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호텔 3 (3/6)

러브호텔 3

일곱째 이야기: 어느 제비족의 말로

"방 있습니까?"

날씨가 제법 쌀쌀해진 어느 토요일이었다. 아직은 손님이 뜸한 초저녁, 사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두 남녀가 여관 불야성의 문을 밀치며 들어섰다.

"예, 그럼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손님?"

종업원 진수의 안내를 받아 객실로 향하는 사내는 훤칠한 키에 검정색 양복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미남형의 얼굴을 하고 있었고 그 옆에 팔짱을 낀

여자는 저녁인데도 검정색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작은 키에 뚱뚱한 몸집을 흔들며 걷고 있었다. 술이 기분 좋게 취한 남녀는 객실 앞에 이르러

주위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복도에 기대어 부둥켜안고 입맞춤을 했다.

"요금이 얼마죠?"

진수가 방 안내를 마치자 여인을 부축하던 남자가 눈짓을 해 보이며 물었다. 가만히 보니 술에 취한 것은 여자만인 듯 했다.

"숙박료가 삼만오천원입니다."

사내는 주머니에서 빳빳한 만원 짜리 네 장을 꺼내어 진수 앞으로 내밀었다.

"잔돈은 됐습니다. 문이나 꼭 잠가주세요?"

"예, 걱정 마시고 편히 주무세요."

오천 원의 팁을 확인한 진수는 이게 왠 떡이냐 싶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자정이 되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여자를 놓아두고 밖으로

나갔던 그 사내가 한 시간쯤 지나서 역시 또 다른 중년 부인 하나를 데리고 문을 밀치며 나타난 것이다.

"아저씨, 방 하나 주세요?"

"........."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진수는 잠시 망설였다. 생김새로 보아서는 틀림없는 아까의 그 남자 였지만 다른 여자를 데리고 이곳에 올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 쌍둥이 일지도 모른다.

"예? 예..... 예..."

잠시 어리둥절해 하던 진수가 정신을 차리고 엘리베이터의 칠층 버튼을 눌렀다. 칠층의 빈방으로 손님을 안내하기 위해서 였다. 그때였다. 여인 몰래

눈을 찡긋 해 보인 사내가 손가락 다섯 개를 펼쳐 보였다. 순간, 진수는 그가 오층으로 방을 원하고 있음을 눈치채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라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진수는 아까 그 남자가 얻었던 객실 바로 옆 호실에 또다시 그 손님을 안내했다. 객실을 확인한 사내는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이번에도 사만 원의 돈을 말없이 내밀었다.

'별 이상한 사람도 다 있군. 두 여자씩이나 데리고 들어와서 뭘 어쩌겠다는 거지.'

프런트 데스크로 내려온 진수는 의아해 하며 오층 복도를 비치고 있는 보안용 CC카메라에 눈을 고정시켰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남자는

다시 방을 빠져 나와 처음의 여자가 있는 방으로 옮겨갔다. 정말로 그 남자는 두방을 오가며 두 여인과 정사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쳇! 자식, 재주도 좋아. 누군 나이 서른이 넘도록 여자가 없어 장가도 못 가고 이 모양 이 꼴인데 누군 하룻저녁에 두 여자를 품고

자다니.... 에잇 더러워라..."

프런트를 보던 나이 서른의 노총각 성일은 열이 받은 양 담배를 꺼내 피워 대며 투덜거렸다.

"걱정하지마, 형! 내일 저 남자 일어나면 사부님으로 모시고 한번 비결을 물어 보면 될 것 아냐? 걱정은 무슨..."

안내를 맡은 진수가 웃으며 말했다.

"정말, 그래야 할 것 같군. 무슨 용빼는 재주라도 있는지..."

그러나 이상한 일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새벽 네시쯤 되어 종업원들이 졸린 눈을 비비며 겨우 잠을 쫓고 있을 무렵 그 사내는 태연히 밖으로

나가더니 아침이 다 되어 이번에는 서른쯤 되어 보이는 여자 하나를 데리고 다시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어어.. 종업원들이 놀라 눈을

꿈벅거리며 바라보자 사내는 태연하게 말했다.

"방 하나 주세요"

"예, 이쪽으로 오십시오"

대답을 마친 진수는 이번에는 말 안해도 알겠다는 듯 사내를 데리고 오층으로 향하였다.

"응... 자기야, 춥다... 얼른 들어가자....."

사내에게 착 달라붙은 여인은 연신 끈적끈적한 신음을 내뱉으며 독한 술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아까의 방 옆으로 객실을 마련해 주자 그는 이번에도

만족스런 얼굴을 하고 사만 원을 진수에게 건넸다. 별 이상한 사람도 다 있다는 생각을 하며 진수는 프런트로 내려와 의자에 몸을 뉘였다. 그렇게

얼마 후, 세번째 여인의 방에서 한시간을 보낸 남자는 다시 두번째 여인의 방으로 그리고 첫번째 여인의 방으로 각각 한시간 정도씩을 머물고는 아침

아홉 시가 되어서 세번째 여인의 방으로 들어간 후 프런트로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무슨 말이 나올까 궁금해 하며 전화를 받은 것은 성일 이었다.

"다른 방에서 말이오. 나 찾는 전화를 하면 일이 있어 아침 일찍 나갔다고 좀 전해 주시오. 다음에 연락한다고 하드라고 말이오. 부탁합니다."

"예, 걱정하지 마시고 푹 주무세요."

남자는 몹시 피곤해 지친 음성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유야 어찌되었건 간에 하룻밤에 세 여인이나 탐을 했으니 코피를 흘리며 쓰러지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스러운 일이었다.

그 토요일, 그렇게 첫 테이프를 끊은 남자는 이후에도 종종 모텔 불야성에 모습을 나타내었다. 이상했던 일은 한번 온 여자와는 절대로 두번 다시

여관에 오는 일이 없다는 점이었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 남자는 그 방면으로 상당한 고수의 실력을 가지고 일을 벌이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하기를 육개월 여, 어언 단골 손님이 되어 버린 그가 어느날부터인가 갑자기 종적을 감추었다. 때를 같이하여 하루에 한두명씩 잘 차려 입은

부인들이 들어와 그 남자의 종적을 묻는 일도 잦아졌다. 전에도 간혹 그런 일들이 있었으나 사내에게서 적지 않은 팁을 챙긴 종업원들이 모른다고

잡아 땐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남자가 사라지고부터 유독 그런 발길들이 잦아졌다. 심지어는 형사들까지 나와서 탐문 수사를

벌여가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종업원들 사이에서 아쉬움과 궁금증으로 그 남자가 잊혀져 가던 어느 날, 누군가가 사들고 들어온 연애 잡지의 한켠에

그 남자의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리고 그 현대판 변강쇠 같은 남자의 베일이 낱낱이 벗겨졌다. 세간에 알려진 남자의 이름은 박 아무개. 그는

출소한지 일년이 체 못된 전과 10범의 전문 사기꾼이었다. 형을 받고 이년만에 만기 출소한 그는 또다시 손을 씻지 못하고 이번에는 잠실과 천호동

주변의 카바레를 돌며 교포2세 사업가를 사칭, 수려한 용모와 세련된 말솜씨로 부녀자들을 홀리고 돈과 몸을 갈취 해왔던 것이다.

최근에 우리 나라는 계속되는 남아 선호 사상으로 인하여 하룻밤에 한 남자가 한 여자 데리고 자기도 힘들어진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와는 정반대로

그는 하룻밤에도 건수가 생기면 두명 세명의 여자도 마다 않고 기쁨조를 운용하는 북한의 김일성 부자나 삼천궁녀를 두었던 백제 의자왕 부럽지 않은

생활을 했으니 가히 기가 찰 노릇이다. 기실 그의 목적은 여자들의 몸이 아닌 그녀들이 지녔던 돈이나 값나가는 물건이었겠지만 말이다. 번듯한

말투에 놀아난 여자들이 가진 것을 모두 빼 주고 덤으로 넘겨주는 몸조차 마다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욕심도 많았던 것 같다. 더군다나 그가 꼬리를

잡힌 것은 여인들의 돈이나 금품을 갈취해서가 아니라 그를 한 번 만났던 여자들이 다시 만나 주지 않는 데에 앙심을 품고 신고를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니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명단이 밝혀진 여인들은 대부분 혐의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고 한다. 하여간에 이러한 제비족

유형의 범죄들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데에는 분별없는 여인들의 행실에서도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상대가 돈 있고 번듯해 보이면 앞

뒤 가리지도 않고 줄것 안줄것 다 주어 버리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가정과 자식들까지도 내팽개치는 것이 현실이니 안타까울 뿐이다. 모든 것이

더럽혀지고 도덕이 무너진 다음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몸의 때는 물로 씻을 수 있을지언정 양심의 더러운 때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 그 화려했던 시절을 뒤로하고 차가운 감방 안에 누워 제비족 사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결코 그 시절이 화려했다고 생각진

않을 것이다. 지금, 당신은? 혹은 당신의 주변은 모두 안녕 하신 지....

여덟째 이야기: 일본에서 생긴일

K씨에게 있어서 이번은 세 번째의 일본행이었다. 부산에 본부를 둔 무역회사 입사 후 줄곧 국내부의 영업관리 일만 맡아 오다가 해외판촉부의 직원

하나가 사표를 내면서 그리로 자리를 옮긴 것이 벌써 몇 달 전이었다. 새로 옮긴 부서는 부서의 특성상 유독 해외 출장이 많았지만 K씨는 그 일이

여간 즐겁고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부서의 직원 다섯명이 함께 동경의 모 회사와 제품 수출계약을 맺기 위해 부산에서 비행기로 날아왔던 이번 출장도

K씨의 주도적 활동으로 유리한 조건으로 계약이 성사되었다. 그래서인지 짠돌이로 소문난 부장이 모처럼 술을 사는 바람에 3차까지 동경의 뒷골목을

누비던 일행은 자정이 되어서야 숙소인 호텔로 돌아올 수 있었다. 상품 홍보도우미 역할 차 따라온 여직원 셋이 일찌감치 방으로 올라간 뒤에도

K씨는 부장과 함께 호텔 빠에서 두시까지 술잔을 기울인 뒤에라야 자신의 객실로 올라왔다. 워낙에 술꾼이기도 한 그였지만 오늘의 계약이 생각할수록

흡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때부터 발생하기 시작했다. 4차까지 술을 퍼지게 마셨으니 어지간히 취할 법도 한데 K씨의 뇌리 속엔 갑자기

딴 생각이 떠올라 좀처럼 잠을 이루질 못했다. 첫째는 술을 먹은 것이 화근이었고 둘째는 술만 먹으면 이상하리 만치 여자 생각이 간절해지는 K씨의

여성 편력이 화근이었다. 잠을 청하려 별의별 노력을 다 기울이던 그는 마침내 결심을 한 듯 전화기를 들고 벨 데스크로 전화를 걸어 벨맨을 오게

했다.

"이거... 혼자 자려니까 영 잠이 오지 않아서 말이야. 얼마면 되겠나?"

일본의 일부 호텔에선 늘씬한 콜걸들이 있더라는 얘기는 언제인가 잡지의 한켠에서 읽은 터였다. K씨는 태연하게 능숙한 일본어로 물었으나 술기운으로

인해 이미 혀는 꼬부라지고 있었다.

"아, 그러시겠어요. 감사합니다."

스물 두어 살쯤 되었을까. 검정 나비 넥타이를 산뜻하게 걸친 보이는 먼저 허리를 굽혀 감사의 표시부터 했다. 그리고는 의미 있는 웃음을 입가에

흘리며 K씨를 쳐다보았다.

"그러면 그전에 손님께서 돈을 내고 하실건지 돈을 받고 하실건지 결정을 해 주셔야지요?"

보이의 말에 의아해진 K씨가 물었다.

"아니 이봐! 내가 여자를 부르는데 돈을 지불해야 하거늘 오히려 돈을 받고 할 수도 있단 말인가?"

"그럼요. 손님은 단지 선택만 해 주시면 됩니다."

"아가씨가 틀린가. 아니면 서비스가...."

"아니요. 다 똑같습니다. 전혀 다를 것이 없읍죠."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이 너무 촌스럽게 보이지나 않을까 걱정해서 였을까. K씨가 거기서 더 이상 묻지 않은 것이 결정적 화근이었다.

"뭐가 그리 복잡해. 아무렇게나 불러 주면 되지. 이왕이면 내 돈을 받고 하겠네."

"아이고 이런... 고맙습니다 사장님."

K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보이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보이는 어찌된 영문인지 진심으로 그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잠시 후 다시 돌아온 보이는

서비스라며 맥주 두병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지갑을 열어 이만엔이라는 적지 않은 돈을 K씨에게 내밀었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참으로 이상한 제도도 다 있구나.'

생각을 하면서 그는 그 중의 반을 도리어 보이에게 팁으로 찔러 주고 침대 위로 벌렁 나자빠졌다. 술이 오르는지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이 두개

세개로 왔다 갔다 했지만 분명 꿈은 아니었다. 손님에게 여자를 소개해 주고 오히려 돈까지 주다니... 참으로 아리송한 일이었지만 그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오늘 회사를 대표한 수출 계약도 무사히 마쳤고 어쩐지 자신에게는 행운이 따라 다니는 느낌이었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K씨가 두대 째의 담배를 태웠을 무렵 정말로 잡지책에서만 보았을 법한 절세의 아가씨 하나가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채 스무 살도 넘지

않았을 법한 애띤 얼굴에 조각처럼 빚어진 몸매. 허리까지 길게 넘실거리는 생머리의 향취에 K씨는 금방 숨이 막힐 듯했다.

'제길. 내가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게로구나.. 꿈이라면 제발 깨지 말아 다오. 현실이라면 아... 이대로 죽어도 좋다....'

K씨는 다리를 꼬집어보았지만 어디까지나 틀림없는 현실이었다. 순간 씽긋 웃어 보이던 그녀가 침대로 다가와 K씨의 머리맡에 걸터앉았다.

"자... 그러면 우리 화끈하게 한번 시작해 볼까요?"

"아.... ...."

K씨는 숨이 막혀서 대답을 못하고 더듬거렸다. 그러면서 그녀는 입고 있던 빨간 블라우스의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곧이어 터질 듯한 안의

내용물이 어렴풋이 K씨의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흥분이 극에 달한 K씨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스탠드의 조명을 붉은 색으로 바꾸고 그녀의 몸 위로

몸을 날렸다. 그때 갑자기 밑에 깔렸던 그녀가 나즉이 속삭였다.

"저.. 우리 화끈하게 불을 켜 놓고 하면 안될까요. 전 어두우면 무서워서 흥분이 잘 안되거든요."

"그래, 그거 좋지...."

K씨가 환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다시 일어나 방안의 조명을 환하게 밝히고는 다시금 침대로 파고들었다.

자. 그 다음에 그날 그 방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지는 독자 여러분들 각자의 상상과 소중한 경험(?)에 맡기겠다. 혹은 더러는 일단의 잠 못

이루는 어린이들이 글을 읽고 행여나 못된 짓을 저지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쩌면 글쓴이의 그 방면의 무지(?) 때문이라고 그렇게 치부해

버리기로 하자. 글의 전개상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 밤, K씨는 정말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맛보는 황홀한 경험을 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언젠가 보았던 일본식 포르노의 그 행위들과 거의 다를 바가 없을 정도로 그 묘령의 여인은 정렬적이었다. 대강 그렇다고 해두고

그 밤의 이야기는 접어 두기로 하자.

그 후, 그들은 모두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왔고 모두 직장에 복귀하여 예전처럼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던 K씨가 동료들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것은 그로부터 약 삼사일 후의 일이었다. 주로 여직원들에게서부터 이상한 수군거림이 시작되더니 순식간에 온 회사 안으로 번져 가는

느낌이었다. 그들은 무슨 말인가를 하다가도 K씨만 나타나면 일제히 말을 멈추었다가 그가 사라진다 싶으면 기다렸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곤 했다.

그렇다고 내놓고 이유를 물어 볼 것도 못 돼 고개를 기우뚱거리던 그에게 며칠 전 일본 출장을 같이 갔던 부장이 퇴근 무렵 그를 지하 커피숍으로

불러내었다.

"아니, 이봐! 자네 어쩌자고 그런 실수를 했어?"

"실수.... 라니요?"

직감적으로 일이 잘못 되었음을 느낀 K씨는 부장의 얼굴만 근심스럽게 쳐다보았다.

"아니... 이 사람. 그럼 여태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 ..."

"그날 자네 혹시 호텔에서 아가씨를 부르지 않았나?"

"예... 그.. 그게 뭐가 잘못 되기라도 했단 말입니까?"

"예이... 이 사람아... 잘못돼도 크게 잘못 되었지. 혹시 보이에게 돈을 받지는 않았나?"

"예... 조금..."

"이런.. 그게 무슨 돈인지도 모르고..."

"아-니-그-럼"

"그래, 그건 일종의 출연비야. 포르노 출연비. 그 호텔 방에는 특수카메라가 설치돼 있어서 손님이 아가씨를 부를 때 돈을 내면 그냥 아가씨를

불러 주지만 돈을 받겠다고 하면 여자를 들여보낸 후 그 정사장면을 즉석에서 찍어서 전 호텔 방으로 생중계를 해 주는 곳이지. 나야 피곤해서 그냥

잠을 자느라 몰랐지만 여직원들이 우연히 그걸 보고 말았나 보네. 아침까지 녹화를 해서 틀어 주었다고 하더군. 젠장 그러기에 몸조심했어야지."

아홉째 이야기: 택시 기사 L씨의 이중생활

구름 낀 하늘. 그러나 눈은 오지 않고 있었다. 점심 시간이 조금 지난 시간이다. 기사 식당에서 설렁탕 한 그릇을 간단히 비우고 나와 자신의

영업용 승용차에 앉아서 담배를 뻐끔거리던 L씨는 갑자기 눈을 가늘게 뜨고 저만치 신호등 앞을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사거리 신호등을 조금

못 미친 곳에는 아까부터 언뜻 보기에도 귀티가 줄줄 흘러 보이는 귀부인 차림의 여자 하나가 택시를 세우려는지 연신 손을 흔들어 대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택시가 앞에 와서 서기만 하면 택시 기사의 얼굴을 한번 힐끗 훔쳐보고는 그냥 보내기를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었다. 그렇게

이십여 대의 택시가 무료하게 그녀를 스쳐 지나쳤다.

'젠장, 공동묘지에라도 갈 참인가?'

꽁초까지 다 타 들어가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L씨는 속는 셈치고 그녀 앞으로 슬그머니 차를 몰았다. 아까부터 줄곧 그녀를 지켜 본지라

잔뜩 호기심이 동하기도 한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택시가 그녀 앞으로 다가서자 그는 또다시 손을 흔들어 차를 세우는 시늉을 했다. 넉넉잡아

여인의 얼굴은 마흔 살쯤 되었을까. 갈색으로 연하게 물들인 머리칼은 두어 번 주리를 틀어서 핀으로 정갈하게 올려 묶었고 긴 검정색 주름치마 위에

걸친 잿빛 밍크코트는 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산들거렸다.

"손님. 어디로 모실까요?"

사뿐히 나비처럼 부인 앞에 차를 멈춘 L씨는 투박한 전라도 사투리를 싹 감추고 정중하게 물었다. 며칠 전 동료 기사에게서 들은 말이 있었던지라

L씨의 입가엔 잔잔한 희심의 미소까지 떠올랐다. 그냥 돌아갈 참이었다는 듯 짜증스런 표정을 짓고 서 있던 그녀의 눈길이 서서히 L씨의 희색

소나타 택시 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에 잠시 무엇인가 망설이는 듯한 묘한 갈등의 표정이 스치고 있었다.

"워커힐 호텔 쪽으로 갑시다."

결정을 내렸다는 듯 쓰고 있던 검정 선글라스를 척 접어든 여인이 택시 앞좌석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썩 만족스런 표정의 아니었으나 날씨가 차츰

쌀쌀해질 판이었는지라 더 이상 길거리에서 서 있을 수도 없는 노릇 인 듯 했다. 나이답지 않은 하얀 피부에 곱상해 보이는 얼굴, 오똑한 콧날

밑에 까만 점 하나.자주 빛 립스틱으로 둘러싸인 도톰한 입술. 찬찬히 그녀를 흩어보던 L씨는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수교차로를 지나

동작대교를 건넌 후 차를 강변대로 쪽으로 우회전했다. 강변 대로를 타고 시원하게 워커힐 방향으로 갈 심산이었다. 그때까지 그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뭔가를 잘못 짚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L씨는 끈기있게 기다렸다. 아직은 작전의 시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남 대교 부근을 지날 즈음

차가 심하게 정체되어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으나 부인은 애초에 시간 따위는 안중에 없는 듯 했다. 그냥 무료하게 창 밖을 힐끔거리며 무엇인가

골똘하게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젠장, 건수 하나 기대하다가 차만 밀리고 합승도 못하고 오늘 하루도 또 죽치는 신세군.'

갑자기 부화가 치민 L씨는 담배를 꺼내 들었다. 때마침 잔뜩 찌푸린 마른 하늘 위에서 솜털 같은 눈들이 날리기 시작했다.

"아저씨, 나도 담배 하나 주시구려..."

벙어리 인줄만 알았던 그녀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눈을 보기 위해서인지 잠시 벗었던 선글라스를 다시 눈가로 가져가고 있었다.

"담배요. 아 얼마든지 피세요."

'그러면 그렇지. 일단 말이 붙었으니 이제 술술 풀리기는 시간 문제겠지.'

L씨는 담배 하나를 꺼내어 건네주며 라이터로 불까지 깍듯하게 붙여 주었다.

"무슨 괴로운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아저씬! 괴로우면 다 담배 피웁니까?"

"앗, 이거 아저씨라고 하지 마세요. 이래봬도 서른 두 살, 한창 팔팔한 총각이랍니다."

결혼 2년째인 L씨는 짐짓 거짓말을 했다. 아무렴 아저씨보다야 총각이 났지 않을까 해서였다. 요즘 돈 많은 유한 마담들이 어디 아저씨 찾는 것

보았는가. 담배를 빨던 그녀가 갑자기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아니, 이봐요? 댁이 총각인지 아저씬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보기를 했어요? 아니면 무엇으로 증명을 한답니까? 요즘은 고등학생만 되어도 총각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랍니다. 하물며 서른 두살씩이나 먹어놓고는..."

"아, 손님도... 그렇게 따지면야 할 말이 없읍죠."

이야기가 어찌 음담패설로 심상찮게 흐른다.

'오늘 잘하면 봉을 건지겠구나.'

솟아오르는 기쁨을 꾹꾹 눌러 참으며 L씨는 어서 본론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차는 어느덧 잠실 대교 부근을 지나 워커힐 사거리 쪽으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아저씨 그러지말고 오늘 날도 그렇고 기분도 싱숭생숭 한데 나랑 드라이브나 더 합시다. 내 합승 요금까지 생각해서 삯은 후하게 쳐

드릴테니..."

"요금을 주신다는 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요. 어디로 모시면 좋을까요?"

"예까지 왔는데 다시 시내로 굳이 돌아갈 일 있나요? 저기서 우회전 해서 그냥 양수리 쪽으로 쭈욱 내 달립시다."

그녀는 주저없이 차들이 미등을 깜박거리며 신호 대기를 하고 있는 사거리를 가리켰다. 말을 하는 폼이 전에도 어느 놈팽이랑 수없이도 와 본 길인

듯했다.

"양수리라면 양평 가는 길 아닙니까? 거기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곳 아닌가요?"

"그래요, 그쪽으로 쭈욱 빠졌다가 분위기 있는 곳에서 커피나 한잔하고 돌아오지요..."

눈은 점점 그쳐 가고 있었다. 평일이건 주말이건 언제나 차량으로 붐비는 곳이 워커힐 고갯길이다. 스키 캐리어를 장착한 차량들과 그만 그만한

남녀들로 쌍쌍이 히히덕 거리는 차들이 대부분 이었다. 모두들 어디로 떠나는 것일까. L씨는 창문을 조금 열고는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부인은

이번에는 담배를 달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에 작은 핸드백 가방을 열고 콤팩트와 립스틱을 꺼내어 막 화장을 고치는 중이었다. L씨는 카세트

테이프에 '조용필 골든'이라고 써진 낡은 테이프를 밀어 넣고 볼륨을 올렸다. 이쯤 나이의 대부분의 여자들 치고 조용필 싫어하는 여자는 없었다.

마침 흘러나온 노래가 '그 겨울의 찻집'이었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럼 그렇지.'

L씨는 흡족한 듯 내심 쾌재를 불렀다.

"노래하면 역시 조용필이 최고지요."

L씨는 슬쩍 부인을 돌아보며 운장을 땠다. 기분만 잘 맞춰 주면 자기가 최고인줄 알고 열을 올리는 것이 그 나이의 배부른 중년 부인네들의 공통된

특성이 아니었던가.

"어머, 조용필을 좋아하세요. 이 아저씨 뭔가를 아시는 분이네. 아휴 요즘 나오는 노래는 영 노랜지 춤인지 구분이 안가요. 십여 명씩 우르르

물려 나와서는 가사만 틀릴 뿐인 똑같은 노래에 비슷한 춤으로 철모르는 학생들만 유혹을 하니... 또 거기에다가 그것을 앞 다투어 방송하는

방송사의 어른들이나.. 몰지각 하기는 다 마찬가지에요. 요즘은 가요대상을 받은 노래도 다음해 지나면 잊혀져 버려요. 그게 무슨 노랩니까. 몇년,

몇십년이 지나도 꾸준히 불리는 노래가 노래지요. 요즘은 노래에 혼들이 없어요."

"맞습니다. 노래하면 실력으로 보나 노래로 보나 당연 옛날 가수들이 더 낫지요."

부인은 기다렸다는 듯 열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L씨는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는 투가 영 못 배워먹은 여자는 아니었다.

차는 시내를 빠져 나오자 한적해진 길을 속력을 내며 내달렸다. 구리를 벗어나면서부터 차량들이 좀 뜸해졌다. 몇곳의 공사 구간을 지나자 청평호를

낀 이차선 도로가 주욱 펼쳐져 있었다. 이제 곧장 내달리면 양수리에 닿는다. 양수리에 닿아서 이 여인은 또 무엇을 요구할 것인가. 물안개가 채

가시지 않은 호반 길을 삼십분여 내달리자 양수리에 닿았고 어느덧 시간은 하오로 치닫고 있었다. 검문소 삼거리에서 차는 양수대교를 건너지 않고

춘천 가는 길로 좌회전을 했다. 양수대교를 건너자마자 철길을 건너 좌회전을 해도 되었지만 강 건너보다는 아무래도 강 이쪽이 개발이 더 된

까닭이었다. 양수리. 남한강과 북한강, 두개의 강줄기가 합쳐져 하나로 된다는 뜻에서 양수리란 지명이 붙은 곳이었으나 늘어나는 러브호텔과 까페들로

오히려 불륜의 장소로도 더 많이 이용되고 있는 아이러니한 곳이기도 했다. 강 언덕에 궁전처럼 지어진 몇개의 러브호텔과 음식점들을 스쳐 지나

얼마쯤을 달릴 무렵, 한곳을 가리킨 부인이 차를 세우자고 했다. 그곳은 '파라다이스'란 간판이 걸린 중세 유럽의 성 모양을 본딴 마치 궁전을

방불케 하는 호텔이었다.

'젠장, 파라다이스라니.. 파라다이스란 천국이 아니던가. 착한 짓을 해야만 갈 수 있다는 이상향의 나라가 아니던가. 그런데 대낮 불륜족이

대부분인 이런 곳의 이름이 파라다이스라니... 어차피 죽어서 지옥에 갈 몸들, 살아서라도 낙원을 즐겨보잔 이야기인가. 그 추한 몸들을

지느러미처럼 흔들어 가면서... 그래, 어디 갈 때까지 가 보자...'

심호흡을 한 번 길게 내뱉은 L씨는 각오한 듯 주차장으로 미끄러지듯 차를 몰았다. 차가 주차장에 깔아 놓은 자갈에 부딪히는지 바퀴에서 자그락

거리는 소리가 났다. 차에서 내리자 갑자기 부인이 곁으로 다가오며 능숙한 폼으로 팔짱을 꼈다.

"차들이 많군요. 아직은 대낮인데..."

멋적어진 L씨가 한마디 던졌다. 그도 그럴 것이 주차장에는 벌써 이십여대의 차들이 저마다 번호판을 가린채 얌전히도 주인들이 일을 끝 마치고

나올때를 주욱 늘어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대꾸 대신 부인은 L씨를 호텔 일층에 마련된 까페로 이끌었다. 카페 안은 어두웠다. 일부러 아는 사람을

피하게 하기 위해 조명이 어둡다는 사실을 L씨가 안 것은 좀 더 이 생활에 프로가 된 한참 후의 일이었다. 이름모를 피아노 반주가 흐르고 있던

실내는 훈훈했다. 저만치 벽난로가 타고 있는 구석 자리 옆으로 자리를 잡은 부인은 웨이터가 다가오자 L씨에겐 묻지도 않고 양주 한병과 안주를

시켰다.

"탁 까놓고 얘기합시다. 기사 양반..."

"뭘... 말입니까?"

대자 패스포트 한병이 반 이상 비워진 후였다. 별 말없이 술잔을 비우던 그녀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가 왜 이러는지 알지요? 이런 경험 처음이세요?"

"처음입니다만..."

대강의 짐작을 했지만 L씨는 짐짓 의외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얼마 주면 되겠어요?"

"알아서 하세요. 주는 데로 받아야지요."

말이 채 끝나기 무섭게 그녀는 핸드백을 열고 수표 한장을 꺼내어 L씨 앞으로 내밀었다. 하얀 오십만원짜리 수표 한장이었다.

"아니... 이렇게 많이는 필요 없습니다."

의외로 액수가 많았던지라 L씨는 돈을 받지 않고 잠시 망설였다. 오십만원이면 입금 빼고도 일주일은 부지런히 뛰어야 벌 수 있는 돈이었기

때문이다.

"그냥 받아 넣어요.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택시비가 아닌 가요. 택시비를 조금 더 얹어 주었을 뿐인데 뭐가 잘못될 것이

있답니까?"

그녀는 까르르 소리를 내어 웃기까지 했다. L씨는 잠시 자신이 화대를 받는 창녀가 된 느낌으로 앉아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썩어빠진 세상인데.. L씨는 연거푸 남은 술잔을 비워 냈다.

"호호... 이제야 좀 말이 통하는군요."

갑자기 부인의 말이 많아졌다.

"후...내가 오늘따라 얼마나 고생을 한지 알아요. 아. 내가 돈이 없어 차가 없어 택시를 잡겠어요. 다 이유가 있어 서지요. 그런데 오늘

일진이 영 아니라 걱정했어요. 오늘따라 미남 택시 기사 양반들은 다 어디로 가고 늙은 쭈그렁탱이들만 지나가는지 얼마나 고생을 했다구요. 그냥

집으로 들어가서 찜질방이나 갈까 하고 막 돌아서려는데 후후.. 우리의 젊은 오빠가 나타난거지요."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들을 내뱉는 것을 보니 이미 그녀는 이런 식의 남자 사냥에 익숙한 모습이었다. 어디 그녀뿐이겠는가. 그녀의 익숙한 말솜씨와

행동은 이미 여럿 그런 친구들이 있는 듯했다. 까페를 나오자 시간은 저녁 다섯시를 넘기고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 검정 가운을 입은 종업원 하나가

다가와 둘을 엘리베이터 앞으로 안내했다. 5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내려오자 문이 열리며 흡족한 표정의 남녀 한 쌍이 팔짱을 낀 채 나오고 있었다.

이름 그대로 파라다이스를 본 얼굴들이다.

"제일 높은 층으로 주세요"

올라가면서 그녀는 한마디했을 뿐이다. 07호실이라고 써진 방 앞에서 따라온 종업원에게 방값을 지불한 그녀는 방안으로 들어가기가 무섭게 L씨의

몸으로 달라붙었다. 술기운이기도 했지만 몹시도 남자에게 굶주린 모양이었다. 반쯤 열려진 창문으로 저만치 북한강의 강물이 넘실거리며 흐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방안에는 계속해서 끈적거리는 유혹이 흐를 뿐이다. 부인은 어쩌면 그렇게 제 남편에게도 해주지 않았을 법한 온갖 몸짓들을 L씨에게

해대었다. 더는 견디지 못한 L씨는 황급히 옷을 벗어 던지고 부인의 일에 동참했다. 적어도 택시비 이외로 받은 팁 값은 해야 되겠다는 투철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호텔 파라다이스는 후끈한 남녀들로 인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들은 아무도 서로에 대하여 묻지도 않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는 얼마간의 돈이나 몸의 대화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리고 후세 그들의 풍광 좋은 정사를 위하여 북한강은 옛부터 그 자리에서

그렇게 흐르고 있었던 것인지... ...

"저 혹시 연락처라도..."

처음에 그녀를 태웠던 방배동의 고급 빌라 단지 부근에 이르러 차를 세울 무렵, L씨는 차에서 내리려는 그녀를 향해 물었다. 시간을 보니 저녁

아홉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그녀와 함께 호텔방에 들어간지 세시간 남짓 얼마나 시달렸던지 L씨는 다리가 후들거려 어떻게 브레이크와 액셀레이터를

밟으며 운전을 여기까지 해 왔는지 정신이 몽롱했다. 과연 예상은 했지만 그녀는 한창 왕성한 중년 여성답게 끝없이 L씨를 괴롭히며 확실하게 본전을

뽑는 눈치였다.

"아저씬 매너 없이 왜 그래요?"

차에서 내린 그녀가 탁 쏘아 붙였다.

"저도 실례인 건 압니다만 워낙 부인이 마음에 들었거든요. 궁합도 잘 맞았고..."

저만치 두어걸음 옮기던 그녀가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궁합이 어쨌다구요. 나참.. 솔직히 말해 줄까요. 지금 내 기분이 어쩐지. 솔직히 본전 생각이 간절한걸요. 젊은 사람이 그렇게

금방 나가 떨어져서 어디... 쯧쯧..."

그녀는 더 이상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언덕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즐길 때는 즐기고 확실하게 맺고 끊을 줄 아는 과연 프로다운 모습이었다. 그래야

지질한 후환도 없을 것이다. 자신에게 철저한 이중 생활의 모범을 가르쳐 준 부인이 사라진 언덕길을 바라보며 공허하게 담배를 태워 물었던 L씨는

겨우 몸을 추스리며 차에 올랐다. L씨의 뇌리 속은 한 몇 시간 푹 자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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