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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랑찰랑거리는 녹빛의 호수를 바라보며 히아신스는 작게 고개를 갸웃거린다. 고민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냥 넘어가겠다고 하기에는 키오후의 열렬한 눈동자가 걸릴 것이다. 그녀는 빤히 녹빛의 물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녹빛의 물 속에서도 히아신스의 에메랄드 같은 눈동자는 아름답게 반짝였다.
“그... 되게 별거 아닌 건데.”
“괜찮습니다. 물뱀의 호수는 사실...”
키오후가 흰 눈썹을 장난스럽게 휜다.
“소소한 고민을 들어주기 위해 있는 거니까요. 어머니 같은 존재죠.”
“하하, 어머니인가요.”
히아신스는 눈가를 가볍게 접어 마주 웃는다. 그녀에게 어머니의 기억은 없다. 그렇기에 새삼 그 말이 정겹게 들렸을지도 모른다.
“음...최근, 꿈을 꿔요.”
“꿈?”
"..."
“으응. 최근이라고 할까. 언제부터였지. ... 아, 그래... 에드나...가.”
“에드나?”
“어떤 꿈인지 물어도 될까요?”
“아, 네. 그게.”
에드나의 이야기에 내가 되물었지만, 이야기는 빗나간다. 히아신스의 눈이 기억을 더듬는 것처럼 가늘어졌다. 그것을 막고 다시 끼어들기도 뭐해 입을 다물고 있으면 키오후의 입가에 문득 짙은 미소가 걸린다. 그는 호박색 눈동자를 깜빡이지도 않고 히아신스를 보았다.
“그게... 부끄럽지만. 폐하의 꿈이에요.”
“호오. 셀리안 폐하의?”
“네, 폐하가 저를 보고 있어요. 다정하게 웃고 계시죠. 본 적이 없는 곳에서 본 적이 없는 얼굴로- 그런데, 그게 언젠가 있었던 일 같아서.”
히아신스는 어느새 눈을 감고 있다. 그 꿈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갑작스레 결혼식이 당겨져서 그런 걸까요. 잘 생각해보면- 결혼 이야기가 등장한 다음부터 같아요.”
“그래서, 아가씨의 고민은?”
“이게, 언제 있던, 아니 실제 있던 일인지 궁금해요.”
히아신스가 다시 눈을 떴다. 녹빛의 눈동자가 똑바로 키오후를 바라본다. 키오후는 황홀한 것처럼 히아신스의 눈을 바라보았고, 그가 손가락으로 호수를 가리킨다. 히아신스는 고개를 내려 호수를 본다. 속삭이듯 고민을 이야기했다. '제 꿈은 진짜 있던 일인가요?' 라고.
호수의 물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도 히아신스도 놀랐다. 물뱀의 예언- 그것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호수의 물은 찰랑거리며 동심원을 그린다.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간다. 히아신스는 홀린 것처럼 호수를 바라보았다. 호수에 점점 무언가가 떠오른다. 그것은 형상이다. 여자와-
“아.”
그 순간- 심장이 조여오듯 아팠다. 아프고 그립고, 그런 감정에 취해 눈을 감으면 내 등 뒤로부터 하얀 손이 뻗어 어깨를 감싸안는다. 차가운 손끝에 나는 눈을 떠 손의 주인을 확인했다.
“히아-”
“네?”
히아신스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두 사람의 히아신스가 나를 보고 있다. 한 사람은 녹빛 눈동자가 생기 있게 빛나는 히아신스다. 다른 한 사람은 머리가 뭉개져, 그 초록의 눈이 멍하니 벌어져 있는 히아신스였다.
히아신스의 가위였다.
“아.”
그럴 리가. 동상에서 누군가가 떨어질 리가. 머리가 혼란스럽다. 부들부들 떨고 있으면 히아신스가 놀라 내 어깨를 붙잡는다. 히아신스의 시선이 흩어지자 호수의 동심원이 잠잠해진다.
"하영, 무슨 일이에요?"
"..."
히아신스의 가위는 내 뺨을 살며시 쓰다듬고, 동시에 나를 걱정한 히아신스의 손이 그 손에 겹쳐져 내 뺨을 쓸었다. 겹쳐진 손이 기묘하다.
“어라?”
히아신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자신의 손을 떼 바라보았다. 곧 히아신스의 가위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뭘까요....? 아, 하영, 괜찮나요?”
“아, 미안해요. 갑자기 현기증이.”
나는 기묘한 현상에 조금 멍한 상태가 되어, 나를 걱정하는 히아신스에게 간신히 사과를 했다.
'뭐였지.'
키오후에게도 사과해야겠지. 호수의 예언을 방해한 게 된 셈이다. 정신을 추스리고, 키오후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돌리자마자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나를 보고 있었다. 키오후의 호박색 눈동자는 무기질했다. 딱히, 살기를 품고 있다거나 적의를 갖고 있는 건 아니지만, 마치 사물을- 아니, 아니다. 길을 걷다 발을 걸리게 하는 돌맹이, 그런 종류의 무언가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
“후후.”
그러고 있으면, 키오후가 다시 미소지었다.
“다시 확인해봅시다.”
“아? 네?”
"괜찮으시죠? 하영도."
"...상관없어요."
"하영이 괜찮다면."
히아신스는 여전히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키오후가 만족스럽게 웃는다.
“자- 꿈에서도 볼 정도의 사랑이라니- 저는 당신이, 지금의 당신이 마법왕과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 저는 정말 기쁩니다. 그래서, 그 기억의 출처를 찾아드리고 싶습니다.”
“아, 네. 감사해요. 하지만, 사실... 그냥 꿈이고. 실제 일어나지 않은 걸 수도 있어서.”
"글쎄요. 그건 호수가 대답해주겠죠?"
히아신스의 시선이 호수에 닿고, 호수가 다시 찰랑거리기 시작했다.
‘사랑이라고?’
나는, 호수가 아닌 히아신스를 새삼 바라보았다. 그녀는 키오후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아니, 왕의 약혼녀인 그녀가 그 말을 부정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서로 사랑한다? 물론 그들은 서로를 아낀다. 다만 내 기억속의 히아도, 셀리안도 서로에게 연애 감정은 없었다. 사랑했던 걸까, 하고 몇 번이고 이 세계에 와 직접 눈으로 보고 히아신스의 가위를 보며 고민했지만, 역시 둘은 연애 관계는 아니었다. 셀리안도 그랬다. 하지만 누구보다 서로가 소중했다.
앞으로 사랑하게 되면 좋겠다고, 그게 최고라고는 생각하지만- 조금 찜찜한 기분이 든다. 두 사람이, 아니 히아신스가 셀리안을 사랑한다는 건 전혀 안 좋은 이야기가 아닌데도. 마치 뭔가 뒤틀려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히아신스님!"
그때, 정원 밖에서부터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녀들이었다. 히아신스의 고개가 돌아가고 물은 잠잠해진다.
결국 그날은 그걸로 끝이 났다. 키오후는 어쩔 수 없다며 웃었고, 히아신스는 미안한 듯 고개를 숙였다. 나는, 히아신스와 함께 그 자리를 벗어났다. 내 뒤를 따라붙는, 아니 그저 히아신스를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키오후의 시선이 신경쓰였지만, 나는 어쩐지 도망치듯이 히아신스를 데리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이상한 일이지, 나중에 확인하면 걱정 했던 추락사건이 새로 일어난 것도 아니었고 키오후 역시 딱히 무슨 짓을 하려던 건 아니었다. 다만, 기묘한 위화감만이 남아 있었다.
*
그날 밤, 꿈을 꿨다. 그것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끔찍한 꿈이었다.
히아신스가 동상 위로부터 추락한다. 그것을 셀리안 크레이누는 보고 있다. 무심한 눈빛. 그녀의 눈동자는 셀리안에게 고정된다.
초록의 눈빛이 일렁인다. 그런 게 보일리 없다. 거리는 멀고 멀어 그녀의 눈동자가 무엇을 담는지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초록 눈동자는 곧 사라졌다. 추락해 뭉개졌기 때문이다. 그녀의 얼굴이 부서져 형태도 알아보기 힘들게. 그것을 끝까지 지켜본 셀리안은 동상으로 다가가 나오는 범인의 목을 잘라버린다.
잘라버린 범인의 눈동자는 은색이다. 얼굴도 기억 안 나는 흔해 빠진 얼굴이었지만, 은빛 눈동자가 이상할 정도로 담담하게 셀리안을 보았고, 그 눈에 언뜻 슬픔이 섞여 히아신스를 응시하던 것 같다고.
그런 기묘한 기억의 꿈-
다시 장면은 바뀐다.
히아신스의 장례식이었다. 아름다운 전장의 에메랄드가 땅에 묻히는 날, 비가 왔다. 비는 오고, 에이나 가의 가주가 울고 있다. 그는 잃은 딸에 눈물을 흘린다. 오열하는 아비를 보는 엘킨의 손이 떨리고 있다.
셀리안은 무표정하게 그것을 바라본다. 그런 그에게 헤르티아가 다가온다. 헤르티아는 폐하를 위로하고 싶다고 이야기했고 머뭇거리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녀는 어쩐지 기뻐보인다.
셀리안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그에게 닿을 때 헤르티아는 항상 제정신이 아닌 황홀함에 붙잡혀 있을 때가 많았으니까.
시선은 다시 옮겨져 장례식장에는 안나가 있었다. 그래, 지난 전생에 안나는 죽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셀리안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기분 나쁜 여자에 대한 이상함 따윈, 그역시 금방 잊혀 졌지만 이상한 장면이긴 했다.
그녀는 세상을 잃은 것 같은 표정으로 히아신스의 묘를 노려보고 있고, 그 옆에는 녹색의 뱀이-
뱀?
*
꿈에서 깨어났다. 눈을 깜빡이면 아직 하늘은 어둡다. 한밤중이었다. 지끈거리며 찾아온 두통에 머리를 부여잡는다. 머리가 깨질 것 같다. 기묘하게 가슴이 두방망이질 친다. 달아난 잠에 일어나려고 하면 몸은 옴싹달싹도 할 수 없다.
무언가가 날 잡고 있었다.
“...”
무언가, 라고 했지만 어렴풋이 뭔지 알았다. 내 허리를 가느다란 하얀 손이 붙잡고 있다. 히아신스다. 낮에 본 모습과 완전히 동일한, 몇 번이고 본 히아신스의 가위. 뭉개져 부숴진 검은 머리와 뻥 뚫린 것 같은 공허한 눈동자, 그녀는 나를 보고 있었다.
“...히아.”
가늘게 그녀의 이름을 읊조린다. 불안하게 그녀를 보며 읊조렸다. 그녀는, 어쩐지 평상시와 다르다. 슬퍼보인다. 슬퍼보이는 눈으로 나를 본다.
언제나 그녀는 나의 부담이었다. 무섭다고, 죄를 추궁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아니면 무언가의 경고, 무엇인가 하라는 경고처럼.
하지만, 새삼 바라본 그녀는 연약해보인다.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연약함으로 나를 껴안는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마치 애원하듯이. 구원을 요청하는 것처럼.
나는 머뭇머뭇 그녀에게 손을 뻗는다.
“히아, 왜-”
왜 나를 찾아오는 거야. 나에게 무얼 원하는 거야. 라고-
순간 히아가 몸을 떨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를 내 쪽으로 껴안았고, 순간 내 발을 감싸 올라오는 위화감에 눈을 깜빡였다. 밑에서부터 녹색의 줄기들이 내 발을 감싸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녹색의 줄기들은 내 다리를 타고 올라와 붉은 장미를 피우며 나를 옭아맨다. 가시 없는 장미 줄기라 아프거나 하지는 않지만.
엄밀히 말해, 내가 아닌, 내가 껴안고 있는 히아신스의 가위를 향해 올라오고 있었다. 그렇게 직감했다. 줄곧 께름칙하다고 생각했던 히아신스의 가위를 나는 보호하듯 감싸 안는다.
"윽!"
그러자 다리를 아프게 조여온다. 나조차 위협할 것처럼 독살스럽게 압박해왔다. 히아신스의 가위는 저 줄기에 닿는 것만으로도 찢길 듯이 연약해 나는 눈을 감았다. 줄기들은 내 다리를 타고 점점 위로 올라온다. 아무리 감싸도 소용없다, 소용없다고, 나는 지킬 수 없다.
'지킬 수 없다니. 뭐가?'
내가 지켜야 할 건 이런 비참하고 초라한- 이미 죽어 뭉그러진 히아신스의 시체가 아닐 텐데, 서글픈 회한과 동시에 밀려오는 건 나 자신의 무력함이었다.
어쩌면 이건 꿈일지도 모른다. 히아신스의 가위가 있고, 이상한 나무 줄기가 나를 감싸고. 흔히 꾸는, 왜 이런 걸 흔히 꿔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 곳에서 흔히 꾸기 시작한 꿈속의 꿈인지도 모른다.
꿈- 그래, 계속 꿈을 꾸고 있다. 그때부터 줄곧.
하지만.
"...도와줘."
정말로, 꿈이든 뭐든 일단은 누군가 나를 도와주면 좋겠다. 내게 히아신스를 지킬 힘을 주면 좋겠다. 어떤 히아신스든, 지키고 싶다. 윤하영이 윤하영에게서 도피하는 것 따위, 일어나지 않도록.
"도와줘?"
그때, 내 위에서부터 목소리가 들렸다.
*
창문은 열려, 새까만 어둠 속에서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 앉아서 나를 보고 있다. 렌이 입고 있던 옷과 비슷한 검은색 넝마 같은 옷을 입고 달빛을 받고 창에 웅크리고 앉은 건 어느새 이름도, 정체도 알 수 없어진 남자.
"그건 널 죽일 의도는 없어보이지만."
남자는 창틀로부터 폴짝 뛰어내려 내 침대로 느릿하게 걸어온다. 걸어온 뒤 품에서 훌륭해보이는 칼집을 꺼내 칼을 꺼냈다. 꺼내든 칼은, 내가 선물한 식칼이다. 그는 식칼을 꺼낸 뒤 나를 보며 생글 웃는다.
"..."
"..."
"..."
"어쩌라고?!"
본격적으로 허벅지까지 올라와 조이고 있는 나무줄기가 아프다. 가시없는 장미 나무 줄기로 인해 치마는 뒤집어졌지만 수치감보다는 통증이 강한데 이 남자는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도와준다고 해놓고 비싼 칼집에서 식칼을 꺼내 나를 그저 보고만 있다.
"...이거 기억 안 나?"
"뭐?"
"..."
"..."
대답하기 싫다. 뭔가, 짜증스럽다. 이 멍청이는 어떻게 그런 일을 한 주제에 여전한 걸까.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내가 준 거잖아."
"그래! 이걸로 뭘 하면 좋을 것 같아?"
"..."
"..."
좀 적당히 해라.
만화라면 저 얼굴에 효과음으로 '두근두근'이라고 표기 될 것 같다.
"...큿. 개새..."
"여전히 입이 험하네, 너는-"
빙글빙글 웃으며, 빙글빙글 칼을 돌린다. 기다리고 있다, 내 대답을.
아프다. 히아신스의 가위를 그 줄기로부터 떼어놓으며 껴안고 있기도 버거울 정도로 줄기들은 용서가 없이 나를 조여오고 있다.
"...도와줘."
"그래, 그래!"
내 말에 고개를 크게 끄덕인 그는 그 식칼로 이 비정상적인 나무줄기를 단번에 베어낸다. 신기하게도 그 칼이 나무 줄기의 몇 부분을 찌르는 순간 그것은 기묘하게 몸을 뒤틀며 녹아간다. 녹아가는 순간 그것이 나무줄기라기보다는 뱀-이라고, 초록의 뱀이며 붉은 장미꽃은 혀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확인하기도 전에 사라졌지만 말이다.
============================ 작품 후기 ============================
yev님이 또 팬앝을... 이로서 류는 최다 팬앝 보유자로 등극했습니다.ㄷㄷㄷ
덧붙여, 뜰에 지나치게 인물이 많은 이 몹쓸 글의 등장인물 소개를 올려보았습니다.>ㅁ 팬앝을 골고루 쓸 수 있도록 했어용.
항상 선추코 감사 드립니다.
배고픈 밤입니다. 복숭아를 먹으며 살고 있습니다.ㅜㅜ
옆집바나나 님 // 옆집 바나나님의 코멘을 읽을 때마다 참 좋네요! 이 부끄럽기 그지없는 글을 즐겁게 봐주시는 것 같아 기쁩니다. ㅎㅎ 저도 생각해봤습니다. 저 OOO은 무엇인가,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