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호텔 5 (5/6)

러브호텔 5

열세번째 이야기 : 어느 상경 소녀의 이야기

연이어 터지는 재벌 그룹들의 부도와 수출둔화, 경제 사정의 악화는 서비스 업계에도 여지없이 그 영향을 미쳤다. 모텔 불야성도 예외는 아니어서

하루에도 몇 바퀴씩 돌리던 객실이 이제는 손님이 차지 않는 날이 더 많을 정도로 썰렁해졌다.

"큰일이군. 손님이 줄어서..."

짠돌이 사장은 종업원들을 모아 놓고 혀를 끌끌 차며 이번 달부터 월급을 20% 삭감한다는 발표를 했다.

"젠장, 당장 이 짓을 때려 치든지 해야지. 더러워서..."

성일은 모처럼 끊었던 담배에 다시 불을 붙이며 투덜거렸다. 정치권의 몇몇 놈들이 저지른 대형 비리의 불똥이 이렇게 하급 서민들에게까지 영향이

미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한 일이다. 정말 생각할수록 열받는 일이었다.

일요일 하오의 여관은 절집처럼 한산했다. 술집이나 유흥가가 많은 도심의 여관일수록 일요일엔 손님이 뜸한 편이었다. 일요일엔 사장도 일찌감치

집으로 들어가는 편이어서 성일은 꾸벅 꾸벅 졸면서 프런트를 지키고 있었다. 이런 날은 가뭄에 콩나듯 들어서서 단잠을 깨우는 손님들이 오히려

귀찮은 존재 였다.

그녀 유미가 모텔의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세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유니폼을 아무렇게나 구긴 채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서 눈을 감고 있던

성일은 본능적으로 눈을 떴다.

"어서 오세요."

잠결이라 목이 잠겼던 성일은 재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저... 손님이 아니구요..."

어색한 동작으로 현관 문을 열고 들어선 그녀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한마디 질문을 던져 놓고 성일은 직업적으로 재빠르게 그녀를 살폈다. 그녀의 나이는 한 스물 두어살쯤 되었을까. 얼굴은 제법 반반한 편이었으나 긴

머리는 싸구려 플라스틱 핀으로 등 뒤로 넘겨져 고정되어 있었고 검정색 청바지에 오렌지색 마이의 균형이 어딘지 모르게 어색함을 풍기고 있었다.

옆구리에는 옷이 들었는지 제법 큼직한 가방 하나가 끌리듯 들려 있었다.

"저어.. 드릴 말씀이 있거든요."

한참 만에야 결심한 듯 그녀는 성일에게 말했다.

"네, 듣고 있으니 말씀을 해 보세요."

조선족 교포 같기도 했으나 억양을 들어보니 충청도 사투리 냄새가 묻어 있었다. 잔뜩 호기심이 인 성일은 프런트 데스크 옆에 마련된 소파에 그녀를

앉히고는 재차 물었다.

"저... 이곳에서 일을 하고 싶거든요."

"일을? 무슨 일을요?"

그녀의 뜻밖의 말에 성일은 의아한 생각이 들어 다시 물었다.

"저.. 이곳에서 밤에 남자들이 오면 손님을 받고 싶어요.. 괜찮으시다면..."

"옛?..."

성일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얼굴도 반반하고 나이도 아직 어린 그녀의 입에서 이게 웬 날벼락 같은 말인가.

"다시 말씀을 해 보세요.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안 가는군요."

"예.. 친구가 그러는데.. 이런 곳에서 일을 하면 돈을 많이 벌수 있다고 해서요..."

그녀의 말인즉, 옛날에 고등학교때 친구 중에 가출해서 서울로 간 친구가 있었다는 것이다. 친구는 당시 호텔이나 모텔 등지를 돌며 콜걸 생활을

했었는데 돈을 많이 번다고 그녀에게 자랑을 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시골 소읍에서 한두해 점원 생활을 하다가 돈이 모아지지

않아서 무작정 서울로 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고향에 남겨진 늙은 부모들과 어린 동생들을 동정하듯 내 비췄다.

"아니 그런데 아가씨가 어떻게 겁도 없이 그런 일을 선뜻 하려고 합니까?"

"일이 어떤 일인지는 친구에게 들어서 대강은 알고 있어요. 저희 부모는 늦게 만나셔서 세 남매를 낳으셨는데 몇해 전부터 아버지가 병으로 쓰러

지져서 집안 꼴이 말이 아닙니다. 얼마간 점원 노릇을 했지만 그것으로 두 동생들과 아버지 약값을 치르기엔 턱없이 부족한 돈이지요. 저도 이일이

나쁜 일이란 건 알지만 어쩔 수가 없잖아요."

"사정은 딱하지만 꼭 그런 일 아니어도 다 살아갈 방도가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모텔이나 여관에서 몸을 팔 수는 없어요. 친구가 과거에 그런

일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다 없어졌지요. 못 믿겠다면 친구에게 연락을 해 보세요."

"작년부터 연락이 끊겼어요. 그러니까 저도 무작정 이리로 찾아왔지요."

"그러지 말고 잘 생각을 해 봅시다. 지금의 섣부른 판단이 이다음 엄청난 후회를 부를 수도 있습니다. 본래 그 세계가 한번 발을 들이밀면

여간해서 빠져 나오기가 어렵거든요. 돈을 많이 번다고요. 그건 극히 일부분의 일이에요. 금방 몸을 망치기 일수고 번 돈도 쉽게 써 버리거든요."

가뜩이나 남을 이용해 먹으려는 사람들이 판치는 세상에 성일은 그녀가 그래도 자기에게 걸려든 것이 매우 대행이란 생각을 했다. 비록 모텔의 벨

보이 생활을 하고는 있었지만 그에게는 최소한의 양심이 살아 있었던 것이다. 서울이 멋모르고 순진한 처녀 하나 버리기에 얼마나 쉬운 동네였던가.

"이봐요 아가씨. 다시는 그런 생각 갖지 마세요.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정말 모르시는군요. 밖에 나가서 그런 얘기 잘못 꺼내면 어떻게 되는지

압니까. 돈 많이 준다고 꼬여서 일본이나 홍콩으로 순진한 처녀들 팔아 넘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요. 그런 곳으로 잘못 발 들여놓으면 인생

끝장입니다."

일이 끝난 저녁, 성일은 그녀를 근처의 식당으로 데려가 식사까지 대접하며 회유의 말을 계속했다. 성일의 설득이 효과가 있었는지 한참 만에야

그녀는 성일의 말을 듣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모텔 불야성에 그녀를 재운 성일은 다음날 그녀를 선배가 일하는 레스토랑으로 데려가 취직을 시켜

주었다.

"숙식이 되니까 참고 일하세요. 서울은 그런 대로 임금이 지방보다는 낳을 겁니다. 시간외 근무를 하면 월급이 꽤 되구요. 또 선배가 있으니까 잘

보살펴 주실 거고... 어려운 일 있으면 언제라도 연락을 하세요."

"고맙습니다."

빨간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현관가지 성일을 배웅하며 고맙다고 연신 고개를 숙였다.

"고맙기는요. 직업이 그렇다보니 순진한 아가씨들이 한순간의 잘못으로 잘못되는 것을 많이 봐왔습니다. 저는 최소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성일의 흡족한 기분은 보름을 넘기지 못하고 무참히 깨어졌다. 그녀 유미를 소개시켜주었던 레스토랑의 지배인인 선배로부터 전화가 왔던

것이다.

"야, 어떻게 된 거야?"

"예. 뭐가 잘못되기라도..."

"임마. 사람을 소개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그애 일주일째 연락도 없이 결근이다. 짐도 다 가지고 갔어."

선배는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무슨 애가 그래? 그만 두려면 당당하게 말을 하던가. 슬쩍 결근을 하면 일은 누가 하냐구?"

세상은 온통 씁쓸한 일 뿐이었다. 성일는 무엇보다 그녀에게 정성을 기울였던 터라 마음이 아팠다. 그녀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몸을 팔고 싶다고

겁없이 모텔 문을 밀치고 들어서던 당돌함으로 또 어딘가의 문을 두드렸으리라. 그렇게 쓸쓸한 기억으로 성일의 뇌리 속에서 유미의 이야기는

잊혀져갔다.

그러던 한달 후,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성일은 무슨 우연인지 그녀를 다시 만났다. 친구네 집엘 갔다가 돌아오던 저녁 길 신림역 부근이었다.

내리는 비를 피해 잠시 근처의 건물 안으로 들어갔던 그는 마침 출근을 위해서 현관으로 들어서는 그녀를 보았던 것이다. 새련된 머리 모양이며 짖은

화장, 짧은 미니스커트의 그녀는 한달 전보다는 몰라보게 변해 있었지만 유미 그녀가 틀림없었다. 놀란 성일이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먼저

성일을 알아본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종종걸음으로 지하로 달려 내려갔다. 비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성일은 무표정하게 그녀가 사라진 지하의

현관 입구에 쓰여진 간판을 바라보았다.

[파라다이스 룸. 비지니스 클럽] 예약 환영.

삼삼 오오 저녁 출근을 하는 젊은 아가씨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섰던 성일은 쓸쓸히 빗속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열네번째이야기 : 순결을 잃는 데이트 코스

다음은 직장 생활 중에 흔하게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이다. 여성들이 조금만 더 성에 대한 관념이 강하다면 얼마든지 피해 갈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사실은 그것도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닌 것 갔다. 문제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혹은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당하는 일이기에 그만큼

여성들이 무방비 상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여성들이 조금만 눈치가 빠르다면 얼마든지 피해 갈 수 있는 상황들이다. 살아가는데 너무

착하고 순진해도 문제가 되는 것이 요즘 세상인가 보다.

"자 미스 김, 한잔 더 받아. 사회생활 하려면 다 술도 마실줄 알아야 해요. 너무 순진해도 숙맥 소리를 듣는 다구."

모처럼 있는 회사 총무부의 회식 자리 였다. 일곱 명의 총무부 여직원들과 함께 자비를 털어 회식 자리를 마련한 이과장은 유독 미자에게 관심을

나타내며 술을 권했다.

"과장님도... 우리도 술 좀 주세요. 미자만 직원 인가요."

총무부 언니 격인 미스 신이 그런 과장을 보며 한마디를 던졌다.

"아, 그야 물론이지. 다들 술을 잘하는데 우리 미스 김만 아직 술을 입에도 못 대니 그러지."

"흥, 다 처음엔 그런다구요. 조금만 있어 봐요. 미자도 우리 못지 않을 걸요."

"하하.. 그럴까?"

"좋아요. 그러면 우리 다같이 건배할까요. 총무부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위하여!"

자정이 다 되어서야 일행은 술집 문을 나왔다. 저녁을 겸한 술자리 였는지라 많이 마신 술들은 아니었지만 미자는 처음으로 여러 잔의 맥주를 받아

마신 지라 기분이 묘하게 취해 왔다.

"미자 괜찮니?"

택시를 잡으려고 늘어서 있는 가운데 미스 신이 물었다.

"괜찮아요."

미자는 짐짓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괜찮긴. 얼굴이 발그스름한데 뭘?"

그때 이과장이 자신의 승용차를 몰고 일행 앞으로 다가왔다.

"어머, 과장님. 괜찮으시겠어요."

"그럼, 겨우 맥주 두어잔 했을 뿐인데. 미스 김과 차에 타라구. 내 오늘은 특별히 두 사람을 집까지 바래다 줄 테니?"

"후, 그러시다 사모님께 혼나시면 저희는 책임 못집니다요?"

"후후, 별걱정을.. 미스 신은 괜찮은데 미스 김이 취한 것 같아서 말이야."

"오늘따라 과장님이 멋져 보이시네. 웬일로 이런 선심을 다 쓰십니까?"

"선심은 무슨. 자기 부하 직원들 위하는 것도 선심인가. 다 일 잘하라고 하는 짓이지."

이과장은 서른 중반이 조금 넘은 나이였지만 일찍 능력을 인정받아 과장으로 진급을 했고 회사의 신임도 두터운 편이었다. 자기 휘하의 여직원들에게도

철저하게 일을 시키는 완벽 주의자였기에 미스 신도 그의 이런 면모는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참 미스 김은 집이 어디라고 했지?"

"사당 동입니다."

"마침 잘되었군. 미스 신이 방배동 이니까 방향도 같은 곳이네."

"호호 그러시다가 사모님이 문 안 열어 주시는 거 아니에요"

"안 열어 주면 말지. 내가 갈 때가 없을 줄 알아."

잠시 후 방배역 부근에 미스 신을 내려놓은 이과장은 역을 우회전하여 사당동 쪽으로 차를 돌렸다.

"죄송해요. 과장님. 택시 타고 가도 되는데..."

미자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괜찮아. 별일도 아닌데 뭘. 참 미스 김은 혼자 사나 보지?"

"예."

"후. 외롭겠는걸. 그래, 서울 생활이 처음엔 누구나 다 그런거야. 부지런히 벌어서 어서 시집가야지."

사무실에서는 무뚝뚝하고 사무적인 이과장이었지만 마음만은 따스한 남자라고 미자는 생각했다. 더구나 다른 여직원들 중에서도 미자에게 만은 친

오빠처럼 잘 대해 주는 그였다.

"기분도 그런데 우리 이왕 차탄 김에 드라이브나 할까?"

사당동 큰길 쪽으로 차가 다다랐을 무렵, 이과장은 짐짓 미스김을 처다 보며 물었다.

"밤에 한강을 끼고 달리는 것도 기분 전환엔 최고라구. 어때?"

미자가 잠시 머뭇거리며 대답을 미루는 눈치를 보이자 이과장은 다음 말을 막듯이 한마디를 더 던지며 차를 강변 쪽으로 향했다.

"늦었는데 괜찮으시겠어요?"

평소에도 차를 타고 한번쯤은 서울의 야경 속으로 달리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기에 미자는 딱히 거절의 말을 못하고 머뭇거렸다. 더구나 그는

가정이 있는 유부남이고 직장 상사 였기에 다른 뜻이 있으리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 동안 보여진 이과장의 꾸밈없고 성실한

인간성이 그녀로 하여금 그를 믿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잘못될 것도 없지. 미스 김도 조금은 갑갑할 테고 나도 워낙 회사 일에 스트레스가 쌓여서 말이야. 한번쯤 이렇게 기분 전환하는 것도 나쁠 것

없지."

이과장의 제의가 별다른 뜻 없는 순수한 제의 였기에 미자는 그를 따르기로 했다. 담배 하나는 꺼내 문 그는 능숙한 솜씨로 차를 올림픽 대로로

진입시켜 강변을 끼고 공항 방면으로 내달렸다.

"어때? 기분 좋지 않아?"

"예, 좋아요."

이과장의 물음에 미자는 웃으며 대답을 했다. 도심을 벗어나 달리는 차 안에서 바라보는 야경은 아름답기 그지없었고 기분도 상쾌했다. 삼사십분 남짓

차를 달려 다다른 곳은 강화도 였다. 섬 안으로 차를 몰아 해안을 끼고 얼마를 더 달리자 언덕 위에 동화의 나라에서나 보았음직한 아름다운 모습의

통나무집 카페 하나가 나타났다.

"자, 내리시지요. 우리 여기까지 왔는데 저기 들러서 차나 한잔하고 가지?"

"어머. 정말 집이 예쁘군요."

"허허. 미스 김은 이런 곳이 처음 인가 보네."

"네."

차나 한잔 마시자는 제의에 미자는 별 의심 없이 그를 따라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이층으로 된 카페 안은 통기타 가수의 잔잔한 라이브 음악이

흐르고 있는 가운데 수십명의 연인들이 앉아서 저마다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다. 처음으로 이런 곳을 들른 미자에겐 모든 것이 별천지처럼

느껴졌다. 차를 마시자던 이과장은 처음과는 다르게 종업원이 오자 맥주를 시켰다. 미자는 차를 마시겠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주위 대부분의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기에 분위기에 압도되어 묻지를 못하고 그가 하는 대로 따랐다. 오히려 잘못하면 촌스럽게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운전은 어떻게 하죠?"

술이 오자 건배를 하자는 그를 바라보며 미자는 걱정스레 물었다.

"이봐. 미스 김. 지금이 몇 신줄 알아?"0

이과장은 약간은 바보 스럽다는 투로 미스 김을 처다 보았다.

"... ..."

"그래, 지금은 새벽 한시라구. 한시가 넘었는데 이곳에는 버젓이 장사를 하고 또 지금이 가장 손님이 많은 시간이야. 그건 뭘 뜻하는지 알아.

이런 곳은 정부에서 일부러 풀어 주는 곳이야. 이를 테면 관광 특구와 같은 곳이지. 조금 마신다고 운전에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단속을 하는

것도 아니니까 걱정 말고 마시자구. 다른 사람들처럼 분위기에 어울리면 돼."

이과장의 말이 오히려 힐책의 성격을 띠었기에 더 묻다가는 바보가 될 판이었다. 이과장이 거짓말을 하고 있을 줄은 미자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그럼, 시간도 늦었으니 간단히 한잔만 하고 데려다 주세요."

"그럼, 그야 물론이지. 집에까지 얌전히 모셔다 줄테니 걱정말고 들어."

이과장은 따스한 웃음까지 웃으며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처음에는 딱 한잔만 먹겠다던 술이었으나 여자는 분위기에 약하다고 했던가. 과장의

데려다 준다는 약속도 있었는지라 미자는 자꾸 술잔을 들이켰다. 그러면서 이과장은 나름대로 부인과의 문제나 회사 일로 괴로운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고 미자도 어려운 집안 형편을 이야기하며 술을 마셨다.

"그만 일어나야지."

분위기가 제법 무르익을 무렵 이과장이 말했다. 오히려 미자는 좀더 앉아서 분위기에 젖고 싶었지만 못내 아쉬운 마음으로 따라 일어섰다. 더구나 별

흑심 없이 자신을 대하는 이과장이 미덥기도 했다.

"괜찮지. 미스 김."

"예, 좀 어지럽긴 하지만... "

"늦었으니 이젠 집에 들어가 봐야지."

시계를 한번 흘깃 처다 본 이과장은 차에 시동을 걸며 미자를 바라보았다. 차에 오르자 못하는 술을 마셨음인지 졸음이 쏟아져 미자는 눈을 감고

있었다. 이과장은 두어번 길을 돌고 돌아서 처음 강화도로 들어섰던 강화대교 부근으로 차를 몰아갔다. 서울로 빠져나가는 다리 난간에서는 마침 음주

단속을 하는지 차들이 꼬리를 물고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죠?"

차가 멈추고 가지를 않자 이상하게 생각한 미자가 눈을 뜨며 물었다.

"큰일인데 이를 어쩌지. 하필이면 오늘따라 음주 단속을 하나 본데."

"그럼 어쩌죠?"

"어쩌긴. 걸리면 면허 정지에 감옥엘 가야 한다구. 일년에 한두번이나 있는 일인데 하필 오늘이 그날이나 보네."

"야단이군. 음주 단속을 한번 하면 아침까지 꼬박 할텐데."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인 이과장은 다시 아까 카페 쪽으로 차를 몰았다.

"어떻게 하죠?"

그때까지도 추호도 이과장의 의도를 모르고 있던 미자는 오히려 자신으로 인해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생각으로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할 수 없지. 아까 카페에 들려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그러나 그들이 카페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불이 꺼진 후 였다.

"이런 카페도 오늘따라 일찍 문을 닫아 버렸네."

대부분의 카페들이 밤 두시 정도면 문을 닫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미자로서는 모든 상황이 우연스레 닥친 것으로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다시

검문소가 저만치 바라다 보이는 언덕길에 차를 주차시킨 이과장은 연신 담배를 피워 물며 검문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검문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저어... 길이 이곳밖에 없는 거에요?"

이과장이 차의 시동을 끄고 있던 터라 밤이 깁자 추위가 닥쳐왔다.

"이봐. 미스김. 여긴 강화도야. 섬이라구.저 다리 하나로 육지와 연결된걸 몰라서 묻는거야."

진심으로 힘이 드는지 이과장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죄송하긴. 미스 김 잘못이 뭐 있다고. 잘못이 있다면 다 내 잘못이지."

얼마간 시간이 흐르자 미자는 자꾸 속이 울렁이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때까지 멀쩡하던 정신이 다시 흐려지며 속이 뒤집혔다. 차 문을

열고 길가로 내려선 미자는 먹은 것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이거 큰일났군."

어느새 뒤를 따라 내려왔는지 등을 두드려 주며 이과장이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이 들어 있었다.

"할 수 없군."

무엇인가를 결심한 듯 이과장은 미자가 차에 오르기 무섭게 차에 시동을 걸고는 다시 온 길을 돌아가기 시작했다.

"미스김. 나를 어떻게 생각하지."

운전을 하며 이과장은 미자에게 물었다.

"뭘 말인 가요. 과장님?"

"이를테면 인간성이라든지..."

"... ..."

"나를 믿지. 미스김은?"

"... ..."

"믿으니까 여기까지 나를 따라서 왔고 술도 마신 것 아니겠어. 그러니까 믿은 김에 한번만 더 믿으라구.이런 일이 본래 이상하게 생각하면 한없이

이상한 일이지만 믿으면 하나도 이상할 것 없는 일이지."

그러면서 이과장이 언덕길 하나를 넘어 차를 세운 곳은 화려한 네온이 반짝이고 있는 커다란 모텔 앞이었다.

"왜, 이런 곳엘..."

"최선의 선택이야. 미자도 몸이 정상이 아니지만 나도 마찬가지야. 또 밤이 깊었고. 검문 때문에 서울로 돌아갈 방법도 없잖아. 지금까지 그랬듯이

나를 믿고 따라와 준다면 이곳에서 잠시 피곤한 몸을 쉬고 몸이라고 씻은 후에 단속이 끝나는 즉시 돌아가는 게 어때?"

"정말 다른 뜻이 있으신 건 아니겠죠?"

미자는 거절을 하고 싶었지만, 아니 어쩌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을 했지만 우선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당장 에라도 쓰러져 잠을 자고 싶은 것은

오히려 그녀 자신인지도 몰랐다.

"이봐, 미스김. 그런 소리 자꾸하면 오히려 내가 화를 낼 거야. 사람의 선의를 그렇게 색안경을 끼고만 보는 것도 잘못이라구. 몰론 세상이

사람을 그렇게 만들긴 했지만."

이과장은 정말로 별다른 뜻이 없어 보였다. 어깨 한쪽을 그에게 부축 당한 채 미자는 난생 처음으로 모텔 안으로 들어섰다. 흐릿한 그녀의 눈빛

안으로 '모텔 하이눈'이라고 써진 간판이 언뜻언뜻 스치고 지나쳤다. 그러나 방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이과장의 태도는 백 팔십도 바뀌었다. 보이가

숙박료를 계산 받고 나가기 무섭게 그는 억센 팔로 미자를 끌어안고 그녀를 침대로 쓰러트렸다.

"악! 무슨 짓이에요 과장님!"

놀란 미자는 있는 힘껏 발버둥을 처 보았지만 이미 소용이 없었다.

"이봐 미자. 사 사실은.... 난 미자를 사랑한다구..."

그 동안 서너시간의 미끼 질을 만회나 하려는 듯 그는 미자의 비명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녀의 옷을 거칠게 찢다시피 벗겨 냈다.

"안돼요 과장님..."

힘을 잃은 미자의 두 눈에서 굵은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치밀한 계획 하에 오늘을 손꼽아 기다려 왔던 이과장의

눈에 그녀의 눈물은 오히려 그를 흥분시킬 뿐이었다. 날이 밝도록 처녀지에서 마음껏 욕심을 채운 이과장은 새벽이 다 되어서야 한쪽 옆으로 몸을

뉘었다. 담배에 불을 붙이며 울고 있는 미자에게 그는 조금의 죄책감도 없이 한마디를 던질 뿐이다.

"울지마. 여자란 다 이렇게 겪어 가면서 성숙하는 거야. 앞으로 내 말 잘 들어. 그러면 아무런 문제 될 것 없으니까."

그는 신입 여사원이 들어올 때마다 벌써 여러번째 써 왔던 오늘의 작전을 돌이키며 만족한 듯 담배를 비벼 끄고 다가가 미자를 안았다.

기실 이과장의 작전 코스는 비단 이곳 강화도뿐만이 아니었다. 주로 경기도 권을 중심으로 양수리 방면이나 포천 송우리 방면, 장흥 유원지 방면,

미사리 방면, 남한산성 방면, 백마 역이나 행주 산성 방면 등, 그 어느 드라이브 코스이건 여자들이 쉽게 분위기에 젖을 수 있는 아름다운 경치와

예쁜 카페들이 즐비하게 있었고 분위기 있게 술 한잔을 걸치고 서울로 진입하는 곳에는 용하게도 평소에는 간첩 한번 제대로 못 잡는 검문소들이

설치되어 음주 단속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음주 단속이 술집이나 카페 등 운전자들이 경유할 법한 곳에 설치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고 또 그것이

교통사고 예방이라는 주 목적도 있긴 하지만 이과장과 같은 플레이 보이들에겐 오히려 그것이 여간 고마운 정책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무슨

정책인지는 몰라도 그런 검문소 못 미친 곳들에는 참으로 용하게도 러브 호텔들이 마치 관과 짜기라도 한 듯이 들어서서 순진한 처녀들을 유린하는데

일익을 담당할 준비를 하고 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세상이 다들 이러는 판인데 방법은 하나 밖에 없다. 여인들이여. 그대들의 몸을

알아서 잘 들 챙기시거라. 세상은 다 도둑놈들 뿐이니까.... .

열다섯번째이야기 : 新 씨받이

남자는 연속으로 줄담배를 피워 댔다. 자신의 부인이 모텔의 남자 종업원과 함께 방으로 들어 간 후 삼십분 남짓한 시간을 연속해서 줄곧 담배만

잡고 있었다. 그 이상한 남자와 여자가 모텔 불야성의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오후 두 시가 좀 넘은 시각, 비교적 손님이 뜸한 한가한

시간이었다. 남자는 서른 중반을 넘긴 나이에 비교적 말쑥하게 양복을 차려 입고 있었고 여인은 서른 초반의 나이에 비교적 미인형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다른 여느 손님들과 다른 이상했던 점은 둘 다 얼굴 표정이 굳어 있었다는 점이며 특히 남자의 표정은 불안감으로 가득했다. '별

이상한 부부도 다 있구나' 생각을 하며 그들을 객실로 안내를 하고 내려온 미스터 조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거야?"

그런 미스터 조의 표정을 보고 프런트를 지키던 성일이 한마디를 던졌다.

"글쎄요. 좋은 일 하러 왔으면서 두 사람이 왜 그렇게 불안한 표정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혹시 쫓기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그런지도 모르지. 잘 지켜보라구. 요즘 어디 이상한 사람들이 한둘이어야지..."

그러나 두 사람의 의문은 잠시 후에 풀렸다. 객실에 부인을 남겨 둔 남자가 성급히 프런트로 내려왔기 때문이다. 그는 다짜고짜 성일을 붙들고

조용히 할 얘기가 있노라고 했다. 남자의 표정이 워낙 진지했던 터라 성일은 잠시 프런트를 비우고 남자와 함께 빈 객실로 들어갔다.

"부탁이 있네."

방으로 들어가기 무섭게 사내는 담배를 꺼내 들며 말했다.

"무슨?..."

"먼저 이유는 묻지 말고 이 일을 절대 비밀로 해주겠다는 약속을 해 주게."

사내가 초조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이마에는 연신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럼요. 걱정하지 마시고 무슨 일인지 자초지종을 말씀해 주시죠?"

"듣기에 따라서는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지금 나와 같이 들어와 방에서 기다리고 있는 여인은 실은 내 부인이라네. 하긴 이런 곳에 부인과

함께 오는 것이 요즘은 오히려 이상한 일이기는 하지만. 이유는 묻지 말아 주고, 지금 내 부인의 방에 남자 하나만 넣어 줄 수 없겠나? 이왕이면

잘생기고 건장한 청년으로 말이야."

"네엣??"

사내의 이야기를 들고 성일은 깜짝 놀랐다. 자기 부인에게 다른 남자를 넣어서 대낮에 정사를 벌이게 하다니... 성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니, 이보세요 손님? 그게 무슨 말씀이 신지 이해가 안 가는군요. 혹시 농담을 하시는 건 아닌지..."

"아니, 농담이 아니라네. 내가 비정상이거나 미친 것도 아니고 사이코나 변태는 더 더욱 아니지. 거기에는 정말 말하기 힘든 이유가 있다네. 나도

괴롭기는 마찬가지니 이유는 묻지 말아 주게."

"그러시면서 굳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지. 어때 가능하겠나?"

남자를 불러 준다는 것이 사실상 있을 수 없는 일이긴 했지만 성일로서는 참으로 호기심이 이는 일이었다.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 밖으로 나온

성일은 미스터 조를 불러 자세한 상황을 이야기했다.

"어떻게 그런 이상한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그러기에 말이야. 가정은 두 가지를 해볼 수가 있겠는데.."

"두 가지요?"

"그렇지. 남자가 아기를 가지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든지 아니면 남자가 바람을 피워서 부인이 이런 식으로 복수와 용서를 하려는 그 두 가지

말이야."

"일리가 있긴 한데 두 번째는 그렇다 치고 남의 정자를 사서 하는 인공 수정이야 병원에서도 할 수 있는 일 아닙니까?"

"그렇기도 하지만 병원에서 그러면 기록이 남는다는 단점이 있을 수 있고 또 비용이 비쌀 수도 있잖는가?"

"흥, 그 말이 맞군요.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도의에 어긋나는 일이기는 하지만 지금 저 사내는 진심으로 내게 부탁을 했어. 도의적으로 치자면 잘못 일수도 있지만 저 사내의 입장에서 보면

긴박하고 절박한 처지의 구원이 될 수도 있다고 봐. 어때 자네가 이 일을 맡아 주게?"

그러면서 성일은 슬쩍 미스터 조의 얼굴을 처다 보았다. 순간 그의 얼굴은 빨갛게 홍당무로 변했다.

"뒤 탈이 없을지 모르겠군요."

"싫다는 말은 아니군. 잘 생각했어. 우리 집에서 건장하고 잘생긴 사람은 자네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해서 미스터 조는 사내의 부인이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사내의 간곡한 부탁을 받아 들어갔고 사랑하는 부인을 다른 사내의 품으로 떠나 보낸

남편은 줄담배를 계속해서 꼬나 물며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여인의 방으로 들어간 미스터 조는 한시간이 넘도록 나오질

않았다. 애가 탄 것은 비단 남편 뿐만이 아니라 성일도 마찬가지 였다. 계속해서 시계만 바라보며 애타게 부인이 나오기 만을 기다리는 사내의

모습이 갈수록 안쓰럽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기를 한시간 반이 되어서야 미스터 조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프런트로 내려왔다. 뒤이어 고개를 숙인

여인이 내려왔고 기다리던 그녀의 남편은 서둘러 그녀를 대리고 밖으로 나갔다.

"이봐, 미스터 조! 상황이 상황인데 빨리 나와야지. 사람이 어째 그 모양인가?"

미스터 조가 워낙 오랫동안 시간을 끌다가 나왔는지라 성일은 기분이 언짢았다. 그러나 다음 미스터 조의 대답은 더 걸작이었다.

"말도 마세요. 전들 빨리 나오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아니, 그럼?..."

"참, 그 여자 대단한 여잡니다. 도무지 그들 두 사람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 뭐 이유라도 좀 알아냈나?"

"그 여자 말입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대단한 여자 였습니다. 빨리 일을 끝내고 나가려고 하는데 잠시도 틈을 주지 않고 저를 붙잡지

뭡니까? 힘들어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지금까지 여러 여자를 알아 왔지만 정말 그런 여자는 처음이었어요."

"뭐라고? 별 요지경 같은 일도 다 있군. 그런데 말이야, 그들 부부의 진정한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후후.. 그거야 그들 두 부부만이 알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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