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 패러독스-54화 (54/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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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킨은 나를 히아신스에게 맡기고, 가볍게 인사를 한 뒤 멀어져갔다. 멀어지기 전 그답지 않게 물끄러미, 내 시선을 놓치지 않고 강하게 바라보았지만 별 말은 없었다.

백마디 말보다 한 번의 시선이 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걸 깨닫긴 했지만.

엘킨은 나에게 마음을 빼앗겼다고 했다.

인정한다고 했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엘킨 다이브다운 명료한 결론이었다. 청명하고 올곧은 엘킨- 아마 그도 첫사랑일 터인데, 우왕좌왕 했을 때 상대가 상처입을까봐 서둘러 결론을 내렸다는 게 엘킨답다.

나를 보는 청명하고 파란, 일렁이는 호수 같은 눈동자.

엘킨이, 누군가를 그렇게 바라보는 것은, 셀리안의 기억 속에는 없었다. 그리고, 그 당사자가 '윤하영'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왜? 원래 엘킨은 셀리안을 사랑할 가능성이 있었나, 단지 성별의 문제였던 걸까? 아니면, 가녀리고 지켜주고 싶은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걸까.

모른다, 나는, 생각하는 걸 포기했다, 고민하는 걸 포기했다. 메슥거림이나 복잡한 생각도, 내가 셀리안 크레이누가 행한 것을 답습했을 때나 혹은  '혹시 엘킨이' 하는, 애매한 확신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눈으로, 명확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내가 다른 무엇을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인가.

분명 엘킨을 만날 때마다 내 심장은 이제껏 이상으로 기대와 황홀함 속에서 뛸 것이고, 더 큰 절망감 속에서 몸부림치겠지. 그런 주제에 그의 마음을 거절도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이기적인 행동만 계속 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언젠가 이곳을 떠난다면, 다 괜찮지 않을까. 어쩌면, 그렇게 이곳을 떠나 시간이 흐르면 '그' 셀리안 크레이누도 받지 못한 사랑을 윤하영이 받았다며 우스개소리를 스스로에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만 해도 역겨울 정도 웃기네.

'죽고 싶다.'

일단 젊은 이 나라의 왕에게 고한 대로 나는 살고 싶었기에, 그가 내 앞에 나타나 다시 그 눈으로 나를 볼 때까지는 역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52

둘이 남게 된 뒤, 히아신스와 나는 장소를 옮겼다. 히아신스 취향의 아기자기한 까페에서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굳이 이야기하면, 내가 자진해 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지만 말이다.

히아신스의 질문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나는, 히아신스의 사과 섞인 질문에 대해 적당히 사실을 늘어놓은 것뿐이었다.

그녀, 혹은 엘킨이 알고 있는 사실은 셀리안이 알고 있는 것과 일치했다.

지온에서 결혼을 앞둔 윤하영이라는 여자를, 남편될 사람을 짝사랑하던 아카인 영애가 나락까지 밀어넣는다.

창녀라는 오명, 도둑이라는 모욕- 그리고 노예마차에 팔리게 된 것까지.

그 사실들을 더듬더듬 확인한 그녀는 마지막으로 다시 내게 사과를 했다.

"몰라서, 미안해요."

"말하지 않았으니까요. 모르시는 게 당연해요."

"아니요. 나는... 당신이 어떤 모습이어도 좋다고 이야기했어요."

히아신스는 눈물 어린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 병원에서 당신이 창녀든 도둑이든 상관없다고- 그런 말을 썼어요. 하지만, 정말 친구였다면 당신이 그럴리 없다고 하는 편이 옳지 않았을까 하고."

"..."

히아신스의 말에 나는 내심 한숨을 쉰다. 여기까지 오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히아신스는 나를 너무 좋아하고 있었다. 너무 좋아해서, 지나치게 배려하고 있었다.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는 자에게, 그것도 만난지 얼마 안 된, 호감만 있을 뿐이지 전혀 알 수 없는 사람에게 무조건 '그게 사실일리 없어,나는 믿어'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폭력이다.

상대의 어떤 모습이어도 포용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히아신스가 나에게 가진 호의의 증거이며 그녀의 다정함이었다.

"하영, 정말 나는-"

"히아신스 님."

그녀의 과잉된 죄책감과 사과를 막을 필요성을 느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히아신스에게 그녀의 잘못도 아닌 걸로 사과를 받는 건 마음이 안 좋았고, 빨리 이 지리한 대화를 끝내고 싶었다. 점심은 물건너 간 것 같지만, 저녁때즈음에는 하기로 했던 걸 해야 했다.

'시간이 없어.'

더불어- 가능하면 히아신스를 떼어놓고 싶지만 그게 안 된다면, 그녀가 내가 둘러대는 말을 믿을 수 있도록-

"저야말로, 죄송해요."

"하영이, 왜..."

"그 기록은 아카인 아가씨에 의해-..."

파칭- 그 기묘한 소리에 매끄럽게 돌아가려고 했던 내 혀가 경직되었다. 순간적으로 히아신스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잔의 손잡이를 부쉈다. 그것도 손으로.

"..."

"그런 여자한테 아가씨라고 할 필요 없어."

"...어, 어쨌든..."

어느새 히아신스는 아카인 영애의 열렬한 안티가 되어, 가녀리고 고운 손으로 커피잔의 손잡이를 박살내고 계셨다. 과연 히아신스 에이나. 칼미온의 아이돌, 칼미온의 에메랄... 이게 아니고.

"...흠흠, 어쨌든 기록 자체는 조작된 겁니다만, 제가 연고 모르는 하찮은 신분이라는 것이 변한 건 아니에요."

"하영!"

"..."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부터 나는 나를 낮추며 그녀를 기만할 예정인데 히아신스는 벌써부터 진심으로 나를 위해 화를 내주고 있었다. 내가 의도한 거긴 하지만, 양심이 아프다.

"그래서, 저한테 자신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히아신스님께 누가 될 것 같기도 하고, 저를 드러내는 것도 자신이 없어 진심으로 히아신스님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나는, 과감하게 내가 직접 히아신스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손, 살아있는 히아신스의 손이다.

"하영?"

지금, 아니 앞으로 내가 그녀에게 하는, 진심을 가장한 이야기들은 전부 기만일 가능성이 높지만- 당신이 나를 얼마나 좋아해도 내가 당신을 앞으로 얼마나 좋아한다고 해도 진심으로 당신을 대할 일은 없겠지만.

"이렇게, 히아신스님께 상처를 드릴 줄 알았다면 저의 하찮은 자존심 따위는 버릴 걸 그랬어요."

"하영-"

"앞으로, 히아신스 님께 먼저 이야기할게요."

내 말에 기쁜 듯, 행복한 듯 미소짓는 히아신스를 보면 역시 잘 말했다 싶다.

*

점심시간은 그렇게 끝이 났다. 히아신스와 팔짱을 끼고 말랑말랑 분위기로 까페를 나온다. 시간이 아깝긴 했지만, 예상한 일이었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까페를 나오자, 점심시간이 시작될 무렵보다 조금 더 소란스러워져 있었다. 칼미온의 점심시간은 왕궁이나 일반 사람들의 점심시간보다 1시간 정도 빨랐다. 이 시간대가 진짜 점심시간 대라 그런지, 만만치 않은 인파들이 몰려들어 있다.

"저녁 때는 이반의 스크롤 가게에 갈 생각이에요."

저녁에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히아신스가 납득할 수 있게 말랑한 분위기에서, 라는 느낌으로 나는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하영이 마법에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사실, 쑥스러워서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나는 말꼬리를 늘이며 수줍은 듯 고백한다. 고백하는 척 한다.

"귀족 분께 대들 수는 없어도, 도망은 치고 싶어서 이동 스크롤 정도는 사고 싶었어요. 폐하가 아카인의-"

"..."

"그 여자가 이 수도에 온다고 할 때부터 내심 불안했거든요. 그래서 나가곤 했던 거예요."

"그랬구나..."

믿었다.

"흐음... 내가 지켜주는 게 가장 좋긴 하지만, 아무래도 사각지대라는 게 있으니까...아, 차라리 내가 선물해줄까?"

"선물은 필수품보다 이런 게 좋지요."

"후후, 그런가."

히아신스와 까페에서 산 케이크 상자를 흔들면 그녀가 마주 웃는다.

"그런 이유로 돌아다녔던 거예요. 저는 영 문외한이라 광장에서 마법 스크롤에 대한 정보도 얻고, 변경 지역에는 싸게 스크롤을 파는 이주민들이 있다고 해서 가본 거고요."

"응응."

"결국 가짜가 많아서, 이반의 가게에서 사는 게 낫다고 생각했지만요."

"확실히, 이반의 가게라면 대중적인 스크롤도 많고, 무엇보다 믿을 만할 테니까."

이동 마법 스크롤 중 회피용의 싼 것은 그럭저럭 저렴한 편이었다. 일주일 봉급을 쏟아부어야겠지만 그래도 살 수 있는 선이었다. 실제 마법가게에 가면 그것을 사긴 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밑밥을 깔아놓는데는 내 원래 목표인 마법 스크롤 점에 갈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 남자, 짐이란 남자의 범행 증거는 스크롤이었다. 그 다소 소심하고 유약해보이는 남자가 추락사건을 일으키려면 스크롤이 필요했고, 나는 그 스크롤을 유통했던 가게를 알고 있다.

이반 시몬스는, 안즈가 마탑의 수장이 되지 않았다면 지금 마탑의 수장으로 군림했을 전형적인 마법사였다. 집안은 혈통 좋은 마법사 가계였으며, 본인의 재능도 뛰어났고, 무엇보다 남자였다.

그 남자가 여자인, 그것도 마법의 마와도 관련 없는 귀족가의 서녀였던 안즈에게 수장 자리를 빼앗겼다. 그가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을지는 손쉽게 상상이 된다.

그 남자는, 마탑 부수장 자리나 마탑의 경쟁 조직이 보낸 콜을 죄다 무시하고 다소 파격적으로 마탑을 뛰쳐나와 마법상점을 차렸다. 평등하게 마법을, 이라는 기치하에 요령 좋게 서민과 귀족을 포괄할 수 있는 마법상점을 꾸렸는데, 상점이라기보다는 거의 현대 의 백화점에 가까웠다.

그리고, 짐이 사용할, 셀리안 크레이누의 결계를-혼신을 다하지 않았다 해도- 파괴할 정도의 스크롤은 그의 상점에밖에 없었다. 짐이 경제력이 없는데 착안한 몇몇 음모가는 이반 시몬스가 배후라고도 이야기했었다. 짐이 '머릿속 누군가가 시켰다'고 한 말이 근거였다. 이반이라면, 조종 마법 따위는 간단히 부릴 수 있다고. 하지만, 한 사람을 통째로 파괴할 정도의 조종 마법은 술사에게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기기 마련인데 이반 시몬스는 결백했다. 그에게는 어떤 흔적도 없었고, 사실- 그가 초대 황제의 동상에 그럴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뿌리 깊은 마법사 가계들은 대부분 마력이 깃든 왕조를 숭배했다. 마력이 없어지면서 비웃었지만 초대 에피룬 크레이누나 그 현신이라고 하는 셀리안 크레이누에 대한 맹신은 신앙에 가까웠다. 오히려 그는 감히 그따위 짓을 한 천박한 이민족 청년을 제 손으로 찢어죽이겠다고 길길이 날뛰었다고 한다. 당시 그 스크롤들은 도둑맞은 것이라고 결론이 내려졌다.

어제 변경지역에서 돌아오는 마차에서 나는 이반의 스크롤 가게를 생각하고 있었다. 시간은 없고 미적지근한 수가 아닐까 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다음 범행은 3주 뒤, 셀리안 크레이누의 결계를 깰 수 있는 스크롤은 아직 이반의 가게에 있을 터이다.

'뭐든 해봐야지.'

처음에는 아무 수확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직접 첫번째 범인을 만난 건 의미가 있었다. 짐이 자의로 사건을 일으킨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으니까. 사건을 서성거릴 수록 알아내는 것도 생길 것이고, 히아신스를 죽였던 범인을 우연히 만나거나, 그를 떠올리는 게 수월할 것이다.

"그렇구나, 스크롤에 관심이 있던 거구나... 으음... 하지만- 그런 거라면, 엘킨 대장에게도 말하지 그랬어?"

"...저는 엘킨 님 앞에서는...좀..."

둘러댄 거였지만, 엘킨을 입에 내는 것만으로 불가항력으로 얼굴이 빨개졌다.

"아, 아아. 하하, 귀여워라. 근데 아까, 엘킨 대장님이 하영에게-"

"..."

"후후, 이런 건 남이 말하면 안 되는 거지."

열이 오르는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히아신스가 기대에 찬 눈으로 힐끔힐끔 바라본다. 역시 아까 엘킨의 말은 누가 들어도-

"!"

"하영?!"

"히아신스님, 죄송해요!"

나는 나를 부르는 히아신스를 뒤로 하고 인파를 뚫고 달리고 있었다.

*

마지막으로 본 남자는 파리한 얼굴로 하얀 거품을 입에 물며 기절을 했다. 기절 한 후 죽은 것처럼 자고 있었다. 수도에는 온 적이 없다고 했다, 무언가를 두려워했고, 내 말을 부정했지만 짐작이 가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많은 인파를 헤치고 전속력으로 골목으로 들어섰다.

왕궁으로 가는 상점가의 골목길에서 나는 본 것이다. 목부터 얼굴까지 천으로 두른, 왜소한 체구의 그 남자가 흐느적흐느적 골목의 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을.

'있다-'

골목을 돌아서자, 그 많던 인파가 사라진 조용한 길이 나온다. 앞으로는 남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오로지 그 길에는 나와, 남자만이 멀찍이 떨어져 있다.

히아신스는 나를 놓친 것 같았다.

"거기, 기다려요!"

길을 따라 걷는 남자를 불러세웠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걷는다. 나는 뛰고 있다. 숨이 턱에 찰 정도로 미친 듯이 뛰고 있었지만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따라잡을 만하다고 생각되는 순간 남자는 다시 골목을 돌았다. 나도 골목을 돌면 처음만큼이나 다시 거리가 벌어져 있다.

'어째서, 저 남자가 수도에, 이곳에 있는 걸까.'

쫓을수록 앞서 걷는 남자가 짐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러나 아니라는 확신도 서지 않았다.

좀더 속력을 내고, 남자가 다시 다음 골목을 돈다.

“기다리라니까!”

“!”

다음 골목을 도는 순간 엇갈리듯 누군가와 부딪쳤다.

"죄송합니다."

“...았다.”

가볍게 사과를 하고 몸을 추스린 뒤 다시 남자의 인영을 쫓는다. 부딪친 상대는 언뜻 나보다 작은 여자 같았다. 제대로 사과를 하는 편이 맞겠지만, 남자를 놓칠 수는 없었다. 찜찜함도 금시에 사라지고,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이상한 그를 계속 쫓아 다시 골목을 돌고 돌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남자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골목을 돌면서 놓친 것도 아니었다. 거짓말처럼 뻥 뚫린 길에서 문득 그를 놓쳐버렸다.

“?”

말도 안 된다. 남자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진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조금 맥이 빠져서 걸음을 멈췄다. 마지막으로 돈 골목에는 오직 나밖에 없었다.

============================ 작품 후기 ============================

코멘트 완전 친절하셔서 놀랐어요.;ㅁ; 제가 피곤하다고 징징 거렸는데 다들 완전 상냥 달달, 사랑합니다.

에이리엘 님 // 이거 준 백합,브로멘스 물인데 큰일났네요. 셀리안*엘킨 히아신스*하영 밀어봅니다...농담입니다.ㅎㅎ 코멘 항상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ㅁ 저도 두근두근 리코멘 달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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