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지막 너의 목소리. (20/21)

#마지막 너의 목소리.

지훈이 어둑하게 내려앉은 강의실에서 몸을 빠져 나온것은 오후 9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현지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생각했지만,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던 지훈은 현준의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확인한채 교문밖을 나서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오랫동안 강의실안에서 자신에게 질문했던 문제의 해답을 얻어내지 못한 지훈은, 끝내 자신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에게나 현지에게나 힘든 시간일 거라고, 그리고 힘든 시간이었다고

생각한 지훈이, 멍하니 내린 결론이었다.

'후우.. 일단 미칠듯 혼란 스럽지만....'

발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현지의 생각을 떨쳐 낼 수 없었다. 몇번이고 현지의 집으로 달려갈까

하는 생각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묵묵히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지훈이 오늘 저지른 '2번째' 실수였다.

하루가 어떻게 지난지도 모를 정도로 심신이 지쳐있던 지훈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거실 쇼파에

쓰러져 바로 잠들었다. 이제야 그 의미를 알게된, 현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침대에는

차마 몸을 뉘울수 없었다. 

아침이 밝고 겨우겨우 눈을 뗀 지훈이, 휴대폰으로 시계를 확인했을 땐 숫자 6이 덩그러니

떠 있었다. 바로 자세를 고쳐잡은 지훈은 목욕탕으로 들어가 몸을 닦는둥 마는둥 하면서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끝'이라고 말하지 않는 이상 완전한 '끝'은 없다. 지훈이 머릿속을 쉼없이

굴리면서 겨우 얻어낸 '어려운 진실'이었다.

집을 나서자, 유난히 차가운 공기가 몸을 적셔왔다. 하지만 차가운 공기의 온도도 느끼지 못하던

지훈은 서둘러 현지의 집으로 향했다. 전화를 걸기에 실례되는 시간인줄은 알면서도 미친듯

걸었던 현지의 전화기는 계속 꺼져 있었다. 

가쁜 숨을 내쉬며 겨우 도착한 현지의 집 앞에서, 마지막으로 다시한번 현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현지의 전화는 꺼져 있었다. 다급한 마음에 현지의 집 초인종을 눌렀고, 지훈 만큼이나

쾡한 눈으로 대문밖을 나오시던 현지의 어머니와 마주칠 수 있었다.

지훈아...

아... 어. 어머니 안녕하셨어요?

이미 일면식이 있는 현지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던 지훈은, 어두울대로 어두운 현지 어머님의

표정을 마주하고 직감적으로 무슨일이 일어났음을 떠올렸고, 지난밤 현지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지훈이한테 연락하려고 했지만, 우리도 경황이 없어서.. 미안하구나

지훈을 보고 이내 고개를 떨구시는 현지의 어머니를 바라보며, 말못한 '동질감'에 사로잡힌 지훈이

연신 '괜찮다' '아니다' '제가 찾아보겠다' 를 외치며 발걸음을 돌렸다. 

'뭐야.. 어디로 간거야? 진짜 또...'

하고 싶지 않지만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생각'을 억누르지 못한채 지훈이 천천히 현준의 집으로

향했다. 현지의 집까지 미친듯 뛰어왔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좀처러 떼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겨우 옮기며 현준의 집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쾅쾅쾅

현준의 집앞에 다다른 지훈에게 초인종을 누를 '사치'같은 건 이미 없어보였다.

문열어.. 김현지! 현준!!! 문 열라고! 안에 있는거 다 알아!

정말 미친듯 현준의 문을 두드리던 지훈에게, 아침부터 찾아온 시끄러운 '불청객'을 바라보며,

얼굴에 불편한 기색을 역력히 띄운 사람이 옆집에서 문을 열고 소리쳤다.

이봐요. 아침부터 이게 무슨 짓이요?

미친듯 문을 두드려대던 지훈이, 이내 옆집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옆집 학생이라면, 지난밤에 엠블란스에 실려서 병원에 갔어요.

네? 어.. 어디가 다쳐서요?

그야 나도 모르지, 그냥 언뜻 보기에는 입에서 피가 잔득 나던데.. 오오 소름끼쳐. 뭐 암튼

지금 그 집엔 아무도 없으니까 그만 가요. 에헴

헛기침을 한번 하더니 옆집 사람은 그렇게 문을 닫아버렸다. 지훈은, 현준이 병원에 실려갔다는 

사실보다도 지금 당장 현준의 집안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왠일인지 조금 안도하게 되었다.

병원?.. 병원이라... 후우

그렇게 곱씹으며 지훈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채 학교로 발걸음을 향했다.

학교에 도착한 지훈이, 하루종일 현지의 전화를 기다리며 수업을 듣는둥 마는둥, 연습을 하는둥

마는둥 하면서 안절부절하지 못하는건 당연한 듯 보였다. 현지의 수업 스케쥴에 맞춰 쉬는 시간

마다 달려간 무용과 건물에선, 당연하듯 현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밤이될때까지 현지의 부모님으로부터 날라온 연락을 제외하곤, 현지에게선 끝내 연락이 닿지

않았고,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현지에게서 지훈에게 연락이 온 것은 그로부터 이틀 후였다. 딸의 연락두절로 안절부절하지

못하시던 현지의 부모님이, 경찰에 실종신고를 하려던 참에 걸려온 딸과의 전화소식을 지훈에게

먼저 전했던 것이었다. 

끝끝내 자신에게 연락하지 않은 현지에게 일말의 '서운함'이 밀려드는 지훈이었지만, 그래도

부모님으로부터 잘 지낸다는 말을 전해듣고선 한결 마음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현지의 부모님과

통화를 마친뒤 현지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지훈이 다시한번 현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기는 여전히 꺼져 있는 상태였다. 체념하고 현지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지훈에게

그 순간 '날카로운 알림음'이 울려퍼졌다.

띵동

지훈의 바지주머니에 들어있던 핸드폰에서 알림소리가 들려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을

나서던 지훈이 황급히 전화기를 들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음성사서함?'

휴대폰 알림창에 낯선 아이콘이 덩그러니 자리잡고 떠 있었다. '직감적'으로 무언가를 느낀

지훈이 재빨리 통화버튼을 눌렀다.

음성사서함입니다...... 아직 읽지 않은 메시지가 '한건' 남아 있습니다. 메시지를 들으시려면..

삐익

마음이 다급해진 지훈은 안내 메시지가 채 끝나기도 전에 '재생'다이얼을 눌렀다. 

지훈아... 안녕?

버튼을 누르자마자, 깊은 한숨소리와 함께 그토록 찾아해맸던 현지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목소리를 듣는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끼던 지훈은, 이내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러기도 잠시, 전화기에서 이어지는 '현지의 고백'에 다시금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나 때문에 많이 힘들었지? 미안.. 그리고 또 미안. 이 말 밖에는 할 수가 없네. 얼굴을

마주했을 땐 그렇게 용기가 안나더니, 전화기를 잡고 있으니깐 그래도 용기가 나네. 큭. 

전화기 너머로 짧게 웃어보이던 현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우선, 현준이와 관련된 일로 더 이상 마음아파하지 않아도 돼. 더 이상 그 사람 만나지 않아.

신이 있다면 신 앞에 맹세해. 물론, '마지막 볼일'이 있어서 지훈이랑 마지막으로 만났던

월요일 밤엔 잠깐 찾아갔었지만, 지금은 단언컨데 나 혼자야. 그 사람은 어떻게 지내는지조차

몰라

지난 날 자신이 눈으로 확인했던 사실을 고백받자, 지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말을 들었다.

아마도 겁이 났었나봐. 나. 솔직히 처음 느껴봤었거든, 23년동안 살아오면서 그런 기분.

기분 나빠하진 마. 현준이 아니더라도, 지훈이랑 했었다면, 분명 '더 행복했을 거야'. 물론

결과론적인 얘기긴 하지만, 후우. 미안... 크큭.. 미안해.. 흑..

전화기 너머로 현지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지자, 지훈또한 답답한 감정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나 너무 뻔뻔한거 알지만, 너무 걱정이 돼서 이렇게 전화기를 들어. 지훈아. 나 때문에

피아노를 버린다는 말.. 고작 나 때문에 모든걸 포기하겠다는 말. 그런말 하지마. 니 눈으로

확인했겠지만, 난 고작 이런 여자일 뿐인걸. 그런 여자때문에... 흑... 그런.. 여자때문에

지난 수많은 시간동안 니가 지켜왔던 걸 포기하지 마. 이건..... 여자친구로써 건내는.. 흑.. 

말꼬리를 흐리던 현지가 결국 마지막 한마디를 던진채 지훈의 전화기에서 멀어져 갔다.

마지막 부탁이야.

현지의 목소리가 모두 지나가고, 낯선 여자의 목사리가 전화기를 타고 전해오자 지훈은 멍하니

전화기를 들고 현관 앞에 서 있었다. 

이게... 이게...... 이게 뭐야!!!!! 악!!!!!

결국 자신의 전화기를 힘껏 집어던지던 지훈은, 아무도 없는 공간에 소리를 높여 울부짖었다.

'끝'이라고 말하기 전에는 '끝'이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모든 것이 '마지막'이길 바랄 때에는, 결단코 그 '끝'을 막을 수 없다.

-리스트의 몰락.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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