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5 72 =========================================================================
72
산은 놀란 것 같았지만, 곧 셀리안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서툴긴 하지만, 기사의 인사법이다. 다만 결정적인 순간을 방해당한 연인이 으레 그렇듯 약간의 원망을 담아 셀리안을 바라보았다. 셀리안은 그게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그는 나에게도 다정했고, 산에게도 다정했다. 전생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셀리안은 썩 산을 마음에 들어했다. 내가 지온에서 그를 찾아간 것도 그 기억에 의존한 이유가 컸다.
“이런, 산- 연회가 지루했나? 정원에서 군을 다 만나는군.”
“연회는 훌륭했습니다. 그런 훌륭하고 화려한 연회는 처음이라, 궁에 오게 해주신 것도, 칼미온에 들어가게 해주신 것도... 정말 감사하다고밖에...”
“호오, 물론 짐에게 감사하는 마음은 좋지만, 연회는 역시 훌륭했지만 취향은 아니었다든가. 하영도 이리 빠져나온 걸 보니, 자신이 없어지는 걸.”
“그, 그런-”
“...”
킥킥 웃으며, 농을 건네자 산은 당황해 고개를 내젓는다. 셀리안은 그의 이런 순진함과 우직함을 좋아했는데, 지금 보면, 놀리기 쉬운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다.
“아뇨, 정말 멋졌습니다만, 그냥 저는... 하영이 보이지 않아서.”
당황하던 그가 나를 언급하며 다시 한 번 열정적으로 시선을 향했다. 셀리안의 눈가가 가늘어진다.
“그녀를 만나게 된 것도, 다 폐하의 덕분입니다.”
그는 지온을 구해줬을 때와 비슷한 눈빛으로 셀리안을 보았다. 나를 만나게 해주고, 내 옆에 설 수 있도록 칼미온의 기사단 자리까지 준 황제에게 더없는 감사를 전했다.
그런 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셀리안은 나와 눈이 맞자 눈가를 휘며 웃었다.
“꺅!”
동시에 내 허리를 잡은 채로 번쩍 들고 산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나를 들고, 산을 감싸안아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좋아좋아, 그럼 하영도 만났겠다 연회장으로 돌아가지.”
“폐, 폐하?!”
“!!”
이 무대뽀자식! 우리의 마법왕님은 진짜 남의 의사를 물을 줄 모르는 것 같다.
이제 정원을 울리는 건 두 명의 발소리였다. 셀리안의 발걸음은 거침없이 앞을 내딛고, 산은 셀리안에게 이끌려 살짝 끌리는 걸음소리다. 산은 제법 그와 비슷한 체격이건만 셀리안이 움직이자 질질 끌려가며 발을 놀렸다. 나로 말하자면, 셀리안에게 허리가 잡혀 들려 있다.
*
당혹스럽긴 하지만- 산을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아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헤매고 있었는데 차라리 잘 되었다 싶기도 하다. 이런 분위기라면 조금은 유예 시간이 생긴 거라고.
‘또 도피하고 있어.’
산과 문득 눈이 맞자 죄책감이 꿈틀 댔다. 역시, 이대로는 안 될 지도. 연회장에 돌아가면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산에게 말할 필요가 있었다.
“폐하!”
“응?”
산이 드물게, 큰 소리로 셀리안을 부른 건 나와 눈이 맞고 10걸음 정도 앞으로 전진한 후였다. 그의 시선이 슬그머니 내 허리를 잡고 있는 셀리안의 손에 닿았다.
셀리안은 걸음을 멈추고 산에게 시선을 준다. 셀리안은 그랬다. 강행하지만, 항의를 하면 일단 멈춰준다. 그게 그가 왕으로서, 지도자로서 사랑받는 이유였다. 설사 제 마음대로 한다 해도 요구가 오면 들어준다. 그게 어떤 내용이라도 말이다.
“...그, 하영은 제 약혼자입니다.”
“...그런 것 같더군.”
셀리안은 여유롭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살짝 흠칫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산에 대해 그와 깊게 내 감정에 대해 이야기한 적은 없었다.
산의 눈이 떨린다. 제법 남자다운 얼굴로 그는 셀리안과 시선을 마주 했다.
“연회장으로 함께 가겠습니다만, 그녀는 제가...”
“호오.”
결론은 셀리안이 자기 여자의 허리에 손을 대고 있는 게 거북하다는 이야기다. 우직한 산, 더불어 셀리안이 아는 산과는 다른, 사랑에 빠진 산이었다.
셀리안의 시선이 그의 손에 데롱데롱 잡혀 있는 내게로 내려왔다. 그의 붉은 눈은 한동안 물끄러미 내 검은 눈을 응시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붉은 눈은 깊게, 미동조차 없이 나를 담고 무언가 가늠하는 것처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내게서 시선을 떼고, 내 허리로부터 손을 거두었다.
셀리안이 나로부터 손을 거두자, 산의 손이 다가온다.
나는 그 손을 피해, 한 발자국 물러섰다.
나의 물러섬에 산이 당황한다. 셀리안은 그런 우리를 관망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
말해야 한다. 연회장에서라든가, 조금 더 시간이 생겼다든가. 그런 식으로 도피했지만 말할 타이밍은 언제라도 좋았다. 지금이 사실 가장 좋았다. 이대로라면, 이대로 질질 끌면 산은 더 상처 입고 만다. 원망을 받는다면 빠른 편이 좋다.
“산-”
나는 머뭇머뭇 셀리안 앞으로 나섰다. 산은 내가 나서자, 안심한 것처럼 다가와 내 손을 쥐었다. 이번에 나는 거부하지 않았다.
“하영-”
존경하는 왕 앞에서 아내를 자랑하는 팔불출 백성처럼 애정을 듬뿍 담은 손짓과 시선. 나는 그대로 그의 손을 꼭 잡고, 입을 열었다.
“산, 나 할 말이 있어요.”
“어, 어?”
순진하게, 반갑게 나를 보는 산. 그때와 변함없는 산.
“...나, 산하고는 결혼 할 수 없어요.”
*
사랑스러운 산, 귀여운 산, 나를 도와준 산, 착한 산.
나는 그를 사랑하지는 않았다. 그런 식으로 좋아했냐고 하면 결코 그 마음에 근접한 적이 없었지만 그래도 좋아했다. 그를 나름대로 소중히 여겼다. 이 남자하고 이 세계에서 흘러가듯이 함께 해도 된다고 생각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건 다른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음이 같지는 않지만,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언젠가의 완전한 행복을 기약할 자신이 있었고 그게 최선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제는 달라졌어. 모든 게.’
나는 그와 결혼할 수 없다.
“...나, 산하고는 결혼 할 수 없어요.”
“뭐?”
원래 세계에서는 언젠가 누군가를 사랑해 결혼도 하고 평범한 행복을 손에 넣고 싶다고 생각했다. 생각했지만, 이제는 잘 모르게 되었다. 오히려, 그저 떠나고 싶다. 그 마음만이 확고해져 갔다.
얼마나 이 세계에 애정을 갖게 되어도, 아니 애정을 가질수록 그랬다. 누군가에게 사람은 쉽게 구애되고, 그 때문에 누군가를 상처 입힌다. 사랑에 대한 근원 모를 혐오는 사라지진 않고 점점 명확해진다. 이제 나는, 어느샌가 누군가와 사랑하며 살고 싶다는 꿈이 너무 무서워지고 있었다.
“하영?”
“...”
산의 눈이 떨린다. 사랑을 거절당한 사람들의 그런 눈동자. 앨리자베스 아카인이 그랬고, 먼 옛날 셀리안 크레이누가 그랬으며, 엔실렌도 종류는 다르지만 그런 표정을 지었다.
지금 윤하영이라는 이상한 여자에 의해 산이 그런 표정을 짓고 있다. 속은 울렁거리고 두통에 머리가 깨질 것 같지만, 나는 견뎌냈다.
이건 매우 이기적인 결심이니까, 책임지고 끝까지 이기적여야 했다.
“무슨, 이야기야?”
산의 표정은 멍하다. 한 대 얻어 맞은 것처럼 눈을 데로록 굴리며 나를 본다.
“왜, 왜? 어째서야, 하영?”
“...미안해요.”
사실 가장 큰 이유는... 내게 떠날 기반이 마련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의 나에게는 변방의 귀족 영애-라는 신분이 생겼다. 셀리안은 마법왕, 돌아갈 방법을 혹시 찾아줄지도 모르고, 못 찾더라도 좀더 수월하게 이곳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창녀에 천민인 칼미온 소속의 윤하영과는 입장이 다르다.
이기적이고 겁 많은 윤하영은 갖춰진 게 없다면,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세계에 버티고 살기 위해 또 누군가에게 의지했을지도 모른다.
모든 게 끝나면, 나는 이곳을 떠날 거야-라고. 그 기반을 마련해준 건 우리를 그저 보고 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마법왕, 나의 전생-
“왜, 왜야? 대체- 내가 잘못한 게 있다면, 배려하지 않은 게 있다면- 모르는 게 있다면-”
“아니에요. 그냥, 내가, 산하고 결혼할 수 없는 거예요.”
그의 얼굴은 울 것 같았다. 그 얼굴을 보며 나는 산의 손을 놓으려 했지만 그가 강하게 붙잡는다. 조금 손이 아플 정도로.
“하영!! 나 노력할 거야. 네 곁에 있도록. 기사가 되고, 좀더 널 제대로 지키고-”
“산이 기사가 되는 건 좋다고 생각해. 산에게 잘 어울려. 하지만, 지온의 식당에 있던 산도 나는 제법 좋아했어요. 그러니까, 어느 쪽이든 나를 위해 선택하진 말아요. 나는, 그래. 결혼을,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너와 함께 걷지 않아, 라고 그런 의도를 담고 강하게 이야기했다. 그는 드디어 내가 진심을 말한다는 걸 깨달은 것처럼 눈을 깜빡였고, 동시에 차마 입에 내지 못한 말들이 여과 과정 없이 쏟아져 나왔다.
“하고... 싶지 않다니? 누군가, 다른 결혼할,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거야? 나 연회에서 언뜻 들었어. 하영이 엘킨님과 혼인할지도 모른다고. 드디어 하영의 짝사랑이 이루어졌다는 그런 이야기를 칼미온의 하인들이 나누고 있었어.”
“...”
“나도 베스와 있었을 때 그런 이야기를 들었으니, 믿지 않았지만. 그, 그런 거야?”
“...아니에요.”
순간적으로 우리를 지켜보며, 끼어들지 않고 있던 셀리안이 가볍게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그는 내가 엘킨을 좋아하고 엘킨도 나를 좋아한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우리 둘을 이어주고 싶어했다.
그것만으로 역사가 바뀐건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는 그랬다. 좋은 일이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시모갈 사절단이 돌아갈 때까지 그가 엘킨에게 빠지지 않는다면 안심해도 좋은 거겠지. 히아신스가 죽지 않는 것까지 확인하면 더욱.
다만, 나는 엘킨과 함께 하지 않는다. 아니, 이곳에 있지 않을 것이다. 돌아가고 싶다. 정말 내가 한 말도 안 되는 거짓말처럼 히아신스를 구하는 순간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럼, 왜? 왜 갑자기 결혼할 수 없다는 거야? 무슨 일이 있던 거야? 혹시- 노예마차에서 무슨 일이...”
“산-”
그를 부른 건 셀리안이었다. 셀리안이 낮은 목소리로 그를 제지했다.
‘이야기해도 되는데.’
그가 무슨 말을 해도, 당연하다.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거니까.
“...차라리 그랬다면 좀 쉬웠을까요.”
“!”
하지만, 잔인한 나는 그런 이야기를 입에 담았다.
“차라리, 그런 이유로 산을 거절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나는 더럽혀져서 산과 함께 할 수 없다고.”
“하영!!”
“알아요, 내가 어떤 모습이라도 산은 나를 소중히 해주겠지요. 지온에서도 나를 끝까지 믿어준 건 산뿐이었어요.”
사랑하기에 무조건적으로 믿어주었다. 창녀의 오명, 도둑이라는 매도 속에서도 그만이.
나는 그것을 ‘사랑’을 이유로 했다는 것만으로도 평가절하했지만, 사랑한다 해도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 얼마나 숭고한지 사실은 알고 있다.
그러니까, 그것을 비하할 수밖에 없는 내가 이상한 거다. 비틀린 거다.
“항상 고마웠어요. 나는 산이 없었다면, 살아갈 수 없었을 테니까.”
그의 손이 절망적으로 힘을 잃고 나로부터 떨어져나간 건 순간이었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윤하영이 누군가와 사랑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게 정답이다.
‘그런 내가 엘킨을.’
사랑하게 되었다. 사랑한다고 착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엘킨도 나를- 거기까지 생각하자 지나친 황홀감과 절망감이 뇌수를 울린다.
“나를-사랑하지 않아?”
“...”
“사랑하지 않게 된 거야? 아니, 사랑했던 건 맞지?”
산의 말에, 구명줄이라도 잡는 듯한 떨리는 그 목소리에 나는 다시 눈을 떴다.
============================ 작품 후기 ============================
연참 갑니다. 새벽 2시 즈음 73화 올라올 예정입니다.
선추코 항상 감사드립니다!
Toxikum 님 // 이거, 로맨스 판타지라고 제가 했었죠! 에헴! 하영이가 역하렘으로 막 후리는 그런 이야기입니다.(반만 진담)
lokoko 님 // 루트 좋네요.ㅎㅎ 언젠가 완결나면 이어지지 않은 사람은 루트를 써볼까 싶은데, 이건 기약없는 약속이네요.ㅜㅜ
에이리엘 님 // 최종보스 등장입니다. 그런데 엘킨이 중간보스 인가요.(웃음) 그리고 사실 최종보스는 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