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호텔 2
넷째 이야기: 립스틱으로 쓴 유서
사람들이 자살을 할 때 그 죽음의 순간을 택하는 장소도 참으로 다양하다. 멀리 여행을 떠나서 낯선 여행지의 강변이나 호텔 방, 혹은 유람선의
달리는 뱃전 위에서 그 생에 마감의 순간을 가질 수도 있고, 더러는 집에서나 아니면 자신이 처한 가장 어려운 환경의 한 가운데가 될 수도 있다.
그 여러 유형의 죽음 가운데 낯설은 여관방에서 생의 죽음을 택한 한 여인의 소설처럼 슬픈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잠실 종합운동장을 지나
한 정거장을 더 내려가면 신천 전철역이 나오고 그 뒤로는 최근 요 몇년 사이 젊은이들의 거리가 되어 버린 화려한 유흥가 골목이 펼쳐 있다. 이
곳은 또한 인근의 야구장과 한강 시민공원 롯데월드 등이 인접해 있고 편리한 교통 여건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일명 뚜벅이거리라고
불리우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렇게 유흥 시설들이 즐비하다 보면 시내 어디를 가도 공통적인 것이기는 하겠지만 한 블록쯤 떨어진 거리에는
반드시 화려한 네온 등들을 앞세운 러브호텔의 불빛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기 마련이다. 이 곳도 마찬가지여서 각종 술집과 포장마차 노래방
단란주점등이 늘어선 거리를 걸어 올라가다 보면 그 길이 끝나는 지점을 기점으로하여 여관들이 늘어서 있다. 마치 '취하고 지친 그대들을
기다렸노라' 하고 말하듯 사랑하는 연인들이 기분 좋게 한 잔씩을 걸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골목길을 나서면 자연스레 여관이 그 앞을
가로막는다.
그 어느 늦은 가을, 가을비가 을씨년스럽게 흩뿌리던 날이었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영업 시간이 끝난 술집의 손님들이 하나 둘씩 가게문을 나와
삼삼오오 집으로 혹은 포장마차로 흩어질 무렵 술에 잔뜩 취한 연인 한 쌍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흐느적거리며 골목길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날씨는 제법 쌀쌀했다. 여인은 검정색 투피스 차림에 이십대 초반의 청순하게 생긴 얼굴이었고 그녀의 팔을 부축한 남자는 큰 키에 귀공자 풍의
얼굴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잔씩 걸친 술로 인하여 취해 있었기는 마찬가지 였고 어느 누구도 두 젊은이를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다. 여인은
술에 취해 몸을 못 가누기는 했지만 제법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남자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영준씨! 제발... 절... 절 떠나지 마세요? 네, 부탁이에요.... 흐흑..."
"미혜... 어쩔 수 없잖아... 부모님의 뜻인걸... 그리고 날 이젠 잊어 줘... 넌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야..."
"흥, 영준씨가 떠나면 전 차라리 죽어 버릴 거예요.... 영준씨는 부모님의 뜻이라 하지만 사실은... 저를... 사랑하지 않고 있어요.
그렇죠?"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난 누구보다도 미혤 사랑했다구.. 다만 지금은 부모님의 뜻을 거절할 수 없기 때문이지.... 난 그분들의
희망이야."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걷던 두 남녀는 잠시 후, '파라다이스'라고 써진 모텔의 현관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비가 많이 오나 보군요?"
두 남녀를 아래위로 흩어 보던 종업원 미스터 박은 형식적인 말을 건네며 엘리베이터에 그들을 태웠다.
"아저씨! 몇 층입니까?"
"예, 6층 607호실입니다.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꼭 부둥켜안은 남녀는 꽤 피곤한 얼굴이었다. 잠시 후 방으로 그들을 안내한 미스터 박은 별 생각없이 요금을 받은 후 방문을 닫아 주고 프런트로
내려왔다. 그리고 긴 밤이 흘렀다. 다음 날 오전 12시, 통상 이때쯤이면 숙박 업소의 대부분은 그때까지도 방을 비우지 않은 손님들에 한하여
일일이 전화로 체크아웃을 시킨다. 청소를 시작하고 새로이 들어 올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함에서였다. 일일이 체크판을 들고 나가지 않은 손님들을
체크하던 미스터 박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하네. 607호 말이야. 안에 손님이 분명히 있는데 전화를 안 받는단 말씀이야."
"잠에 취해서 그렇겠지. 다시 한 번 전화를 해 보세요."
걸레질을 하던 프런트 케쉬어 미스 리가 거들었다.
"글세.. 어제 저녁에 술에 취해서 들어오기는 했지만 지금쯤이면 술이 깨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이상하네."
"문을 마스터키로 따 보면 되잖아요?"
"에이, 누가 그걸 모르나. 손님 방 함부로 열었다가는 큰일 나니까 하는 소리지. 가뜩이나 술 취해서 믈건 잃어버리면 종업원 소행이라고 우기고
신고하는 판인데... "
"훗훗, 하긴 그렇기도 하겠군요."
"에잇! 더러워서. 빨리 돈 벌어서 뭐라고 차리던가 해야지. 그나저나 607호실은 문제군. 문을 열어 보는 수밖에 없겠는데. 요즘 젊은것들은
문제야. 대낮인데 출근도 안 하나."
미스터 박은 투덜거리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잠시후 607호실 앞에 이른 그는 다시 한 번 소리내어 문을 두드렸으나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젠장, 전쟁이 일어나도 모를 판이군."
조심스레 마스터키로 객실 문을 연 미스터 박은 손님이 깰 까봐 조심하면서 마치 영화 속의 미 정보국 CIA요원이 된 기분으로 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커튼이 드리워진 방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다만 문 입구에 여자 구두 한 켤레가 아무렇게나 놓여져 있었으나 손님은 없는 듯 했다.
"젠장, 여기가 무슨 쓰레기장인줄 아나. 줄줄이 버리고 가게스리. 그나저나 괜히 놀랬네."
완전히 손님이 없음을 확인한 그는 투덜거리며 커튼을 열어 젖혔다. 여관에 와서 새로 산 신발이나 옷가지들을 갈아입고 헌 것들은 버리고 가는
경우는 그전에도 종종 있던 터였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이상한 냄새가 조금씩 풍겨 나오기 시작했다.
"앗, 그런데 이게 무슨 냄새지?"
갑자기 풍기는 역한 비릿내에 깜짝 놀란 미스터 박은 조심스레 욕실문을 열었다.
"아악"
다음 순간, 그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닫혀진 욕실 안에는 참으로 처참한 풍경이 벌어져 있었다. 긴 머리를 어깨에까지 늘어트린
여인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으로 동맥을 절단한 채 욕조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았음인지 물
속에서는 아직도 더운 피가 뭉클거리며 솟아나고 있었다.
"여... 여보세요..."
정신을 차린 미스터 박이 달려들어 여인의 몸을 흔들었으나 이미 숨이 끊어진 후였다. 한평 남짓한 욕조 주변에는 여인이 밤새 피우다 만
담배꽁초들과 손톱 소재용 화장칼 하나가 널려 있었다. 그리고 차가운 타일 위에 걸려 있던 욕실용 거울에는 그녀가 마지막으로 망설임 속에 썼을
법한 몇 자의 글씨가 빨간 매니큐어로 흔들리듯 쓰여져 있었다.
--어머님! 아버님! 용서하세요. 불효자는 먼저 떠납니다...
얼마 후 경찰이 달려오고 사건의 전모는 밝혀졌다. 어제 밤에 같이 여관에 들어 왔던 남자와 여인은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것도 죽고는 못 살
정도로. 그렇지만 사랑만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벽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즉 남자는 유명한 대기업의 외동아들이었고 여인은 평범한 가정의
대학생이었던 것이다. 아들에게 회사를 물려주려는 부모는 마침 다른 기업의 외동딸과 자기 아들이 맺어지길 원하였고 자기 아들이 평범한 여인과
사귀고 있음을 눈치 채고는 그 대기업의 외동딸이 유학하고 있는 영국으로 유학을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 이별의 마지막 날, 그 남자는
마지막으로 사랑했던 여인과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비행기에 올랐으리라. 부모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기에. 그리고 사랑했던 남자가 다른 여인의
품으로 떠나버린 아침, 그 여인은 세상을 절망하며 동맥을 끊었으리라. 참으로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가슴 아픈 이야기이다. 하지만 소설 속의
창작된 이야기가 어차피 현실의 일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모티브를 두고 있기에 더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없다. 그 여인의 시신이야 화장이
되고 곧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갔겠지만 그 사랑의 마음이 어떠했기에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치닫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전해들은
순간부터 줄곧 필자는 가슴 아픈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다섯째 이야기: 남편을 찾아라
서른 중반쯤 되어 보이는 중년 부인 하나가 다급한 표정으로 모텔 불야성의 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새벽 여섯시, 뿌옇게 콘크리트 빌딩 숲을 헤치고
아침 여명이 밝아 올 시각이었다. 부인은 이목구비가 뚜렷한 꽤 미인형의 얼굴이었지만 무언가에 쫓기듯 계속 해서 안절부절못한 모습이었다. 당직근무
중이던 성일이 깜짝 놀라 졸린 눈을 비비며 부인에게 물었다.
"어서 오세요 손님,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잠시 가쁜 숨을 몰아쉬던 부인은 물을 한컵 청한 후에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 여기가 불야성이 틀림없죠?"
"네, 맞습니다만..."
"저.. 아저씨 부탁입니다. 제발 좀 도와주십시오?"
난데없는 부인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성일은 다시 물었다.
"손님, 진정하시고 말씀을 해 보세요. 도대체 무엇을 도와 달라는 말씀이신지요."
"지금 혹시 손님 중에 강혜숙이란 여자가 있는지 확인 좀 해 주시겠어요. 아마 307호실 일거예요."
"확인이야 어려울 거 없겠지만 그 전에 자초지종을 말씀해 주셔야죠. 저희가 무턱대고 손님들을 알려드릴 순 없잖습니까? 저희에게도 어느정도 손님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잖아요."
"흐흑... "
잠시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던 부인이 잠시 후 자세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부인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자기 남편이 직장을 핑계로 사흘이 멀다하고
외박을 하며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운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눈치 챈 부인이 이혼할 것을 요구하자 오히려 증거를 대라며 부인을 구타하고 의처증으로
몰아 세웠다. 할 수 없이 증거를 찾으려 전화기에 도청 장치도 해 보고 사람을 시켜 남편의 뒤도 밟아 보았지만 워낙 주도면밀한 성격의 남편은
그때마다 교묘하게 추적을 빠져나갔다. 그러기를 석달째 되던 어제 오후, 드디어 남편의 꼬리가 잡혔다. 우연찮게 남편의 삐삐 비밀 번호를
알아내는데 성공을 한 것이다. 어제 오후, 남편은 지방 출장을 간다며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 새벽, 묘령의 여인이
남편의 삐삐메시지에 음성녹음을 남긴 것이다.
"그래, 뭐라고 녹음이 되어 있었던가요?"
궁금해진 성일이 재차 물었다. 그럴수록 부인의 모습이 참으로 측은해 보였다.
"새벽 네시쯤 일겁니다. 이 여관 307호실에서 기다린다는 메시지 였어요. 그 강혜숙 이라는 여자, 이미 짐작은 했던 여자죠. 남편과 같은
부서에 근무하는 여자거든요. 각본대로 라면 교활한 남편은 지방에서 새벽에 서울로 올라와 곧장 이리로 달려올 겁니다."
그러면서 부인은 멍 투성이인 몸의 상처들을 보여 주었다.
"이게 다 그놈한테 의처증이라고 얻어맞은 상처들이에요. 꼭 좀 도와주세요. 이번에도 현장을 잡지 못하고 놓친다면 저와 아이들은 끝장이랍니다."
"숙박계를 보니 307호실에 강혜숙이란 여자가 틀림없이 묵고 있군요. 그런데 부인 혼자 힘으로 어떻게 하시겠어요?"
"제 남편은 상상외로 교활한 인간입니다. 조금만 이상해도 자릴 떠버리기 때문에 몇번이나 현장을 놓쳤지요. 남편은 한번 갔던 여관에 두번 다시
가는 일이 없을 정도로 철두철미한 성격의 소유잡니다. 저는 사람들과 멀리서 기다릴 테니 남편이 들어가면 곧바로 제게 호출을 해주세요. 그러면
제가 사람들을 데리고 곧 달려올 겁니다."
그러면서 부인은 자신의 호출 번호와 함께 남편의 사진을 내밀었다.
"그렇게 하지요. 너무 걱정 마세요. 잘 될겁니다."
부인이 사라지자 성일은 잠시 딜레마에 빠져들었다. 만에 하나 부인의 말이 거짓이라면... 더구나 종업원은 일단은 자신의 여관에 묵은 손님을
보호해야 할 일차적인 책임이 있지 않은가. 더구나 업주는 시끄러운 일이 생기고 경찰들이 들이닥치는 일은 절대로 원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내
온몸이 멍 투성이인 부인의 애절한 눈빛이 떠올랐다. 적어도 부인의 눈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두시간여 긴장된 시간이 흐르고 아침 아홉시가 조금
못 되어 드디어 그 문제의 남편이 여관 문을 조심스레 밀치고 들어섰다.
"손님! 누굴 찾아 오셨습니까?"
식은땀이 흘렀으나 태연한 얼굴로 성일이 물었다.
"307호 갑니다."
남자가 짧고 굵은 바리톤 음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남자가 사라지자 종업원 성일은 서둘러서 부인의 호출 번호를 눌렀다. 000번,
그것은 남자가 나타났다는 부인과의 약속된 암호였다. 잠시 후, 오분이 채 못되어 사복 차림의 경찰관 두명을 데리고 부인이 나타났다. 작은
카메라를 손에 든 부인의 두 손은 자꾸만 떨리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누구보다도 사랑해서 지구상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단 한사람의 인연으로
맺어진 인연이리라. 그러나 그 사랑이 자식까지 낳은 마당에 차가운 배신이라는 이름으로 돌아서고 있을 때에 부인의 심정은 어떠했으랴. 더군다나
다른 여자와 부둥켜안고 침대를 뒹굴고 있을 그 현장을 눈으로 확인해야 하는 이 마당에. 분노에 와들와들 떨고 있는 부인을 대신하여 대동한
경찰관이 차분히 307호실의 문을 두드렸다.
"실례합니다. 잠시 인검이 있겠습니다. 문 좀 열어 주세요!"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안에서 앙칼진 여자의 음성이 들려 왔다.
"누구세요?"
하지만 대답 속에는 분명히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네, 인검 중인 경찰관입니다. 문 좀 열어 보세요."
곧이어 문이 열리고 서른쯤 되어 보이는 여자 하나가 급히 겉옷만 껴입은 채로 얼굴을 내밀었다.
"저리 비켰! 이 더러운 년!"
남편과 함께 있는 새파란 여자를 보자 분노가 치민 부인이 여자의 몸을 밀치며 방안으로 뛰어 들었다. 곧 이어 경찰들도 뒤를 따랐다.
"앗! 어떻게 된 일이지?"
부인이 먼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어찌된 영문인지 방안은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남자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가 않았다. 모두가
어리둥절해 할 무렵, 문 한켠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있던 여자가 조소를 흘리며 말했다.
"흥, 뭣들 하는 거죠? 경찰이면 답니까? 민주 경찰은 이렇게 남의 방에 함부로 들어와도 되는 건가 보죠. 어서 썩 들 나가세요!"
당황한 경찰관이 종업원들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어떻게 된 거야?"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금방 307호실로 올라 간 사내가 감쪽같이 사라지다니. 그러나 물러설 경찰이 아니었다.
"이봐요 아가씨! 시치미 뚝 때면 모를 줄 알고, 이거 왜 이래. 다 알고 왔는데. 도대체 어디로 도망간 거야?"
"마음대로 하세요. 만약 증거를 찾지 못하면 불법침입죄로 모두를 고소하겠어요."
너무나도 당당한 여자의 태도 였는지라 모두들 엉거주춤 방을 나왔다.
"이봐! 잘못 짚은 것 아냐?"
"아닙니다. 틀림없이 사진 속의 그 남자 였어요. 307호실로 간다고까지 말했는걸요."
"젠장,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바로 그때였다. 방에서 날카로운 여자의 비명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무엇인가 둔탁한 것이 땅으로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앗! 창문입니다. 빨리 밖으로 나가세요."
짚이는 데가 있는 듯 성일이 소리쳤다. 아니나 다를까. 밖으로 달려나온 일행은 모두들 놀라며 얼굴을 가렸다. 창밖 여관 건물 앞 화단 위에는
아까의 그 남자가 의식을 잃고 거꾸로 처박혀 있었다. 경찰과 부인이 간통의 현장을 덮친 순간, 당황한 그 남편은 창문 밖으로 몸을 숨겼고
베란다에 매달려 있다가 힘에 겨워 밑으로 추락했던 것이다. 다행이 떨어진 곳이 콘크리트가 아닌 화단이었던지라 남자는 다리가 부러지고 두어군데
찰과상을 입은 것으로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 이후, 두 부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헛된 한 순간의 욕망이 초래한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 기회를 빌려
유부남 유부녀와 바람을 피우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충고를 해 주고 싶다. 자기 남편이나 부인 몰래 다른 사람과 한 순간 피워 올리는 불장난은 자칫
스릴 있고 쾌감이 따를지언정 입장을 바꾸어서 자기의 부인이나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면 그 심정이 어떻겠는가를... 결코 아무렇지도 않게 무덤덤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섯째 이야기: 잠복 근무
연일 계속되는 도둑과의 싸움으로 인하여 모텔 불야성의 종업원들은 지칠대로 지쳐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철통같이 순찰을 돌고 객실
점검을 해도 얼굴을 모르는 도둑은 요 며칠 사이 계속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손님들의 방을 털어 가곤 했던 것이다. 손님들이 술에 취하여 객실
문을 열어 놓고 자다가 가끔 도둑을 맞는 일이 있긴 했었지만 일년에 한두번 어쩌다가 있는 일이었지 요즘처럼 자주 발생하지는 않았었다. 최근 한달
여를 기점으로 하여 근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어김없이 손님들의 방이 털리곤 하자 사장은 드디어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손님들에게 일일이 귀중품은
프런트에 맡기게끔 하였고 문을 걸고 잠을 자도록 유도하였다. 그리고 밤에는 전 종업원이 교대로 순찰을 돌고 몽둥이를 들고 지키게 했지만 모든
것이 헛수고 였다. 범인은 귀신처럼 문을 따고 손님들의 지갑을 훔쳤고 급기야 조사하던 형사들은 이를 내부의 소행으로 단정 애매한 종업원들만
조사를 벌이며 의심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종업원들은 오해를 풀고 범인도 잡기 위해 사장에게 CC-TV와 카메라를 설치하자고 건의를 하였지만
구두쇠 사장은 돈 드는 것이 싫어 그것을 묵살하고 형사들과 한편이 되어 오히려 종업원들을 물갈이 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겉으로는 한없이
평화스러워 보였지만 그렇게 차가운 전운이 감돌고 있는 모텔 불야성에 지방에서 서울로 범인 검거차 출장 왔던 박형사가 들어선 것은 자정이 조금
못된 시간이었다.
"방 하나 있습니까? 피곤해서 잠 좀 자야겠습니다."
유도로 딱 벌어진 어깨에 서른을 갓 넘긴 박형사는 몹시 지쳐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범인을 잡기 위해 며칠째 잠복 근무를 하다가 허탕을 치고
내일 첫차로 일찌감치 본부로 내려오라는 명령을 받고 얼마 안되는 수사비를 쪼개어 여관을 찾은 터였다. 범인의 집 앞 벽돌 담아래서 삼일 밤낮을
쪼그리고 보낸 터라 뜨거운 목욕과 따스한 잠자리가 간절했다.
"저... 혼자 주무실 겁니까?"
박형사를 위 아래로 예리하게 흩어 보던 종업원 성일의 눈이 순간 반짝 빛났다. 안 그래도 도둑 때문에 긴장되던 터에 남자 혼자 오는 손님은
무조건 경계 대상이었던 것이다.
"이놈들아! 여자 남자가 여관에 연애하러 와서 할일 없이 남의 방을 털겠어. 이건 필시 남자 혼자 오는 놈의 소행 일거야. 오해받기 싫으면
잡아! 못 잡으면 너희들 소행으로 알겠어."
얼마 전까지 악다귀를 늘어놓다가 퇴근을 한 사장의 말도 일리가 있는 얘기였다. 도둑은 필시 남자일 것이다. 그리고 도둑이 외부에서 침입 하리란
법만은 없었다. 손님으로 가장해서 방을 잡고 기다렸다가 모두가 잠든 새벽녘에 살며시 일어나 다른 방들을 따고 지갑을 훔친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왜, 남자 혼자 자면 안되는 법이라도 있습니까? 피곤해 죽겠으니 어서 방이나 하나 줘 봅시다."
종업원의 말이 기분이 나쁘긴 했지만 박형사는 참기로 했다. 어서 따근따근한 물로 샤워를 하고 자리에 눕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 뜻은 아니구요. 혹시 여자 손님 오시면 안내를 해 드려야 하니까, 헤헤... 해서 물어 본 겁니다."
이상한 예감을 억누르며 성일은 미스터 조를 불렀다.
"미스터 조? 손님 오셨으니 방 좀 하나 안내해 드리세요."
"예, 이쪽으로 오시죠. 침대로 드릴까요? 온돌로 드릴까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 버튼을 누르며 진수가 물었다.
"혼자 잘건대 침대는 뭐합니까. 따듯한 온돌로 하나 주세요. 일자릴 구하느라 온종일 돌아 다녔더니 피곤하군요."
박형사는 짐짓 거짓말을 했다. 정말로 그의 얼굴은 피곤으로 가득해 보였다.
"어디, 이상한 낌새는 없던가. 미스터 조?"
진수가 안내를 하고 내려오자 프런트를 보던 성일이 성급히 물었다.
"별다르게 이상한 점은 없던데요. 그 나이에 캐주얼복 운동화 차림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그러고 보니 자꾸 피곤하다고 하는 것이 이상하긴 하기도
하고... ..."
"틀림없어. 뭔가 있다구. 이래봐도 내가 프런트 경력 10년째야. 척보면 손님들의 마음쯤은 읽을 수가 있지. 지금까지 예감이 빗나간 적은
없었어. 아무튼 졸지 말고 신경 써서 보자구.이번에 한 번 더 도둑을 맞았다 간 우리 목이 성치 않을 거야."
"제길... 무비카메라 한대 달면 해결될 문제인데 직원들끼리 서로 의심이나 하고 이 기회에 직업을 바꾸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봐! 그건 둘째 문제야. 어쨌든 도둑놈을 빨리 잡아야지. 참, 그 방 말야. 남자 혼자 올라간 방. 문에 표시를 해 두지 그래. 문을 열고
다른 방을 돌아다니다가 자기 방으로 들어가면 표가 나게끔. 문틈에 성냥 한개를 끼워 놓으라구. 문을 열면 밑으로 떨어질 테니 표가 나겠지."
"참, 그거 좋은 아이디어군요."
성일은 오늘은 왠지 그 동안 속을 썩이던 도둑이 잡힐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잃어버린 돈을 변상해 주고 경찰서를 들락거리던 그 동안의 일들이
생각나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나 둘씩 손님들의 발길이 뜸해지고 드디어 운명의 밤이 깊었다. 새벽 다섯 시, 마지막으로 객실 점검을
하고 진수가 프런트로 돌아왔을 때 성일은 피곤했던지 전화 교환대에 코를 박고 잠에 빠져 있었다.
'쯧쯧. 저러니 도둑이 와도 털릴 수밖에 없지.'
들고 있던 야구 방망이를 곁에 내려놓고 혀를 끌끌 차던 진수도 이내 쏟아지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졸기 시작했다. 객실
문도 모두 굳게 닫아져 있었고 여관 후문 쪽에 있는 비상구도 아예 닫아 걸어버렸다. 화재나 비상시를 대비하여 열어 놓아야 할 비상구 였지만 밤에
잠 안자고 소방서에서 소방 검열을 나올 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같은 시각, 모텔 맨 위층에 위치한 7층 709호실의 문이 열리고 복면을 한 두 그림자가 소리 없이 복도로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709호실에 일찌감치 손님으로 가장하여 방을 잡았던 인물들이었다. 한 명이 손짓을 하자 다른 한 명이 재빠르게 계단을 이용하여 1층에 있는
프런트로 달려 내려갔다.
"그래, 어때? 깨어 있나?"
"아무 생각 없이 자고 있어요. 탁자를 두드려도 모르더군요."
"자식들! 그러면서 무슨 도둑을 잡겠다고..."
어둠 속의 두 그림자는 킬킬거리면서 행동 개시를 했다. 그들의 손에는 날카롭고 조잡한 모양의 만능키가 들려져 있었다. 두 그림자는 살며시 그러나
능숙한 폼으로 7층부터 객실의 이중 안전고리가 걸리지 않은 방을 중심으로 방을 열고 잠에 떨어져 있는 손님들의 지갑만을 털면서 밑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딸각-"
한편, 자정 무렵부터 잠에 취하여 정신없이 잠에 빠졌던 박형사는 새벽이 되어 화장실에 갔다가 다시 방으로 돌아와 마악 잠을 청하는 순간 밖에서
들려 오는 이상한 소리에 본능적인 감각으로 정신을 차리고 숨을 죽였다.
"딸각-"
잠시 후 두어번의 문 비트는 소리와 함께 살며시 문이 열리며 검은 물체 하나가 소리 없이 방 안으로 스며들어 왔다. 전혀 소리가 없이 그 모습은
마치 그림자처럼 다가왔다. 박형사는 순간 도둑임을 확신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놀라서 비명을 지르고 난리를 쳤겠지만 박형사는 동물적인 감각과
오랜 수사 경험에서 얻은 베테랑다운 솜씨로 오히려 코를 골아 가며 자는 시늉을 했다. 물론 작게 실눈을 뜨고 도둑의 행동을 살피고 있었지만
어두워서 도둑은 방안의 사람이 자고 있는 줄로만 알았을 것이다. 증거를 포착해야 했다. 기다린 보람이 있었던지 잠시 방안의 동태를 살피던 도둑이
살며시 박형사의 청바지 주머니를 열고 지갑을 꺼내었다.
"꼼짝 마!"
다음 순간, 범인을 제압하기 위한 날카로운 외침 소리와 함께 박형사의 곰 같은 육중한 몸이 도둑의 몸을 덮쳤다. 놀란 도둑의 비명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격투가 이어졌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박형사가 어둠 속에서 날렵하게 수갑을 꺼내 도둑의 손에 채우고 불을 켰을 때 박형사의
팔에서도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도둑이 휘두른 나이프에 스친 듯했다.
"앗-"
도둑의 두건을 벗긴 박형사는 다시 한 번 놀랐다. 도둑은 뜻밖에도 갓 이십대 초반의 아리따운 아가씨 였던 것이다. 손님으로 왔던 박형사가 어여쁜
아가씨의 손에 수갑을 채우고 프런트로 내려오자 성일과 진수는 어안이 벙벙했다.
"앗!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분은 우리 집 단골 손님인대요."
"어떻게 되긴? 빨리 경찰을 불러요. 도둑이 다행이 내 방으로 들어왔기 망정이지. 큰일날뻔했지 뭡니까."
자기의 애인이 잡히자 그와 같이 있던 그녀의 남자 친구도 순순히 자수를 했고 얼마 후 사건의 전모는 밝혀 질 수 있었다. 즉 그들은 애인 사이로
공고를 졸업한 남자 친구가 열쇠 따기에 남다른 제주가 있던 점을 이용하여 애인 사이로 가장 여관에 든 후 만능키로 닫혀진 객실 문을 열고 돈을
털어 왔던 것이다.
"정말 고맙습니다."
연락을 받고 황급히 달려온 사장이 박형사를 보고 고개를 구십도로 숙여 인사를 건넸다.
"고맙긴요. 제 일인 걸요. 그나저나 쉬는 시간까지 잠복근무의 연장이니 웃어야 겠지요. 편히 발 뻗고 쉴 날이 없구려."
새벽 기차를 타기 위해 박형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후, 모텔 불야성에서는 더 이상 도난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