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어느 상경(上京) 소녀의 이야기
어느 저녁, 나는 성일과 술자리를 같이할 기회가 생겼다. 아는
선배의 결혼식에서 다시 녀석과 마주친 것이었는데 식이 끝나고
우리는 자연스레 술집으로 발길을 향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
가 전철역에서 '러브호텔 이야기'가 들어있는 녀석의 대학 노트를
받고 헤어진 후 꼭 8개월 만이었다.
"글은 잘 써지냐?"
녀석의 첫 마디 였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완전 실패작이야. 역시 사람들의 인식이 새삼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어. 곧 조기 종영을 해야할 처지라구..."
"젠장, 무슨 소리니?"
녀석(성일)은 이해가 안된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글의 내용이 내용인지라 각오는 했지만 그간 내게 날라온 몇
통의 메일은 정말 글쓰고 싶은 의욕을 상실 시키더라."
"메일이라니?"
"왜,컴퓨터 통신을 하면 전자 편지라는 게 있어. 일반 편지처럼
전자 메일을 통해 편지를 주고받고 하는 건데."
"그게 어때서?"
"한마디로 수준 낮은 소설이래."
"기가 막히군. 그 수준의 잣대가 도대체 뭔데?"
"일종의 인식의 차이이지. 연예인은 연예가 뒷 얘기를 쓸 수 있
는 거고, 정치가는 정치 이야길 쓰는 거고, 내 글은 러브호텔에서
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을 모았을 뿐인데 러브호텔이니까 저질이
라 이거지."
"그러면 그런 사람들은 사랑하는 애인 생기면 호텔 한번 안 갈
사람들이군. 성(性)이라든지 섹스에 있어서는 관심도 없는 사람들
인가 보네."
"근데, 그건 그렇지가 안으니까 우습지."
"그래, 너도 개의치마. 세상엔 그런 인간들이 반드시 있기 마련
이니까. 그런 사람들 알고 보면 다 똑같아. 네겐 네 신념이 있는
거고 너는 그 신념대로 밀고 나가면 되는 거야. 애초의 취지대로
러브호텔에서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세상에 알려야겠다는
그 취지대로 계속 글을 쓰라구."
"하지만, 요즘 의욕이 많이 상실된 건 사실이야.그런 메일 한두
통 받고 나니까 기운이 쏙 빠지더라구. 애초에 자료 수집된 한 삼
사십 개의 이야기 중에서 이십 여 개만 글로 만들고 끝을 맺을 생
각이야."
"이해한다. 하지만, 끝까지 최선은 다하길 바래. 그래야 자료를
넘겨준 나도 보람이 있잖아. 세상엔 별난 사람들이 다 있는 거야.
그런 사람들 치고 글 끝까지 읽고 그러는 사람들 하나도 없다구.
제목만 보고 괜스레 한마디 던질 뿐이지."
"과연 그럴까?"
"그럼. 대신에 그 글을 재미있게 읽을 보이지 않는 독자들도 많
을 테니까. 그 이야긴 그만하고 내 얘기 한번 들어볼래,노트에 적
어 놓지 않은 숨겨둔 이야기거든."
작가 주). 1번의 시작하기를 보시면 윗 글이 이해 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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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어 터지는 재벌 그룹들의 부도와 수출둔화, 경제 사정의 악
화는 서비스 업계에도 여지없이 그 영향을 미쳤다. 모텔 불야성도
예외는 아니어서 하루에도 몇 바퀴씩 돌리던 객실이 이제는 손님
이 차지 않는 날이 더 많을 정도로 썰렁해졌다.
"큰일이군. 손님이 줄어서..."
짠돌이 사장은 종업원들을 모아 놓고 혀를 끌끌 차며 이번 달부
터 월급을 20% 삭감한다는 발표를 했다.
"젠장, 당장 이 짓을 때려 치든지 해야지. 더러워서..."
성일은 모처럼 끊었던 담배에 다시 불을 붙이며 투덜거렸다. 정
치권의 몇 몇 놈들이 저지른 대형 비리의 불똥이 이렇게 하급 서
민들에게까지 영향이 미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한 일이다. 정말
생각할수록 열받는 일이었다.
일요일 하오의 여관은 절집처럼 한산했다. 술집이나 유흥가가
많은 도심의 여관일수록 일요일엔 손님이 뜸한 편이었다.
일요일엔 사장도 일찌감치 집으로 들어가는 편이어서 성일은 꾸
벅 꾸벅 졸면서 프런트를 지키고 있었다. 이런 날은 가뭄에 콩나
듯 들어서서 단잠을 깨우는 손님들이 오히려 귀찮은 존재 였다.
그녀 유미가 모텔의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세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유니폼을 아무렇게나 구긴 채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서 눈을 감고 있던 성일은 본능적으로 눈을 떴다.
"어서 오세요."
잠결이라 목이 잠겼던 성일은 재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저... 손님이 아니구요..."
어색한 동작으로 현관 문을 열고 들어선 그녀는 쑥스러운 듯 머
리를 긁적거렸다.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한마디 질문을 던져 놓고 성일은 직업적으로 재빠르게 그녀를
살폈다.
그녀의 나이는 한 스물 두어 살쯤 되었을까. 얼굴은 제법 반반
한 편이었으나 긴 머리는 싸구려 플라스틱 핀으로 등 뒤로 넘겨져
고정되어 있었고 검정색 청바지에 오렌지색 마이의 균형이 어딘지
모르게 어색함을 풍기고 있었다. 옆구리에는 옷이 들었는지 제법
큼직한 가방 하나가 끌리듯 들려 있었다.
"저어.. 드릴 말씀이 있거든요."
한참 만에야 결심한 듯 그녀는 성일에게 말했다.
"네, 듣고 있으니 말씀을 해 보세요."
조선족 교포 같기도 했으나 억양을 들어보니 충청도 사투리 냄
새가 묻어 있었다. 잔뜩 호기심이 인 성일은 프런트 데스크 옆에
마련된 소파에 그녀를 앉히고는 재차 물었다.
"저... 이곳에서 일을 하고 싶거든요."
"일을? 무슨 일을요?"
그녀의 뜻밖의 말에 성일은 의아한 생각이 들어 다시 물었다.
"저.. 이곳에서 밤에 남자들이 오면 손님을 받고 싶어요.. 괜찮
으시다면..."
"옛?..."
성일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얼굴도 반반하고 나이도 아직 어
린 그녀의 입에서 이게 웬 날벼락 같은 말인가.
"다시 말씀을 해 보세요.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안 가는군요."
"예.. 친 구가 그러는데.. 이런 곳에서 일을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해서요..."
그녀의 말인즉, 옛날에 고등학교때 친구 중에 가출해서 서울로
간 친구가 있었다는 것이다. 친구는 당시 호텔이나 모텔 등지를
돌며 콜걸 생활을 했었는데 돈을 많이 번다고 그녀에게 자랑을 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시골 소읍에서 한두 해
점원 생활을 하다가 돈이 모아지지 않아서 무작정 서울로 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고향에 남겨진 늙은 부모들과 어린 동생들을 동
정하듯 내 비췄다.
"아니 그런데 아가씨가 어떻게 겁도 없이 그런 일을 선뜻 하려
고 합니까?"
"일이 어떤 일인지는 친구에게 들어서 대강은 알고 있어요. 저
희 부모는 늦게 만나셔서 세 남매를 낳으셨는데 몇 해 전부터 아
버지가 병으로 쓰러 지져서 집안 꼴이 말이 아닙니다. 얼마간 점
원 노릇을 했지만 그것으로 두 동생들과 아버지 약값을 치르기엔
턱없이 부족한 돈이지요. 저도 이 일이 나쁜 일이란 건 알지만 어
쩔 수가 없잖아요."
"사정은 딱하지만 꼭 그런 일 아니어도 다 살아갈 방도가 있을
겁니다.그렇다고 모텔이나 여관에서 몸을 팔 수는 없어요. 친구가
과거에 그런 일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다 없어졌지요. 못
믿겠다면 친구에게 연락을 해 보세요."
"작년부터 연락이 끊겼어요. 그러니까 저도 무작정 이리로 찾아
왔지요."
"그러지 말고 잘 생각을 해 봅시다. 지금의 섣부른 판단이 이다
음 엄청난 후회를 부를 수도 있습니다. 본래 그 세계가 한번 발을
들이밀면 여간해서 빠져 나오기가 어렵거든요. 돈을 많이 번다고
요. 그건 극히 일부분의 일이에요.금방 몸을 망치기 일수고 번 돈
도 쉽게 써 버리거든요."
가뜩이나 남을 이용해 먹으려는 사람들이 판치는 세상에 성일은
그녀가 그래도 자기에게 걸려든 것이 매우 대행이란 생각을 했다.
비록 모텔의 벨 보이 생활을 하고는 있었지만 그에게는 최소한의
양심이 살아 있었던 것이다.
서울이 멋모르고 순진한 처녀 하나 버리기에 얼마나 쉬운 동네
였던가.
"이봐요 아가씨. 다시는 그런 생각 갖지 마세요.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정말 모르시는군요. 밖에 나가서 그런 얘기 잘못 꺼내면
어떻게 되는지 압니까. 돈 많이 준다고 꼬여서 일본이나 홍콩으로
순진한 처녀들 팔아 넘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요. 그런 곳으로
잘못 발 들여놓으면 인생 끝장입니다."
일이 끝난 저녁, 성일은 그녀를 근처의 식당으로 데려가 식사까
지 대접하며 회유의 말을 계속했다. 성일의 설득이 효과가 있었는
지 한참 만에야 그녀는 성일의 말을 듣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모텔 불야성에 그녀를 재운 성일은 다음날 그녀를 선배가 일하
는 레스토랑으로 데려가 취직을 시켜 주었다.
"숙식이 되니까 참고 일하세요. 서울은 그런 대로 임금이 지방
보다는 낳을 겁니다. 시간외 근무를 하면 월급이 꽤 되구요.또 선
배가 있으니까 잘 보살펴 주실 거고... 어려운 일 있으면 언제라
도 연락을 하세요."
"고맙습니다."
빨간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현관가지 성일을 배웅하며 고
맙다고 연신 고개를 숙였다.
"고맙기는요. 직업이 그렇다보니 순진한 아가씨들이 한순간의
잘못으로 잘못되는 것을 많이 봐왔습니다. 저는 최소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성일의 흡족한 기분은 보름을 넘기지 못하고 무참히 깨
어졌다. 그녀 유미를 소개시켜주었던 레스토랑의 지배인인 선배로
부터 전화가 왔던 것이다.
"야, 어떻게 된 거야?"
"예. 뭐가 잘못되기라도..."
"임마. 사람을 소개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그 애 일주일째 연락
도 없이 결근이다. 짐도 다 가지고 갔어."
선배는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무슨 애가 그래? 그만 두려면 당당하게 말을 하던가. 슬쩍 결
근을 하면 일은 누가 하냐구?"
세상은 온통 씁쓸한 일 뿐이었다. 성일는 무엇보다 그녀에게 정
성을 기울였던 터라 마음이 아팠다.그녀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몸
을 팔고 싶다고 겁없이 모텔 문을 밀치고 들어서던 당돌함으로 또
어딘가의 문을 두드렸으리라.
그렇게 쓸쓸한 기억으로 성일의 뇌리 속에서 유미의 이야기는
잊혀져갔다.
그러던 한달 후,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성일은 무슨 우연인지
그녀를 다시 만났다. 친구네 집엘 갔다가 돌아오던 저녁 길 신림
역 부근이었다. 내리는 비를 피해 잠시 근처의 건물 안으로 들어
갔던 그는 마침 출근을 위해서 현관으로 들어서는 그녀를 보았던
것이다. 새련된 머리 모양이며 짖은 화장,짧은 미니스커트의 그녀
는 한달 전보다는 몰라보게 변해 있었지만 유미 그녀가 틀림없었
다.
놀란 성일이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먼저 성일을 알아본 그
녀는 고개를 숙인 채 종종걸음으로 지하로 달려 내려갔다. 비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성일은 무표정하게 그녀가 사라진 지
하의 현관 입구에 쓰여진 간판을 바라보았다.
[파라다이스 룸. 비지니스 클럽] 예약 환영.
삼삼 오오 저녁 출근을 하는 젊은 아가씨들을 물끄러미 바라보
고 섰던 성일은 쓸쓸히 빗속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