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나다
거짓말처럼 새로운 아침이 밝아왔다.
자정을 조금 넘어 인터뷰를 마치고 지친 몸을 집으로 향하던 지훈은 현지와의
약속대로 집앞에 도착하기 전에 연신 전화벨을 눌렀지만 끝내 한번도 받지 않는
현지가 걱정되었다.
하지만 한시가 넘어 도착한 자신의 집 안방에서 잠들어 있는 현지를 보고
지훈은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뭐야 연락 달라더니. 많이 피곤했었나? 아깐 그렇게 쌩쌩하더니. 하긴 벌써
한시가 넘었네. 후우 나도 대충 닦고 자야겠다.
그렇게 말하며 현지의 곁을 떠나는 지훈의 등뒤로 말없이 흐느끼는 현지를
지훈은 미쳐 알아차릴 수 없었다.
지훈아 수업 가야지
현지의 목소리에 졸리는 눈을 겨우 뜨고 현지를 바라보는 지훈이었다.
어. 현지야 잘 잤어?
응... 어제는 지훈이 덕분에 잘 잤지
지훈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현지의 미소를 바라보며 웃으며 대답했다.
후우. 다행이네. 그래도 어젠 얼마나 걱정했다고. 전화달라고 해서 기껏 전화했더니
전화 안받길래 막 뛰어왔단 말야
아....아... 그랬어?... 미안
순간 얼굴빛이 어두워지는 현지를 보며 지훈이 놀라 정색하며 말했다.
아니 아니 미안하기는.. 그냥 걱정되서 그랬어. 미안해 하지마. 빨리 씻고
간단하게 뭐라도 좀 먹자
'지훈아.... 미안...'
여느때와 다름없이 상냥한 미소를 건내는 현준의 등뒤로 현지는 마음속 깊이
사과를 건냈다.
지훈아 미안한데... 나 먼저 갈게..
어? 왜? 금방 닦아 나. 같이 밥먹고 가자.
서둘러 일어나는 현지를 바라보며 지훈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딱히 밥생각도 없고, 생각해보니 오늘 무용과 연습이 조금 일찍 있어서
지금 가지 않으면 늦을 것 같기도 하고.
어? 그런말 없었잖아... 연습같은거 있다고
어?.. 그게 갑자기 생겼어
거짓말이라곤 해본 적 없는 현지가 당황하며 말했다. 이래저래 지훈에게
거짓만 늘어가고 있는 자신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구차하게 느껴졌다.
아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그런데 그 ... 차림으로 가려고?
자신의 배기팬츠를 입고 있는 현지에게 지훈이 의아하다며 말했다.
어?.. 어.. 어제 땀을 많이 흘려서 어제 입었던 옷을 다시 입기 그래서.
오늘 하루만 빌릴게 지훈아.. 암튼 지훈아 이따가 캠퍼스에서 보자.. 연락해
어? 잠깐만 현지야.. 현지야
그렇게 말하며 황급히 지훈의 집을 나서는 현지였다.
왜 저러지? 정말 화난거 같은데?...
현지의 행동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지훈이었다.
에이. 일단 씻고 나도 빨리 학교에 가야겠다.
그렇게 말하며 지훈은 별일 아니겠지 하는 마음으로 다시 욕실로 향했다.
지훈아 미안... 정말 미안해...
지훈의 집을 나선 현지는 다시한번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어젯밤 있었던 일들은 물론 계속해서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에게 거짓을 뱉을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역겨움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앞으론 어떻게 해야 하지?'
자신의 마음과는 반대로 맑디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현지는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
수없이 자신에게 되물었지만, 좀처럼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캠퍼스에 도착한 현지는 혹시라도 현준에게 연락이 오지 않을까 오전부터 오후내내
불안한 마음으로 수업을 들었다. 하지만 저녁이 올때까지 현준에게서는 왠일인지
전화가 없었다. 그저 남자친구인 지훈에게서만 안부전화가 걸려올 뿐이었다.
'무슨 꿍꿍이 인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현지는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무용과 건물을 나서며 지훈에게 전화를 걸 참이었다.
누구한테 거는거야?
바로 그때였다. 어둠속에서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현준이 현지의 앞에
나타나 현지를 가로 막았다.
뭐야 너....
현지가 놀란것도 잠시. 이내 눈을 부릅뜨며 현준을 노려보았다.
세상의 근심을 모두 혼자 가진듯한 얼굴을 하고서는... 걱정되서 그러지..
현준이 지난밤 현지를 유린할 때 수없이 보였던 옅은 미소를 입가에 띄우며
현지에게 말했다.
여기... 학교야. 이상한 짓 할 생각이라면 고쳐먹는게 좋을거야.
현지의 앙칼진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현준은 현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침에 밑이 휑하지 않았어?
그게 무슨?
현지가 놀라며 물었다. 사실 그랬다. 아침에 지훈이 잠든 사이에 목욕탕 앞에
놓여져있던 자신의 옷가지를 챙겼을때, 자신의 팬티가 없음에 당황한 현지였다.
구태여 지훈의 팬츠를 빌려입고 나온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이거 때문에 그런거야....
현준은 하얀색의 팬티를 자신의 바지에서 꺼내며 현지앞에 내밀었다.
변태자식
현지는 얼굴을 붉히며 현준의 손에 들린 자신의 팬티를 낚아챘다.
여긴 왜 왔어? 어제 그걸로 협박하려는거야?
현지는 현준을 힘껏 노려보며 말했지만, 동시에 무용과 건물에 사람이 있을까
최대한 주의를 살폈다.
어제 그렇게까지 친절하게 설명했는데.... 아직도... 뭐 상관없어. 일단 차에 타
현준은 조금 질렸다는 표정을 보이며 현지에게 자신의 차를 보이며 말했다.
왜.... 왜 내가 저걸 타야해? 저리 꺼져..
현준을 무시하며 현지가 현준의 곁을 지나치려 했을 때였다.
아... 안돼...아...그만해. 안돼 안에다가는 안돼
!
현지가 나지막히 울려퍼지는 은밀한 음성쪽으로 고개를 돌렸을땐 현준이 어제밤
현지와 나눈 정사가 담긴 디카를 손에들고 조롱하듯 서 있었다.
꼭 말로 할려고하면 이렇게 기를 쓰고 달려드는 애들 있어. 볼륨을 더 틀어볼까?
그만둬... 이자식아
알았어. 멈추고 싶으면 차에 타...
이.....
현준의 협박에 현지는 어쩔 수 없이 현준의 차에 올라탔다.
이제야 순순히 차에 올라타는 현지를 바라보며 현준이 디카에서 흘러나오는
농밀한 영상을 정지시키고 뒤이어 자신의 차에 올라탔다.
더러운 자식
현지가 증오가 가득 담긴 표정으로 현준을 노려보며 말했다.
어제도 말했지만, 니가 협조만 잘 해준다면 구태여 내가 더러운 짓은 하지 않아도 되잖아...
그렇게 말하는 현준을 보며 이내 차밖을 살피는 현지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무용과로서는 연습이 거의 없는 저녁 시간인 탓에 인기척을 느낄 수 없다는 점이었다. 현지는 조금 안도하며 물었다.
뭘 할건데?
잠깐 어디좀 갈까하고.
어딜? 너 설마 또?
걱정마... 일단은.... 일단은 아무짓도 하지 않아... 일단 안전벨트부터 매자.
장소는 가보면 알아
그렇게 말하는 현준이 현지가 미쳐 막을 틈도 없이 현지를 덮치듯 현지의 안전벨트를 잠궜다.
후우.. 그래 이향기다... 어제 이 향기가 참 좋았어.
그제야 현준이 만족한 듯한 표정을 보이며 현지에게 미소지었다. 하지만 현지는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때였다.
띠리리 띠리리리리리
현지의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일단... 받아... 남자친굴거 아니야...
현지보다 한발 앞서 현준이 명령하듯 말했다.
받을거니까 신경꺼.
그렇게 말하는 현지였지만, 이상할 정도로 심장이 뛰고 있는 현지였다.
'왜 이러지? 일단 진정하자.'
그렇게 자신을 진정시키며 전화를 받는 현지였다.
여... 여보세요?
어 현지야
예상대로 지훈이었다.
어... 지훈아.
왜 또 목소리가 그래? 어제부터 이상해... 나 때문에 화 많이 난거야?
아침에도 그렇게 가버리고 아까 통화할때도 대충대충이고
어? 아니야. 그런게 아니라... 몸.. 몸이 좀 안좋은거 같아. 어제 밤에 잠을 잘못잤나봐...
너무 걱정하지마.. 화같은게 날리없잖아
일순간 미안한 마음과 초조한 마음이 뒤섞인 현지였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어디야?
어? 그게.... 지금
그때 대화를 엿듣고 있던 현준이 둘의 통화에 끼어들며 현지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통화가 너무 길어... 나. 또 이거 틀고 싶어졌어... 자꾸 사람 나쁘게 만들거야?
그렇게 말하는 현준이 다시한번 자신의 디카를 가리키며 말했다.
'윽....'
현지는 분한 마음이 머리 끝까지 차올랐지만 이내 수화기 저편에 있는 지훈에게
다음 말을 전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몸이 안좋아서 지금 집에 가고 있어.
집에? 연락하지. 같이가면 좋잖아.
어..그러게... 미안.. 그.. 그정도로 몸이 아좋아서 그랬나봐. 지훈인
콩쿨도 얼마 안남았는데 방해할 순 없잖아
현지는 자신이 생각해도 무서울 정도로 거짓을 고백하는 자신의 지금 태도에 내심 놀라워했다.
에이 .. 그래도 아쉽다... 그럼 어쩔수없지... 나중에라도 꼭 연락해. 나 걱정되니까
그...그래 지훈아... 걱정끼쳐서 미안하고....... 고마워
그래 알았어 들어다
뚝
그렇게 둘의 짧은 대화가 끝났다. 지훈에게 자신은 계속 거짓을 고하고 있음에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던 현지의 죄책감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또.... 거짓말을....'
고개를 숙이고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는 현지를 보고 있던 현준이 현자의 전화기를
뺏으며 말했다.
무.. 무슨 짓이야?
잘도 그런 거짓말 뱉어내고선 그런 미안한 표정 같은거 짓지마.
현준이 정색하며 말했다.
그나저나 어제부터 너 다시 봤어.. 연기력이 좋은거야. 아님 뭐야?
혼자 미안한척은 다 하면서 거짓말이나 술술 해대고...
현준아 현지를 비꼬며 말했다.
암튼 빨리 어디든 가줘..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아
다시 안정을 찾은 현지가 혹여라도 다른 사람에게 들킬까 조마조마하며 현준에게 말했다.
알았어 보채지마
그렇게 대꾸하는 현준이 차에 시동을 걸었다.
#욕망이 고개를 들다.
얼마간 달렸을까. 현준이 차를 세운곳은 어느 한적한 바였다.
내려..
여긴...
현지가 바의 간판을 유심히 살피다 현준을 바라봤다.
사람많은 곳에서 얘길해야 니가 덜 경계할거 아니야? 잠깐 얘기좀 하려고 해.. 내려
차에서 내려 바 안으로 들어가는 현준을 바라보며 현지는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모르는 사이에, 아니 어제 그 일 이후로 두사람에게 어느새 그동안의 존칭은
사라지고 없었다.
어? 현준이 아니냐? 간만이네?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현준에게 말을 걸어온다.
아 형. 오랜만이네요. 여전히 좋은 바에요. 여긴
그렇게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이 문 옆에서 수줍게 바 안을 응시하는 현지를 동시에 바라봤다.
괜찮으니까 들어와..
현준이 현지에게 소리쳤다.
어? 누구? 여자친구?
주인이 궁금하다는 듯 현준에게 묻는다.
아..아니요. 후배에요. 얘기좀 나눌려구요. 대화하는데 이 곳 만한데가 없잖아요
현준이 익살스럽게 대꾸하자 주인은 알았다는 듯 웃으며 현지 쪽으로 다가갔다.
현준이 후배군요? 괜찮아요 들어와요. 내가 꾸민 가게긴 하지만 나름 분위기 좋아요
인상좋은 남자가 현지에게 말을 걸어오자 현지는 겨우 마음을 놓았다.
아닌게 아니라 멋진 곳이었다. 어찌됐든 술집이긴 하지만 아늑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여기로 와서 앉아, 현지야
어느샌가 바의 한곳에 자리를 잡고 현지를 부르고 있는 현준이었다.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현준에 대한 분노가 다시금 올라왔지만
일단은 현준이 부르는 곳으로 걸어가는 현지였다.
그래 마실건?
아까 그 인상좋은 주인이 말을 걸어온다.
음. 전 항상 마시는 걸로 주세요. 아마 이 친구는 이런데 별로 와 본 경험이 없을테니
저랑 같은 걸로 주셔도 될거에요. 그치?
눈을 찡긋하며 말하는 현준을 보며 현지는 움찔했지만 이내 주인남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럼 얘기들 나누라고
그렇게 말하며 주인 남자는 사라졌다.
분위기 좋지 여기?
현준이 현지를 그윽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빨리 용건이나 말해
현지가 퉁명스럽데 대답했다.
여기까지 와서 그렇게 까지 뾰루퉁해 있을 필요 없잖아. 기분풀어.
여기 보는 눈도 많고, 또 어젯밤처럼 현지를 강제로 어떻게 할 생각은 없어
현준의 말대로였다. 현지가 들어왔을때 가게 안에는 저녁 시간 치고는 제법 많은
손님들이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어제와는 다른 현준의 분위기에 간신히 화를 누르고
경계를 푸는 현지였다.
자 주문하신거 나왔습니다.
아까 그 주인이 양손에 술을 가지고 둘에게 다시 다가왔다.
자.. 주문한거. 현준인 항상 이것만 찾으니까.. 하여튼 멋쟁이라니까? 아가씨도..
아차 호칭 맘에 안들려나? 그럼 바꿔서 현준이 후배도 맘에 들거에요. 좋은 술이거든 이거
그렇게 말하며 주인이 한쪽눈을 찡긋하며 현지에게 술을 건냈다.
그럼 난 정말 이만
또다시 웃으며 사라지는 주인이었다.
하여튼 저 형은. 크. 일단 마셔봐. 맘에 들진 모르겠지만
됐고. 아까도 말했지만 일단 용건을 얘기해
살갑게 말을 걸어오는 현준에게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현지였다.
후우. 그래. 알았어. 여전히 기분이 안좋은 모양이네. 하긴 좋을리가 없지.
아 맞다 그전에 일단 이거 받아
그렇게 말하는 현준이 자신의 바지춤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말했다.
이게 뭐....
피임약이야.. 확실히 너 아무런 대비도 안할것 같아서
현지는 죽을것같은 수치심을 느끼며 어제의 그 차가웠던 밤을 떠올렸다.
하지만 현준의 말대로 어제 이후에 딱히 이런건 신경조차 쓰지 못하고 있던 현지였다.
일단은 현준과 피임약을 번갈아가며 쏘아보는 현지였다.
그렇게 말하며 현준이 먼저 자신의 술잔을 한모금 기울였다.
우선 어제 일은 사과할게.
사과? 현준의 입에서 사과라는 말이 나오자 기가차는 현지였다.
사과? 너 이자식 지금 사과라고...
일단 들어...
현지를 먼저 제지하고 나서는 현준이었다.
그래 사과받기 싫음 그냥 무시해도 좋아. 하지만 내가 오늘 너를 이곳에 데리도 온 이유는
조금이나마 고백할 것이 있어서야
고백이라니? 무슨 변명거리라도 찾겠다는 거야?
현지가 다시 현준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일단 들으라니까... 일단 듣기라도 해야 너도 어제의 일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납득할 거 아니야..
납득이라.... 현준의 입에서 뻔뻔하게도 납득이라는 말이 흘러나오자 현지는
다시 화가 차 올랐지만, 일단은 화를 조금 누그러트리고 현준의 말을 듣기로 했다.
사실 어제 내가 관계를 가진... 아니지.. 내가 강제로 너를 품은건 딱히 이유랄게 하나 있어.
그건 내가 너의남자친구.. 그러니까 서지훈을 증오하기 때문이야.
현지는 어이가 없었다. 변명이라고 한다는 소리가 그래 뭐 어째?
당신 지금 그걸 말이라고...
일단 끝까지 들어
현준이 다시 현지의 말문을 막았다.
어이없겠지. 이해할 수 없겠지. 알아. 하지만 내가 서지훈을 증오하는건,
그 증오의 깊이는 니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오래된 거야.
그렇게 말하며 현준이 다시 한모금 자신의 술을 들이켰다.
난 너희보다 3년먼저 지금 다니는 학교에 입학했어. 뭐 믿기진 않겠지만 나도 나름
고등학교때 학교에서 신동소리 들으면서 피아노 쳤었거든. 훗 그땐 정말 어깨에 힘도
많이 들어가고 내가 이 세상 모든 피아노의 중심에 서 있다고 자만에 빠지기도 했어.
지금 생각해보면 마냥 바보같은 일이지만.
그렇게 말하는 현준을 현지는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 리스트 껀 특히 엄청나게 잘 쳤거든. 리스트 알지? 미칠듯한 연주의 신...
사실 어려워서 콩쿨이나 대회에는 리스트로 출전한 경험은 없지만, 늘 연습은 그의 곡으로 했어.
그 속주의 쾌감.. 절망적인 표련력. 최고거든.. 그렇게 세상위엔 나 혼자만 있다고 생각하면서
대학에 들어왔지
지훈은 갈증을 느낀듯 다시 한모금 술잔을 기울인채 말을 이었다.
헌데 역시 난 우물안 개구리더라고. 고등학교때 전국대회에서 입상도 하고 도대회마냥
규모가 작은 대회는 거의 휩쓸다시피 했는데, 마냥 대학에 와보니 이쪽 저쪽 가릴거없이
주위에 깔린 놈들이 전부 나만큼 치는거야. 아니다. 미안. 크크 다 나보다 한 수 위에 있는거야
현준은 다소 슬픈 표정을 지으며 현지에게 말했다. 그런 현준의 동태를 살피며
현지는 잠시 동요했지만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현준의 다듬얘기를 기다렸다.
너 그런 기분 아냐? 내가 미친듯이 연습실에서 연주를 하고 나 스스로는
완전 만족스러워서 기쁜 표정을 얼굴에 짓고 있는데, 옆에서 듣고 있는 동기놈이나 교수
심지어 후배들이 다가와서는 '형은 정말 잘치는데 뭐랄까 리듬감이나 기본기가 조금 미흡해요'
라던지 '그부분은 그렇게 감정적으로 치는게 아니에요' 라던지 하면서 건방떨 때
내가 받는 비참함... 넌 그런거 느껴본적있어?'
어느샌가 현준의 눈에 조금의 눈물이 고였다.
'이남자 지금 무슨 말을..'
현지는 현준이 조금 안쓰러워 보였다.
늘 최고라고 생각해 왔는데. 대학에선 나 따위 그냥 삼류취급이였어.
하나부터 열까지 절망의 연속이였지. 진짜 피아노고 뭐고 다 때려칠 생각이었어.
그래서 한동안 진짜 마음대로 살았어
잠자코 듣고 있던 현지가 현준의 말에 잠시 대꾸하려 했지만 이내 그만두기로 결심하고
현준을 살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렇게 절망속에 절어 있는대도 피아노가 치고 싶어지는거야.
진짜 너무 치고 싶었어. 언제인지는 몰라. 거의 반쯤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학교 피아노실로 뛰다시피 달려갔지. 그런데 거기 누가 있었는지 알아?
분노에 가득찬 현준의 눈을보며 현지는 그게 누구일지 짐작할 수 있었다.
'지훈이...'
현준은 실소를 머금고 대화를 계속했다.
잘나신 니 남친이었지. 서지훈이. 난 일단 거의 숨듯이 피아노실로 몰래 들어갔어.
저 놈은 뭐지? 뭔데 내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거야, 이런저런 생각이 한 가득이었지.
그런데 그때.
현준이 테이블을 한번 세게 치며 다음말을 토해냈다.
그놈이 리스트의 피아노곡을 연주하는거야. 나만의 것이라고 늘 생각했던 나의 최고 음악가.
리스트를.. 일단 연주를 들었지. 그런데 정말 기분이 엿같았던게 뭔지 알아?
현준이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슬픔.. 애처로움.. 고귀함. 절망. 그속애 피어나는 희망. 몇년동안이나 그렇게
열심히 연주해도 나는 표현할수 없었던 그 감정들을 그놈은 그렇게 몇분동안 토해내고 있었어.
날 위해 존재한다고 믿어왔던 피아노와 나의 리스트. 그 모든게 그 순간만큼은
그놈의 뒤에 서서 나를 조롱하는것처럼 보였지.
현준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현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런 치졸한 질투때문에 어제 그 더러운 짓거리를 나에게 해 버렸으니
이래저래 이해해 달라는거네?
!
현준은 굳게 입을 다문채 현지를 응시했다.
바보같은 사람이구나. 아니 어쩌면 한심한 사람이네. 나는 또 고백한다길래...
뭔가 대단한 이유라는게 있을줄 알았지
입 다물어....
현준이 눈에 핏발을 세우며 현지를 노려봤다.
아니...당신이야 말로 잘 들어. 지훈이의 연주를 몰래 훔쳐듣다 자신과는 비교되는
우월한 실력에 쫄아서는 그래. 결국 실력으로 이길 수 없으니까 어떻게든 다른 방향으로
이겨보겠다고 생각한거 아니야? 최악의 남자네
조롱하듯 말하는 현지를 쏘아보던 현준은 화를 누르고 현지를 응시하며 말했다.
맞아.. 그런거야.. 그래도 이렇게 털어놓으니까 조금은 기분이 낫네
현준을 도발하려던 현지는 자신의 뜻대로 되지않자 조금 당황했다.
뭐 어쨌든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현지가 이해해 줄거라는 생각따윈 하지도 않았어.
난 그저 용서를 구해야겠지.
다시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잇는 현준을 말없이 지켜보는 현지였다.
어제일은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이미 벌어진 일이지만 사과한다.
이후에 신고를 해도 좋고 날 죽을 만큼 때려도 좋아. 다만 나도 어렵게 말을 꺼냈다는걸 알아줘.
그리고 지금 만큼은 내 얘기를 들어줘서 고맙다. 한잔...하자.
그렇개 말하며 술잔을 내미는 현준을 보며 현지의 가슴은 복잡하게 얽혀졌다.
'죽을만큼 미운건 변함없는데...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는것 같기도 하고....'
결국 현준이 내미는 술잔에 맞춰 자신의 술잔을 천천히 들어올리는 현지였다.
정말 미안.... 현지
그렇게 말하는 현준을 살피며 현지는 한껏 풀어진 경계심 사이로 자신의 술잔을 입으로
가져다 댔다. 하지만 그런 현지를 바라보며 냉소를 던지는 현준을 현지는 미쳐
알아차리지 못했다.
'니깟것들이 뭘알아.... 내 분노를... 내 증오를....'
#이성은 본능을 이길 수 없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현지는 어느새 자신을 가눌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런 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현준은 생각했다.
'이럴줄 알았어. 술이 약할거라는건 알고 있었지만 겨우 두잔째에.
현준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현지 옆으로 다가가 현지를 부축하며 말했다.
현지야.. 집에 가자
현지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분위기에 취해 경계심을 너무 쉽게 풀어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아... 아.. 몰라....
혀꼬였네. 큭
현준은 현지를 부축하며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현지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까는 잘도 떠들어대더라? 남은 진심을 담아서 힘들게 고백했는데..
사실 오늘은 순수한 마음 한 가득이었는데 뭐 어쩌겠어. 다 니탓이야.
이젠 내가 위로 받아야 겠다.
현준이 뭐라하든 지금 상황에선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 없는 현지였다.
어.. 현준이 가려고?
한몸처럼 포개진 현준과 현지를 바라보며 주인이 말했다.
네 형. 후배가 많이 취해서요, 오늘 너무 감사했어요
감사는 무슨. 오랜만에 얼굴봐서 좋았다. 그나저나 후배 많이 취한것 같은데 괜찮겠냐?
집.. 바로 옆인데요 뭐.. 다음에 또 올게요
그래.. 그럼 조심히 들어가...
인사를 마친 현준이 현지를 부축하며 바에서 나왔다. 현준이 많은 술집을 놔두고
굳이 이곳으로 현지를 데려온 이유중 하나는 지인이 운영하거나 단순히 분위기가 좋다는
이유에서만은 아니었다. 자신의 집이 이 바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여러모로 치밀한 현준이었다.
그럼 가볼까?
그럴게 말하며 현지와함께 자신의 집으로 향하는 현준이었다.
한편 그 시각 지훈은 학교 피아노 연습실에 홀로 앉아 콩쿨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 역시 안되네. 현지 때문에 신경쓰여. 목소리랑 안색이 너무 안좋았는데.
역시 전화라도?
그렇게 말하며 휴대폰의 다이얼을 누르는 지훈이었다..
뜨르르 뜨르르
통화음이 계속해서 지훈의 휴대전화 너머로 들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끝끝내
현지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역시 자는 모양이네.. 후우.. 그래 귀찮게 하지말고 내일 다시! 후우
그렇게 말하며 다시피아노에 손을 가져가는 지훈이었다. 같은 시간 현준과 현지가
현준의 오피스텔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알아차리지 못할 지훈이었다.
딸깍.
현지를 거의 업다시피하고 자신의 오피스텔로 들어왔을때 현준은 가뿐 숨을 몰아 쉬었다.
휴우. 힘드네. 덕분에 술은 다 깼어. 큭.
거실에 널부러뜨린 현지의 엉덩이를 손으로 툭툭치며 현준이 말했다.
솔직히 얘기하면... 진심을 얘기하면 그래서 조금의 동정이라도 좋으니까
내게 보여줬다면. 난 어쩌면 정말 앞으로 아무일도 하지 않을거라 오늘 아침까지
한순도 못자고 생각했어.
혀를 끌끅 차며 현준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된바에야
현준이 자신의 바지춤에 손을 가져다 대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야말로 널 완전한 내 여자로 만들어 주겠다.
그렇게 말하며 현준은 자신의 옷을 천천히 벗가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