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 풍자 소설]
☞11화: 남희(南熙) 이야기
날씨는 화창했다. 긴 겨울의 그림자가 지나고 바야흐로 봄이 찾
아온 것이다.
날씨가 풀리고 봄이 오면 성일 에게는 해마다 찾아오는 가슴 아
픈 기억이 있다. 바로 그의 고향 마을, 남희에 대한 기억 때문이
다.
그러니까 바로 사 년 전의 오늘과 같은 봄날이었다. 바로 이웃
에 살며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녀가 한 줌의 재가되어 저 세
상으로 떠나간 날이.
남희는 성일의 고향 마을인 전라도 정읍의 한 시골 마을, 바로
옆집에 살던 성일 보다 두 살 연하의 여자 아이였다. 그럭저럭 농
사일로 남부럽지 않게 어린 시절을 보낸 성일에 비하여 옆집 남희
네는 참으로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다. 농사일을 하던 남희의 아버
지는 갑자기 논에서 쓰러진 이후로 몇 년째 병석에서 일어나지를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혼자 세 남매를 돌보던 남희의 어머니마저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가출을 하고 말았다. 그때 남희는 마악 고
등학교 1학년의 나이였고 밑으로 어린 동생 둘이 있었다. 졸지에
집안의 가장이 되어 버린 남희는 그 길로 학교를 중퇴하고 돈을
벌겠다며 서울로 상경을 했다. 그것이 성일이 어린 시절 마지막으
로 본 남희의 모습이었다.
그 몇 달 뒤, 서울로 간 남희로부터 고향집으로 돈이 송금되어
오기 시작했다. 의외로 돈의 액수가 많았던지라 마을 사람들은 놀
랐지만 들리는 풍문으로 그녀가 서울에서 마음씨 좋은 사람을 만
나서 큰 회사에 들어갔고 그래서 돈을 잘 버는 것이라 했다. 아
버지가 병상에 누워 있기는 했지만 남희의 매달 송금으로 인하여
두 동생은 끝까지 학교를 다녔고 아버지도 꾸준히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남희는 그날 이후로 한 번도 고
향엘 내려오지 않았다.
그후, 참으로 뜻밖의 장소에서 성일은 남희를 다시 만났다. 그
동안 군대를 갔다 오느라 한동안 남희의 일을 잊고 지내던 성일은
제대 후 시내의 모 관광 호텔 학원을 수료하고 이곳 불야성으로
일자리를 얻었고 몇 년여를 일해 오던 그해 겨울날이었다.
다른 날과 별반 다를 바 없이 밀려드는 손님과 시름하던 저녁,
근처에 있는 모 룸살롱에서 이차를 나온 듯한 서너 명의 사내들과
아가씨들 틈에서 성일은 낯익은 얼굴 하나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
녀는 다름 아닌 어린 시절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인해 학업을 포
기하고 마을을 등졌던 옆집의 남희, 그녀였다.그런 그녀가 술집에
서 호스티스 일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놀란 성일이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얼굴을 돌렸을 때는 이미 프런트로 걸어오던 그녀와 얼
굴이 마주친 뒤였다.
"앗!..."
남희는 얼굴이 빨개지며 낮게 신음 소리를 냈다. 놀란 것은 성
일도 마찬가지 였다.
"서... 성일오빠...."
무엇인가 말을 하려던 그녀가 별안간 옆에 팔짱 꼈던 오십대의
뚱뚱한 사내를 밀치고 쏜살같이 문을 열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뭐야 이건... 야, 거기 안서!"
술에 반쯤 취했던 사내는 별안간 같이 이차를 나왔던 아가씨가
도망을 가자 깜짝 놀라며 뒤쫓아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날, 남희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돈을 환불해 달라며 프런트
에 서서 고래고래 룸살롱 웨이터를 향하여 전화로 언성을 높이던
그 오십대의 사내는 기어이 대체되어 온 다른 아가씨와 방으로 사
라졌다.
그렇게 남희는 다시 기억 속에서 잊혀지는가 했다. 자신의 불행
한 치부를 동네의, 그것도 바로 옆집의 오빠에게 들켜 버린 충격
이 컸던 듯 그녀는 한동안 연락이 없었다. 그러기를 일주일째 된
어느 날 저녁, 갑자기 남희에게 전화가 왔다. 내심 그녀의 전화를
기다리던 성일은 반가운 마음에 수화기를 들었다.
"오빠, 나 술 한잔 사줘. 술이 마시고 싶어."
다음날 저녁,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일을 하루 빠진 성일은 근
처의 한 카페에서 남희를 만날 수 있었다.
"야.. 남희 너, 몰라보게 예뻐졌구나..."
성일은 놀랐다. 며칠 전엔 둘 다 서로가 놀란 나머지 상대의 얼
굴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지금 찬찬히 붉은 불빛 아래서 바라
보는 남희의 얼굴은 어린 시절 코흘리개의 그녀가 아닌 성숙한 여
인의 모습이었다.
"오빠.. 사실은 그날, 내가 얼마나 죽고 싶었는지 알아? 하필이
면 이 넓은 서울 바닥에서 오빠를 만나다니.. 그것도 그토록 추한
모습으로.. 내 자신이 한심해서 정말 죽고 싶었어."
"남희야.. 그런 바보 같은 말이 어디 있니? 오빤 네 입장을 다
이해한다. 오히려 네가 자랑스러운걸.."
"후후.. 몸을 팔아서 동생들을 가르친 일이 자랑스러운 일이라
고...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사람이란 말이다.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그런 상황에 처하는
수가 있다. 마음이 중요한 것이지 행동이나 육체 따위는 결코 중
요한 것이 될 수 없는 거야."
"그래도 난, 오빠를 만난 것이 저주스러워.올해를 끝으로 이 일
에서 손을 떼려 했는데. 어쩐지 강남으로 오기가 싫더니만..."
남희는 술이 많이 취하여 흐느꼈다. 그러면서 처음 서울에 올라
와 나쁜 사람들을 만나서 술집에서 일을 하기까지를 숨김없이 털
어놓았다. 그리고 지금껏 자신이 버티며 살아올 수 있었던 힘은
집안의 두 동생들과 병든 아버지 때문이라고 했다.
"오빠, 부탁이 있어요."
"... ..."
그녀의 집 앞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서는 성일을 남희가 불렀다.
"제 이야기 마을에 가셔서 하시면 안돼요. 아니, 그 누구에게
도... 부탁이에요. 그렇게 약속해 주실 수 있는 거죠?"
"그럼, 난 벌써 잊었는걸..잊어버려라. 지나온 과정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단다. 지금부터가 중요한 것이지."
"고마워 오빠..."
하지만 그 날이 남희를 마지막으로 본 날이 되고 말았다. 불과
한달 후, 남희는 고향으로 내려가 그 동안 번 돈으로 아버지를 큰
대학 병원에 입원시켜 수술을 받게 하였고 아버지의 수술이 무사
히 끝난 날,마을 뒷동산에서 목을 메고 자살을 했던 것이다. 뒷동
산에 꽃들이 만발하던 봄날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고개를 흔들면서 그녀의
죽음을 의아해 했지만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성일은 한동안 괴로
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운명이란 과연 무엇이기에. 그날, 모텔에서 남희와 마주치지만
않았던들 마음 착한 그녀가 수치스러움에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행
동을 취하지는 않았으리라. 왜 하늘은 남들처럼 학교 한 번 제대
로 다녀 보지 못하고 일찍 서울로 내몰려 동생들 뒷바라지에 아버
지의 수술비까지 힘겨웁게 삶을 꾸려 온 그녀에게 마지막 순간에
죽음이라는 가혹한 올가미를 씌웠던 것일까.
그녀의 영혼을 좀 더 편안히 쉬게 하려고 했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