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3 side story 5 =========================================================================
검은 용은 파괴의 용. 그를 굴복시킨 건 에피룬 크레이누, 그것은 역사로 남겨진 기록이지만 검은 용 자체에 대해서는 그밖에도 여러가지로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인간에게 지나치게 많은 해악을 끼친 검은 용이기에, 모순되게도 인간에게 가장 친숙한 용 또한 검은 용이었다. 그의 일화는 변형을 거쳐 아이들의 동화나 전설 안에서는 어떤 형식으로 굳어져 있었다.
예컨대
검은 용이 마을을 습격했는데 마을의 현명한 소년이 기지를 통해 그를 몰아냈다느니
검은 용이 여자들을 잡아 희롱한 뒤 탑에서 떨어뜨렸다느니
검은 용이 공주를 붙잡아 탑에 가뒀는데 용사가 구하러 오는 이야기라던가
그 공주와 검은 용이 사랑에 빠져 검은 용이 인간이 되었다던가
흔해빠진 이야기들이었지만, 이 이야기들은 실제 이런 저런 사실이 합쳐지고 왜곡된 것들이었다.
인간과 사랑에 빠진 검은 용과 사람을 추락시킨 검은 용은 다른 용이며, 기지를 발휘한 마을의 현명한 소년과 용사는 동일인물이었으니 말이다.
내려오는 전래 동화들이 그랬듯이 원형을 잃은 구전들은 사실과 꾸민 이야기가 교묘하게 섞여 역사로부터는 멀어져 있었다.
side story 5
검은 공간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공간은 아니고, 그저 빛이 들지 않아 어두웠고 유난히 가구나 장식이 없는 것뿐이었다. 그냥, 윤곽이 잡히지 않을 만큼 조명이 좋지 않은, 평범하고 허름한 방이었다. 잘 보면 딱딱한 나무 침대가 하나 있었는데 이불보조차 펴 있지 않다. 이 단 하나 있는 가구인 나무 침대에는 하얀 신관 차림의 남자가 누워 있다.
남자는 이 어두운 방에서, 유일하게 빛났고 동시에 존재감은 극히 적은 기묘한 존재였다. 누구보다 신성하지만, 반면 아무런 색도 없는 것 같은 하얀 남자. 그는 침대 위에서 눈을 감고 키득거리고 있었다.
키득거리며 작은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구른다.
그 모습을 검은 소년과 붉은 청년이 바라보고 있다.
“하핫, 하하. 셀리안 크레이누의 그런 표정이라니. 큭큭, 정말 싫은가봐.”
“...이유를 모르겠어. 왜 자신의 전생을 그렇게 싫어하지.”
킥킥 웃는 류에, 검은 소년 엔실렌이 고개를 갸웃한다. 류는 진심으로 즐거워보였지만, 엔실렌은 그다지 유쾌해보이지는 않았다.
심란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는 엔실렌은, 그 전과 달리 상처 하나 없는 온전한 어린 아이의 모습이었다. 물론 외관 뿐이고 그 내부는 갈갈이 찢겨 있었다. 지치고 너덜해진 모습을 류와 진 앞에서 더이상 내보이기 싫어 겉모습만 어떻게든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이, 오히려 쓸데없이 지치게 했지만.
"정말, 이상해."
"그래? 나는 이해가 되니까 즐거운데. 후후"
"?"
눈은 흐릿하고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저 구석에 주저앉아 간신히 외관만 유지 한 채 몸 주변으로는 회복의 고리를 이리저리 펼쳐놓고 있었다. 보랏빛 고리가 그를 감싼 채 흔들거리고 있다.
'이해가 된다고?'
렌은 고리 안에서 무겁게 한숨을 토했다. 이렇게 다친 게 얼마만인지. 실제 에피룬하고 만난 날 이후 처음 같았다.
‘그때는 이후에 에피룬이 치료해줬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영혼에게 그때만큼이나 상처 입었지만 그 본인은 렌에게 관심조차 가져주지 않았다.
렌은 그 날을 반추했다.
그리운 날의 기억이다.
*
그때-
지금으로부터 몇 백년, 아니 천여년 전. 고대 키오스는 무너져가고 있었고 아직 마법왕 에피룬 크레이누가 이름을 날리기 전의 그 시절-
검은 용 엔실렌은 한창 화가 나 있었다.
그의 형제가 사라졌다. 간신히 찾았더니 하찮은 인간 여자를 선택해 인간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인간 여자는 이미 형제의 아이를 낳은지 10여년이 지났다고 한다.
형제는 그와 꽤 마음이 맞았지만, 그보다는 다소 내향적이었다. 심심함에 함께 하찮은 인간들을 습격하기도 했지만, 진마냥 인간들을 방관하는 일이 많은- 다소 얌전한 형제였다. 진과는 마음이 맞지 않았지만, 자신과 달리 얌전한 형제는 제법 좋아했다.
그랬던 형제를 얼마간 볼 수 없다 생각했더니, 인간 여자와 이어지기 위해 인간이 되어 있었다. 하찮은 아이, 하찮은 인간 여자, 하찮은 인간이 된, 그의 유일한 형제.
너무 화가 나서 그 여자와 닮은 평범한 갈색 머리의 갈색 눈을 가진 여자들은 죄다 잡아 형제가 사는 수도의 건물에서 한 명 한 명 추락시켰다.
평상시에 하던 장난과 별로 다를 건 없었다. 다른 게 있었다면 쉽게 질리던 그가 제법 오래 이 참사를 지속하고 있었다는 것과 다른 때와 달리 그 일이 즐겁다기보다는 짜증스러웠다는 것이 달랐다.
"인간은 이렇게 시시해!! 시시하다고!!"
검은 용은 소리 지른다. 포효한다.
마법에 묶인 채 붙잡힌 여자를 한 명 씩 떨어뜨릴 때마다 남은 여자들은 부들부들 떨었다. 그당시는 그렇게 높은 건물은 없었다. 건물이 높지 않은 만큼 다들 즉사는 하지 않았지만 어찌나 세게 떨어졌는지 떨어진 여자들은 머리가 깨진 채 밑에서 경련하고 있었다. 차라리 한 번에 죽는 게 나을 만큼 고통은 오래 갔고, 검은 용은 벌레처럼 고통에 몸부림치는 여자들을 보며 낄낄 댔다. 낄낄대다가도 화를 내며 다른 여자를 집어 던진다.
검은 용의 광기에 사람들은 공포와 원망에 떨면서도 차마 간섭하지 못했다.
검은 용은 인간을 혐오했다. 그래서 인간의 모습도 하지 않았다. 하지 않으니 할 줄도 몰랐다. 알 필요도 없었다. 거대한 검은 용이 인간 여자들을 입에 물고 탑에서 하나씩 떨어뜨리는 장면은 사람들에게 지옥도처럼 보였다.
"나와, 겁쟁이 자식! 쓰레기 자식! 인간 따위가 되다니!!"
용은 포효한다. 포효할 때마다 인간 여자의 머리가 깨진다. 다리가 부러진다. 손이 꺾인다.
"하찮은 인간이 되다니, 수치다!! 너도 이렇게 만들어주겠어!!"
한 명 더, 화를 내며 한 명 더 잡는다. 이번에 잡은 여자는 아이와 소녀의 중간에 있는 것이었다. 멍한 눈을 가진, 제법 큰 마나를 가졌지만 사용할 줄도 모르는 인간 계집애였다.
다른 인간과 달리 조금은 특별한 마나에 엔실렌은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이내 흥미를 잃고 던져 버린다. 인간 마나가 커봤자지, 검은 용은 비웃었다.
이번 계집애는 비명도 지르지 않는다.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듯 눈을 꼭 감는다.
"흥-"
재미없는 반응이었으나 하찮은 인간에게 비명을 강요할 것도 못 되었다.
그런데-
다른 여자들보다 작고 작아 이 높이에서도 즉사할 것 같았던 소녀는 죽지 않았다. 떨어지지 않았다. 분명 바닥을 향해 던졌으나 어느새 나타난 황금빛 공에 보호되어 안전하게 한 소년의 손에 공주님처럼 안겨 있었다.
"...끔찍하군."
소년은 주변에서 죽어가고 있는 뭉개진 여자들을 혀를 차며 바라보았다. 바라보다가 제 품안의 작은 소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소녀는 자기만큼 작은 소년을 놀란 것처럼 바라보았다. 황금색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아이였다.
"아, 괜찮아?"
"괘...괘, 괜찮아요."
"응, 다행이다."
붉은 눈동자는 태양과 같이 반짝인다. 소녀는 넋을 잃고 소년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 시선에 약간 쑥스러운 것처럼 소년은 멋쩍게 미소지었다.
"내 이름은 에피룬이야. 너도 참 봉변이다! 아, 이름은?"
"...아, 안나입니다."
"안나, 완전 예쁘네. 그런데 왜 존대를 써?"
"...그, 그게."
소녀가 머뭇거리면, 그 모습을 황당하다는 듯이 보고 있던 엔실렌이 씹어뱉듯이 이야기했다.
"...넌 뭐야."
검은 용이 불만스럽게 물으면 소년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자신만만하게 씨익 웃으며 여자 아이를 황금빛 공에 보호한 채 자신의 옆에 내려놓는다.
"좀만 기다려."
"야, 벌레, 내 말 무시하냐?"
"벌레? 글쎄, 쓸데없이 이런 짓을 하는 못된 도마뱀이야말로 벌레만도 못 하다고 생각하는데."
"뭐?!"
"당신이 내 삼촌이라는데, 책임지고 몇 대 때릴게."
남자 아이의 눈동자가 매섭게 빛났다. 용은 하찮은 소년을 비웃었다.
비웃었지만, 용은 그날 정말 무지하게 두들겨 맞았다. 인간에게, 아니 누군가에게 그렇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은 건 처음이었다.
*
‘흠씬 두들겨 맞았지.’
엔실렌은 그날을 반추하며 조금 웃었다.
그 아이가 바로 인간이 된 형제와 인간 여자의 아이였다. 형제도 인간 여자도 닮지 않았지만, 그 머리색과 눈동자는 그 어미의 아비가 가졌던 색이라고 이야기 하는 건방진 꼬마.
렌은 인간따위에게, 그렇게 하찮게 여겼던 인간의 아이에게 잔뜩 맞고, 이용당하고, 매료되었다.
11살정도 되었던 소년은 검은 용을 두들겨 패고, 그것도 모잘라 엔실렌의 기를 이용해 아직 죽지 않은 여자들은 다 살려냈다. 머리가 깨진, 죽어가고 있던 여자들 전부가 살아났다.
이 이야기는 당시 사람들 사이에 회자가 된다. 용감한 소년이 검은 용의 폭주를 막고 그의 희생자들을 기적으로 다 살려냈다고. 검은 용 이야기, 라고 여러 형태로 변형된 싸구려 동화로 지금도 남아 있다는 것 같지만 일부러 뒤적이지 않으면 찾기도 어렵게 된 이야기.
에피룬과 검은 용의 만남은 1년 후, 그와 진이 본격적으로 계약을 맺기 위해 소년을 찾아간 이후부터가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 제법 유명해질법한 그 전의 이야기가 역사로 기록되지 않은 것은, 당시 에피룬 크레이누가 너무 어렸고, 그가 도망친 공주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정식으로 기록되지 못했다.
그가 마법왕이 된 뒤에도 에피룬 크레이누가 자신의 공적을 공공연히 떠드는데 관심이 없던 것도 이유였다.
하지만, 적혀 있던 적혀 있지 않던 이것은 검은 용에게는 소중한 추억이었다. 그는 두들겨 맞긴 했지만 반성을 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런 건 불가능했다. 그 사건은 그에게 그저, 자신과 에피룬의 운명적인 만남으로 가치를 가졌다.
그날 이후로, 엔실렌에게 있어 가장 행복한 날들이 시작되었다. 최고의 나날이었다. 지루하지 않고 흥미진진한 사랑스러운 나날들.
검은 소년, 렌의 눈이 몽롱하게 변했다.
*
"...다시 시작될 줄 알았는데."
류 이외에 주인을 받을 생각은 없지만, 류는 방임주의니까. 엔실렌은 재현만 한다면 다시 그날의 계속이 이어질 거라 생각했다. 떠올려줄 거라 생각했다. 셀리안의 12살 생일날 거절당한 분풀이라는 의미도 있었지만 추억을 되살리고 싶었다. 그래서 동상에서 여자들을 떨어뜨려본 거지만, 대처는 비슷했는데 셀리안의 태도는 달랐다. 셀리안 크레이누는 또다시 엔실렌을 선택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러게, 어떻게 하면, 셀리안 크레이누가 뒤집어질까."
다시 씁쓸한 표정을 짓고 그 차이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리는 엔실렌, 폭소를 터뜨리는 류.
진은 난장판이라면 난장판인 공간을 훑으며 한숨을 쉬었다.
정말 바보들 뿐이다.라고.
“렌, 넌 좀 더 녹아야겠다.”
진은 셀리안의 마지막 공격에 짓이겨진 한 쪽 팔을 슥 흔들어 엔실렌의 보라색 회복 진을 깨버린다.
“야!”
“다시 만들어. 멍청이.”
“너, 나한테 그런 힘이... 지금...”
“노력할 힘은 있지. 넌 좀 더디게 팔팔해져야겠다.”
진은 혀를 차며, 나무 침대로 다가갔다.
"하하, 그 멍청한 얼굴이라니...하하하!"
“너도 그만 웃어. 별로 웃기지도 않잖아?”
진이 나무침대를 툭툭 차면 낄낄대던 류의 접혀 있던 눈이 반짝 떠졌다. 황금색 눈이 진을 올려다보았다.
"하하...하...흠..."
권태로워보이는 황금빛 눈동자.
"..다 웃었냐?"
"..."
아마 셀리안 크레이누의 당혹을 즐기는 것도 질렸겠지.
류는 쉽게 질린다. 그에게 감정은 결여되었다기보다는, 부족하다. 부족했기 때문에 그는 과장했다. 과장했지만, 결국 쉽게 질렸고 부수고는 했다. 그가 부수려고 하면 모두 쉽게 부서진다.
“응, 재미없어졌어. 통쾌하긴 했지만. 이제는 불쾌한 게 더 커.”
류는 벌렁 대자로 누워 미간을 찌푸렸다.
“불쾌하다고?”
“응.”
“아직도?”
“응, 생생하게 불쾌해.”
류는 토라진 것처럼 옆으로 몸을 눕혔다. 진은 그 옆에 걸터앉았다. 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웃음을 그친 그는 정말 불쾌해보였다. 셀리안 크레이누로 인한 감상은 다 사그라졌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불쾌함이 남아 있다니 의외라고 진은 생각했다.
류는 부정적인 감정도 사실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셀리안 크레이누에 대한 분노도 그저 그가 가진 그나마 가장 큰 감정일 뿐이다. 그가 질리려 해도, 셀리안 크레이누의 마나는 강하고 강해 존재감이 있다. 그 존재감이 류를 언제나 자극했다. 둔감한 류에게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그의 어머니를- 류는 그 때문에 불쾌해했지만, 동시에 그가 가진 가장 큰 감정에 몰입했다.
텅 빈 류, 자극을 원하는 류.
그러나, 지금 그가 이야기하는 불쾌함은 일부러 몰입한 감정에서 파생된 것과는 달랐다.
“뭐가 그렇게 불쾌한데.”
진은 어린애를 달래듯 조곤조곤 묻는다. 렌은 모르겠지만, 진이 류에게 품었던 감정의 시작은 동정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이 무시무시한 악마에게 진은 약했다. 에피룬에게도 해주지 않았던, 아니 할 필요도 없던 뒤치다꺼리를 하는 것만 해도 그랬다.
“하영.”
그 이름에 렌의 시선이 류를 향한다. 진은 가볍게 혀를 찼다. 그 아가씨도 고생이다.
“걔는 왜이렇게 마법왕을 챙기는 거야... 불쾌해. 마지막까지도 붙잡고 있었어.”
류가 투덜거리며 다시 몸을 뒤집는다. 엷은 황갈색 뒤통수를 바라보며, 진이 그를 어떻게 달랠지 헤매고 있으면 류가 생각난 것처럼 몸을 일으켰다.
“나, 일단 걔를 빼와야겠어.”
“...그건-”
“찬성!”
렌이 몸을 일으킨다. 그가 방싯 웃으며 방방 뛰기 시작했다. 방방 뛰었지만, 푹 쓰러진다.
“멍청이.”
진이 한심하다는 듯 바라본 뒤, 다시 류를 바라보았다.
“야, 너 지금은 자중...”
“하루드, 아직 안 망가졌지?”
“...안 망가졌어. 거의 들쑤셔지긴 했지만.”
그건 셀리안 크레이누의 시선을 끄는 용에 불과했다. 거의 버려놓은 주제에 이제 와서 찾다니, 그 조직도 참 고생이다.
진은 다시 한숨을 쉰다. 그를 막을 수 없다. 막아봤자다. 류의 눈은 이미 새로운 구상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이걸로 외전은 끝입니다. 내일부터는 다시 본편으로 돌아갑니다^^
선작, 추천, 코멘 모두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