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 패러독스-117화 (117/155)

00117  Side story 7  =========================================================================

“네, 그럼요. 과연, 그 동상이 에피룬 크레이누님이셨군요...왠지...”

에피룬의 이름을 가진 남자는 한 템포를 쉬고 이야기를 잇는다. 교묘한 화법이었다. 마치, 자신에 대해 다 알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셀리안은 눈앞의 사제와 눈을 마주했다. 평범한 외모, 신관다운 청정한 기운, 기묘하게 잡히지 않는 흐릿한 분위기-

명백하게 수상하고 명백하게 불쾌한 인간이지만, 무언가가 안개처럼 남자를 감싸고 예민해지려는 감각을 방해한다.

“...저보다 제 눈앞의 폐하가 더 제 이름이 어울릴 것 같네요."

하지만, 그런 실질적인 방해보다, 어이없게도 자신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에 셀리안은 굴욕을 느꼈다. 아니, 굴욕이 아니다.

“...”

고작 저런 말에, 흔들린다. 흔들리고 상처 입고, 그걸 인정하기 싫어서 굴욕이란 감정에 집중한다. 그것을 고집하지 않으면 무너질 만큼 상처 입었다는 걸 어렴풋이 안다. 그 상처를 드러내는 일이 없을 거라는 것도.

이런 경우도 있다. 있을 수 있다. 있을 수 있었건만.

에피룬 윈드아라고 이름을 댄 남자가 가느다란 눈을 접으며 천사처럼 웃는다. 칭송하는 것처럼 웃지만, 마치 다 아는 것처럼 악마처럼 웃고 있었다.

"제가 감히 이 이름을 갖고 있는 게 죄송할 정도입니다.”

이 이름은 폐하 건데 말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순간, 그의 품안에서 얌전히 안겨 있던 여자의 손이 움직여, 굳어 있는 왕을 꼭 끌어안았다.

Side story 7

성가신 여자라고, 생각했다.

엘킨의 늦은 첫사랑, 히아신스가 호의를 가진 여자, 재미있는 여자, 쓸만한 패, 말이 통하는 자, 호기심이 동하는 인간, 수상한 존재- 그 작은 여자에게는 과하다 싶은 수식이 붙긴 했지만, 어쨌든 결론적으로 셀리안 크레이누는 윤하영이 제법 성가시다고 생각했다.

성가시다. 이것저것 혼자 생각이 많은 것도, 뭔가 많은 것을 안다는 것처럼 구는 것도, 그런 주제에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연기하는 것도- 전부 성가시고 동시에 재미있고- 하찮았다.

그는 쉽게 상대에게 정을 주지 않았지만, 어쩌면 정을 주는 상대에 대해 기준이 까다로웠던 걸지도 모른다. 셀리안 크레이누는 꽤나 결벽적인 면이 있었고 자신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가 정을 준 자는 엘킨 다이브와 히아신스 에이나 뿐.

엘킨 다이브도, 히아신스 에이나도 그 마음과 정신은 깨끗하고 올곧아, 그들에게는 뒤가 없고 그들에게는 구김이 없었다. 상처가 없는 게 아니다. 그들이 평탄한 인생을 살아온 게 아니다. 다만, 그들의 천성이 올곧았고 그들의 삶이 떳떳했다. 그것이 셀리안의 편벽된 기준에 들어맞았던 것뿐이다.

명실공히 최강의 마법왕이었지만, 그에게는 약점이 많았다. 열등감이 많은 자는 되려 완벽한 자를-제 기준에서지만- 찾게 된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 약점이, 그조차도 가늠하기 힘든 성가시고 복잡한, 파고들수록 기분이 더러워지는 역겨운 이야기라는 데 있었지만.

덕분에 그는 그다지 많지 않은 나이에도 인간의 감정, 오욕, 선하면서도 뒤틀린, 모순된 면을 누구보다 깊게 이해했다. 이해하고 싫어했기에 인간을 지배하는 데도 능숙할 수 있었다. 죄책감 없이, 누군가에게 군림할 수 있었다.

결벽하고 깨끗하게,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평등한 청렴의 기사, 엘킨 다이브-

인간의 모순된 더러움을 모르는, 언제나 당당하고 순수한 히아신스 에이나-

그런 그들에 비해, 윤하영은 지독하게 하찮다.

그녀를 이용하기 위해 직접 대면한 뒤 셀리안은 ‘실제 윤하영’에 대해서 많은 것, 적어도 이 세계에서의 그녀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알아냈다. 산과의 관계, 그녀가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같은 것들, 남으로부터 듣고, 그가 직접 확인했다.

알면 알수록 재미있기도 했지만, 알면 알수록 성가셨다.

수상하다고 생각했고, 가능하면 그녀가 배제해야 하는 것들과는 상관없는 거면 좋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그녀는, 그가 정을 준 자들이 좋아하는 여자였으니까. 자신이 재미있다고 생각한 것보다는 정 준 자들이 상처 입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않았지만, 상관이 있다면 어쩔 수 없다고 냉정하게 생각했다. 오히려, 그녀가 그의 소중한 자들에게 상처를 주기 전에 정리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숨겨왔던, 자신의 치유마법을 써서 그녀를 치료했지만, 여차하면 제거할 수도 있다고, 제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까지는.

*

“왜 졸졸 쫓아오는지 모르겠군.”

“성물을 보여달라고 이야기 드렸는데 왜 거절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시모갈 사절단은 별로 기분 좋은 방문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닥 감정은 없다. 에피룬 크레이누를 연호하는 아누휀 윈드아 정도는 싫다고 생각했지만, 심지어 성물을 요구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눈앞의 젊은 사제조차 그저 귀찮을 뿐이다.

이걸 어떻게 떼어내면 좋나- 싶은 심드렁한 기분으로 복도를 걷는다. 남자는 예의를 모르는 건지, 정치를 모르는 건지, 지나치게 신앙심이 높은 건지-

‘아니면 정치적으로 고단수인건지-’

셀리안은 날카롭게 눈앞의 젊은 사제를 바라보았지만, 곧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 눈은 그저 열정으로 빛나고 있다. 감정에 치우쳐 맹목적으로 다가온다.

왕은 눈앞의 남자에게 흥미를 잃었다.

“자네의 윗사람들도 더 이상 왈가불가하지 않지 않나.”

“이상하지 않습니까. 성물을 확인하러 신전에 들어선 순간, 갑자기 환자들이 나았습니다. 대신관님들은 그게 성물의 증거이자 저희를 환영하는 기적이라고 하셨습니다만-”

흥미를 잃고 기계적인 대답에 대한 뻔한 대답을 듣고 있으면, 복도에서 다른 이의 기척이 느껴졌다.

“?”

그 기척은 꽤 가까운 모퉁이의 벽 뒤에서 숨죽이고 있었다.

“...흐음, 유망한 대신관 후보가 아니라, 탐정이었나 보군.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겠지만, 나는 회복 마법을 쓰지 못하네.”

기척의 주인은, 그 회복마법을 가장 최근에 썼던 여자다. 수상하지만 보호가 필요한, 제 방에 가둬두었던 여자였다.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

“그야 모르죠. 당신은 마법왕 셀리안 크레이누이지 않습니까.”

“...성물은 바깥 공기를 타면 그만큼 낡고 마는 종류인 건 알고 있겠지.”

“압니다.”

귀를 쫑긋 세우고, 안절부절 못하는 게 여기까지 느껴진다. 셀리안 크레이누는 열정적으로 반박하는 청년을 흘끔 바라보았다. 다행히 남자는 제 기분에 취해 여자의 기척에 대해서는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다.

남자는 셀리안의 서늘한 반응에도 악착같이 매달린다. 성물이 도둑 맞았을지 모른다는, 구태연연한 구설수부터 무례죄에 해당할 수 있는 셀리안 크레이누와 얽힌 이야기까지-

이런 자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는 알고 있다. 이제 이 정도에는 화도 나지 않는다. 셀리안은 그에게 적당히 응수하다가 적당한 때에 한 번 침묵했다. 침묵한 뒤, 적당히 위압한다.

그는 살기를 섞지 않고도 상대를 압도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어디서 압도해야 할지도. 충분히 상대가 자신의 논리와 패를 보이게 한다. 곧 상대는 수가 떨어지고, 바닥이 보인다. 이는 이 세계 살아있는 모든 것에게는 기본적으로 우위인 셀리안 크레이누이기에 취할 수 있는 여유였다. 압도하고 제압한 뒤, 냉정하게 현실을 고한다.

“성물이 보고 싶다면 보여주지. 일단 짐이 아니라, 자네의 윗분들을 설득해서 나에게 정식으로 요청을 넣게.”

“그런-”

“시모갈의 촉망받는 대신관 후보라고 해서 봐줬지만, 더 이상 이야기한다면, 무례죄로 다스리겠다. 요한 세르기타.”

멍청하고 열정적인 젊은이가 셀리안의 말에 주춤한다. 주춤하고 분해하고, 결국 도망치듯 뒷걸음질 쳤다. 그 모습을 냉정하게 쳐다본다.

곧 천자락이 펄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청년이 걷기 시작했다.

다만, 문제는 청년이 훨씬 마법왕에게 압도되었다는 것이다. 그를 지나쳐 가야할, 본래 가야 할 길, 그의 숙소가 있는 장소나 신전이 있는 장소로 향하는 복도가 아닌 반대쪽으로 걷기 시작한다.

‘...귀찮네.’

윤하영이 숨어 있는 복도쪽이다.

씩씩대며 걷는 청년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셀리안 크레이누는 가볍게 혀를 찼다.

남자가 윤하영이 있는 복도 벽 바로 앞까지 당도한다. 아직, 그녀는 그의 백성이며, 엘킨이 연모하는 자다. 굳이 수치를 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셀리안은 빠른 보폭으로 걸어 요한 세르기타를 앞질렀다.

“폐하?”

의아한 듯한 요한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복도를 돌아가면-

“...”

“아.”

멍청한 표정- 이라고 생각한다.

검은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셀리안을 보고 있다. 꼬락서니를 보자면, 그 방에서 치료받던 모습 그대로다. 가슴에는 붕대를 두르고, 속바지만 입고 있다.

이러고 나온 건가, 싶었는데, 멍청한 여자는 주저하며 입을 벌린다. 설마 뭐라고 이야기할 생각은 아니겠지-

“저-”

“한 마디로라도 하면, 처형하겠다.”

여자는 납득하지 못한 얼굴을 하고서도 바로 입을 다물었다. 이런 점은, 좋다. 주제를 아니까. 셀리안이 입고 있던 가운을 벌린다. 가운을 벌려 그대로 그 작고 가는 여자를 품으로 끌어들였다.

*

...죽이는 편이 나을까.

알고 있다. 냉정하지 못한 걸. 셀리안 크레이누는 조금 조급함을 느끼며, 자신을 꼭 끌어안고 있는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신관들이 있던 장소에서 도망치듯 이동한 복도에서도, 여자는 셀리안을 끌어안은 팔을 풀지 않는다. 마치 달래는 것처럼, 진정시키려는 것처럼 꼭 끌어안고 있다.

위로 받고 있다. 여자는 셀리안 크레이누를 위로하고 있었다. 위로 받고 있다는 것에 당혹스럽다. 그 위로에 정말로 위안받는 것이 끔찍하다고 생각한다.

“바람 피는 것 같군.”

“바람이요? 폐하가요?”

“아니, 그대가 말이야- 그보다.”

어떤 표정을 하고, 이런 짓을 하는 걸까- 농담을 던지면, 여자가 고개를 든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그 건방지기 그지없는 검은 눈동자로 셀리안 크레이누를 보고 있다.

“한 마디라도 하면, 처형하겠다고 한 것 같은데.”

죽이고 싶다. 어디까지 아는 걸까, 뭘 아는 걸까, 이 여자는 뭘까. 뭐든 간에 정말로, 정말로 처형하고 싶다.

“폐하가 물어놓고... 그래서, 처형하게요?”

“생각 중이야.”

자신을 껴안고 있는 여자의 손은 따뜻하고, 그 눈동자는 다정해서, 돌아버릴 것 같다고 생각한다. 화가 난다. 흔들리는 자신에 대한 건지, 아니면, 주제 넘은 여자에 대한 건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되는 거겠지.

“언젠가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안 되는 거겠지. 그래서는-

“뜬금없이 기다렸다며 다가오는 이종족이나 지나치게 오래 산 인간은 질색이라고.”

멍하니 자신을 보는, 불쾌한 눈동자를 마주하며 천천히 이야기한다. 방법은 약간 다르지만 요한 세르기타에게 했던 것과 같다. 위압하고 시간을 주고, 내리눌러, 숨기고 있는 게 있다면 보이게 한다.

그가 조사한 윤하영은, 지온의 종업원으로 산의 약혼자였으며 앨리자베스 아카인에게 누명을 쓴 불쌍한 여자다. 하지만, 그녀의 그 전, 지온 전에 무얼 했는지 과거를 찾을 수 없다.

어째서? 마나라고는 한 톨도 느껴지지 않지만 혹시 모르지.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그러고 보니, 그대도 동상을 조사하고 있었던 것 같더군.”

“...아.”

그 빌어먹을 동상에서 벌어지는 연쇄 추락사건, 그것을 쫓는 여자- 지하 밑에 갇힌, 동상 추락사건의 범인인 용이 열렬하게 관심을 갖는 여자-

“그렇게 그 동상에 관심이 많다니-”

“...”

여자의 얼굴이 점점 구겨지는 걸 식은 눈으로 바라본다. 역시 관련이 있는 거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이 여자가 무얼 알고 있든, 무얼 숨기든, 자신을 어떻게 배려하든- 기분 나쁘기 그지없다.

설사, 이 여자가 자신을 배려해, 아는 주제에 숨겼고 그 검은 용을 정말로 막기 위해 동상 근처를 배회한 거라고 해도 어느 쪽이든 민폐다. 정말로 배려한다면 자신 앞에 나서지 말아야 했다. 정말이지 전생이니 환생이니 그런 건 지긋지긋하니까.

“확실히- 그 동상이 제법 잘생기긴 했지. 관심을 가질만도 해. 신관도 짐의 동상이라고 착각할 정도가 아닌가.”

“...이.”

“뭐?”

여자가 중얼거린 건 그 순간이었다.

“...”

줄곧, 가벼운 탄식이나 한숨만 쉬던 여자가 씹어뱉듯이 중얼거렸다. 귀를 기울이면, 여자의 눈동자가 뾰족해진다. 죽일 것처럼 자신을 보며 이어 중얼거린다. 귀를 기울일 필요도 없다. 바로 뭉개진 발음이 들릴 정도로 중얼거리기 시작했으니까.

“멍청이, 멍청이, 멍청이...”

주문을 외듯이 종알거린 여자는 곧 입을 다물고, 다시 셀리안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짐이 잘못 듣지 않았다면... 방금 멍ㅊ...”

이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닌데, 그 나온 말이 너무도 예상외라 멍해져서 확인하면 여자의 눈이 더 더 뾰족해졌다.

“...하나도 안 닮았어요.”

“응?”

“자기 외모가 조각같이 잘 생겼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빈말도 구분 못 하나 보죠?”

셀리안이 눈을 깜빡인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어느 쪽이든, 건방지다. 이게 왕에게 할 법한 태도인가. 마법을 써도 되고, 당장 왕궁내 누구에게라도 명령을 내려도 좋고, 그게 아니라면 그냥 셀리안이 저 가느다랗기 그지없는 목을 부러뜨려도 좋다. 그런데 그런 여자를 상대로 셀리안은 그저 눈만 깜빡였다.

“거울이나 보고 오세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요? 폐하는 ‘당신의 자다 깬 얼굴도 예뻐’라는 말에 넘어가는 소녀랑 동급이에요.”

“비유가 이상하군.”

아니 이상한 건 자신이다. 왜 저런 이상한 이야기를 듣고만 있는 걸까. 이런 대답을 하는 걸까.

“...닮지 않았나?”

“진짜- 언제까지 말하게 할 거예요. 폐하는 폐하가 조각 같은 미남이라고 생각하시나 보죠?”

“...내가 더 잘생겼지- 음... 그래도 언뜻 닮긴 했지?”

아니, 이게 아닌데- 싶으면서도 멍청하게 여자에게 끌려간다. 여자는 점점 더 화가 나는 것 같다. 마치, 그녀의 말에 끌려 멍청한 대답을 하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아니요.”

“...”

“아닙니다. 전혀 닮지 않았어요. 폐하, 못생긴 걸요.”

하지만, 그녀도 끌려오고 있다. 셀리안의 멍청한 대답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하면서도 절실하게 대답하고 있다. 이 이야기가 그에게 매우 중요하다는 걸 아는 것처럼.

왜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는 거지?

왜 나는 이런 대답을 하고 있는 거지?

의문이 들면서도 사무치게- 그래, 사무치게. 터무니없는 대응이다. 그저, 셀리안 크레이누이기에 그저 들을 수 밖에 없고, 눈앞의 여자이기에 이야기해줄 수 밖에 없는 것 같은 헛소리.

“...하하”

셀리안은 약간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안도하는 표정이 되는 여자를 보며.

*

솔직히, 에피룬 크레이누의 환신이라고 선언하기로 했을 때 이상하게 그렇게 불쾌하지 않았다. 아니 불쾌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괜찮았다.

그게 신기했다. 세류 키스톤을 사칭했던, 그 용의 주인이 그 사단을 만들었을 때는 정말 그 자리에 있던 자들을 죄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었는데.

‘이상하군.’

어쩌면, 너무 절망한 건지도 모른다. 절망해서 감정이 말라붙어버린 건지도 모른다. 그 증거로 이 신전에 와 있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 저도 모르게 방문하던 그 신전이다. 이제는 그 지긋지긋한 녹색의 상자가 없는, 이 신전에 몇 시간이고 멍하니 있는 걸 보면, 자신이 혼란해 있는 건 알 것 같다.

하지만, 생각외로 그렇게 괴롭지 않다. 이보다 더 괴로운 게 어떤 건지 알고 있다. 예컨대 그날, 12살의 생일날 용들이 찾아왔던 그날, 죽을 것 같이 힘들었는데.

‘정말 이상해.’

생각하며,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인다. 여전히, 오감은 마비된 것 같지만,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귀를 기울였다.

알고 있다.

이 발걸음을, 이 기척을- 다급하게 다가오고 있다.

다급하게 뛰어와, 신전 앞에서 잠시 멈칫했지만 곧 거침없이 문을 열었다.

어떻게, 이 신전을 아는 걸까.

어떻게, 감히, 왜-

“...리안.”

“...역시 너군.”

모른다. 여자가 어떻게 그런 걸 아는 건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없다. 왜 여기 있는지조차, 사실은 모른다. 알 수 없는 그대로, 어느샌가 방치하고 있지만 사실 중요하지 않다. 중요하지 않아졌다.

심장도, 감정도, 오감도 마비되어 더 이상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 않아졌다고 생각했지만.

‘이상한 일이군.’

검은 눈동자가 걱정스러운 듯 자신을 보고 있다.

‘정말 이상해.’

중요한 건 여자가, 셀리안 크레이누가 이 신전에 있다는 걸 알고, 그를 위로하기 위해 왔다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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