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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있었구나.’
기괴하기까지한 비늘의 한 덩어리건만 에드나였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몸을 떨며, 온 몸으로 물을 뿜어내는 그녀 역시 에드나였지만, 이것도 에드나였다.
에드나의 마지막 한조각- 영혼의 조각. 탁하게 물들어 검었지만, 그것이 언젠가 보았던 물뱀의 모습을 한 에드나의 비늘 중 하나란 걸 알았다.
그 하나에 에드나가 담겨 있다. 셀리안이 끌어낸 영혼, 그 마지막 한 조각이-
“정말 자기 손도 아니고, 이런 곳에 숨겨두다니- 여전히 촌스러운 거 아닌가.”
진은 담담하게 이야기했지만, 그답지 않게 흥이 나 있었다. 기특하다는 것처럼 내 머리를 쓰다듬었고, 그 손을 고리도 나도 거부하지 않았다.
키오후는 멀찍이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참을 수 없는 것처럼 떨며 나를 보았지만, 다가오지 못한다. 그저 풀숲 앞에 서서 나를 볼 뿐이다.
“이제 정화 하면 되는 거야.”
“정화?”
“셀리안 크레이누는 공주의 영혼을 긁어모았고 키오후는 그 조각에 그 일부를 빼돌렸어. 그리고 저주를 걸었겠지. 그 때문에 셀리안 크레이누의 부활 마법이 방해를 받아, 호수는 공주를 구성하지 못하고 불완전하게 채워진 거야.”
“호수가...”
"그래. 호수는 결국 그녀를 구성하지 못하고 그저 그녀에게 고여 더 썩어갔던 거겠지. 추측, 이지만- "
진은 어깨를 으쓱하긴 했지만, 그의 말이 정확할 것이었다. 진의 말을 들으니 추측되는 것도 있었다.
물뱀의 호수는 예언을 한다기보다는 조언을 하는, 현재와 과거를 품고 있는 존재였다. 그것이 그녀를 온전히 부활시키지 못했고 그녀는 그것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에드나는 내가 말하려고 했던 모든 것을 알고 있던 게 아닐까- 호수가 이야기해주었기에, 그녀가 호수였기에-
에드나는 미실랭과의 꿈도, 미실랭의 영혼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으니까.
그걸 호수를 통해 본 그녀는 어땠을까.
'에드나.'
마음이 아팠다. 아파하는 것도 미안할 정도로 아파 나는 비늘을 꼭 쥐었다.
“자, 그걸 줘."
"어?"
"내가 정화 해줄테니까.”
“...”
진이 손을 내밀었고, 나는 약간 주저했다.
망설일 건 없었다. 그의 말대로 오염된 조각이라면 정화하면 된다. 정화를 하고, 에드나를 부활시키고. 어느 쪽이든 그 몸이 포화될 정도의 호수다. 그런 어마어마한 마나다. 셀리안 크레이누가 부활에 적합하다고 선택한 마나. 저주가 없어진다면 충분히 그녀는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마법왕 셀리안 크레이누의 치유마법을 믿는다.
‘다시 돌아오고 그 다음에는?’
미실랭이 없는 세계 따위 아무래도 좋다는 에드나의 이야기, 머릿속에 문득 그 말이 떠올랐지만 도리질쳤다.
도리질치고 나는 결연하게 입을 열었다.
“아뇨.”
"응?"
"..."
마음을 다잡는다.
“내가 할게요. 방법을 알려줘요.”
“네가?”
어느 쪽이든 에드나를 저대로 둘 수는 없었다. 키오후에게 이용당하게, 저런 모습으로 남겨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지만 곧 그는 자랑스러운 눈을 했다.
‘어린애 보듯 보고 있네.’
동시에 그런 대단한 일이 아닌데. 오히려- 셀리안은 지금 이 자리에 없고, 진이 하는 건 에드나가 싫어할 거라는, 덧붙여 내가 그녀를 위로하고 싶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했던 말일 뿐인데 진의 눈에 담긴 감정에 쑥스럽기까지 했다.
"...고마워요."
"응?"
그리고 그것은 힘이 되었다. 망설이긴 했지만 그 눈이 마치 내 결의가 옳다는 것 같아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재차 에드나를, 조각을 쥐면 키오후가 히스테릭하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웃기지 마십시오!!"
"!"
“당신에게는 무리입니다!”
"..."
“찌꺼기 따위에게 가능할 리가 없지. 그런 마나도 없는 주제에! 고작 핵을 이동시켰다고 에피룬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군요!”
여태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남자도 내 말에 반응한 듯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그는 내 기를 꺾을 생각이었을지도 모르고, 정말로 그의 말대로 기가 막혀 소리치는 건지도 모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모습에 마음은 더 굳어졌다.
“그래요, 난 에피룬 크레이누가 아니에요.”
“뭐라고요?”
“당신 말대로예요. 에피룬은 당신에게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던 것 같지만 나는 끔찍하게 당신이 싫으니까.”
“...”
내 말에 키오후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의 얼굴이 굴욕으로 물든다.
그는 에피룬을 싫어했지만 그를 깊게 의식하고 있었다. 그것은 진의 말대로 근원적인 경외였고, 뿌리깊은 열등감이었다. 반면 에피룬은 어떨까. 그를 보고 있는 내 안에서 내 감정이 아닌 어떤 감정도 일어나지 않는 점에서- 그저 던진 이야기였지만 정답이 아닐까.
“이건 에드나를 좋아하는 내 의지야.”
나는 다시 진을 바라보았고, 진은 응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내가 류 녀석의 마나를 끌어쓰는 법도 알려줄게. 어차피 그녀석은 쓰지도 못하고 나와 렌의 마나를 쓰고 있으니까. 자- 팍팍 소망해. 그리고 정화하는 거야. 윤하영이-”
“할 수 있을 리가 없어... 그런 것 따위...”
“웅얼거리지마. 찢어버리기 전에-”
진은 나에게서 고개를 돌리지 않고 대장로를 향해 차갑게 읊조렸고, 키오후는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 이야기하고 싶은 듯 움찔거리는 기척이 느껴졌지만, 진의 목소리는 키오후에게와는 달리 다정하게 나를 향했다.
“자- 집중해야지.”
나는 그에게 마주 고개를 끄덕이고 검은 조각을 꽉 쥐었다.
“눈을 감고- 소망해. 네가 원하는 것을.”
나는 그의 말대로 눈을 감는다.
망설일 건 없었다. 정화하는 거다. 내가, 윤하영이.
눈을 감자, 이상하게 조용해진 느낌도 들었다. 신경 쓰였던 키오후의 기척도 발목을 적시는 물의 촉감도 모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조용한 침묵 속에서 진의 말만이 조곤조곤 다정하게 귓가를 울린다.
“자, 들어봐. 뱀 공주의 영혼의 맥박을 듣는 거야. 귀를 기울이고.”
동시에 따뜻하게 고동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맥박소리, 에드나의 맥박소리일까.
‘에드나-’
마음 속으로 그녀를 부르자 이상하게 맥박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느낌도 들었다. 살아 있다. 그녀는 아직 살아 있다.
“이름을 불러줘. 영혼의 이름이 그녀에게 닿을 수 있도록. 소리로, 마음으로-”
눈을 감고, 옆에서 진이 이야기해주는 대로 조용히 소망했다. 소리로, 마음으로 그녀를 부른다.
“에드나-”
조용히 소망하며 조각을 두 손으로 그러쥐었다.
눈을 감고, 조용히 그녀를 부른다.
“에드나-”
손끝이 따뜻해지고 어느새 진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조각은 나를, 어쩌면 에드나의 영혼을 먼 옛날로 거슬러올라가게 했다.
희미하게 퍼지는 깨끗한 빛은, 그녀에게 아름다운 시절을 일깨운다. 에드나란 여성을, 그녀의 마음과 긍지, 인격을 만들어준 소중한 기억들이 다시 켜켜이 쌓여간다.
살아갈 힘과도 비슷한 그런 이야기들, 추억들, 삶의 조각들-
[에드나, 너의 이름은 에드나다-]
태어났을 때-
[자랑스러운 공주님- 우리의 공주님-]
물뱀 일족의 공주로서 사명을 얻었을 때
처음으로 호수를 마주 했을 때
대장로의 이야기를 동화처럼 조곤조곤 들을 때, 그리고 그에게 칭찬 받을 때.
[훌륭하구나. 에드나.]
훨씬 작고 늙은 남자의 목소리였지만, 지금의 키오후를 떠올릴 수 없을 만큼 자애로운 목소리였다. 뱀 같다고 생각했던 키오후의 손길은 전혀 달라, 어린 뱀의 공주는 그 손길에 자긍심을 느끼고 애정을 느낀다.
도중에 그에게 실망을 느끼기도 하고, 현실적인 벽에 진저리를 치기도 했지만 이해하고 싶어서, 그를 더 이상 미워하기 싫어서 일족을 나왔다. 도망친 걸지도 모르지만 품게 된 긍지를 소중히 여기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른다.
주욱 다시 거슬러 내려와 여자가 보인다.
[물뱀의 공주님은 엄청나게 미인이네요.]
눈을 반짝이는 인간이 있다. 주욱 일족 속에 있던 그녀가 처음으로 인식한 인간이었다. 왈가닥 여장부 주제에 순수하게 눈을 빛내는 건 그녀의 첫 주인. 키도스 미실랭의 조모다.
우아하고 세련된, 기가 센 여인은 부대장과 전혀 닮지 않았지만 그 눈빛은 꼭 닮았다.
다시 다시 다시 그 모습은 자신의 어머니와 매우 닮은 부대장의 이모로 바뀐다.
[미안해. 에드나. 시집 좀 간다고 어머니가 에드나를 뺏을 줄은 몰랐어.]
혀를 낼름 내밀며 그녀는 아쉬운 듯 이야기했지만 결혼생활에 대한 기쁨이 더 커보였다. 에드나는 그런 그녀에게 사랑스러움을 느낀다.
미실랭가의 사람들, 사람들. 붉은 머리카락이 휘리릭 퍼진다.
‘아-’
그리고 곧 붉은 피처럼 퍼져나가는 게 있다. 눈가가 찢어진 소년. 피를 흘리며 에드나를 마주 본다.
[괜찮아?]
따뜻한 목소리다. 햇살 같은 목소리- 붉은 머리의 어린 소년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웃고 있다. 손을 내민다. 상냥하게 말을 건넨다.
그 모습의 기억에 도달한 순간 눈물이 흘렀다. 에드나의 눈물이다. 그녀의 슬픔이, 눈물이 내 눈물이 된다.
- 이 사람을 위해 살고 싶었다-
그것은 어떤 기억보다 강한 삶의 의지였지만, 뭔가 잘못 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깨달아도 멈출 수 없다.
눈물이 흘렀을 때부터, 거슬러올라가는 기억이 멈췄을 때부터 무언가 잘못된 걸 느꼈지만 그 큰 슬픔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으니까.
“하영!!”
멀어진 현실 속에서 진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들리지만, 그저 슬퍼서. 슬퍼서.
곧 기억이 다시 움직였다. 미실랭에게 주인이 되어 달라고 하고 그에게 거절당하고 그를 지켜보고- 그가 기사단에 들어가고 엘킨과 웃고 셀리안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장면이 계속 해서 바뀌어 어둠 속으로 진입한다. 새까만 어둠 속에 빛처럼 키도스 미실랭이 서 있다.
에드나는 손을 뻗는다- 윤하영은 손을 뻗는다-
미실랭의 몸이 비틀거리며 뒤돌아본다. 그 눈은 생기를 잃고 그 입은 부자연스럽게 벌어져 있다. 검게 구멍처럼 열린 입에서 검은 손은 뻗어나와 ‘윤하영’을 잡아챘다.
[잡았다-]
그때는 들리지 않았던 렌의 목소리다. 그녀에게 먹혀 뒤섞여 버린 렌의 감정이 흘러들어온다.
[인간 따위는 모두 하찮아. 너만이 특별해.]
구애하는 렌의 목소리가 귀를 때린다. 미실랭이 부서진다. 그의 영혼이, 그의 육체가 부서지는 것에 검은 용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기억해줘. 에피룬. 나를 봐줘. 에피룬- 누나- 윤하영-]
목소리는 뒤섞이고, 공허해진 키도스 미실랭의 눈을 마주본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깨질 듯한 비명 속에 고막은 터질 것 같고, 영혼에는 금이 갈 것 같이.
“지금부터 나는- 모든 것에 피해를 입히더라도, 용들을 죽일 수 있을 테니까.”
에드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그녀에게 한 번 들었던 목소리였다. 그것은 현실에서 파고드는 목소리다.
“하영!!!”
안돼-
“핫.”
나는 기억 속에서 빠져나온다. 눈을 깜빡이면 손으로부터 쳐내진 비늘이 물 속으로 떨어져있고, 진이 내 손을 붙잡고 있었다.
*
“미안...하다.”
그의 눈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비늘로부터 나를 떨어뜨린 건 진이었다.
비늘은 완전히 검지는 않았다. 반 정도는 투명한 초록빛을 띠고 있었고, 반 정도는 여전히 새까맣다.
“그대로라면 네가.”
진은 변명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며 내 손을 그러쥐었다. 황금의 고리에서 보호되고 있었건만 비늘을 잡았던 손은 새카맣게 변색되어 있다. 피부가 탄 것처럼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역시 찌꺼기 따위에게 가능할 리가 없지!”
키오후가 비틀비틀 걸어 내 손을 빠져나간 검은 비늘을 손에 쥐려고 다가오기 시작한다. 나는 재빨리 움직여 그를 막아섰고 바로 뒤에 진도 버티고 서 그것을 막았다.
“다시, 다시 한 번 해볼게요.”
“무리입니다. 당신 따위가 할 수 있을리 없어요. 똑같을 겁니다.”
“아니, 단시간에 저 정도면 훌륭한 거야. 더 이상 뱀공주도 넘치지 않고 있고.”
확실히, 기분 탓인지 모르지만 발목을 채운 물은 더 이상 늘어나지 않은 것 같다.
“그래, 다시 한 번 해보자. 다시 한 번.”
진이 격려하는 듯 거처럼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들긴다. 그는 우려하는 것처럼 나를 보았지만 나를 막을 생각은 없어보였다. 단지 그는 내 손을 회복시키려 했다. 그것을 나는 거절했고 진은 이해해해주었다. 에드나가 먼저였다. 고개를 끄덕이고, 비늘 쪽으로 걸어가 그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할 수 있어. 해야 해.'
하지만 새하얀 손이 나보다 먼저 그 비늘을 잡아챈다.
새하얀 손, 균열이 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손이었다.
“아.”
고개를 들면 에드나가 있다. 아까까지 움직이지 않던 그녀가 짧은 순간 다시 움직인 것이다. 그녀의 의지로.
그녀의 의지-
그녀의 입가가 열리고 에드나는 조용히 읊조렸다.
“미안해.”
라고.
============================ 작품 후기 ============================
네르비안 님 // 것도 재미있겠네요. 흔들리는 나무바라기입니다만, 에피룬은 이미 죽은 사람으로. ㅎㅎ 재미있는 코멘에 한참 웃었네요.
체셔빈 님 // 그의 개소리는 계속 됩니다. 주욱 계속 됩니다. 얼마 안 남은 루패가 키오후의 개소리로 당분간 찰 예정에 죄송스러워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