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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나 패러독스-67화 (67/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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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이 세상에 나타난 것 같아.”

셀리안은 이야기한다. 엘킨은 침묵했다. 나는- 망설인다.

대답해야 한다, 어물쩡 넘어갈 수는 없다. 하지만, 어디까지 이야기 해야 하는 건지, 이야기할 수 있는 건지 알 수 없다. 망설이고 있는 나를 셀리안은 가만히 보더니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내 질문에만 대답하도록 하거라.”

시선도, 목소리도 다정하기 그지없어서, 추궁한다기보다는 나를 도와주려는 것 같다.

“...에.”

“네, 겠지. 할 수 있겠지?”

어린애를 어르는 듯한 말투로, 날카롭지도 추궁하지도 않고. 그는 가능하면 넘어가주고 싶어한다는 걸 알았다. 나를, 수상하다고 말한 주제에 믿어주려 하고 있었다.

‘쉬운 남자.’

엄격하고 날카롭고 누구보다 왕다운 왕 주제에, 무르다. 무르고 여리다. 그러니까 쉬운 남자. 상처 입으면서도 채 떨치지 못하고, 실망하면서도 올곧음을 동경했고 결국 사랑 따위에 손쉽게 무너져 자신을 잃어버린- 왕.

“네.”

“좋아.”

셀리안은 눈가를 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자리를 옮겼다. 언제까지 서있을 수는 없기도 했고, 내 상태를-이제 괜찮은데도- 우려한 엘킨이 권하고 셀리안이 수긍했다.

셀리안의 책상이 있는 곳에는 의자가 하나 뿐이었지만, 셀리안이 손을 흔들자 의자가 두 개 정도 더 나타났다. 그는 한 번 더 손을 흔들어 의자를 둥글게 둘러 세운다.

어디에 앉아도 서로 마주보게 된 틈 속에서 그가 자리를 권했다.

셀리안은 나보다 과장 좀 보태서 머리 세 개정도 더 컸다. 의자에 앉아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비율적으로는 다리가 길어도, 전체적으로 길기 때문에 시선을 맞추려면 나는 살짝 고개를 올려야 했다. 그게 맞는데...

그는 오만한 자세로 다리를 꼬고 몸을 낮추고 있었다. 오만한 자세지만 덕분에 나는 고개를 올릴 필요가 없었다.

'배려...일까.'

배려겠지. 배려해주고 있다. 눈을 맞춰주고 있다. 진실을 말할 걸 종용하는, 셀리안 특유의 눈동자였지만 역시 다정한 눈동자다.

그 눈을 보고, 나는 내가 제법 이 젊은 왕에게 호의를 갖고 있다고 깨달았다. 나지만, 내가 아닌- 조금 기묘한 상대-

“그래. 그대는 2년 전에는 확실히 지온에 있었지?

“네.”

“그렇다면 그 전에는 어디에 었었지?”

“...”

“창녀였나?”

엘킨이 무언가 이야기할 것처럼 입을 뻐금거렸지만, 곧 입을 다문다. 그 역시 왕의 의중을 이해하고 있다. 그도, 내가 이대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아닙니다.”

“도둑이었나?”

“아닙니다.”

“그럼 뭐였지?”

“...”

나는 뭐였지.

“...평범한...”

평범한.

“여자였어요.”

진짜 평범한. 판타지한 세계의 왕이 전생이었다는 걸 제외하면 정말 평범했다.

“평범한?”

“그걸... 어떻게 설명해요. 정말 평범했는데- 진짜 평범하게 일하고 평범하게 결혼도 꿈 꾸고, 승진도 꿈 꾸고...”

부모님도 있었고 적지만 친구도 있었고 썸남도 있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열심히 대학에 가 열심히 회사에 취직해 열심히 살았다

왠지 굉장히 먼 이야기 같다.

“흠...”

“?”

“그대-와는... 별로 안 어울리는군.”

착잡한 기분으로 먼 나를 반추하고 있으면 셀리안이 터무니없는 말로 끼어들었다.

“네?”

“아니, 짐의 기사를 홀리고, 짐조차 들었다놨다 하는 여자가 평범하게 일하고 결혼을 꿈꾸고... 마치 자신을 진짜 평범한 평민 여성처럼 이야기하니-”

셀리안이 씨익 웃는다.

“다른 성실하고 순수한 평민 여자들에게 미안하지 않나.”

정정, 호의는 있지만 역시 이런 점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완전 마이페이스에 제 하고 싶은 대로 이야기한다. 배려에 감사하고 있다가는 그 느물느물함에 뒤통수 맞기 쉽상이다. 전생의 나에게 놀림을 받다니, 이건 무슨 업보야.

“안 홀렸고, 안 들었다 놨다 하거든요. 오히려 폐하한테 휘둘리고 있어요. 진짜-”

“설마-”

“홀려 있습니다.”

“엥?!”

거든 건 엘킨이었다. 다만, 셀리안처럼 놀리는 것 같은 표정은 아니고, 청명한 눈을 반짝이며 나를 열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지능 떨어지는 소리가 두근거리는 심장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것 같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하는데.

“이 경우, 당신이 홀렸다기보다는 제가 제멋대로 당신에게 매료된 거지만요.”

“!!”

“엘킨... 그대는- 뭐라고 할까. 한 번 노선을 잡으면 끝이 없군.”

“그렇습니까.”

엘킨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담담하지 못해서 당장이라도 튀어나가고 싶어졌다. 셀리안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한다.

“그래서, 성실한 아낙네였다면, 더더욱- 궁금해지는군- 어디에서 그대는 그런 평범하고 성실한 아낙이었지?”

“...”

“어디에서?”

아, 대답해야 하는데!

이번에는 대답이 궁한 게 아니라 멍해 있어서 대답을 못 하고 있다. 나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엘킨으로부터 시선도 피하지 못하고 완전 홍당무가 되어 그에게 몰입하고 있었다. 눈을 뗄 수 없다. 그런데 엘킨도 그런 나로부터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오히려 계속 붙잡고 싶어 하는 것처럼 강하게 바라본다.

이 무슨-

“쯧-”

셀리안이 혀를 찬 건 순간이다. 그가 벌떡 일어난다. 일어나는 순간 엘킨을 보던 내 시야가 가려진다. 눈을 깜빡이면 셀리안이 가볍게 제안했다.

“일단, 조금 진정하고 하도록 하지.”

이상하게도 그 목소리가 조금 못마땅한 것처럼 들렸다.

*

이야기는 한참 후에야 재개되었다. 셀리안이 마법으로 주방에서 적당히 소환해 왔다며 몇가지 먹을거리를 내오고, 앉는 자리를 바꿀 걸 제안한 뒤에. 빙 둘러 앉는 게 아니라 가운데 셀리안이 앉고 양 옆으로 나와 엘킨을 떨어뜨려놨다. 여전히 엘킨과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이 가슴을 떨리게 했지만, 빙 둘러 앉아 상대를 볼 수밖에 없는 상태가 파해지자 조금 나아졌다.

셀리안이 가져온 먹을거리는 달지 않은 과자와 빵 종류로, 멋대로 주방에서 소환해온 터라 식어 있었다. 아니 식었다기보다는 완전 차가웠다. 차가웠지만 과연 왕궁 음식, 차가워도 먹을 만하다.

“차가운 빵도 생각보다 괜찮지?”

"폐하..."

"엘킨-딱딱하게 굴지 말고, 어떤가, 하영- 짐이 대접한 야식은..."

"폐하는 참..."

참- 그렇다.

마법이란 게 기본적으로 있는 기를 이용한든지, 있는 물건을 소환하는 거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아니었다. 기억 속의 셀리안 크레이누는 가끔 밤에 일을 하면서 이렇게 차가워진, 하인들이 먹으려고 남겨둔 음식을 가져와 먹고는 했다는 걸 기억해낸다. 참, 털털하다고 해야 할까- 종종 빵이나 과자가 없어지니 하인들은 쥐가 있지는 않나 고민했을 것이다. 그게 이런 왕쥐인줄 도 모르고.

"그래, 왕이 가져온 빵은 맛있나?"

“맛있네요.”

"다행이군."

오물오물 씹고 있으면 셀리안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린다.

“그래서, 어디에서 평범한 아가씨였다는 거지?”

분위기는 한결 가벼워졌다. 나는 먹던 빵을 마저 삼키고 차가운 초코 쿠키를 입안에 넣으며 대답한다.

“이 곳이 아닌 곳이요.”

일주일 동안 자고, 어제 먹은 건 순전히 죽뿐인지라 잘 넘어간다.

“이곳이 아닌 곳?”

셀리안이 곱씹는다. 그는 내가 먹는 초코쿠키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같은 것을 집어 입에 넣었다.

“역시 초코렛은 차가운 편이 좋군.”

“그렇죠?”

“그거 아나, 심지어 하인들은 초코렛도 뜨겁게 해오기도 하지. 그나저나, 이곳이 아닌 곳이라... 키오스가 아니라는 의미는 아닌 거지?”

“...네.”

“...그래...”

끄덕인 셀리안이 초코쿠키를 하나 더 집는다. 나와 셀리안 만큼 부지런하지는 않지만 엘킨의 손도 간간히 보인다. 그의 손이 보일 때마다 기습이라도 당한 것처럼 가슴이 쿵쾅거렸는데 그럴 때마다 셀리안의 커다란 손이 그 사이를 가르듯이 먹을 거리를 가져가곤 했다. 과연 괜찮은 배치다. 우연이지만 셀리안의 손은 정신을 가다듬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곳이 아닌 곳이라... 흐음- 이곳이 아닌 곳, 키오스를 넘어- 그래... 이 ‘세계’가 아닌 곳이라든가?”

*

셀리안이 이 세계가 아닌 곳을 골라낸 건 기묘한 발상이지만 신기한 건 아니었다.

이 세계에는 확실히 이 세계가 아닌 곳에 대한 개념이 정립되어 있다. 물론 내가 살던 세계 같은 개념은 아니다. 마계라든가 신계라든가, 이 세계에 속하지만 이 세계라고 하기 뭐한 세계의 구분은 있었고, 때문에 셀리안은 그런 사고방식에 기인해 물었던 것이다.

의미는 다르지만, 정확하다면 정확했다. 셀리안도 완전히 같은 의미일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차라리 잘 된 것 같았다. 나에 대한 의심, 기록이 전혀 없고 흔적도 없다는 것이 해결된 것이다. 그것을 긍정하면 이야기는 술술 풀려갈 것 같았고 나는 긍정했다.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풀리면, 그 다음은 셀리안에 대한 것을 빼고도 그럭저럭 앞뒤가 맞았으니까.

일을 마치고 방에 돌아와 눈을 감았는데 지온이었다고. 내가 살던 세계가 아니었다고 평범하게 이야기했다. 평범하게 이야기한 뒤 설명했다. 지온에서 살아남으려 했다고,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안 된다면 이 세계에서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고.

그래서, 산을 찾아갔고, 산에게 의지했다는 이야기까지. 그 후에는 자연스럽게 아카인으로 넘어가 노예마차에 끌려가 엘킨에게 구해져 이 나라에 왔지만, 굳이 이야기하자면 너무 겁을 먹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는 이야기로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내 이야기는 거기까지였다. 그 후에는 왕궁과 관련된 이야기였고, 그것은 셀리안의 수중이었다.

그 후는 이야기할 것도 없다고,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내게 늘어놓으며 나는 이야기를 끝마친 것이다.

사실은- 이야기할수록 내가 할 수 있는 게 거기까지라는 걸 깨달았다. 술술 풀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불가능했다. 수도로 들어온 후에는 필연적으로 히아신스와 추락사건의 이야기가 섞여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

“다른 세계라니, 그것도 마계나 천계 같은 게 아닌 다른 세계라- 엘킨은 혹시 아나?”

“금시초문입니다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군.”

“...”

솔직하게 이야기하자고. 그가 나의 전생인 걸 제외하고 그의 진심에 진심으로 대응하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셀리안이 내 전생임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말은 이어질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전생이 일어나지 않은 이상 말하기도 뭐하다. 가능성이란 망상과도 같고, 죄는 나만의 것이어서 결국 진실에는 다가갈 수 없다. 역시나 윤하영은,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고 무언가 숨기려 하며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수도에 처음 와서도 그랬다. 굳이 누명을 밝히지 못하고, 그냥 흐름에 몸을 맡겨 -그냥 멈춰서 있었다. 셀리안이 이렇게 할 거야, 저렇게 할 거야 추측만 하면서 떠밀리듯이 히아신스를 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살리는 게 마치 내가 이 세계에 온 이유처럼, 그래서 숨기는 게 많아지고 혼자 행동하는 게 많아지고 위험에 처하고.

‘히아신스...’

그녀를 소중히 여겨, 죽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어느새 커지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히아신스의 가위에 떠밀려 내 죄를 지우듯이 살금살금 노력하는 ‘척’한 것 뿐이다. 혼자서. 멍청하게.

그리고 칼에 찔렸다. 그걸 말하라고?

“그래- 사실은 그 다른 세계에 대해서도 궁금하긴 하지만, 너무 늦기도 했고."

"..."

"그대도, 피곤한 것 같군."

"그렇, 네요."

나는 내 감정을 숨기기 위해 부러 고개를 숙여 과자를 입에 넣는다. 맛있다고 생각했던 과자는 그저 얼음처럼 차고, 맹맹하게만 생각되었다.

"마지막으로- 그대는 그대가 왜 굳이 다른 세계에서 이 세계에 왔다고 생각하나.”

"..."

왜라니...나야말로 궁금하다. 지금의 질문은 그야말로 숨길 것도 없이, 대답을 모를 질문이었지만,  나는 어쩐지 모른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정면을 보면, 나를 수용해주는 다정한 전생의 내가 있고, 어느새 나를 고통스럽게 할 정도로 다양한 시선으로 나를 보는 엘킨 다이브가 있었다.

“마지막 질문이 너무 복잡한가. 하지만 다른 세계에서 온 그대가, 왜 이렇게 이 세계에 대해 잘 알고 있는지에 대답이 필요해서 말이야. 산에 대해서도 미리 알고 의지한 것처럼 들렸고 짐에 대해서도, 너무 잘 알지 않나.”

“...”

“혹시, 그런 것들이 모두- 그대가 살고 싶다고 원하며 전전긍긍하면서도 동상의 추락사건에 관여 한 것과 관련이 있는 건가? 그게 이 세계에 온 이유와 관련이 있다던가...”

대답을 못하는 나를 도와줄 생각인지 셀리안 크레이누는 그가 미심쩍어 하는 것들을 엮어 풀어낸다. 그는 이제 딱히 나를 의심하거나 못미더워하지 않았다. 다만, 말로 하기에는 너무 복잡하리라 배려한 것이겠지. 그의 배려는 허공을 돌았지만 말이다. 조각조각난 이야기들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뿐이라, 아마 이 셀리안 크레이누는 상상도 못 할 것이다.

“...하나 여쭤도 되나요?”

“얼마든지.”

“...추락사건...”

셀리안의 얼굴을 살폈지만, 그는 별다른 감정의 기복이 없어보였다. 계속 하라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이 셀리안 크레이누는 짐작도 하지 못해.'

심장이 뛰고 있다. 엘킨 때문이 아니다. 그럼 무엇 때문인지 나는 헤맸다. 헤매며 무의식적으로 집어든 과자를 뽀각 부숴버린다. 고요한 방안에 과자 부서지는 소리만이 유독 선명하게 들렸다.

“추락사건의 범인이... 떨어져 죽었나...요...”

그 일도 역시 모르는 과거다. 현실감이 없는 과거- 나는 왠지 모르게 술렁거리기 시작한 심장을, 내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애써 암시했다.

“아아, 그대가 찔린 날, 내 마법진을 뚫고 죽었지.”

그가 내 표정을 살핀다. 역시나- 히아신스의 가위가 나타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 범인이...”

“아아-”

셀리안은 엘킨과 눈을 마주하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

떨어진 사람은 내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예상했던 대로 내가 변경에서 만났던 청년 짐이 추락했고 일단은 범인이라고 밝혀졌다. 그리고 예상치 못했던 한 사람이 더- 이례적인 두 사람이 연속으로 떨어진 추락사건이었다고 한다.

다른 한 희생자는, 리나 테일이었다.

============================ 작품 후기 ============================

에이리엘 님 // 하영이가 그렇게 말했으면, 이 소설이 좀더 빨리 끝났을 텐데 말이죠... 엉엉.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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