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준 (2/21)

#현준

지훈은 학교 연습실에 혼자 남아 생각했다. 10대시절엔 단순히 외로워서 마음을 나눌 친구가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진학한 고등학교에선 정말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고 현지를 만날 수 있었다. 

만약 존재한다면, 간절했던 자신의 소원에 크게 화답해준 신에게 마냥 감사하고 싶었다.

이전까진 자신을 채워줄 수 있는건, 그리고 외로움을 어루어 만져 줄 수있는건 피아노밖에 없을거라고 믿고있었다. 

하지만 이젠 피아노만으론 부족하다는것을 느껴버린 지훈이었다. 피아노를 사랑한다. 내 인생의 모든것이라고 해도 좋다. 

하지만 이젠 그만큼 현지를 사랑한다. 이제껏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테지만 피아노에 얹은 손을 거둘 수 없을 것이고 

또한 바로 그만큼 지금 곁에 있는 현지의 손을 놓을 수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놓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현지가 좋아하는 블루셔츠, 헤어스타일, 그리고 그녀가 사랑하는 향수까지. 그녀가 시키거나 바랬던 일이 아님에도 

고스란히 현지의 취향에 맞춰진 지훈이었다. 단순히 그녀를 기쁘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에서 지난 시간 

지훈이 노력해온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크다할 수 있는 흔적이었다. 이미 현지는 지훈에게 있어 

절대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여. 서지훈이 연습안하고 뭐해?

바로 그 순간이었다. 현지 생각으로 반쯤 넋이 나가있던 지훈을 누군가가 돌려세운것은.

아 현준선배. 안녕하세요?

일어나서 뒤를 돌아보니 같은 과 선배인 현준이 서 있다. 지훈보다 3살이나 많은 선배인데 격식을 따지지 않고 

지훈을 대해 지훈이 편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였다.

연습하러 오셨어요? 자리 비켜드릴게요

지훈이 피아노 앞에서 일어나며 현준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또... 또.... 분위기 어색하게 만들기는 ㅋㅋ 임마 언제 내가 학교에서 피아노 연습하는거 봤냐? 

뭐 대학 들어올때는 좀 쳤었는데, 막상 들어오니깐 너같은 천재들 틈바구니에서 숨쉬는 것도 어렵다 짜샤. 

에이 형. 천재라니요. 그런 말씀 마세요

현준의 놀림에 귀까지 빨개지는 지훈이었다. 늘 직설적이지만 따뜻한 표현이 듣기좋은 형이다.

사실 지금에야 현준과의 사이가 많이 편해진 것이지만, 현준을 처음 만났을 땐 지훈은 

딱히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하얀 피부색에 미남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얼굴, 그리고 어딘가 기품있어 보이는

품새까지 사실 첫인상 자체는 매우 훌륭한 선배지만, 우연한 기회에 같은과 여자 선배들에게 들은 선배의

나쁜 소문이나(주로 여자에 관련된) 유독 자신을 대하는 말투가 퉁명스러운 현준을 경계할 수 밖에 없었던

지훈이었다.

물론 지금에야 적응이 되어 그것이 현준의 매력이라고 생각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현준과 관련된 소문이야 

자신이 확인한것만 믿는 지훈의 성격 탓에 이미 기억 저편으로 넘긴지 오래였다.

또 얼굴 빨개지기는. ㅋ 하여튼 우리 지훈이 놀려먹는것만큼 재미있는 일도 없어요 요즘. 난 신경쓰지마. 

아까 잠깐 연습실에 왔을때 놓고간 악보 찾으러 왔거든. 아 여기 있다

그렇게 말하며 악보쪽으로 손을 내미는 현준을 바라봤을 때 지훈은 흠짓 놀라며 말했다.

어? 그건 프란츠 리스트?... 사랑의 꿈 녹턴 3번

응 그냥 가끔씩 치는 곡이야. 왜 니가 좋아하는 리스트 내가 연주하니까 꼽냐? ㅋㅋ

아니...아니요. 그런게 아니라 조금은 놀라서요. 원래 기교파 싫어하시잖아요 형은.

의아한 표정으로 지훈이 말했다.

뭐 싫어하진 않아. 내 실력이 리스트 발끝에도 못 미치니까 문제지 ㅋ 그래도 이 곡은 가끔 머리 아플때 연주해. 

4학년이나 됐는데도 여지껏 박자도 절고, 또 늙어서 악보 보는데 눈도 침침하고 ㅋㅋㅋ

형 늙다니요, 농담이 지나치세요

현준의 말을 듣고 있자하니 묘한 공감대가 형성되는 지훈이였다. 기뻤다. 나를 거리낌없이 대해주는 학교 선배가 

나와 같은 음악가를 좋아하고 있다니.

기뻐요...

엥? 뭐가?

현준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모르겠어요. 예전에도 이런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냥 기뻐요. 형이랑 통할 수 있는 다리 같은게 있다는게. 

사실 그 전까진 형이랑 친하긴 하지만 음악적으로 거리감 같은게 느껴졌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형이 던진 

한 마디에 그런 거리감이 놀랍게도 사라졌어요

지훈이 말했다.

나 참. 단순한놈. 그래 좋아하는 음악가나 취향이 같은걸로 무조건 오케이 인거야? 네놈은? 

푸하 하여튼 우리 지훈이는 여러모로 대단해요. 여러번 놀란다.

현준이 환하게 웃으면서 지훈에게 말했다. 참 좋은 선배라고 생각했다. 연습실 안으로 들어어는 노을빛이 

그의 얼굴과, 또한 남자치곤 길게 기른 찰랑한 머리에 물들어서 오늘따라 우독 더 근사하고 멋져 보였다. 

뭐야... 너 나한테 반했냐?

예? 무슨 그런....

넋놓고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날 보고 있길래. 하여간 재미있는 놈이야 넌 ㅋㅋ 아낀다. 

아참. 지훈아 너 혹시 향수 쓰냐?

네? 네 쓰고 있어요 향수

지훈이 의아한 표정으로 현준에게 묻는다.

아 놀랄건 없고, 가끔씩 너랑 이렇게 대화할때면 나는 은은한 향기가 좋아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궁금해서 물어봤다. 

아 그러셨구나.. 예 버버리 위켄드(weekend) 쓰고 있어요. 현지가 꽤나 좋아하거든요

에? 완전 애처가시네. 우리 지훈이. 현지씨가 그거 안뿌리면 안아주지 않겠데?

혀~~엉 무슨....

ㅋㅋㅋ 짜식 귀까지 빨게져서는 당황하는 꼴이라니. 미안미안.

암튼 너무 늦게까지 연습하진 말고.... 예쁜 현지씨 걱정하니까. 그럼 간다

네 형 들어가세요

잠시동안 나눈 현준과의 대화가 기분 좋게 다가오는 지훈이었다. 오후에 만난 현지의 기습 키스에 또

저녁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현준 선배와의 만남. 유달리 기분 좋은 하루였다고 생각하며 지훈은 

다시 피아노앞에 앉아 악보집을 폈다. 왠지 연주가 더 잘될것 같다 느끼며.

'리스트를 좋아하냐고?'

벌써 어둠이 거웃거웃한 밤을 따라 걸으며 자신의 집 앞에 다다른 현준은 아까 지훈과 나눈 대화를 곱씹었다.

리스트는 말야. 내가 너 따위 녀석보다 훨씬 좋아한다고. 고등학교 때부터 속주좀 지랄맞게 한다고 

뭐라도 된줄 아는 모양인데. 리스트는 속주만이 다가 아니야. 알고있어?

벌써 2년이다. 너를 알게된 지도. 사람 미워할줄도 모르는 하여튼 더럽게 둔해 빠진 새끼.

'잘난 얼굴... 그 낯빛. 밟아줄게 기다려. 음악으로는 상대가 안될지도 모르지. 

내가 어떻게 너같은 천재를 이기겠어?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다른 걸로도 얼마든지 충분히 널 밟을 수 있어. 이 동정새끼야.'

그렇게 읖조리는 현준의 안색이 무서울 정도로 차갑게 변해갔다.

그나저나 버버리 위켄이라 했던가? 참 향수도 거지같은거 쓰네. 내 취향은 아니긴 한데 말야. 

뭐 너의 그녀가 원한다면~~~

그렇게 알수없는 말을 되뇌이며 현준의 그림자는 차츰 어둠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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