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날... (3/21)

#그 날...

시간이 흘러 지훈의 잡지 인터뷰 날이 밝았다.

지훈은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운데 캠퍼스 벤치에 앉아 콩쿨에 나갈 악보를 유심히 들여다 보며

오늘 있을 생애 첫 잡지 인터뷰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지훈의 학업에 지장을 주기 싫다며 인터뷰 일정을 지훈의 스케쥴에 맞춘 잡지사 '거울'의 배려 덕분으로

인터뷰는 잡지사의 근처 커피숍에서 진행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원래는 '거울'쪽 사람이 인터뷰차 지훈에게

찾아올 계획이었으나 평일은 이런저런 레슨에 눈코뜰새 없이 바쁜걸 먼저 알아챈 잡지사 사람들이 

'연습 충분히 하시고, 여유생기실지 모르는 오후나 밤시간이라도 지훈씨만 괜찮다면 저희는 인터뷰 괜찮아요' 

라며 연락을 준 탓에 천성이 착한 지훈은 괜시리 미안한 마음에 자신이 연습을 마치고 먼저 잡지사 근처로 

찾아갈 것을 제안한 것이었다. 꽤나 귀찮게 되어 버렸지만 지훈의 입장에선 당시의 미안한 마음보다

차라리 몸이 힘든게 낫다는 생각에서 나온 작은 실수였다.

서지후운.... 오늘 인터뷰 날이지?

지훈이 고개를 들어보니 현지가 말을 걸어온다. 

사귄지 4년이 넘어가지만 서로에게 별다른 호칭이나 애칭이랄건 없다. 

그저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는게 전부이건만 지훈은 자신의 이름을 토씨하나 틀리지않고 또박또박 불러주는 

현지의 그것이 좋았다.

어. 맞어. 오늘이네.

준비는 많이했어?

준비랄거까지 뭐 있나? 그냥 넌지시 생각해봤어. 기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뭐가 궁금할까. 

무슨 질문을 할까? 하면서말야

음. 그랬군 좋아 좋아 아주 좋은 태도야. 그렇다면 내가 여자친구의 자격으로 몇가지 물어봐 주지.

좋아.. 인터뷰까지 시간 좀 남았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현지는 자세를 고쳐 잡으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잡지'거울'의 인턴기자 김현지입니다. 먼저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인물이 참 훤하시군요. 미남이세요

아. 감사드립니다. 기자님도 참 예쁘세요

어머. 그런말 많이 들어요. 호호호

웃지마 뭐가 웃기다고. 사실을 얘기했을 뿐인데

현지가 눈을 부릅뜨며 말하는탓에 지훈은 잠시 흠칫한다.

너무 유명하신데다가 잘 생기기까지 하셨으니. 당연히 여자친구분은 있으시겠죠?

현지의 기습적인 질문에 잠시 곤란해하는 지훈이었다. 이럴땐 거짓하나 드러나지않는 자신의 얼굴이

조금은 원망스러웠다.

왜 대답안해?

그게.... 그러니까 있다고 해야하나 없다고 해야하나

퍽.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현지의 주먹이 지훈의 가슴을 파고 든다.

헉. 콜록콜록. 아 미안 기분 상했어? 별다른 의미는 아니야. 생각못한 질문이 나와버려서.

됐어. 쳇 내가 챙피해? 그냥 여자친구 있다고 하면 될걸. 기분 나빠 서지훈. 가서 인터뷰나 열심히 하셔

뾰루퉁해져서 일어나는 현지의 손목을 간신히 낚아채고 지훈아 빌다시피 말했다.

아니야. 부끄럽다니 당치도않아. 그런말 하지마. 말했잖아.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 나와서 당황했다고. 

너도 알다시피 국내 클래식 잡지 중에선 꽤 진지한 축에 속하는 잡지잖아. 당연히 음악에 대한 질문만 하겠거니 

생각하고 그것들만 리스트 만들어서 생각하고 연습했는데. 느닷없이 니 입에서 여친이라니. 당황할만 하잖아.

됐다고

화가풀리지 않은 듯한 현지의 태도에 지훈은 더욱더 애가타며 말했다.

왜 니가 부끄럽겠어? 고등학교때부터 내옆에 있어준 내 첫사랑인데. 다른 무엇과도 바꿀수없는 

맑은 미소와 은은한 향기가 배인 긴 생머리. 나만 사랑한다고 말하는 네 입술까지. 

단 한번도 너를 부끄럽다고 생각한적 없어. 진심이야. 현지야.

다급해서 말했지만 지훈이 생각해도 낯간지럽고 허술한 멘트였다. 

하지만 꼭 잡고 있는 현지의 손이 떨리는 걸 느꼈을 쯤 현지가 고개를 돌려 지훈을 돌아봤다.

푸흡

현지가 웃고있었다. 내심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죽고싶을 만큼의 부끄러움이 지훈의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그게 뭐야 서지훈.. ㅋㅋㅋ 아 웃겨. 장난좀 쳐봤더니 금새 당황해서는. 

감정표현에 필터링이 안되시는 우리 지훈씨. 어쩌면 좋을까?

현지의 놀림에 잔뜩 열이난 지훈이 무언가를 입밖으로 꺼낼 참이였을 때였다.

지훈이 어떻게 할 새도 없이 현지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에 와 닿았다. 늘 하는 키스. 

하지만 이번엔 뭔가 느낌이 다른..... 그런 느낌에 지훈이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현지야...너....

지훈이 당황하며 말을 내뱉자 현지가 말했다.

인터뷰 잘 하고 오라고 여자친구가 선물 드리는 거에요. 기운내시고 멋진 인터뷰 하고와.. 

잡지 나오면 제일 먼저 달려가 사야겠다

지훈은 다시한번 거짓을 띄울수 없는 자신의 얼굴에 행복감이라는 단어로는 이내 다 표현할 수 없는 

벅찬 감정을 드러낸채 현지를 껴안았다.

고마워. 잘하고 올게. 제일 먼저 사서 보겠다는 그말 잊지마.

물론. 아 향기좋다

지훈의 몸에 은은하게 박힌 향수 향기를 느끼며 현지가 말을 이었다.

아참 그나저나 지훈아. 나 못한 얘기가 있는데

어, 뭔데?

친척분께서 상을 당하셔서 부모님이 지방에 내려가셨거든, 오늘. 

아까 연습실에서 연습하다가 잠깐 쉬는 동안 부모님께서 연락 주셨어. 그래서 오늘은 혼자 집에 있어야 될 것 같은데.

나 너네 집에 가 있으면 안돼? 너무 갑작스럽지?

응? 갑작스럽긴. 근데 나도 인터뷰가 밤 늦게 잡혀 있어서 새벽깨나 들어갈텐데. 괜찮겠어?

물론입니다. 재워만 주신다면 밥이라도 해놓고 오실때까지 눈뜨고 기다리겠어요.

풉. 그럴 필요는 없는데

지훈과 현지가 사귄지 4년. 대학에 진학하면서 부모님께서 사정상 외국으로 떠나신 이후엔 

지훈은 늘 한국에서 혼자 지나고 있었다. 그럴때마다 현지가 가끔 부모님의 허락을 맡고 지훈의 집에 놀러와서 

같이 놀거나 쉬거나 하면서 했기 때문에 지훈 입장에선 현지가 집에 온다는 것에 대한 별다른 거리낌은 없었다. 

사실 솔직히 말하면 4년이라는 시간동안 키스도 하고 많은 스킨쉽을 나눴지만 그 이상의 진척은 없었다.

섹스에 대해 딱히 두렵다거나 성욕이 생기지 않는다거나 하는건 결단코 아니지만 현지와 나누는 이런 관계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있다고 생각하는 지훈이였다. 오히려 이렇게 조바심 내지 않는 것이 현지와의 유대감을 

조금더 나은 방향으로 형성 시킬 것이라 확신하는 지훈이었다.

뭐 암튼 인터뷰 끝나자마자 집으로 달려갈게. 몇시부터 가 있을거야?

음. 난 오늘 무용과 수업 6시에 끝나니까 바로 갈래. 니네집 남자혼자 사는것 치곤 근사하단 말이지!

말대로 남자 혼자사는데 근사해 봤자지. 암튼 이따봐 현지야. 연락할게

넵 남자친구님

밝은 태양이 내리쬐는 가운데 23살의 청춘들은 서로 같은 생각을 공유하며 그렇게 웃으며 인사를 나눈채 

조금씩 멀어졌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벤치 근처에서 모습을 감추고 있던 자그마한 그림자가 조금씩 길어지며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낭군님은 인터뷰가시고 새벽 늦게 돌아오시고. 우리 현지님은 혼자인채로 6시부터 동정새끼님 집에 계시는거구나. 

생각보다 기회가 빨리 왔어.

현수가 기분나쁜 웃음을 보이며 생각했다.

'딱히 훔쳐들을 생각은 없었다만, 이렇게 우연히. 훗. 하늘도 돕는건가? 

그나저나 누가 동정커플 아니랄까봐 하는짓도 귀엽게 노는구나. 뭐 그럴다면야. 가르쳐 드려야지. 그게 뭐든. 

나중에 나에게 고마워할 때가 있을거야 동정놈아'

'서지훈이 집이 아마 거기였지? 저번에 악보 가져다 주는걸 빌미로 이미 한번 가봤어. 

그럼 나도 슬슬 준비를 해볼까?'

알수없는 말을 지껄인채 현수도 발걸음을 옮겼다.

저녁이 채 오지 않은 캠퍼스를 긴 머리가 휘날리며 버버리 위켄을 잔뜩 뿌려대는 미남을 사람들이 본다면 

꽤나 매력적으로 바라볼 테지만, 지금 그런 현준이 마냥 멋있어 보이지 않는 건 왜일까. 되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그의 그림자에 새겨지는것은 또 왜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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