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끝이라고 말해야만 한다면.. (21/21)

#끝이라고 말해야만 한다면..

'그 사건'이 있은 후 4년이라는 시간이 더 흘렀다. 시간이란 항상 얄궂게도 현지와 사랑을

나눈 4년이라는 시간을 더 뺐어간 뒤에야, 지훈의 '상처'를 조금이나마 아물게 만들었다.

현지가 떠나간뒤, 1주일 후에 열린 국제콩쿨에서 지훈은 '절망적'인 연주를 선보였다.

리스트가 그의 부인 플라비니를 만나, 혹은 전 생애를 걸쳐 펼쳐 보인 그 '절망적'인 연주와는

여러모로 '궤'를 달리하는 '절망감'이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채로 자신이 무엇을 연주하는

지도 모른채로 의무적으로 건반을 눌러대며 객석을 혼란으로 내몬 지훈은, 콩쿨 최하위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모든 것은 그 날 이후로 변했다.

특히 대중과 평단의 관심은 무서울 정도로 사그라 들었다. 

자신들이 그토록 열렬히 환호해 마지않던 음악계의 신성이, 단 하루 아침에 '몰락' 하자

모든 관심의 시선을 다른 누군가에게로 던졌다. 덕분에 한국음악계를 이끌 '재목'이니

'리스트의 환생'이니 하는 거창한 타이틀은, 하루 아침에 지훈의 곁을 떠나갔다.

지훈의 부모님이 지훈에게 보내는 실망감도 말이 아니었다. 지훈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콩쿨' 이후 지훈이 받은 '절망감'을 훨씬 웃도는 그것을, 자신들과 그리고 그들의 아들에게

토해냈다. 지훈으로썬 처음 느껴보는, 아니 어쩌면 '두번째' 느껴보는 패배감과 절망감이었지만

왠일인지, 처음의 그것처럼 자신의 마음을 도려내듯 아프게 하진 않았다.

최고의 자리에서 순식간에 미끄러진 지훈의 생활은 빠르게 변화했다. 자신에게 쏟아지던

학내 선후배들의 동경의 시선은, 이미 '걷힌지' 오래였고 현지가 떠나버린 탓에, 캠퍼스에선

늘 혼자였다. 마치 10년전의 그날 처럼.

지훈이 죽일듯이 미워했던 현준의 소식은 '그날 아침' 이후 듣지 못했다. 건너 건너 들려온

소문에는 현준이 '어딘가'를 크게 다쳐 더 이상 학교에 나오지 않게 되었다는 것과, 그동안

현준이 정신분열증의 한 종류인 '어떤 병'의 초기증상을 겪어 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지가 떠나버린 지금에, 지훈에게 있어 아무것도 중요한 사실은 없어보였다.

그저 그날 이후 왠일인지 자신을 차갑게 대해버리는 현지의 부모님으로부터, 현지가 어딘가로

'떠났다'라는 사실만 전해 들었을 뿐, 아무 것 도 알 수 없는 지훈이었다.

마치 외톨이처럼 자신의 집안에 쳐박혀 한동안 피아노만 쳐대던 지훈은, 어느샌가 '걱정'에서

'동정'으로 바뀌어버린 부모님의 시선에 견디지 못하고, 천천히 세상밖으로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직까진 인맥이 완전히 끊기지 않았던지, 학교 선배의 연으로 꽤나 유명한

피아노 학원에 잠시나마 '취직'할 수 있었다. 각종 콩쿨을 재패하고, 무서운 성공가도를 달리다

한순간에 '무너진' 천재에게, 쏟아지는 관심과 갈채는 더 이상 없었다. 지훈은 그저 27살의 

나이를 달리며, 자신의 '살아갈 방향'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할 뿐이었다.

원체 온순한 지훈의 성격탓에, 학원에서의 생활은 의외로 '자족감'이 높았다. 그리고 입소문이

돌았던지, 한 때 '천재' 였던 피아노 강사에게 자신의 자식들을 맞기려는 '열성적 부모들'때문에

재밌게도 지훈도 차츰 '예전의 자신'을 찾아가고 있었다.

여름이 걷히고 가을이 다가오던 어느날, 지훈은 불현듯 달력을 쳐다보다 '본능적'으로 수화기를

들어 학원에 '일일 휴가계'를 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오늘은 꼭 그곳에 가고

싶다는 열망이 지훈에게 찾아들었다.

달리는 버스안에 기대, 집에서 챙긴 리스트의 악보를 연신 만져대는 지훈이었다. 오랜만에

펼쳐보는 리스트의 그것이었다. 그리고 곡 제목은, 그날과 같은 리스트가 편곡한

'베토벤 피아노 교향곡' 이었다.

얼마간을 내달린 버스에서 내리자, 졸업한지 7년만에 찾아온 지훈의 '모교'가 지훈을 반기고 

있었다. 방학이라 한적한 공기를 맞으며 천천히 고등학교 안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

7년의 시간이 가져다 준 변화속에 이것저것 많은 것이 변해 있었지만, 기억을 더듬고 더듬던

지훈은 이내 자신이 예전에 앉아서 연습했던 피아노 연주실을 찾아낼 수 있었다.

후후. 운이 좋네? 아직 여긴 변하지 않았구나

그렇게 말하던 지훈이 천천히 연주실 문을 열었다. 여름이 겨우 가고 가을을 맞는 날씨탓에

조금의 습기찬 공기의 축축함이 느껴지긴 했지만, 지훈은 이내 가방에서 악보를 꺼내 천천히

피아노 앞에 앉았다. 마치 '그날처럼'

따라라... 따라라라리라

4년간 절망속에서 헤엄치며 기억속 저편으로 밀어냈던 리스트였다. 하지만 왠일인지 지훈은 

'몸'과 '마음'이 익숙해짐을 느끼며 천천히 리스트의 영혼을 불러내고 있었다.

딴따라라.. 따라리리리

한참을 눈을 감고 연주하던 지훈이, 연주를 마치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하아.. 하아.... 기분탓인가?

자신의 등 뒤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에, 텅빈 연습실을 살폈지만 

끝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큭.. 한심하긴. 이제 겨우 지웠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또 기억해내는 건 또 뭐야

그렇게 웃으며 말하던 지훈의 두 눈에, 끝내 얇은 눈물이 젖어 들었다. 수많은 변화 속에

연습실과 피아노는 그대로 인데, 무던히 변해버린 자신과 '무언가'를 떠올리며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쏟아냈다.

하아.. .아아아... 악...

결국 지훈은 피아노앞에 쓰러져 오열하기 시작했다. 

현지가... 보고싶다. 다시 그날처럼 자신에게 웃으며 다가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게 '헛된' 바램일 뿐이다. 지훈은 한동안 그렇게 피아노 앞에 자신을 숨겼다.

'울지마... 바보야....'

한편 피아노 연주실 문옆에서, 자세를 낮추며 '낯익은 이'의 연주를 듣고 있던 '누군가'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피는 그 사람의 눈을 훔쳐 보고는 이내 놀란 가슴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지훈을 잃었던 '그 날' 이후 4년동안 '도망치듯' 미국으로 날라갔던 현지였다.

운명이란 참으로 재미있는 녀석이다. 4년만에 돌아온 한국에서, 안부를 물어오는 부모님을

뒤로하고 '무엇에 홀린듯' 7년만에 다시 찾은 이곳에서, 지난 4년간 한번도 잊어본 적 없는

그 사람을 다시 마주할 것 이라곤 단 한번도 '기대'하지 않았다. 

하나도 안변했네. 어딘가 조금 야윈것 빼곤

아주 잠시간 훔쳐보았던 연인과 짧게 '재회'를 나눈 현지가, 이윽고 가슴속을 드리운 추억의 

아련한 감정을 이겨내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토록 그리웠고, 지우려고 해도

'감히' 지우지 못했던 지훈이었다. 그런 지훈과 4년만에 마주하자, 왠일인지 막연한 '두려움'에

휩싸여 도망치듯 지훈 곁을 떠나온 현지였다.

미안해... 나... 나 여전히 너에게로 갈 수 없어.

미국에 도착하고 얼마간의 시간후에 '임신'사실을 알게된 현지가, 아무도 모르게 고통속에서

'생명'을 걷어냈던, 4년전의 일을 애써 힘겹게 기억해 내며 자신의 곁에 없는 지훈에게

말했다. 

미안해.. 그때나 지금이나.. 또 앞으로도

현지의 눈에서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끝'이라고 하지 않으면 '끝'이 아니지만, '끝내야 한다면' 말없이 '끝'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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