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트의 몰락
#대학 3학년
무슨 일이든 새로 시작한다는 것이 사람에게 가져다 주는 상쾌함, 혹은 기대하게 만드는 것은
결코 기분 나쁜 종류의 것이 아니다.
지훈이 대학에 들어온지도 벌써 횟수로 3년째. 그렇다. 벌써 그렇게 대학에서의 3번째 봄을
맞고 있는 지훈이었다.
지훈은 고등학교의 명성을 대학에서까지 이어가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 나이때 학생들이
받는 조명(조명이라고까지 표현할 수 없는 미미한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혹은 관심에
비추어 본다면 이제 막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한 지훈에게 쏟아지는 그것은 꽤나
이례적일 정도로 강렬한 것이었다. 어떤 면에선 하나의 현상, 신드롬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었다.
평단에서 이런 젊은 연주학도에게 관심을 갖는건 당연해 보였고 지훈역시 자신에게 쏟아지는
갈채나 기대감이 싫지 않았다. 하지만 지훈은 이런 자신으로 향하는 세상의 관심이나 기대감에
마냥 안주하거나 자만하지 않고 스스로를 채근질 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았다. 물론 지훈이 그렇게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것에는 지훈의 곁을 2년간, 아니 지난 4년간 지켜준 현지의 역할도
한 몫 했다.
사실 지훈이야 대학교에 진학할 당시에도 국내 음악인들로부터 찬사와 기대를 한몸에 받는
엄청난 스타였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보건데 어쩌면 더 놀라운건 지훈보단 현지 쪽에 가까웠다.
지훈을 따라 명문 대학에 진학한건 좋은 일이지만, 고등학교 시절과 지금을 비교하면
현지의 위상이랄까, 그런것에는 분명 극명한 차이가 있었다.
고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대 국내 최고 수준의 명문 예술고등학교 무용과에 진학했다고 해도
고등학교 시절 현지의 무용 실력이나 발전 가능성은 동급생들에 비해 높은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당시의 현지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정말 뛰어난 동기생들과 같이 연습하고 생활하다 보니 자신의 한계점이 너무나
극명하게 드러났다. 너무 심하게 비교도 되고, 자신의 지금 실력이나 지난날의 선택에 대한 회의감과
패배감에 빠져 있던것이 고등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그렇게 힘겨워 하며 집으로 가던 그 날, 우연히 지금
자신의 곁에 있는 지훈을 보게 되었던 현지였다.
서지훈.
자신이 다니고 있는 고등학교 입학 동기일뿐만 아니라 음악계가 주목하고 있는 피아노의 신성.
어린맘에 그런 천재는 연습같은건 하지 않아도 그만일거라는 바보같은 생각도 했었다.
또한 이따금 그를 보며 그를 시기와 질투의 대상으로 바라보기도 하곤 했다.
하지만 그 날 이후로도 항상 같은 시간에 매번 연습실에 자리를 잡고 똑같은 곡(리스트의 그것)을 미친듯이
연습하고 있는 지훈을 보고 현지는 자신의 생각을 차츰 고쳐먹게 되었다. 아니었구나.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구나. 그도 매일 나처럼 연습하고 노력하고 있다. 아니 사실은 나에게 비하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정말 많은 연습량을 소화해 내고 있다. 이런 생각에 현지는 복잡했던 머릿속을
정리할 수 있었고 자신의 전공인 무용에 무서울 정도로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자신을 조금은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다시한번 가을의 서늘한 바람이 지훈의 연주와 함께 자신에게 다가왔을때 꽤나 충동적으로
먼저 지훈에게 다가갔고 그 순간부터 바로 지금까지 두 사람은 지난 4년이라는 시간동안 늘 함께였다.
현지는 생각했다. 그때 용기를 낸건 자신의 그리 길지 않은 인생을 다시 돌아보아도 최고의 순간이였다고.
덕분에 자신은 기대하지 않았던, 아니 기대조차 못했던 장학금까지 받으며 국내 최고 명문대에서 자신이 하고 싶었던
무용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지훈과 연인이 되어 이렇게 행복할 수 있지 않은가?
현지가 지훈에게 보내는 감정이란 고마움과 사랑을 넘어서는 꽤나 독특한 것이었다.
연습은 잘 되가?
현지가 지훈에게 말을 걸어왔다.
국제 콩쿨? 뭐 연습은 늘 많이 해 두었으니까. 걱정은 안해
역시 내 남자친구답네. 자신감 충만한건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다른 누군가가 했다면 조금은 빈정어릴 듯한 말이 현지의 입에서 흘러 나오자 되려 기분이 좋아지는 지훈이었다.
그나저나 음악잡지 '거울' 인터뷰는 어떻게 하기로 했어?
현지가 지훈을 보며 말했다.
아 그거? 잊고 있었어. 아마 다음주였던걸로 기억하는데. 원래 그런거 관심없었는데 이번엔 한번 해 볼 생각이야.
우와 정말? 잘됐다. 내심 하길 바랬는데. 되게 유명한 잡지잖아 그거.
음. 이것저것 심도있는 질문을 할건가봐. 추구하는 음악은 무엇인지. 누구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지. 앞으로의 계획
뭐 그런것들 물어볼건가봐. 궁금한게 많은 모양이야
조금은 무미건조한 말투로 대답하는 지훈이었다.
쳇. 부럽다. 남자친구는 완전 잘 나가는데 난 이게 뭐라니? 괜히 질투만 나네.
입이 반쯤은 나와있는 현지를 보며 지훈이 말했다.
그런말하지마. 우리가 걷고 있는 이 캠퍼스는 아무나 들어온다니? 그리고 이학교 무용과는 또 아무나 들어온대?
난 그런 무용과에서 장학금까지 받고 다니는 내 여자친구가 너무 자랑스러운걸
현지는 진심이 깃든 지훈의 말이 너무 진실되고 고맙게 느껴졌다.
뭐...뭐야. 괜히 부끄러워지게. 에이 우리 남자친구 예쁜일 했으니까 상줘야 겠다. 쪽
현지의 기습 키스에 지훈의 볼은 저물어가는 석양과 함께 붉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