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리지 못한 절망은 파멸을 향해 달려간다. (16/21)

#가리지 못한 절망은 파멸을 향해 달려간다.

현지와 격정적인 정사를 나눈 현준은 미처 다 채우지 못했던 셔츠의 단추를 하나 둘

채워가며 무용과 계단을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간단하게 점심식사를 마치고 건물안으로

들어오던 무용과 여학생들이 어느 '낯선이'의 방문에 경계하는 눈빛을 흘렸지만, 현지에게 

쏟아낸 정액과 함께 최고의 쾌락을 지금 막 맞이했던 현준은 일일이 반응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후우.. 끝내줬어..'

다시한번 현지와의 성적인 관계를 떠올리던 현준이 입맛을 다시며 무용과 건물을 빠져나왔다.

얼마간 걸어서 건물 뒤 쪽 어딘가, 인적이 드문 곳에 다다라서야 겨우 담배에 불을 붙이며

다시 깊은 생각에 잠기는 현준이었다.

후우..

깊은 담배연기를 뽑아대던 현준이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의 끈을 이어잡고 있었다.

이젠 조금 확실해졌어. 서지훈에 대한 복수나 증오도 그렇지만, 역시... 난

질끈 눈을 감아버린 현준이 다시한번 깊은 연기를 뿜어내며, 자신이 결심한 무언가를 

공기속에 토해냈다.

갖고 싶어. 완전히 갖고 싶어. 지훈따위와는 상관없이. 가지고 싶어. 현지.. 현지의 몸

그렇게 말하며 마지막 담배 한모금을 빨아들인 현준이 천천히 피아노과 건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현준의 뒤를 따라 흐르던 눈부신 햇살이 마냥 밝게만 느껴지지 않는

한적한 오후였다.

한편 무용과 연습실 안 샤워실에서 자신의 허벅지에 길게 '눌러앉은' 지훈의 '흔적'을 

천천히 지워내던 현지가, 다시금 찾아온 흥분에 모든 이성을 너무나도 쉽게 놓아버린

자신을 뒤늦게 질책하며 샤워기에서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주말동안.. 흑... 주말동안. 그렇게 다짐했는데. 그렇게 결심했는데.. 왜...

현준과의 섹스를 통해 다시한번 말할 수 없는 쾌락을 몸안에 가득 새겨 버린 현지가,

흐르는 샤워기 앞에서 절규했다. 하지만 연습실안에서 들려오는 무용과 학생들의 인기척을

느끼며 이내 서둘러 샤워를 마치고 자신의 옷으로 갈아 입었다. 

물론 격정적인 섹스에서 '짖이겨져'버린 자신의 연습복은 혹여라도 누군가의 눈에 보일까 

조심 조심 자신의 가방속에 구겨넣어 버렸다. 연습실 안으로 다시 발을 들여놓는 현지가 

차츰 얼굴색을 환하게 바꿔 가고 있었지만, 고통의 몸부림 속에서 현준에게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하겠다'고 서약처럼 내뱉어 버린 자신의 말을 떠올리며 앞으로 또 무슨 일이 자신에게 

벌어질 것인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쉽게 지워버리지 못하는 현지였다.

딴... 따라라.. 따라라라

'아무것도 모르는' 지훈은 피아노 연주실에 앉아, 오후 시간내 연습에 집중하고 있었다.

겨우 1주일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현지에게 쏟아버린 걱정의 시간과 고통으로 

연습에 큰 지장이 있었던 지훈으로썬 낮에 환하게 쏟아내던 연인의 미소를 떠올리며 다시금

연습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후우. 그래. 이 부분은 조금 강하게.. 그리고 이 부분은 점점 빨라지게끔.. 그래서 

도약되어 지게끔. 후우. 

한참을 피아노 위의 건반을 눌러대며 리스트의 영혼을 불러들이던 지훈이 잠시 자신의 연주를

곱씹어보며 피아노위에 놓인 건반에 천천히 자신의 생각을 체크해 나갔다. 

꽤나 열심히 하고 있네?

집중해서 악보를 체크하던 지훈이 가슴을 얼릴만큼 차갑게 들려오는 음성쪽으로 처천히 고개를

돌렸다.

현준이형!

현준을 보며 반갑게 웃고있는 지훈을 향해, 현준이 조금의 표정변화도 없이 천천히 

지훈에게 다가갔다.

뭐 좋은 일이라도 있어? 얼굴이 한결 좋아보이네

아. 좋은일은요. 그냥요. 현지가 아픈게 나아서 다행인거 정도?

연신 미소를 보내는 지훈을 물끄러미 바라보자니, 현준은 차츰 다시 올라오는 불쾌하고 

짜증섞인 증오감을 마음속으로 씹어내고 있었다

그나저나 리스트가 살아돌아온지 알았다. 클

겨우 마음을 진정하고, 방금전 훔쳐들었던 지훈의 연주에 대한 '솔직한' 감상평을 쏟아내는

현준을 보며 지훈이 머쓱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최소한 현준이 지금 쏟아낸 감상평은

지금 그 순간만큼은 모두 진심이었다.

에이 과찬이세요. 얼마간 연습을 못해서그런지 오늘은 연습이 잘 안되는 걸요

씨발. 끝까지 잘난척이네. 퉤

!

겨우 억누르던 증오라는 감정을 결국 이겨내지 못하고, 핏발이 가득선 눈으로 지훈에게 

소리치는 현준을 놀라 바라보며 지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혀...형.. 왜.. 왜 그러세요? 뭐 안좋은 일이라도?

안좋은일? 반대야. 지금 내 기분이 얼마나 좋은줄 알아? 크큭 너무 좋지. 너무 좋아.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눈 앞에서 펼쳐진 지훈의 완벽한 연주에 조금씩 현준의 

가슴속을 파고들던 질투와 시기, 증오의 복합적인 감정이 결국 폭발하며,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이성의 끈을 한순간 놓쳐버린 현준이었다.

'언제나와 똑같이 바보같은 놈이다. 짜증나. 왜.. 왜 난 가질 수 없는건데.... 

리스트도.. 그리고 이제 좋아하게 되어 버린건지도 모를 현지도... 모두'

이미 차오를대로 차오른 증오의 감정을 어렵게, 아주 어렵게 가라앉히고 있는 현준을 

그저 약간 겁에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고 서 있는 지훈이었다. 현준이 이런 지훈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너 그거 아냐? 음악하는 사람들은 말야. 그래 좋아. 그게 아마추어든 프로든 상관없이,

언제나 가슴속에 자신의 연주에 대한 끝없는 '자존감'과 프라이드를 가지고 살아. 

물론 이것도 어느정도 수준에 도달해야 가능한 말이다만. 뭐 좋다 얘기야.

이미 가슴속에 벅차오른 그 어떤 감정을 추스리지 못하던 현준이 계속 말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지랄같았어. 고등학교때부터 날렸다길래, 그냥 어느정도 피아노좀 치나보다

생각했는데. 막상 눈앞에서 니 연주를 듣게 된순간, 난 모든걸 잃어버린 듯한 깊은 상실감과

모멸감을 느꼈어. 그거 알아? 그래 과장좀 보태서 정말 죽고 싶을 정도였어.

자신의 앞에서 연신 괴성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쏟아내는 현준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던 지훈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현준의 말을 그저 잠자코 듣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자존감을 잃어버린 음악가는 말야. 특히 누군가에 의해 그것이 절망적으로 '짓밟힌'경우엔

더더욱.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배와 같아. 도저히 어디로 나아가야 할 지 알 수 없거든.

그래서 그 날부터 계속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어. 나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하지만 한번 무너진 자존심과, 더불어 짓이겨진 나의 피아노는....

한번 강하게 입술을 깨물던 현준이, 깊은 숨을 몰아쉬며 지훈에게 말했다.

'그날'..... 바로 그날. 모두 죽어버렸다. 너에 의해서

몇분간 연습실을 울리던 현준의 '고백'이 끝나자, 조금 넋이 나간 표정의 지훈과 현준은

서로를 바라보며 묵묵히 피아노 옆에 서 있었다. 갑작스러운 현준의 등장도 모잘라, 예상치도

못했던 자신을 향한 분노를 폭발시키던 현준을 바라보던 지훈이 겨우 입을 땠다.

형. 죄송한데, 오늘 조금 이상하세요. 평소랑 많이 틀리세요. 무.. 무슨 말씀인지

전혀 알 수가 없어요

이상? 이상하다? 크큭.

몇분간 토해낸 자신의 고백이 묵살됐다고 느낀 현준은 허탈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래? 후우. 그토록 좋아하는 리스트도 너에게 뺏기고 졸지에 이상한 놈까지 되어버렸네. 

하여튼 끝까지 멍청하고, 둔해 빠진 새끼란 말야. 너란놈은. 클클. 후우. 그래. 근데 말야

어느새 지훈의 얼굴 바로 앞까지 다가선 현준이 지훈을 쏘아보며 무겁게 얘기했다.

그렇게 고통받던 내가, 이제야 겨우 너란 놈을 이길 수 있게 됐는지도 모르겠어. 

어쩌면 그것도 아주 '완벽'에 가깝게.

자신의 눈앞에서 뜻모를 말들을 늘어놓는 현준을 여전히 응대하고 있는 지훈이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거 이런것쯤 이제'

잠시 지훈을 쏘아보던 현준이 자신의 가슴팍에 손을 집어넣고, 연습실에 오기전 몇번이나 

확인했던 'CD'를 만지작 거리다, 결국 맨손을 빼냈다. 멍청하게 자신을 쳐다보던 지훈을 보며,

현진을 그토록 유리하게 만들었던 자신의 '보험' 보다 더 좋은 생각을 직감적으로 생각해 냈기

때문이었다.

무.. 무슨 말씀이세요? 형? 저를 이길수.. 있게 되었다는 말씀이...

한참을 잠자코 현준을 바라보던 지훈이, 겨우 용기를 내어 현준에게 물었다.

큭큭.. 아무것도 아니야. 후우.. 내가 잠시 정신이 나가서는 이상한 말들만 늘어놨나 보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겨우 이성을 찾고 지훈에게 등을 보이며 현준이 말을 이었다.

후우.. 그나저나 휴대폰 좋네. 이거 현지꺼랑 같은거냐?

아... 네... 그.. 현지랑 같은날 샀어요. 커플폰..

갑작스럽게, 피아노 옆에 놓여있던 지훈의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는 현준을 바라보며 '묵묵히'

대답하는 지훈이었다. 현준은 의중을 알 수 없게도, 연신 지훈의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다

내려놨다.

저.. 형.. 말씀... 해 주세요. 도대체 무슨 말씀을?

자신의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천천히 연습실 밖으로 빠져 나가는 현준을 바라보며 지훈이

다급하게 말했다.

후우. 답? 답을 듣고 싶어?. 그래 답이라면 말야. 니가 병신같이 '둔해 빠졌다는 거야'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자신을 노려보는 현준의 무서운 얼굴에, 지훈은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지훈을 향해 현준이, 비장한 한 마디를 내 던지며 사라졌다.

너.... 니 집에 있는 침대는 한번이라도 제대로 본 적 있냐?. 아니 지난 금요일 이후에 

정리라도 해 본 적 있어?. 아마 없을거야. '그걸' 니 눈으로 직접 확인이라도 했었다면.....

......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첨첨히 사라지는 현준을 바라보며, 지훈은 갑작스레 자신을 찾아온 

혼란스러움에, 조금의 매스꺼움을 느꼈다. 

'뭐... 뭐가 도대체 어떻게 되는거야? 현준이 형이 갑자기 왜...'

짧은 시간동안 아무리 생각을 정리하려고 애를 써도, 결국 혼란스러움만 가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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