들이 게임에 빠지는 건 바라지 않았다.

그는 일은 잠시 그만두고, 아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함께 놀이터에 가고, 나무 위에 아지트도 만들었다.

아지트는 오두막 모양을 갖춰갔다.

데이빗이 망치질하다 손가락을 다쳤다. 깨진 손톱 사이로 피가 뿜어져 나왔다.

“큭!”

손가락을 움켜잡았다.

데이빗의 얼굴에 고통이 번뜩거렸지만, 준은 놀라지 않았다. 특유의 무심한 표정으로 피를 바라볼 뿐이었다.

데이빗은 아들이 놀라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생각’은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나는 아들을 사랑하는구나. 사랑하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다행이야.

그는 멍한 표정의 준을 보며, 빙긋이 웃었다.

손가락을 다치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키우지만 ···. 행복했다. 준은 이런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아빠? 안 아파?”

“아프지.”

“그런데 왜 웃어?”

“널 사랑하니깐.”

아이는 아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삼류 마술사 공연 같았다.

컵 속에 있어야 할 빨간 구슬이 사라졌다. 통증과 고통이라는 구슬.

준은 아지트를 좋아했고, 그곳에서 곧잘 게임을 했다.

에밀리는 보더콜린 품종의 강아지를 데려왔다.

애완견을 돌보면 게임을 덜 할 테고, 감정도 풍부해지겠지.

준은 강아지를 렘지로 불렀고, 먹이를 챙겨주고 산책도 했다. 렘지는 지치지 않고 뛰어다녔다.

같이 놀아주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금방이었다.

*

‘어떻게 살지?’

머리도 나쁘고, 친구 만드는 기술도 부족하다.

운동이라도 잘하면 몸을 굴려 먹고 살겠지만, 선천적인 약골이었다. 렘지와 진탕 놀고 나면, 다음날 일어나는 게 힘들었다.

부모님 옵션이 있지만 ···.

“언제까지 키워주실 거예요?”

“어른이 될 때까지.”

“어른이 되면 ···. 나가야 하나요?”

“그럼.”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도 요?”

“당연하지!”

에밀리는 놀리듯이 말했는데, 걱정하는 준이 귀여웠다.

준의 머릿속에서 일자리도 없이 쫓겨나는 미래가 그려졌다. 길거리에서 봤던 광고 문구가 생각났다. ‘상상은 이뤄진다.’

준은 젊은 노숙자다. 쓰레기통에서 능숙하게 필요한 것을 찾아내고,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잠을 잔다.

헌 옷이 있는 곳과 편의점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빵을 내놓는 시간도 안다.

“준!”

에밀리가 소리치자, 풍선처럼 커지던 준의 상상이 터졌다.

“걱정하지 마. 너는 엄마 아빠보다 잘살 거야.”

“어떻게 아세요?”

“널 사랑하니깐.”

준은 사랑을 재산 상속 같은 걸로 이해했다.

준은 집안을 대충 둘러보고, 아빠와 엄마의 수입을 대충 계산한 후, 혼잣말했다. ‘사랑이 너무 부실해.’

준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데이빗에게 말했다.

“이건 정말 심각해요.”

“뭐가?”

“사랑이 너무 부족해요.”

“미안하구나. 노력한다고 했는데 ···. 사실은 ···.”

데이빗은 마음의 준비를 하며, 숨을 골랐다.

이 어린 것이 알았구나. 알고 있었구나. 마음의 준비를 하고 호흡까지 정리했지만, 진실은 너무나 무거웠다.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 어떻게 했으면 좋겠니.”

“엄마에게 가계부를 쓰게 해야 할 거 같아요. 돈을 너무 막 쓰는 거 같아요.”

*

짓궂은 또래들은 급식시간에 준의 몫을 빼앗았다.

선생님에게 말했지만, 또래들은 준이 주었다고 둘러댔다. 특히 스탠리의 거짓말은 정교하고 설득력이 강했다. 스탠리의 집안은 대대로 변호사였다.

스탠리의 변명을 듣던 준도 ‘정말 내가 준 건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있지도 않은 쌍둥이를 만난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선생님은 준의 억울함을 ‘오해’라고 판단했다.

준을 괴롭히는 건 작은 유행이었다. 연필이 없어지고, 삼각자가 사라지고, 책이 찢어졌다. 준을 괴롭히는 아이들은 무척 즐거워 보였고, 뿌듯해했다.

‘뭐가 재밌다는 거지?’

또래를 이해할 수 없었다.

마술사가 눈앞에서 연필이 사라지게 한다면 놀라운 일이겠지만, 연필을 직접 숨겨놓고 그걸 좋아하다니? 어린 것들이 벌써 ···. 치매냐?

또래 입장에서 연필 하나를 숨겨 놓는 상상을 했다. 아무리 상상을 반복해도 재밌는 포인트는 없었다.

‘없어진 연필을 찾는 내 모습이 우스웠나?’

그것도 이상했다.

준은 사라진 연필을 찾는 게 즐겁지 않았다. 즐겁지 않은 모습을 보며, 즐거워할 수 있다니! 믿기지 않았다.

숨기느라 힘들고, 찾느라고 힘들고, 뭐가 재밌지?

준은 동굴 속 어둠에 적응하듯이, 익숙해졌다. 억울하고, 속상했지만, 목숨이 위태로운 정도는 아니었다. 진정한 두려움은 지금 당장 겪는 ‘불편’이 아니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이런 일이 끝나지 않는다면?

종이 상자를 움켜쥔 노숙자가 보였다.

‘저 모습이구나!?’

노숙자가 다가왔다. 시큼한 술 냄새와 오줌 냄새가 났다.

“꼬마야 거시기가 뭔지 아니?”

준은 노숙자가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노숙자의 마음이 선명하게 읽혔다.

이 사람은 자신을 비웃어주길 바란다. 그런 식으로 자신이 얼마나 못났는지 확인하고 싶어한다.

노숙자는 노숙자이어야 했다.

행동과 말, 냄새와 마음까지도 몽땅 노숙자이어야 한다. 대통령이 대통령이어야 하듯이.

준은 그를 비웃지 않았다.

존중해서가 아니라, 원하는 것을 줘야 할 이유가 없었다. 준이 보기엔 노숙자는 이미 원하는 것을 모두 가졌다.

어쩌면 ···. 너무 많이 가졌을지도 모른다.

며칠 동안 아침을 안 먹고 학교에 갔다. 집에 와서도 저녁을 먹지 않았다.

“내 아들! 무슨 일 있어. 왜 밥 안 먹니?”

“그냥 굶는 거예요.”

퀭한 얼굴이었다. 에밀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즘은 너처럼 마른 아이도 다이어트를 하니?”

“그런 게 아니라, 어른이 되면 굶을 거 같아서요. 연습하는 거예요.”

“기후 온난화 때문에?”

“아뇨. 바보로 사는 준비예요.”

“오! 이런!” 그녀는 아들을 꼭 안아주었다. “넌 바보가 아니야. 자랑스러운 나의 아들이고 나의 보석이야.”

“엄마 ···. 보석은 저보다 딱딱해요.”

“엄마에게 네가 최고의 보석이란다! 항상 네 곁에 있을 거야.”

“항상요? 내일부터 같이 학교에 다니실 건가요?”

“아니. 하지만 마음과 마음이 이어져 있잖니.”

그녀는 더 강하게 준을 안았다.

“엄마 ···. 보석이 숨 막혀요.”

*

에밀리와 데이빗은 준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홈스쿨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의논했다. 하지만 누가 준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지? 오히려 더 바보로 만드는 건 아닐까?

“준아 학교 다니는 게 어떠니?”

“힘들어요.”

“그런데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니?”

“학교 다녀야 일자리를 구할 수 있잖아요.”

이슬처럼 맑은 눈동자였다. 에밀리와 데이빗은 가슴이 아팠다.

“학교 다니는 게 왜 힘드니?”

“왜라뇨? 제가 멍청해서잖아요.”

준은 또래들과 선생님을 탓하지 않았다.

*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데이빗은 수학문제집을 사 와서, 직접 가르쳤다.

준의 수학 성적은 항상 ‘중간’이었다.

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별다른 공부를 하지 않고 받은 점수였다.

준은 아주 가끔 마른하늘에 번개 치듯이 수학 재능을 보여주곤 했다.

공을 던져서 지구를 한 바퀴 돌아오게 하려면 얼마나 세게 던져야 하는가? 라는 문제를 혼자 계산하기도 했다.

먹고 살기 위한 인생의 한점 돌파 - 수학.

수학은 풍부한 감정을 요구하지 않았다.

부족한 지능은 반복 학습으로 메웠다.

반복, 반복, 반복 ···. 공식 하나하나가 뉴런이 될 때까지 치열하게 반복했다.

같은 문제집을 최소 열 번씩 풀었다.

어떤 문제집은 백번도 넘게 풀었다.

나중에는 펼친 페이지 질감만으로, 페이지에 있는 문제를 알아낼 정도였다.

문제집을 잡으면 그 속에 있는 문제들이 동시에 떠올랐다. 지독하게 어려운 문제를 풀고 나면 아련한 충만감이 느껴졌다.

데이빗은 프로그래밍 실력을 발휘해서, 수학 게임을 만들었다.

기하학, 미적분, 조합, 확률 ···. 게임을 만드느라 밤을 새웠고, 준은 게임을 하느라 밤을 새웠다.

책상에는 혈당을 유지할 견과류와 샐러드가 있었다.

프로그래밍하던 데이빗의 빠른 손이 멈췄다.

그의 손가락은 오랜 작업에 지쳐 미묘하게 떨렸다.

이제 남아 있는 문제는 학생 수준을 저 멀리 뛰어넘는 것이었다.

‘허수 공간 Z의 리만 변환이 참임을 증명하라.’ 이런 문제뿐이었다.

이런 걸 풀라고 하면, 아동 학대죄에 걸린다.

데이빗이 아들을 보자, 준은 배고픈 강아지처럼 아빠를 바라보았다. 책상에 놓인 견과류 샐러드 그릇이 비어 있었다.

어찌나 배고팠던지, 아이는 허수 공간 Z의 리만 변환이 참임을 증명했다.

우주의 무게를 구하고, 시공간의 좌표 가속도를 계산하고, 단풍나무의 광합성 함수를 만들고, 선풍기가 한 번 회전할 때 생기는 바람의 세기를 구했다.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