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 패러독스-74화 (74/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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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한 히아신스는 완전히 뭉개져버렸다. 셀리안은 무감하게 그 모습을 보았고, 동상을 내려오는 범인을 주시하며 천천히 다가갔다.

얼른 끝내고 엘킨에게- 진범은 따로 있었고, 히아신스는 죽었다고- 그를 붙잡을 여러 가지 안을 고안한다.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게 된 걸 의식하면서, 냉정하게 잔혹한 생각에 골몰했다.

"쯧-"

"..."

내려온 남자를 재빨리 붙잡은 뒤, 손에 마력을 담아 그 목을 긋는다. 남자의 목이 떨어진다.

범인은 인상에도 남지 않을 평범한 남자였다. 어디나 흔하게 굴러다닐 것 같은 남자. 하지만 그는 죽는 순간 기묘하게 침착한 얼굴로 셀리안을 바라보았던 것 같다.

자신이 죽을 걸 예감하지 못한 걸까, 아니면 조종 당하고 있기에 제정신이 아니었던 걸까.

그 목이 바닥에 닿는 순간, 남자의 흔해빠진 갈색 눈동자에 희미하게 은빛 섬광이 스치듯 지나갔다.

지나가는 것 같았다.

여태껏 그런 생각은 해본적이 없으니, 착각이겠지만.

71

“영애께서 절 따라오는 건 처음이네요.”

류가 테라스를 넘어가는 순간, 나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그 뒤를 따라 테라스를 넘었다. 테라스를 넘으면 왕실의 정원이다. 다들 왈츠가 한창이기에 정원을 걷는 건 나와 류 뿐이다.

"...셀리안을 엿 먹이겠다며."

"그래서 따라오는 거야? 대단하네."

별 뾰족한 수도 없는데, 류를 그대로 둘 수 가 없었다.

나는 불안하게 그의 등을 바라보며 따라 걷는다.

"...류가 류라고 이야기할 거야."

"나야 나지. 근데 왜 이야기하러 안 가고 따라오는 건데."

"나 안 막아?"

"말해도 증명할 방법이 없어. 이건 그런 주술이니까."

"...주술..."

"주술이라기보다는 체질이지만."

"그게 뭐야."

그가, 셀리안에게 무슨 짓을 할지 불안해 견딜 수 없었다. 셀리안을 싫어하는, 셀리안이 어떻게 하면 상처 입을지 아는, 그를 그대로 둘 수가 없어서.

이상한 일이다. 내가 이렇게 적극적이었나.

가정이지만, 실제 이 공간에 게트룬 남작이 나타나도, 진짜 키스톤가의 자객이 나타나도 절대 나는 그들을 졸졸 쫓거나 당황해서 셀리안에게 알리러 가거나 하는, 그런 짓은 죽어도 안 할 거다. 나도 목숨이 한 개고.

하지만, 에피룬 윈드아가 류라는 걸 알고,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류가 셀리안에게 엿을 먹이는 방법은 상상할 수는 없지만 최악일 거라고 직감했다. 에피룬의 이름을 연호하며, 셀리안을 자극하던 류.

“언제나 내가 따라다녔는데.”

류는 휘파람을 불며 정원을 빙 돈다.

정원의 대리석을 걷는 류의 발걸음은 의외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마치 바닥을 밟지 않는 것처럼 그는 걸었고 나는 그 뒤를 소리를 내며 걸었다. 류는 빨리 걷지는 않았지만, 나는 류 같은 재주는 없었다. 따라잡는 건 가능했지만, 정원을 울리는 발소리는 내 힐 소리뿐이다.

"네가 날 따라오니 나쁘지 않은 기분이야."

대리석 밟는 내 발소리와 류의 휘파람소리 뿐인, 정원-

사람들이 북적북적 모인 왕궁의 연회장이 멀어질수록, 현실감이 없어진다. 눈앞의 기묘한 남자, 류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이상하게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 같았다. 존재감은 이렇게 강한데도.

"아무거나 질문하면 대답해줄게."

질문, 셀리안에게 무얼 할 생각이야, 라던가.

“... 아카인 영애는 어떻게 되었어?”

화제를 돌려볼 겸, 계속해서 걷는 그를 멈출 겸 해 가볍게 묻는다. 그녀에 대해 별 관심은 없지만, 궁금하다면 궁금했다.

“흐음... 아카인?"

"...설마 잊었어?"

"아냐, 기억해. 다만, 뭘 하고 있는지는... 잊고 있달까, 모른달까. 음... 사랑하는 자의 환상이라도 보고 있지 않을까.”

“환상이라니.”

류는 심드렁하게 이야기했다. 용은 인간의 정신을 조작할 수 있다. 왠만한 평범한 사람은 그 개입을 막을 수 없다. 용이란 가장 신에 가까운 자로, 인간은 그들에게 미물보다 못한 존재였다. 일반적으로는.

“렌은 갇혀 있으니... 진이 혹시 영애에게 무언가 한 거야?”

“응? 아니아니, 하루드의 싸구려 약에 취해 계시지. 산- 산, 지겹게 읊고 계시지요. 마치 지친 카나리아처럼.”

“...”

류는 빙글 돌아 나를 보았다. 그의 기다란 신관복이 날개처럼 팔랑거리고, 베이지색의 머리카락은 평범하기 그지없었지만 달빛을 받아 기묘하게 반짝거린다.

“그 아가씨는 내 손을 떠났습니다. 남은 건 다른 분들이 해주고 있겠지요.”

“...하루드는, 후작의 입을 막기위해 그녀를 이용하는 거야?”

“으음. 거참, 시시한 걸 계속 묻네.”

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정치적인 이야기는 전공은 아닙니다만. 마법왕께서 후작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려는 겁니다.”

“사용하지 못하게...”

원래의 역사 속, 셀리안은 후작을 몰아내지만 후작가는 남겨둔다. 아카인의 상권은 꽤 쓸만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가 이용할 영애는 하루드의 손에 있고 후작은 딸의 안위 때문에 하루드를 배신하지 않고 있다. 후작가는 사용할 수 없다. 그저 뭉개는 것밖에. 나는 이용해 보존하기 위한 증인이 아닌, 아카인가를 완전히 뭉개기 위한 카드였다.

"아카인 가는 하루드에서 키운 거지. 그들은 마법왕이 아카인가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싶어하고, 나도 그건 찬성이야. 나는- 어쨌든 내것을 그가 갖는 건 딱 질색이거든."

"..."

“후후.”

류는 가볍게 웃고 나에게 한 발 다가선다. 부러 발소리를 냈다. 나보다도 묵직하게 대리석을 울린다.

“마법왕이 걱정되어, 견디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나 하고.”

“...”

“또 해주면 되겠네.”

"?"

그는 이죽인다. 류가 셀리안에게 보이는 적의는 이제 나를 향하고 있다.

“지난 번처럼, 꼭 끌어안아, 울지말라고 둥기둥기 달래주면 되지 않아?”

“...”

나는 내가 품는 감정이, 자기애인지 새삼 호의를 갖게 된 셀리안에 대한 연민인지 답을 내리지 못한 채로 류의 말을 들었다.

류는 완전히 내 앞에 섰다. 나보다 조금은 크지만 셀리안이나 엘킨과는 다르게 작다. 눈은 무리없는 위치에서 맞는다.

"정말... 죽이고 싶군."

류가 나를 향해 고개를 내린다. 나는 굳은 것처럼 그의 금안을 바라보았다. 금안은 점점 가까이 다가와 내 얼굴 바로 앞에서 멈춰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한숨소리가 낮게 심장을 울렸다.

"웃기지도 않네."

그리고 또각, 하고- 들리는 건 대리석을 밟는 또다른 구두소리였다. 또각하고 들린 구두소리는 급하게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다. 류는 나로부터 떨어져 가볍게 성호를 긋는다.

“세계의 가호가 있으시길.”

*

누군가 또각또각 달려오는 걸 눈치챘지만, 나는 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천천히 걷는다. 쫓아가야 했지만, 왠지 쫓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내 추적을 허용하지 않을 거라 직감했다.

그저 바라본다. 류가 정원의 중앙에서 정원수를 빙글 돌아 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리고 그가 사라질 즈음 달려오던 사람은 내 뒤에서 멈춰섰다. 마치 나를 향해 달려온 것처럼.

그제야 고개를 돌리면-

“하영-”

익숙한, 애정이 듬뿍 담긴 순박한 목소리-

"...산?"

오랜만의 만남, 의외의 등장에 그 이름을 읊으면 그의 눈이 떨린다.

"하영!!"

셀리안이나 엘킨과 덩치는 비슷했지만 그들과는 다른, 다듬어지지 않은 체구를 가지고 있는 순박한 얼굴의 청년. 많이 야위긴 했지만, 변함없는 그는 한숨을 몰아쉬며 나를 보았다.

있을 수 있는 일이긴 하다. 아카인 영애를 따라온 게 산이라면, 그녀가 산과 함께 류에게 끌려간 게 아니라면 그는 셀리안에게 잡혔을 테고, 나쁜 대접을 받지 않고 있다면 이 왕궁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연회에 참석할 가능성도 있었고.

"하영...이지? 정말."

감격한 듯 목소리를 떠는 그를 보며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고민한다. 오랜만이라고 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어느 쪽이든 답을 돌려주기 위해 입을 열면 산이 나를 껴안았다. 지온에서와 비슷하게 거침없이.

"하영-"

"..."

산은 나를 좋아했다. 사랑했다. 그리고 나는 그와 같은 마음인 '척' 했다. 그러니,  그에게는 정말 감격의 재회일 테고, 나를 껴안는데 거침이 없었다. 류나 셀리안 같이 마이페이스도 아니고 엘킨처럼 조심스러운 것도 아닌, 확신을 가진 포옹이다.

다시 만난 약혼자를 힘껏 껴안는다. 그에게 우리는 양방의 사랑을 하고 있는 관계고, 함정에 빠져 헤어진 연인이었다. 나는 오랜만에 부딪치는 일방적인 산의 애정에 속이 메슥거렸다. 그 또한 오랜만에 느끼는, 나에 대한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감각이었다.

나를 껴안은 산의 어깨가 떨렸지만, 나는 지온에서처럼 팔을 뻗어 마주 안을 수는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들었어.”

“...”

“베스가 너에게 그런 짓을... 힘들었지.”

그런 미세한 변화를 눈치 채지 못한 산은 더듬더듬 말을 잇는다.

“...나는 괜찮아요. 산이야말로... 미안해요.”

“아니, 아니야. 나는 너를 전혀 돕지 못했어. 미안해. 미안해.”

일단 사과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입에 내긴 했지만, 내 사과의 의미가 온전히 전달되진 못한 것 같다.

"미안해-"

오히려 산은 계속 사과를 했다.

“너에게 그런 짓을 한 베스를... 난.”

"..."

“하지만, 베스와는 아무 일도 없었어.”

그는 나에게 상처를 준 앨리자베스 곁에 있던 게 엄청 미안한 일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최근 왜이렇게 사과를 받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나를 지켜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사과를 해야 하는 것도, 지켜야 하는 것도 나이건만.

*

열정적으로 변명하고 나를 걱정하고- 온도차가 이렇게까지 다르니 오히려 할 말이 없었다. 산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한 번 크게 숨을 들이쉬었고 그 자신이 진정할 시간을 가진 뒤에서야 나로부터 몸을 뗐다.

몸을 떼, 찬찬히 나를 바라보았다.

“많이 예뻐졌네, 우리 약혼자.”

마치 그날, 신부복을 입은 나를 봤을 때마냥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에게는 이 모든 게 그 날로부터의 연장이었다.

문제는 나는- 아니라는 점이었다. 나는 그의 감정을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지온에서는 그나마 따라가는 척이라도 했지만, 이제는 그 감각은 너무 멀어져서.

나에게 먼 과거, 돌아가고 싶은 윤하영의 과거는 원래 세계였으며, 나의 현재는 인정하긴 싫어도 왕궁이었다.

“귀족...아가씨가 됐다고.”

"...네."

"하영."

산은 넋이 나간것처럼 나를 훑고, 떨리는 목소리로,  결심한 것처럼 내 이름을 불렀다.

"?"

그 목소리에 담긴 것은 다른 이들과는 다르다. 억울한 처지에서 제 신분을 되찾은 윤하영에 대한 연민의 감정들도 물론 없진 않지만 산에게는 갑자기 자신과 신분이 달라진 아내에 대한 당혹스러움이 크게 담겨 있었다.

“폐하가 나를, 칼미온에 넣어주겠다고 했어.”

“칼미온에? 산이-”

“기사견습이지만, 기사가 될 수 있어.”

열심히 하면 작위도- 라고 이야기한다.

"나, 기사가 될 거야."

그가, 나를 찾아 아카인 영애와 함께 온 건 알고 있다. 아마, 나를 데리고 지온에 돌아가는 게 최종목표일까. 하지만, 지금 그는 귀족 아가씨가 된 윤하영에게 다른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는 지온의 가게를 소중히 여겼다. 앨리자베스와 결혼해 아카인 후작가에 들어갈 때도 가게만은 아카인 후작가에서 관리해 유지했었다.

'가게는-, 산?'

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쳐올랐지만 산은 내가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이야기를 잇는다.

“나, 열심히 할 거야. 열심히 해서 출세해서. 귀족인 네게 어울리는 남편이 되겠어.”

흔들흔들, 바람이 불고, 나는 그의 일방적인 고백을 멍하니 듣고 있다.

수도 휴론의 바람은 깨끗해서, 지온과는 다르다. 다른데도 순간 지온의 모래바람이 부는 것 같은 환상, 산은 그대로인데 공간만 옮겨진 듯한 착각을 했다.

“사랑해.”

“...”

속은 울렁거리고 구토가 치밀고. 송구스러울 정도로 무례한 감정에 자기 혐오에 빠지고.

나는 윤하영이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산, 있잖아요. 나는-"

나는 간신히, 모든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결심했다. 어떻게, 에 대한 답은 찾지 못해, 내가 유도하고 이용한 사랑을 거부할 말을 찾아 헤맨다. 헤매며 입을 열었지만, 산의 감정은 빠르게 진행해갔다.

"산-"

헤매는 사이 산이 고개를 숙였다. 나에게 점점, 오랜 헤맴 끝에 만난 연인들이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종착점처럼 다가온다.

“하영-”

애절하게 사랑의 이름을 부르며.

나는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그는 어떻게 생각한 건지 나를 꼭 붙잡고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다. 그의 속눈썹이 떨린다. 가까이, 가까이.

이제 엔딩이다-

"산, 잠깐-"

"!!"

순간 뒤로부터 허리가 잡아당겨졌다.

익숙한 손, 익숙하게 뜨거운 체온의 품안. 언젠가는 이 품으로부터 엘킨이 나를 끌어냈다. 고개를 올린다. 비슷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산보다 약간 컸다.

붉은 눈동자는 여유롭고 나른하게 나를 바라보며 접힌다. 그리고 산을 보고 반가운 듯 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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