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유를 말해줘. (19/21)

#이유를 말해줘.

이제 막 자신의 집에서 나와 택시를 기다리던 지훈의 휴대폰에, 잠시간 울려퍼진 '느닷없는

방문'이 끝나고 지훈은 인적이 드문 길 한복판에서 완전히 넋이 나간채로 서 있었다.

화질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휴대폰 안에서 잔뜩 상기된 얼굴을 하고 '울며 애원'하던 사람이

자신의 연인이라는 사실과, 바로 잠시전까지 자신을 괴롭히던 '문제의 해답'이 한순간에 자신을

찾아오자 그저 머릿속이 하얘지는 지훈이었다.

'무... 무슨 일이.... 무... 무슨'

완전하게 꺼져있는 자신의 휴대폰 액정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던 지훈이, 이내 모든 것을

가까스로 정리한듯 천천히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일단, 학교로 가야 한다. 그래. 일단 학교로...'

그렇게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지훈이, 저녁의 시작을 알리는 듯, 자신의 얼굴에 차츰 내려앉는

노을을 안으며 택시를 잡아탔다.

계속 그러고 서 있을거야?

한편 겨우 옷을 다 챙겨 입은채 여전히 멍하게 강의실 책상옆에 서 있던 현지를 바라보며,

강의실 창가에 기대어 서 있던 현준이 차갑게 한 마디를 던졌다.

우... 우....우우...

우는건지 절규하는건지 모를 낮은 신음소리를 토해내던 현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현준을

바라봤다. 얼굴에 눌러붙은 눈물 자국이, 아까보다 더욱더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어떻게 할거야? 남친님 지금쯤 미친듯이 학교로 올텐데. 이제 천천히 '마중'나가 봐야지.

음. 그전에 화장실이라도 가서 얼굴이라도 씻어내는게 나을 듯 하다만

창가에 기대어 연신 현지를 조롱하듯 말하며 서 있는 현준을 바라보며, 현지가 천천히 현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음.. 진짜 많이 아픈가보네? 그렇게 엉거주춤 걸어오는 걸 보니. 클클. 괜히 내 가슴이 아파지는..

짝!!

어느새 현준의 앞으로 다리를 쩔뚝거리며 다가오던 현지가, 계속 지껄이는 현준의 뺨을 내리쳤다.

너... 너.... 흑흑... 

다시금 참았던 눈물이 천천히 흘러나오던 현지가, 무슨 말이라도 할 것 같이 입을 벌리다가

이내 입을 꾹 다물고 만다. 누구의 탓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모든 일은 자신때문에, 자신의

욕심으로 인해 생겨난 일이었다. 그런 후회와 참회가 현지의 마음속에 피어나자, 겨우 현준에게서

천천히 떨어지며 강의실 밖을 나서는 현지였다.

후우... 어찌됐건, 너에겐 조금 미안하다만.

불시간에 자신의 뺨을 '가격'당한 현준이, 얼얼하게 아려오는 자신의 오른쪽 뺨을 문지르며

현지가 사라진 강의실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언제나 그렇듯, 이상할 정도로 섹스의 쾌락이

지나간 자리에는 빠르게 이성이라는 놈이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하는 현준이었다.

갈곳 없으면... 받아줄 생각은 있어. 나라도 괜찮다면.

이내 얼굴속에 웃음을 터뜨리는 현준이, 다시금 '완벽하게' '정복'한 현지를 떠올리며, 

강의실안에 멀뚱히 서서 생각에 잠겼다.

강의실안을 겨우 나와 천천히 밀려오는 '고통'인지 '쾌감'인지 모를 '자극'때문에 쩔뚝거리며

복도를 걷던 현지가, 천천히 여자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

화장실 안에 들어서자마자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던 현지가, 거울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며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푸석푸석하게 헝클어진 머리, 여전히 상기된채

발그레한 두 볼, 주섬주섬 챙겨입어 여기저기 구겨진 채로 엉망인 스커트, 현준에게 영락없이

'공략'당해 단추가 풀어져 자신의 가슴을 훤히 내보이고 있는 블라우스, 그리고 얼마의 고통을

쏟아냈는지 모를 '눈물자국'까지, 거울앞에 서 있는 '또다른' 자신의 모습을 먹먹한 가슴으로

바라보는 현지는 쉽게 그 존재를 인정할 수 없었다.

하아... 아.... 흑...

결국 다시금 쏟아지는 눈물과 함께 천천히 세면대 앞으로 다가가, 흐르는 물 속에서 쏟아지는

눈물과, 그리고 이미 쏟아진 눈물을 함께 닦아내기 시작하는 현지였다.

하아... 내가.. 내가.. 어쩌다가.. 왜...

연신 눈물을 닦아내던 현지가, 기어이 자신의 가슴속을 잦아드는, 자신에 대한 후회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비어있는 화장실 안에서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바로 잠시후에

자신의 연인을 어떻게 마주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과 걱정이, 현지의 머리속에 차츰 돋아내기

시작했다.

후우... 후우...

거친 숨을 몰아쉰뒤 몇 칸의 화장지를 뜯어내, 얼굴을 훔쳐내던 현지가 다시금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고 있는 머리를 뒤로 쓸어내며 천천히 휴대폰 액정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정말.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하지만 아무리 휴대폰 액정을 들여다보아도, 그 어떤 해답을 찾을 수 없는 현지였다. 휴지 몇칸을

더 뜯어내서 거울을 보며 마지막으로 정리하던 현지가 이내 다시한번 깊은 숨을 토해내며 화장실

밖을 나서고 있었다.

'만지작 만지작'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택시를 겨우 잡아타고 학교로 향하는 지훈은, 벌써 몇 분동이나 계속

고개를 숙인채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자신이 태운 '어린 손님'의 동태를 백미러로

유심히 관찰하던 택시 기사는, 이내 궁금증들을 모두 내려놓고 자신의 '본분'에 다시금 집중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하나...'

당장 어떻게 해야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현지뿐만 아니라 지훈에게도 쏟아지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격정적인 '동영상'이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이후에 계속해서 자신을 압박하는 질문이었다.

'현지에게 전화를... 전화를... 해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막상 현지에게 전화를 할 생각을 하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뜻모를

'두려움'이 지훈에게 엄습해 오고 있었다. 

'모르겠어.. 후우.. 모르겠다고.... '

그렇게 고개를 숙인채 질끈 눈을 감은 지훈의 휴대폰이, 낯익은 음악소리를 토해내며 울어대기

시작했다.

현지?

계속해서 침묵하던 '손님'이 크게 소리치자, 이에 놀란 기사가 다시금 백미러로 손님의 동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지훈이 허겁지겁 휴대폰 액정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현준이형'

하지만 자신의 바램과는 다르게 휴대폰 액정위에 새겨진 네글자는, 다시금 지훈의 분노를 끌어내고

있었다.

'왜... 왜 이 자식이 또....'

어느새 현준에 대한 적개심은, 그동안에 쌓아왔던 '우정'이나 '친밀도'의 감정을 모두 넘어서고

있는 상태였다. 자신의 손에서 울려대는 전화벨을 애써 무시하던 지훈이, 백미러로 연신 자신을

훔쳐보는 기사 아저씨의 눈과 한번 마주치고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왜.

......

수화기 너머로 예상치도 못했던 '짧고' '나지막하게' 자신을 불러오는 목소리를 듣고서는

현준은 당황하며 서 있었다.

왜.. 전화했냐고.

큭.. 서지훈이 화 많이 났나보네? 깜짝 놀랬잖아.

시끄럽고 용건만 말해. 지금 학교가고 있어, 잠시 후면 도착할거야.

아~ 그래? 알았어 알았어. 다른게 아니라 말야

잠시간의 당황감을 서서히 걷어내고, 현준이 수화기 너머로 다시금 천천히 자신의 생각을

내뱉기 시작했다.

원래는 조금 궁금해서 전화했어. 아까 보여준 '총천연색 무비'랑, 집까지 뛰쳐가서 니 눈으로

확인한 게 뭔지. 클클클 .

조용히 입닥치고 기다리고 있어.

무서운 눈을 하고선 휴대폰에 대고 소리치는 지훈을 힐끔 바라보며, 택시 기사는 빨간색 신호에

맞춰 천천히 멈춰섰다.

후우.. 알았어. 알았어. 사실은 '현지' 대신 전화했어

뭐? 아직도 같이 있는거야?

현지라는 말이 현준이 입에서 터져나오자, 자신도 모르게 격렬하게 반응하는 지훈이었다.

워~ 진정해 진정. 이미 진작에 사라졌어. 다리를 쩔뚝거리면서 말야. 그래도 걱정이 되서 말이지.

어찌됐든 '몸을 섞은' 사이긴 하니까 말야. 아마 모르긴 몰라도 어디에 숨어선 연신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서는, 휴대폰만 바라보고 숨어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상.. 상관하지마. 

어떻게 상관을 안해? 클클 봐봐. 너도 그냥 그렇게 물끄러미 앉아서는 전화할 생각도 못하고

있었던건 아니야?

!

자신의 속내를 들켜버린 지훈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분한마음을 겨우 억누르며, 아직 끝나지 않은

현준의 말을 듣고 있었다.

뭐 이제 다 끝나버린 마당에, 나도 아쉬움 같은건 없어. 아, 앞으로 어쩌면 '다시 안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아쉬움 같은건 있네. 물론 '어쩌면'이긴 하지만 클클. 뭐 암튼 다시 말하지만

여긴 신성관 404호고, 니가 도착할때 쯤이면 물론 난 여기 없을테지만 혹시 또 알아? 현지가

내 생각하면서 다시 이 곳으로 돌아올지? 클클. 암튼 연락이라도 해 보라고. 끊는다. 딸깍

............

아까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하고픈 말만 연신 쏟아내던 현준은 다시금 그렇게 통화를 끝냈다.

'왜.. 왜.. 아무말도 못하는 거야. 왜'

묵묵히 현준의 말을 듣고 있던 지훈이, 자신의 '무력함'과 '나약함'에 휴대폰을 들고 떨기

시작했다.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던 택시 기사는 천천히 캠퍼스 앞 사거리로 진입하려는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후우. 이젠 정말 끝인가보네.

지훈과의 통화를 마친 현준은, 빈 강의실에서 나와 '혹시나 어딘가 있을' 현지를 천천히 

찾으며 이내 진작에 인기척이 사라진 건물 밖으로 나오며, 익숙한 담배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럼 나머지 스토리는 '비련'의 주인공들에게 맡기고, 조연은 사라지겠나이다.

빠르게 담배를 머금던 현준은 캠퍼스안에 세워놓은 차에 천천히 올라타며,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운전석에 앉아서 백미러로 주위를 살폈지만, 이내 자신의 시야에 '현지'의

모습이 들어오지 않는 것을 확인한 현준은 악셀을 밟아 교문밖을 빠져 나갔다.

6400원 입니다.

멍하게 앉아있던 지훈을, 캠퍼스 안에 내려놓으며 택시기사가 말했다.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선 택시기사에게 내던지는 지훈을, 다시금 빤히 쳐다보던 택시기사는

천천히 차를 몰아 캠퍼스 밖을 유유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한동안 사라지는 택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지훈이 이내 자신의 시야에서 '그것'이 완전히 사라지자,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전화기를 올려 들었다.

일단.. 너부터야...

여전히 현지에게 전화할 용기를 내지 못하던 지훈이, 핸드폰으로 현준의 이름으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하지만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것은 '익숙한' 현준의 목소리가 아닌 낯선

여자의 목소리였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소리샘으로 연결...

이.... 이....

현준의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사실을, 수화기 너머의 낯선 여자가 이내 확인시켜 주자 

신경질적으로 수화기를 내려놓는 지훈이었다. 

잘... 잘도...

머릿속으로 현준을 떠올리며 입술을 한번 꽉 깨무는 지훈이었지만, 이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떨리는 발걸음으로 신성관으로 향했다. 

신성관 앞에 다다른 지훈은 다시금 차오르는 복잡한 감정을 겨우 억누르며 다시금 천천히

휴대폰을 들었다. 두렵고 겁이나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해야만' 하는일. 그리고 자신의 귀로

'들어야만' 하는일. 그것을 마음속에 새긴 지훈이 천천히 현지의 이름을 누르기 시작했다.

띠리리리.. 따라라라라

지훈의 수화기 너머로 익숙한 통화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차라리... 힘들면... 받지마... 시간이 얼마나 걸려도 내가 널 찾아갈테니까.'

복받쳐 오르는 슬픔에 다시금 입술을 꽉 깨무는 지훈이 신성관 앞에 서서 수화기를 귀에 대고

현지의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끝끝내 현지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후우... 어쩌면 당연한 건가?

그렇게 생각하던 지훈이 천천히 신성관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따르르르... 따르르르르

자신의 손에서 계속해서 '짖어대던' 휴대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현지는, 이내 그런 소란스러움이

걷히자, 소리없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화장실에서 나와 빈 강의실에 넋을 놓고 앉아있던

현지가, 다시금 찾아온 곳은 우습게도 '404호'였다. 

'큭.. 내가 정말...'

고개를 들어 자신의 눈에 들어오는 '익숙한' '404'라는 숫자에 웃어보이던 현지가 천천히

404호 강의실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럴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미 현준이 사라져버린

빈 강의실은, 뜨거웠던 조금 전과는 달리, 어딘가 조금 스산하게 느껴졌다. 

이젠.... 그냥 기다리면 되는건가...

무언가를 직감적으로 느끼던 현지가 천천히 빈 강의실에 들어가, 아무 책상이나 잡아채고는

자리를 잡고 앉기 시작했다.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챈 현지였다.

뚜벅 뚜벅

수업이 끝난 신성관 계단을 천천히 오르던 지훈은, 자신의 눈에 커다란 숫자 '4'가 들어오자

얼굴을 붉히며 쉼호흡을 한번 내쉬었다. 줄곧 정리되지 않는 자신의 생각을 겨우 부여잡고는

차가운 소리가 울려퍼지는 4층의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404호

결국 404호앞에 다다른 지훈이 천천히 강의실 문을 열기 시작했다. 

딸깍

404호의 문이 열리며 자신을 등지고 긴 생머리를 느려뜨린 여인의 뒷태가, 창가로 부서지는 

노을의 색과 함께, 파노라마 영상처럼 천천히 지훈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토록 침착하자고

애써 자신에게 소리쳤던 지훈의 뜨거운 감정이, 다시금 복받쳐 오르기 시작했다.

현... 현지....

떨리는 목소리로 등을 보이고 있는 여인에게 말을 건 지훈이, 꼼짝없이 문앞에 서서는 나지막하게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공기를 타고 자신의 이름이 전해져 오자, 어깨춤에 미세한 떨림을 보이던

현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현... 현지야... 현지야...

지훈은 연거푸 현지의 이름을 부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된거냐고

따지듯 물어볼까? 아니면 다짜고짜 따귀라도 내려칠까? 현준의 무엇이 그렇게 좋았냐고 쏘아

부쳐보기라도 해볼까? 정말 많은 생각을 하면서 캠퍼스까지 달려왔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그토록 오랫동안 사랑해온 연인의 이름을 불러내는 것 뿐이었다.

현준의 이름을 묵묵히 받아내던 현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지훈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빈 강의실에 앉아서 닦아내고 또 닦아냈던 자신의 눈물이었건만,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지훈을 바라보자 다시금, 현지의 눈에서 눈물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된.. 거야... 현지야...

오지마!

현지의 이름을 부르며 현지에게 다가가던 지훈에게, 현지가 결국 눈물을 쏟아내며 지훈에게

부탁하듯 말했다.

현지야....

부탁이야. 지훈아. 제발... 더 이상 오지마

느닷없이 자신을 제지하는 현지를 멍하니 바라본채, 현지가 만들어낸 약 3미터 남짓한 거리를

마주한채 지훈이 발걸음을 멈추어 섰다. 그리곤 적막만이 이어졌다.

미안..

숨막히는 적말을 먼저 깨어낸건, 현지였다. 연신 눈물을 쏟아내며 입술을 깨물고 서 있는

현지가 짧다면 짧은 지난날의 일들에 대한 '속죄'의 한마디를 쏟아냈다.

왜... 왜 그런... 협.. 협박 당한거지? 현준이형... 아니 그 자식한테 협박당한거지? 그렇지

이내 말소리를 높이며 현지에게 답을 요구하는 지훈이었다.

처음엔 억지로... 당했어... 그리고 협박을 당했던 것도 사실이야.

죽.... 죽여 버리겠어.... 현준이....

현지의 입에서 그토록 나오지 않길 바랬던 한마디가 쏟아져 나오자, 참아왔던 눈물과 함께

현준에 대한 분노를 토해내기 시작하는 지훈이었다.

지훈아.. 그만... 미안해... 내가 다 미안해.. 그러니까 제발 진정해.. 겁이 났어.. 나 너무

겁이났어...

윽... .끄윽.. .윽...

지금이라도 어딘가에 있을 현준을 향해 달려가고 싶은 지훈이었지만, 애써 쏟아지는 현지의 말을

계속 들으려는 지훈이었다.

현준에게 약점이 잡혀버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너무 비참했어. 하지만 내가 더 겁이

난건, 현준이에게 깔려 신음소리를 내뱉는 거 말고, 지훈이가 이 사실을 알게 되고선 힘들어하게

될까봐... 그리고 모든걸 ... 모든걸 잃게 될까봐.. 하는 말도 안되는 두려움이었어...

그만... 그만... 그만해!!

결국 오열하며 자리에 쓰러지는 지훈을 말없이 바라보던 현지가, 빗줄기처럼 쏟아지는 눈물을 

훔칠생각도 하지 않고, 쓰러져 있는 지훈에게 다가갔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지훈아. 내가 뭐라 할 말이 없어. 이렇게 될까봐.. 니가 이렇게 될까봐

아무 말도 못했던거야. 내가 미쳤었나봐. 미안해.

현지는 아무 잘못도 없다. 현지는 그냥 현준이한테 강압적으로 당한것 뿐이다. 연신 그렇게

자신을 설득하던 지훈이었지만, 마음대로 자신을 냉정하게 컨트롤 할 수 없었다. 아니

그렇게 하는 것이 지금 당장엔 너무 힘들어 보였다.

죽여... 죽여버리겠어.. 어디든 달려가서 다 죽여버리겠어!

안돼 지훈아...

오열하던 지훈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지훈의 앞에 서 있던 현지가 등을 보이며 뛰쳐 나가려는

지훈의 허리춤을 감싸 안으며 지훈을 막아섰다.

이제... 이제... 그런 사람... 어떻게 되든 상관 없으니까. 그리고 앞으론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을테니까 분명히. 이제 다시 예전처럼.. 예전처럼 살아가자. 지훈이 콩쿨도 얼마 안남았잖아.

넌 피아노 연습하고, 난 무용하면서 예전처럼 그렇게... 예전처럼...

그깟 피아노....

!

하지만, 지훈의 입에서 입에서 차마 '나와선 안될 말'이 흘러나오자, 현지의 바램대로 되는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깟 피아노 안치면 그만이야. 사랑하는 사람이 망가졌는데, 그리고 힘겨운 시간을 가져왔는데,

난 '병신'처럼 앉아선 아무것도 모른채 피아노만 쳐댔어. 그런데 현지 너는, 나더러 피아노를

지키라고 말하고 있는거야? 왜 끝까지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건데? 왜!

지.. 지훈아....

자신을 마주하고 눈물을 쏟아내며 이야기를 하는 지훈을 한참동안 말없이 바라보던 현지가

이내 멍한 표정으로 천천히 지훈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

마치 모든걸 체념한 듯이 어깨를 축 늘이고 강의실 밖을 나서던 현지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지훈은 현지의 뒷통수에 대고 크게 소리쳤다.

어디... 어디가는거야 김현지! 또 어디로 가는거냐고!!

...............

연신 고함을 질러대는 지훈에겐, 돌아서서 어딘가로 향하는 현지의 눈물에 그렁그렁

고여버린 많은 눈물 따윈, 그리고 나지막한 신음소린,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그렇게 모든것은 끝나가고 있었다.

#끝났어.. 하지만 착각하지마.

강의실 밖을 나서는 현지를 차마 잡을 생각도 하지 못하던 지훈은, 멍하니 신성관 404호에

남겨져선 햇살이 부숴지듯 작렬하는 창가에 걸터앉아,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현지의 모습같은건 당연히 찾아볼 수 없었지만, 그저 지금 이순간 창밖을 응시하는 것 이외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만 하는 일 같은건 없어보였다.

'만지작 만지작'

지난날 현지가 그랬듯, 차츰 자신의 얼굴에 깊숙이 '눌러붙은' 눈물을 닦아낼 생각도 하지 못하던

지훈이 창가에 앉아 '또다시'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기 시작했다.

'현준....'

상상도 하기 싫지만 현지가 자신을 지나 교실을 빠져 나간 이후엔, 고통스럽게도 현준의

얼굴만이 지훈의 머릿속에 아른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전화를 걸 용기조차 쉽게 허락되지 않음을

알아챘을때, 다시한번 자신을 감싸오는 '무력감'이 고통에 신음하게 만들었다. 

지금 이 순간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딱딱한 돌처럼 굳어버린 지훈이 빈 강의실에서 힘들게 내려놓은 '결정' 이었다.

진작에 자신의 집에 도착해서 샤워를 끝내고 거실에 앉아있는 현준은, 다시금 자신을 찾아오는

일말의 '소소'한 죄책감과, '궁금증'에 휩싸여 눈을 감았다.

후우

하지만 눈을 감자마자 이내 자신의 머릿속에 천천히 모습을 보이는 현지를 떠올리며, 천천히

자신의 물건에 오른손을 얹었다. 

정말 미안한건 사실이지만, 좋은건 어쩔 수 없나봐. 후우 아직도 이렇게 뻐근해

이내 조금 발기한 자신의 물건을 어루만지던 현준이, 신성관 404호에서 자신이 마지막으로

'정복'한 현지의 '좁은' 구멍에서 느꼈던 '강한 쪼임'을 상기시켜 내며 다시금 깊은 여운에

사로 잡혔다.

띵동

바로 그 때였다. 현준이 눈을 감고 달콤했던 쾌락의 유희를 불러내고 있을때, 현관에서

벨소리가 울려퍼졌다.

'설마?'

저녁 7시. 이 시간에 딱히 자신을 찾아올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지금 자신의 집에 울려퍼지는

초인종 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정도는 어렴풋이 떠올릴 수 있다.

'현지??'

그렇게 생각한 현준이 다시금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킨채 천천히 현관쪽으로 다가섰다.

딸깍

!

현준의 예상대로, 아니 기대대로 였다. 현준이 문을 열었을 때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현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현... 현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자, 현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울어서 빨갛게

충혈된 눈, 그리고 전반적으로 어딘가 '상실감'에 지쳐있는 표정. 그 모든 것은 현준으로 하여금

'모든 것은 끝'이라는 사실을 넌지시 전해주고 있는 듯 했다.

여.. 여긴 왠일로?

그렇게 현지에게 모른척 묻는 현준이었지만, 속으론 알 수 없는 승리감에 쾌재를 불렀다. 지훈에게

짜릿한 고통을 선물한다는 '소기의 성과'를, 진작에 달성했지만 그토록 바라고 원했던 현지가

자신의 눈앞에 덩그러니 서있는 모습에 현준의 심장은 다시금 떨리기 시작했다.

들어가도 돼?

고개를 들어 물어오는 현지를 바라보며, 현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준을 스쳐지나 천천히

현준의 집으로 들어가던 현지를 뒤쫓아, 현준이 문을 걸어잠그고 자신의 거실쪽으로 현지를

따라 들어갔다.

마실것좀 줄까?

응..

현준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는 현지를 보며, 냉큼 주방으로 걸어 들어가는 현준이었다. 

언젠가 현지가 자신에게 그랬듯 현준은 물위에 얼음을 여러개 띄워 시원하게 되어버린 글래스를, 

손에 들고 현지에게 건냈다.

꿀꺽 꿀꺽 꿀꺽

목이 탔는지 한달음에 차가운 물을 들이키는 현지를 그저 말없이 지켜보는 현준이었다.

하아... 시원해

다 끝났어?

물 한잔을 비워낸 현지를 바라보며, 어떤 이유에서인지 다급해질 때로 다급해진 현준은 현지를

바라보며 자신이 그토록 '궁금해 하는' 그것을 뻔뻔하게 물어봤다.

큭.. 바보야? 잘 알 거 아니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널 찾아왔겠어?

차갑게 미소지으며 말하는 현지를 바라보며, 현준은 가쁜 숨을 내쉬다 결국 현지를 끌어 안아

버렸다. 

쨍그랑

갑작스런 현준의 포옹에 현지는 손에 들고 있던 '글래스'를 땅에 떨어뜨려 버렸다. 덕분에

결코 경쾌하지 못한 파열음과 함께, 날카로운 유리의 파편들이 이리저리 흩날리며 거실에

쏟아졌다.

하아... 하아... 클클. 그래. 잘 생각했어. 모든건 본능이 원하는대로 하면 되는거야! 후우.

서지훈따윈 이제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니가 내 곁에 함께라면..

묵묵히 자신의 강한 포옹을 받아들이던 현지를 가까스로 떼어낸 현준이, 이윽고 현지의 입에

입맞춤을 하기 시작했다. 현준의 입장에선, 모든것을 자신이 쟁취했다는 승리감이 가져온, 

다분히 '본능적'인 행위였다. 

쭙.. 쭙.. 쭈웁....

현준은 언제나 그랬듯, 마음까지 전해지는 현지와의 키스를 계속했다.하지만 바로 그 순간이었다.

쭈...아?... 악!! 아악!!!!!!!!!!

연신 현지의 입을 공략하던 현준이, 현지를 멀찌감치 떨구어내며 손으로 입을 감싸쥔채 현지 앞에

쓰러졌다. 

고마워? 웃기는 소리하지마. 내 잘못으로 지훈이랑 끝을 내고 온 것 처럼, 너에게도 '끝'을

선물하려 여기까지 온것 뿐이야

쓰러져서 신음하는 현준을 물끄러미 바라본채, 현준의 피로 흥건히 젖어버린 자신의 입술을 닦아내며

현지가 입밖으로 무언가를 연신 뱉어냈다. 가증스럽게도 현지의 입을 다시금 머금은 현준의 혀에

'다른 종류의' '고통'을 선사한 현지였다.

욱...우욱. .아악...

거실에 흩뿌려진 유리잔의 파편위를 뒹굴며, 자신의 몸이 서서히 붉게 물들고 있다는 사실도

망각한채, 현준은 눈물까지 쏟아내며 미칠듯한 고통에 울부짖고 있었다.

그런 현준을 뒤로한채 현지가 현관으로 향하며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이젠... 정말 다... 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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