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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나 패러독스-94화 (94/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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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리안 크레이누는, 공허한 시선으로 신전 안, 선황제의 묘를 바라보았다. 엄밀히 말해서는 선황제의 묘들- 그 중앙에 있는 녹색의 상자를 죽일 듯이 보고 있었다.

생일에는 좋은 일이 있었던 일이 없다. 애초에 별로 의미조차 두지 않았건만, 점점 최악으로 치닫는다.

자식에게 간만에 닿아, 고작 한다는 말이 공허한 찬양일 뿐인 어미도,

그 자신을 깎아내릴 뿐인 추잡한 비난을 서슴지 않는 아비도,

머저리처럼 입 다문 자신도,

그것을 바라보는 엘킨 다이브의 충직한 시선조차-

아무래도 좋다. 더 비참해질 수도 없다. 비참해질 것도 없다.

“하찮군.”

그래도-

무너지지 않는다. 고작 그까짓, 몇 백년도 더 된 옛날 이야기에 사로잡혀 무너지지는 않겠다고 마음 깊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어린 시절부터 생각했던 것, 결코 그런 것 때문에 망가지지 않겠다고, 상처 입지 않겠다고, 무너지지 않겠다고

몇번이고 생각했던가.

아무래도 좋다고 자포자기하면서도 마음을 다잡기 위해 이 신전에 온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성물의 상자가 있는 신전, 자학적이게도 마음이 무너질 것 같을 때면 이곳으로 와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올곧은 성군이, 제대로 된 인간이, 휩쓸리지 않고 앞으로 걸어갈 셀리안 크레이누, 그 자신에 대한 자긍심으로.

그 따위 억지로 부여잡은 자긍심, 한 줌 먼지도 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에게는 그외에는 없었던 것이다.

"폐하, 계십니까."

한참을 그러고 있으면, 곧 신전의 문이 열리고 엘킨 다이브가 신전으로 들어왔다.

'허락도 하지 않았건만.'

셀리안은 조금 웃었다. 정중한 주제에, 과감할 때가 있다. 건방진 녀석, 하고 약간 웃었다. 그 일이 있고 처음으로 웃음이 나왔다. 문이 열린 그곳에는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푸른 남자가 서 있었다.

"폐하-"

엘킨 다이브다. 그의 기사, 그의 고결한 기사. 엘킨 다이브의 눈에는 셀리안 크레이누에 대한 존경심만이 오롯이 차올라 있다. 지금은 깊은 걱정이.

정말이지, 우직하고 그러면서도 둔감하지 않고- 좋은 부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의 일은 부끄럽고 수치스럽지만, 위로가 된다. 모순된 마음이었다.

엘킨 다이브의 시선과 셀리안 크레이누의 시선이 얽힌다.

“...”

“...”

짧은 시간이었지만, 셀리안 크레이누는 엘킨이 그의 공허를 이해했음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죽이고 싶을 정도로 수치스러울 텐데, 그 상대가 엘킨 다이브이기 때문일까. 그마저도 위로처럼 느껴졌다.

실제, 아마 그 상대가 엘킨이 아니라 해도 셀리안은 죽이기는커녕 성군의 웃음으로 마주했겠지만.

"..."

"찾게 했군. 나가지."

그런 감정도, 자신의 시간에 침범해온 기사에 대한 머슥함으로 바뀌어 셀리안은 발걸음을 옮긴다. 위로 받았고, 그가 마음에 들지만 셀리안 크레이누는 엘킨의 존재만으로 흔들리지 않는다. 자신의 마음도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아직은, 아직은 혼자로서 충분했다.

그런데, 왕의 명에도 엘킨은 나가지 않는다. 셀리안이 의아하게 바라보면 그의 청명한 푸른 눈이 투명하게 셀리안 크레이누를 보고 있다. 그리고-  기사답게, 우직하게, 고결하게 그 공허에 발을 내딛는다.

"저는 폐하의 기사입니다."

"알고 있다."

"'제가' 지키는 건 폐하입니다."

"..."

"'제가' 지키는 건 '셀리안 크레이누' 폐하입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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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란 눈동자는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나역시 엘킨을 멍하니 바라본다. 이제 내 눈동자에도 푸름의 기사, 엘킨 다이브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를 담은 푸른 눈이 스르륵 감긴다. 당장 울 것 같이 느껴지는, 그 푸른 호수에 내가 감겨 사라진다. 나도 눈을 감았다.

나를 안은 손은 떨리지 않았다. 묵묵히 나를 껴안은 채, 살짝 닿은 입술은 눈이 감기는 걸 신호로 벌어졌다. 나는 거부하지 않았다. 엘킨의 손은 차가웠지만 그의 입안은 따뜻하다.

갈구하는 것 같은, 엘킨답지 않은 절박한 입맞춤이다.

녹아간다. 스르륵 녹아- 머릿속은 그로 가득 찼다. 그것은 황홀함과 당혹감과 배덕감, 그리고 불안이다.

"..."

"...하아-"

얼마나 지났을까, 입이 떨어지고 서서히 엘킨의 눈도 떠진다.

‘왜 키스인 걸까.’

두근거리고 어지러운 머릿속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엘킨답지 않다고.

입술이 떨어지고 그 푸른 눈에 내가 담긴 걸 확인했다. 흔들리는 고요한 눈동자. 그는 이상하게 만족스러운 얼굴이었고, 나는 내 의문을 입에 낼 수 없었다.

상황에 맞지 않는다느니, 첫키스에 설레느니, 그런 걸 넘어 울렁거리기 시작한다. 나는 엘킨을 좋아하고, 엘킨도 나를- 좋아하고, 그 감정을 넘어 머리를 아프게 하는 흐름의 정체를 알 수가 없다.

"...그런 얼굴."

"?"

"저에게는 항상 그런 얼굴이시군요."

"엘킨?"

"...비단 오늘만이 아닙니다."

엘킨은 꺼질 것처럼 미소짓다가 가볍게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것은 의식 같기도 하고 위로 같기도 하고- 정말 이상하지만 무언가 참기 위한 행위 같기도 했다.

"그래도, 적어도 이제는 평상시의 눈으로 돌아오셨군요."

"평상시의?"

"...저를, 보고 계십니다."

감정은 뒤섞여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다. 가늠도 할 수 없는 와중에 언젠가의 꿈이 떠올랐다. 왜인지는 알 수 없다. 왜 이 타이밍인지는 알 수 없다. 망친다면 자신, 사랑에 무너진 셀리안 크레이누의 환생인 나에 의한 악몽이라고 생각했던 꿈이, 어째서 엘킨과의 입맞춤 뒤 떠오른 것인지.

그 꿈은 아카인 영애에게 찔린 직후 꾼 꿈이다. 뒤로는 시체, 수많은 시체가 있고, 떨어져 뭉개진 히아신스도 있었다.  그럼에도 나와 엘킨은 틈도 없이 안고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사랑을 속삭인다.

그 떠오름이, 오싹해서. 머리가 아프다.

전혀 다른데. 히아신스는 죽지 않았다. 죽은 건 안나, 상처 입은 건 셀리안. 셀리안은 상처 입었을 테고, 그것은 내가 아는 전생보다 최악으로 뒤틀어진 형태이긴 했지만 한가지 분명한 건 그는 결코 전생에 의해 무너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다짐했던 걸 기억한다.

엘킨에게 사랑에 빠지기 전, 셀리안이 그 신전에서 했던 맹세를, 어린 시절부터 품은 소망을, 지금의 셀리안 크레이누 덕에 기억해냈던 것이다. 젊고 훌륭한 왕이 품었던  자긍심을.

그렇다면, 이 비참하기 그지없는 구상은 윤하영에게서 비롯된 것이어야 하건만, 나는 불안하게 엘킨을 바라보고 있다.

'말도 안돼.'

엘킨은 다르다. 엘킨은 누군가를 희생시키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셀리안과는 다르다. 그는 변하지 않는다. 게다가 지금은 그런 상황조차 아니다.

결국 터무니없는 생각인 것이다.

“하영?”

나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셀리안에 대한 걱정 때문인지, 아니면 말도 안 되는 엘킨에 대한 기우 때문인지, 그도 아니라면 단지 그의 키스에 주책없이 떠는 것 뿐인지 조금 휘청거렸다. 어느쪽이든 좋다.

그 뿐이라면.

"아."

"..."

"감사해요."

비틀거리는 나를 지지한 건 엘킨이었다.

"...정신없이, 죄송합니다."

"아뇨,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이상한 말을 해서."

"그런-"

평소의 엘킨 다이브로 돌아온 기사는 단단하게 지지해 휘청거리는 나를 부축하듯 안았다. 부축하듯 안고 눈을 찌푸렸다. 걱정스러워 보이는 눈이다. 평상시와 같은 다정한 눈이었다. 다정하고 조금은 괴로워보이는, 죄책감이 섞인 눈이었다.

“그, 어째서... 방금 전?”

그에 기해, 나는 기묘한 배덕감의 이유를 물었다. 말도 안 되는, 방금 전의 구상을 완전히 지워버리기 위해서였다.

"왜, 저에게 입을 맞추셨나요?"

*

셀리안 크레이누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최악이었다. 그는 내 트라우마의 근원이며 사랑에 대한 불신의 상징이었다. 그런 그가, 실제로 만난 그가, 너무도 윤하영은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빛나서. 그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에 점점 감정은 기묘하게 방향을 틀었다. 나는 이 시기의 셀리안 크레이누를 지키고 싶었다. 돌아간다면, 그가 변하지 않는 걸 확인한 뒤면 좋겠다고, 어느새 생각하고 있었다. 절박하게. 그것은 지독한 연민이자 자기애와 가까운 감정이었다.

반면, 엘킨에 대해서는- 이 세상 누구를 마주하는 것보다 괴로운 동시에 안심하는 것도 있었다. 그는 변하지 않는다. 그는 무너지지 않는다. 그는 망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강력한 믿음이었다. 그는 셀리안 크레이누가 그에 대한 사랑에 망가지는 와중에도 변치 않고 그대로였으니까.

그가 나를 좋아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그가 사랑을 하면 어떤 행동을 취할지 예상외의 연속이었지만, 엘킨에 대한 믿음은 어떤 의미로는 셀리안보다 강고했다고 봐도 좋다.

그런 믿음을 담아 나는 물었다.

확신을 위해.

"왜, 저에게 입을 맞추셨나요?"

그의 푸른 눈동자는 여느때와 같이 흔들림이 없었다. 단지 숨기기 위해 가라앉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가 나에게 숨길 감정 따윈 없었다. 없어야 했다.

엘킨은 한참을 나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폐하 때문에... 괴로워보였으니까요.”

“네?”

나는 눈을 깜빡였다. 순간, 그 대답에서 위화감을 느끼긴 했지만 나는 안심하는 걸 택했다. 안심할 수 있는 방향으로 입이 열린다.

"걱정, 해주신 거군요?"

그런 의미가 아닐지 몰라, 하지만 내가 아는 엘킨 다이브라면, 아마도 그랬을 거라고. 그의 갑작스러운 키스에 나름대로 이유를 찾아 묻자 엘킨이 멈춘 것처럼 나를 마주했다.

"위로해주신 거죠? 제가 폐하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

내 안전을 위해 나를 잡고 있던 그를 뿌리치고, 한나라의 왕비인 헤르티아의 입을 막으려 하고, 그 소란의 중간에 있었던데다가, 그 후에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셀리안에 대해서만 몰입하고 있었다.

걱정할 만하다. 엘킨이라면 걱정했을 것이다.

"그, 지난 번에 이야기한 꿈에서 폐하가... 그, 이상한 이야기일지 모르지만...그, 성물과 관련해 괴로워하는 걸 본 적이 있어요."

"..."

"그, 그래서... 괜히 민감하게 걱정했던 것 같아요. 단지 보고 애매하게 추측해 걱정하는 저보다 폐하가 괴로울 게 뻔한데... 저야말로, 쓸데없는 걱정을 해서 엘킨의 걱정까지 사버렸네요."

그게, 맞는 거지? 엘킨 다이브라면, 고결하고 충직한 엘킨 다이브가 이런 상황에서 내게 키스를 할 이유는 그 뿐이다.

그는 나를 좋아하니까, 아마도 셀리안 때문에 이상하게 넋이 빠진 나를 걱정해서.

“엘킨?”

나는 나못지 않은 복잡한 시선으로 나를 보는 기사를 재차 바라보았다.

“폐하를...”

엘킨은 나를 잡은 채, 나에게서 시선을 빗겨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을, 달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검은 하늘만이 담겨 달은 투영되지 않았다. 그럴리 없는데.

“폐하를?”

그 말에 재촉하듯 이야기하면 엘킨은 조금 웃었다. 폐하는-의 뒤를 기다리고 있으면 그가 천천히 나를 본다. 달의 역광 때문에 그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이제 폐하를 뵈러 갈 겁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에?”

"폐하는 강하신 분이지만 당신이 걱정하시는 것도 이해는 갑니다. 당신을 방에 데려다 준 뒤, 폐하께 돌아가 그 분의 기사로서 지지해드릴 겁니다."

"다, 당연하죠! 아, 시간을 빼앗아서 죄송해요."

"아뇨, 저는 당신을 좋아하는 걸요. 조금이라도 함께 있고 싶고 걱정도 되어 욕심을 부렸습니다."

"아."

"그리고, 가능하면 헤어지기 전 당신이 계속 걱정하시지 않길 바란 겁니다."

"그렇군요. 폐를 끼쳤네요."

그의 다정한 말에 진심으로 안심한다.

"그 방법이 좀 이상하긴 했지만."

"하하."

그래, 이후 엘킨은 셀리안에게 가는 거다. 알고 있었는데. 나 같은 것보다, 엘킨이 그의 곁에 있어주는 게 좋을 것이다.

내가 헤르티아를 어설프게 막거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그를 위로하는 것보다 엘킨 다이브가, 그 존재가 분명 셀리안 크레이누를 누구보다 깊게 위로하리라고. 변하지 않는, 올곧은 엘킨이 곁에서.

"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되면 다시 찾아 뵙겠으니, 당신은 아무 걱정하지 말고 푹 쉬세요.”

그는 상냥하게 미소지으며 내 입에 다시 한 번 입을 맞췄다. 방금과는 다른 가벼운 입맞춤은 그야말로 잘 자라는 인사였다. 그 상냥한 입맞춤에 오히려 얼굴이 달아올랐다.

*

방에 돌아오고 수분, 나는 멍하니 내 입술을 쓸었다. 몇 번이고 가볍게 한숨을 쉰 뒤, 몸을 뒤집으면, 머릿속이 뒤죽박죽인 채로 잠에 빠져들었다.

엘킨 덕분일까, 조금은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안정이 된다. 이상한 위로법이고, 새삼 생각하면 얼굴에 열이 오르지만- 나는 좀더 침착하게 셀리안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그는 괜찮을 것이다. 그는 전생에 의해 무너지지 않는다. 상처 입지만 무너지지 않는다. 그를 무너뜨리는 건 사랑이다. 셀리안이 엘킨을 사랑하게 되는 것도 곤란하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그것도 조금 다르지 않을까 생각했다.

다르지 않다 해도 지금의 셀리안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엘킨 다이브뿐이다, 나의 존재가 섞여 상황은 이상한 방식으로 꼬여가지만, 엘킨만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괜찮을 거야.'

라고.

그날,

잠시 본 꿈속에서 나는 엘킨과 있었다. 그는 나를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나도 엘킨을 오래도록 쳐다본다. 하지만 우리 둘은 서로에게는 닿지 않는다. 그냥 오래도록 쳐다보는, 그런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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