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호텔 4 (4/6)

러브호텔 4

열번째 이야기 : 귀신과의 정사

민수는 모 프로 야구단의 잘 나가는 주력 투수이다. 억대의 몸값을 받고 첫해에 15승이라는 성적을 올려 톡톡히 이름 값을 한 그는 어느덧 데뷔

2 년째에 접어들었음에도 2년생 징크스를 무색하게 하며 총알 같은 공을 씽씽 뿌려 대 상대 팀 타자들을 벌벌 떨게 하곤 했다. 그런 민수에게

약점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한창 혈기 왕성한 미혼의 선수답게 주변에 항상 수많은 여인들을 거느리고 다녔다. 즉 여자를 지나치게 밝히는

것이 민수에게는 최대의 흠이자 약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민수는 장래가 총망되는 억대의 선수인데다가 외모 또한 영화배우 못지않게 출중했던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민수의 주변은 끝없이 여자들이 맴돌았고 그는 별 어려움 없이 여자들을 골라가며 잠자리를 같이 하곤 했다. 민수의 최대

강점은 뭐니뭐니해도 불같이 솟구치는 강한 체력이었는데 경기 전날 새벽까지 잠을 안 자고 여자와 데이트를 해도 다음날이면 변함없이 상대 타자들을

넉다운 시켰다. 오히려 민수에게 여자들과의 육체적 교류는 강한 운동에너지의 원천처럼 느껴지게까지 되었다. 심지어 감독의 불호령이 떨어져 외박이

금지된 날이면 다음날 이상하게도 그의 공은 맥을 못 추고 상대 타자들에게 통타 당하곤 했던 것이다.

그러던 민수의 신앙이 어느날 싹 깨어지고 마는 일이 일어났다. 때는 프로야구가 한창 전기 리그 종반으로 치닫던 어느날, 가장 중요한 시점에서

팀이 내리 5연패를 당하자 화가 치민 감독은 전 선수에게 외박과 금주령을 내렸다. 선수들의 정신무장을 다시 하자는 의도였던 것이다. 일이 그렇게

되자 가장 몸이 단 것은 물론 민수였다. 하루라도 여자를 만나지 않으면 좀이 쑤셨던 민수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감독의 불호령이었다. 그렇다고

지시를 어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쌍방울 레이더스와 3연전을 치르기 위해 서울에서 전주로 이동을 했던 팀은 전주에 있는 C 호텔에 여장을 풀고 주말 3연전에 대비했다. 문제의

C호텔은 귀신이 나온다고 알려져 있어 징크스에 예민한 야구단은 여간해서 묵기를 꺼리는 곳이었으나 팀이 주로 묵던 모 호텔이 수리를 하면서 할 수

없이 팀은 C호텔로 왔던 것이다.

저녁에 비가 조금 왔던 관계로 일찌감치 훈련을 끝마치고 호텔로 돌아온 선수들은 내일 있을 3연전에 대비해 작전 구상들을 하면서 휴식들을 취했다.

그러나 민수는 이래저래 죽을 맛이었다. 안 그래도 작년에 전주에 와서 모 나이트 클럽에서 만나 사귀어 오던 아가씨 하나를 만나기로 미리 약속까지

정해 두었던 터인데 팀의 성적 하락으로 물거품이 되어 버린 것이다. 마음이 뒤숭숭해진 민수는 일지 감치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호텔 창밖을

바라보니 비는 그쳤다 오다가를 반복하며 내일의 경기를 불투명하게 하고 있었다.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던 그녀는 화를 내며 매몰차게 전화를

끊었었다.

'젠장, 여자가 어디 자기뿐인가...'

새벽 두시. 호텔 5층 창문밖에는 짙은 어둠과 함께 아직도 빗방울이 뜯고 있었다. 통상 같이 방을 쓰곤 하던 룸메이트인 선배 투수 K는 허리

디스크가 번져 갑자기 병원으로 실려 간 터였다. 예상대로 라면 지금쯤은 무슨 핑계라도 대고서 호텔을 빠져 나와 가까운 곳에 방을 잡고서 여인의

품 안에서 시간 가는줄 모르고 노닥가리고 있을 시간인데 민수는 생각할수록 부화가 치밀었다. 바람이 부는지 연신 창문이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제대로 잠이 오지를 않자 민수는 냉장고의 문을 열고 캔맥주 두개를 꺼내 창문 가로 가져갔다. 이정도 비라면 전주의 그라운드 사정은 뻔하다.

어차피 게임은 물 건너 간 것이다. 민수는 천천히 맥주를 들이켰다. 작은 스탠드 불만을 켜 놓은 방안은 희미했고 커튼을 열어놓은 통에 창문

유리를 통하여 민수의 모습이 침침하게 내 비췰 뿐이다. 창 밖도 어둠뿐이었다. 호텔 뒤편이 야산이었기 때문에 그저 칠흑 같은 어둠이 빗속에

일렁거리며 춤을 출 따름이었다.

새벽 두시 반, 갑자기 문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 오더니 똑똑 정확하게 두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빈속에 연거푸 들이마신 두 캔의

맥주로 인하여 약간 정신이 흔미한 상태였기에 민수는 혹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귀를 의심했다.

'이상하군, 이 시간에 룸 서비스가 올 일도 없는데…'

민수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사이 다시 똑똑 두번의 문 두드리는 소리가 틀림없이 들려왔다.

"누구십니까?"

혹시 자신처럼 잠 못 이루는 팀 동료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 민수는 조심스레 문가로 다가갔다. 하지만 기분이 약간 이상하단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저... 문 좀 열어 주시겠습니까?"

목소리의 주인공은 뜻밖에도 애띤 소녀의 음성이었다.

"예, 무슨 일이죠?"

상대가 여자인지라 약간 안도감이 든 민수가 다시 물었다.

"예, 옆방에 든 투숙객인데요. 대단히 실례 인줄은 알지만 잠도 오질 않고 무서워서요... "

순간, 민수의 눈이 재빠르게 빛났다.

'이런 제길... 떡이 저절로 굴러 들어오는 경우도 있네.'

하지만 이래 놓고 야중에 돈을 요구하는 악질 콜걸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민수는 문틈을 통하여 복도 밖을 여자를 확인했다.

헉.. 민수는 다시 한 번 놀라며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긴 생머리를 늘어트리고 잠옷 같은 것을 걸친 여인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하긴.. 저도 적적하고 잠이 안 오기는 마찬가집니다. 마침 냉장고에 맥주도 있고...."

그러면서 민수는 문을 열어 여인을 방으로 안내했다. 가까이서 보니 여인의 모습은 더욱 더 매혹적이었다. 약간 창백한 얼굴에 화장끼 없는

얼굴이었으나 잠옷 바람으로 겁도 없이 처음 보는 남정네의 방으로 돌진하는 것을 보면 아무튼 대단히 끼가 농염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러면 간혹씩 있기 마련인 여성 펜들의 육탄 공세일른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렇게 야밤에 방으로 처들어 온 일은 드믄 경우였다.

"같이 묵은 남자 친구는..."

희심의 미소를 지으며 여인의 앞에 털썩 주저앉은 민수는 본격적인 일 벌이기에 앞서서 뒷감당을 먼저 생각했다. 한참을 중요한 시기에 우락부락하고

인상 험한 그녀의 남자 친구가 그녀를 찾아 문을 따고 쳐들어와 펀치를 날릴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살폿 웃음을 머금으며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 방면에 도통한 민수는 프로다운 눈을 번득이며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통상 이런 시점에서 여자의 앞뒤를 들추는 건 하등의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은 익히 터득한 터였다. 그냥 서로를 묻지 말고 즐기기만 하면 그만이다. 일이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의 직분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맥주 캔 하나를 따서 그녀에게 건넸지만 두어 모금 마시는 시늉을 했을 뿐이다. 대신에 그녀가 노골적으로 속살을 보여 왔으므로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민수는 용기를 내어 그녀 옆으로 다가갔다. 아마도 같이 투숙한 남자 친구가 제대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잠이 들었거나 아니면

여자를 홀로 바람 맞춘, 어쨌거나 여자는 지금 몹시 외로운 상태 입에는 틀림이 없어 보였다. 어쩌면 이시점에서 여인에게 구차스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오히려 매너 없는 행동일 것이다. 민수는 용기를 낸 김에 더 내어 살며시 그녀의 손을 잡아 보았다. 놀랍게도 여인은 민수의 손을 끌어

그녀의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젠장, 나보다 더 급하시군... 에라 모르겠다.'

민수는 여인을 들어 침대로 눕히고는 성급히 잠옷을 풀어 내렸다. 여인은 반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거친 숨소리를 내며 민수를 더욱 끌어 당겼을

뿐이다. 민수는 거의 폭팔 직전의 풍선처럼 숨이 막혀 왔으나 프로답게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한 번으로 끝내기엔 여인의 미모가 너무 서늘하도록

아름다웠던 때문이다. 민수는 서서히 여인의 몸을 쓸어 내렸다. 야구공을 뿌릴 때와는 다른 또 다른 기술이었다.

갑자기 섬짓, 그 이상하다는 생각이 불현듯 민수를 스친 것은 그로부터 불과 오분 후의 일이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몸 아래에서 신음을 토하고 있는

여자가 자꾸 영화 화면처럼 흐릿하게 포개져 보인 것이었는데 민수는 처음에는 그것이 자신이 마신 술 때문인 줄 알았다. 더욱더 이상한 것은 여인의

얼굴이 지나치게 창백했다는 것과 눈동자가 초점이 전혀 없이 멍하니 떠져 있다는 점이었다. 거기에다가 자신의 허리를 꼭 잡고 풀어 주지 않는 강한

힘은 또 무엇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민수는 조심스레 여인의 눈치를 살피며 묻고 말았다.

"그런데 아가씨 몸이 왜이리 찬지 모르겠군요. 밖에서 비 맞고 헤매다 온 사람 같으니…"

거기 까지 생각한 민수의 머리에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가만 몸이 차다는 것은... 그래, 마치 얼음처럼 냉기가 가시질 않는다. 혹시...'

민수는 온 힘을 다하여 여인을 밀쳤다. 갑자기 머리가 쭈뼛해지고 소름이 돋아 올랐다.

"후후.. 날 버리고 어딜 가려고... 이미 늦었네..."

여인이 갑자기 팔에 힘을 주며 민수를 꼭 끌어 않았다. 어떻게나 그 힘이 강했던지 민수의 발버둥은 헛된 것이 돼 가고 있었다.

"날 버리고 못 간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널 죽여 버리겠어..."

그녀는 몸을 바꾸어 민수의 몸 위에 걸터앉더니 갑자기 힘껏 민수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잠시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긴 했으나 곧 숨이

가물가물 해지는 것으로 보아 꿈은 분명코 아니었다. 민수는 마지막 힘을 모아 살려 달라고 힘껏 소리치기 시작했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점점

기억이 희미해지는 찰나, 갑자기 밖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 왔다.

"이봐! 박민수. 무슨 일이야? 대체 왜 그래... 문열어 문!"

순간 여인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 갔다.

"이런... 하필이면... 거의 다 되었는데..."

밖에서는 종업원이 달려 왔는지 비상키를 이용해 문 여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녀는 억울한 표정으로 잠시 문 밖을 바라보더니 훌쩍 창문 밖으로

뛰어 내렸다.

"귀신... 귀... 귀신..."

말을 잊지 못하고 부들거리고 있는 민수를 바라보며 뛰어 들어온 동료 선수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젠장. 꿈을 꾼 거겠지. 도심 한복판 호텔 방에 귀신은 무슨..."

"이봐! 박민수 자네 혹시 몽유병 있는 것 아니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물로 목을 축인 민수가 입을 열었다.

"정말 귀신이었습니다. 차가운 얼굴에 처절하도록 아름다운 얼굴이었죠. 처음에는 저곳 탁자에 앉아서 둘이 맥주를 마셨었는데 침대로 가서 일을

시작하려 하자 갑자기 제 목을 조이더니 창문으로 훌쩍 뛰어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앗! 이건..."

팀의 주전 포수인 B가 갑자기 유리컵 잔을 들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이건 틀림없는 여자의 입술 자국 같은데... "

"그래요. 우린 캔 맥주를 따서 유리잔에 부어 몇 잔을 마셨죠. 그녀는 한 잔인가 빼고는 거의 입에 대지 않았지만..."

정말로 탁자 위에는 누가 보아도 두 사람이 앉아서 술울 마신 흔적이 역력했다.

"혹시 그녀가 앉았던 자리가 이쪽 창가 쪽이 아니었나?"

"예 맞아요. 그녀는 그쪽에 있었죠. 저는 이 쪽에 앉았고.."

"그럼, 자네 말처럼 귀신이 틀림없네. 이쪽을 보십시요?"

B는 어느새 사람들이 모여들어 웅성거리는 좌중을 둘러보며 귀신이 앉았다는 의자 밑을 가리켰다.

"여기... 틀립없이 귀신이 있었어요. 하지만 귀신은 술을 마시지 못했죠. 우리와는 엄연히 다른 차원의 에네르기 같은 환영이었을 테니까."

의자 밑에는 그냥 쏟아 부어진 듯한 맥주로 인하여 흥건하게 젖어 들고 있었다.

며칠 뒤, 죽은 영혼을 불러내어 구명 시식을 잘 하기로 이름난 C모 법사가 호텔로 찾아와 구명 시식을 하며 그 여자 귀신을 불러내었다. 그녀는

약 7년 전에 그 방에서 남자 문제로 인하여 창문으로 뛰어내려 자살을 한 여인의 귀신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하여 한을 풀지

못하고 차원을 넘어 자신의 죽은 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구명 시식 이후로 그녀가 계속 나오는지는 알아보지 못했다. 교회 목사님이

들으시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시겠지만 이것은 엄연히 사실로 일어난 일이다. 작년 여름에 일어난 이 사건을 아마 기억하는 독자 분들도 있을

것이다. 다만 정사 신은 글쓴이 임으로 꾸민 픽션임을 밝히고 싶다. 실제로는 호텔 복도에서 주로 목이 없는 형태로 귀신은 자주 목격되었다고

한다. 구명 시식을 한 것도 사실이다.

열한번째이야기 : 남희 이야기

날씨는 화창했다. 긴 겨울의 그림자가 지나고 바야흐로 봄이 찾아온 것이다. 날씨가 풀리고 봄이 오면 성일 에게는 해마다 찾아오는 가슴 아픈

기억이 있다. 바로 그의 고향 마을, 남희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그러니까 바로 사년 전의 오늘과 같은 봄날이었다. 바로 이웃에 살며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녀가 한줌의 재가되어 저 세상으로 떠나간 날이.

남희는 성일의 고향 마을인 전라도 정읍의 한 시골 마을, 바로 옆집에 살던 성일 보다 두 살 연하의 여자 아이였다. 그럭저럭 농사일로 남부럽지

않게 어린 시절을 보낸 성일에 비하여 옆집 남희네는 참으로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다. 농사일을 하던 남희의 아버지는 갑자기 논에서 쓰러진 이후로

몇년째 병석에서 일어나지를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혼자 세 남매를 돌보던 남희의 어머니마저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가출을 하고 말았다. 그때 남희는

마악 고등학교 1학년의 나이였고 밑으로 어린 동생 둘이 있었다. 졸지에 집안의 가장이 되어 버린 남희는 그 길로 학교를 중퇴하고 돈을 벌겠다며

서울로 상경을 했다. 그것이 성일이 어린 시절 마지막으로 본 남희의 모습이었다.

그 몇 달 뒤, 서울로 간 남희로부터 고향집으로 돈이 송금되어 오기 시작했다. 의외로 돈의 액수가 많았던지라 마을 사람들은 놀랐지만 들리는

풍문으로 그녀가 서울에서 마음씨 좋은 사람을 만나서 큰 회사에 들어갔고 그래서 돈을 잘 버는 것이라 했다. 아버지가 병상에 누워 있기는 했지만

남희의 매달 송금으로 인하여 두 동생은 끝까지 학교를 다녔고 아버지도 꾸준히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남희는 그날 이후로

한 번도 고향엘 내려오지 않았다.

그후, 참으로 뜻밖의 장소에서 성일은 남희를 다시 만났다. 그동안 군대를 갔다 오느라 한동안 남희의 일을 잊고 지내던 성일은 제대 후 시내의 모

관광 호텔 학원을 수료하고 이곳 불야성으로 일자리를 얻었고 몇년여를 일해 오던 그해 겨울날이었다.

다른 날과 별반 다를 바 없이 밀려드는 손님과 시름하던 저녁, 근처에 있는 모 룸살롱에서 이차를 나온 듯한 서너 명의 사내들과 아가씨들 틈에서

성일은 낯익은 얼굴 하나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녀는 다름아닌 어린 시절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인해 학업을 포기하고 마을을 등졌던 옆집의 남희,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술집에서 호스티스 일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놀란 성일이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얼굴을 돌렸을 때는 이미 프런트로

걸어오던 그녀와 얼굴이 마주친 뒤였다.

"앗!..."

남희는 얼굴이 빨개지며 낮게 신음 소리를 냈다. 놀란 것은 성일도 마찬가지 였다.

"서... 성일오빠...."

무엇인가 말을 하려던 그녀가 별안간 옆에 팔짱 꼈던 오십대의 뚱뚱한 사내를 밀치고 쏜살같이 문을 열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뭐야 이건... 야, 거기 안서!"

술에 반쯤 취했던 사내는 별안간 같이 이차를 나왔던 아가씨가 도망을 가자 깜짝 놀라며 뒤쫓아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날, 남희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돈을 환불해 달라며 프런트에 서서 고래고래 룸살롱 웨이터를 향하여 전화로 언성을 높이던 그 오십대의 사내는

기어이 대체되어 온 다른 아가씨와 방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남희는 다시 기억 속에서 잊혀지는가 했다. 자신의 불행한 치부를 동네의, 그것도 바로

옆집의 오빠에게 들켜 버린 충격이 컸던 듯 그녀는 한동안 연락이 없었다. 그러기를 일주일째 된 어느 날 저녁, 갑자기 남희에게 전화가 왔다.

내심 그녀의 전화를 기다리던 성일은 반가운 마음에 수화기를 들었다.

"오빠, 나 술 한잔 사줘. 술이 마시고 싶어."

다음날 저녁,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일을 하루 빠진 성일은 근처의 한 카페에서 남희를 만날 수 있었다.

"야.. 남희 너, 몰라보게 예뻐졌구나..."

성일은 놀랐다. 며칠 전엔 둘 다 서로가 놀란 나머지 상대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지금 찬찬히 붉은 불빛 아래서 바라보는 남희의 얼굴은

어린 시절 코흘리개의 그녀가 아닌 성숙한 여인의 모습이었다.

"오빠.. 사실은 그날, 내가 얼마나 죽고 싶었는지 알아? 하필이면 이 넓은 서울 바닥에서 오빠를 만나다니.. 그것도 그토록 추한 모습으로..

내 자신이 한심해서 정말 죽고 싶었어."

"남희야.. 그런 바보 같은 말이 어디 있니? 오빤 네 입장을 다 이해한다. 오히려 네가 자랑스러운걸.."

"후후.. 몸을 팔아서 동생들을 가르친 일이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사람이란 말이다.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그런 상황에 처하는 수가 있다. 마음이 중요한 것이지 행동이나 육체 따위는 결코 중요한 것이 될 수

없는 거야."

"그래도 난, 오빠를 만난 것이 저주스러워. 올해를 끝으로 이 일에서 손을 떼려 했는데. 어쩐지 강남으로 오기가 싫더니만..."

남희는 술이 많이 취하여 흐느꼈다. 그러면서 처음 서울에 올라와 나쁜 사람들을 만나서 술집에서 일을 하기까지를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그리고

지금껏 자신이 버티며 살아올 수 있었던 힘은 집안의 두 동생들과 병든 아버지 때문이라고 했다.

"오빠, 부탁이 있어요."

"... ..."

그녀의 집 앞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서는 성일을 남희가 불렀다.

"제 이야기 마을에 가셔서 하시면 안돼요. 아니, 그 누구에게도... 부탁이에요. 그렇게 약속해 주실 수 있는 거죠?"

"그럼, 난 벌써 잊었는걸.. 잊어버려라. 지나온 과정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단다. 지금부터가 중요한 것이지."

"고마워 오빠..."

하지만 그 날이 남희를 마지막으로 본 날이 되고 말았다. 불과 한달 후, 남희는 고향으로 내려가 그 동안 번 돈으로 아버지를 큰 대학 병원에

입원시켜 수술을 받게 하였고 아버지의 수술이 무사히 끝난 날, 마을 뒷동산에서 목을 메고 자살을 했던 것이다. 뒷동산에 꽃들이 만발하던

봄날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고개를 흔들면서 그녀의 죽음을 의아해 했지만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성일은 한동안 괴로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운명이란 과연 무엇이기에. 그날, 모텔에서 남희와 마주치지만 않았던들 마음 착한 그녀가 수치스러움에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으리라. 왜 하늘은 남들처럼 학교 한번 제대로 다녀 보지 못하고 일찍 서울로 내몰려 동생들 뒷바라지에 아버지의 수술비까지 힘겨웁게 삶을 꾸려

온 그녀에게 마지막 순간에 죽음이라는 가혹한 올가미를 씌웠던 것일까. 그녀의 영혼을 좀 더 편안히 쉬게 하려고 했기 때문일까.

열두번째 이야기 : 음흉한 직장 상사들

여상 졸업반인 혜진은 점점 높아져만 가는 취업 문턱에서 한시라도 빨리 일터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신문에 모

무역상사에 대리점의 경리사원 모집 공고를 본 후 응시, 서류 전형에 합격하였다. 1차 면접시험을 보기 위해 회사를 찾아간 그녀는 그곳에서 최고

상사인 영업소장 최소장을 만났다. 아직 사회 경험이 없는 그녀에게 대리점 소장이란 무척 높은 위치처럼 느껴졌다. 그녀를 처음 본 최소장은 의외로

호의적으로 그녀를 대했다. 학교 성적도 좋았고 얼굴에 잡티 하나 없는 예쁜 얼굴이었기 때문에 그의 호의는 별로 이상스런 일이 아니었다.

"언니, 합격하면 나 맛있는 것 많이 사줘야 해."

"그래, 잘하면 취직이 될 것 같애. 그곳 분들이 나를 잘 본 것 같거든."

공사판 막일을 하는 아버지는 늘 술에 찌들어서 살았고 때문에 가정 형편이 어려운 처지에서 김양은 한시라도 빨리 취직을 하고 싶었다. 막냇동생의

희망 어린 시선을 대하면서 혜진은 빨리 취직이 되어 동생에게 맛있는 것을 사 주고 싶었다.

다음날 저녁, '개인 면담과 함께 이력 상황의 확인이 필요하니 시내 모 백화점 앞으로 나오라'는 최소장의 전화를 받고 혜진은 아무런 의심 없이

약속 장소로 나갔다. 고졸이라는 학력 제한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사무직으로의 취업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학력이 안돼서 위에서 퇴짜를 맞았는데 내가 김양을 강력하게 추천을 했지."

최소장은 혜진의 착한 마음씨에 감동을 했다며 근처의 레스토랑으로 그녀를 데려갔다. 최소장의 인간미에 마음을 놓은 혜진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내친김에 어려운 집안 형편까지 털어놓았다. 우수한 학교 성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대학 진학을 포기한 그간의 사정을 털어놓으며

혜진은 눈물까지 흘렸다.

"자, 다 털어 버리라구. 앞으로 무슨 일 있으면 날 아버지라 생각하고 상의하도록 해. 내가 힘닿는 데까지 도와 줄 터이니..."

"속상 한데 술이나 마시자구."

"술은 못하는데..."

"맥주는 괜찮아... 그리고 앞으로 사회생활 하려면 맥주 정도는 마셔야지.. 오늘 부로 묵은 기분 싹 풀어 버리고 내일부터 새롭게 출발하는

거야."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고 있는 최소장을 혜진은 딱히 거절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한두 잔만 하던 술이 점차 늘었고 시간은 자정 무렵이 되어 갔다.

"흠... 집이 어디라고 했지.."

"소장님 많이 취하셨어요. 일어서야 겠는데요?"

"그래, 이런... 늦었구나.. 일어나야지..."

시간이 되어 자리를 일어서던 최소장이 갑자기 의자 옆으로 푹 고꾸라졌다.

"어멋 소장님, 괜찮으세요?"

"으응.. 내가 너무 취했나 보군.. 날 좀 부축해서 근처 여관으로 안내해 주지 않으련.."

혜진은 난감했지만 자신의 취직이 딸린 문제라 그대로 버려두고 집으로 갈 수 없었다. 자신의 일자리가 위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최소장의 의도를 전혀 몰랐던 그녀는 정말로 그가 취해서 그런 줄로만 알고 서둘러 계산까지 하고 레스토랑을 나왔다. 밤 공기는 차가웠다. 다행히도

근처 가까운 곳에 여관이 있었기에 여관까지 늘어진 최소장을 안내했다. 그러나, 방으로 들어가 최소장을 눕히고 방을 나서는데 갑자기 최소장의 억센

팔이 혜진의 어깨를 잡았다.

"왜 이러세요. 소장님."

"왜, 그러냐구? 몰라서 그래?"

갑자기 늑대로 돌변한 최소장은 거칠게 혜진을 침대로 끌어다가 눕혔다. 혜진은 그제서야 최소장의 본심을 파악하고 도망치려 발버둥쳤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소장님. 제가 잘못했어요.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잠자코 있지 못해. 다 널 위해서야. 월급도 내가 많이 주고 뒤를 돌봐 줄 테니 가만히 있으라구. 알았지?"

혜진은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쳤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취소장의 욕정만 부채질할 따름이었다. 두툼한 입술로 혜진의 입을 막은 그는 서둘러 그녀의 옷을

모조리 벗겨 냈다. 아직 단 한번도 남자의 손길이 닿지 않은 혜진의 살구 빛 가슴이 최소장의 시야로 들어왔다. 순간, 이성을 잃은 최소장은 울고

매달리는 혜진을 힘으로 누른 뒤, 그녀의 순결한 몸 위로 자신의 더러운 몸을 얹었다. 태어나서 난생 처음으로 당하는 고통에 몸을 떨며 혜진은

눈물을 흘렸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처녀지에서 마음껏 욕심을 채운 최소장은 잠시 후 절정을 맛본 후 쓰러졌다.

"너 취직과 보수는 걱정마. 내일부터 출근하게 해 줄 터이니 앞으로 내 말만 잘 들으라구. 알았지."

참담한 심정으로 쓰러져 있는 혜진의 몸을 어루만지며 그 뒤에도 최소장은 오랜만에 맛본 흥분감으로 인하여 몇 번이고 그녀를 공격했다. 눈물을

흘리며 누워 있던 혜진은 새벽녘, 최소장이 잠에 빠진 틈을 타 여관을 빠져나와 경찰에 그를 신고했다. 최소장은 경찰에 연행되어 신문을 받았고

징역 5년형이 선고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멋모르는 사회 초년병들을 향하여 가해지는 직장 상사들의 야릇한 눈길은 지금도 멈춤 없이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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