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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이 좋아.’
셀리안 크레이누의 기억 속에서 그는 웃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웃지 않게 되었다. 언제나 무언가를 참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나중에는 체념하는 시선이 되었다. 그저 올곧게 책망했다. 셀리안 크레이누의 사랑을 책망할 뿐이었다.
'책망할 만해-'
그러니까, 역시 이걸로 충분하다. 엘킨에 한해 새로운 자극 따위는 필요없다. 그가 지금과 다른 표정을 짓는 건 보고 싶지 않다. 그저 그다운 그의 웃음을 지키고 싶다고, 이 표정으로 충분하다고 재차 생각했다.
“...또 그 얼굴.”
“에?”
어느새 엘킨이 웃음을 멈추고, 불만스럽게 이야기했다.
50
불만스럽다고 착각하게 되는 표정을 유지한 채 엘킨은 말없이 나를 근처의 의자로 인도했다. 그에게 이끌려 정자의 의자에 앉는다. 떨어져 앉으려고 했지만 엘킨은 적당히 거리를 두면서도 결코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엘킨이 불만스러운 표정이라고?’
이것도 착각임에 분명하다. 류도 아니고. 엘킨이?
무엇보다 이유가 없다. 웃고 있는 자신을 계속 쳐다봐서? 그 역시 이유가 되지 않았지만 방금 전까지의 밝은 분위기가 무색할 정도로 조용해졌다.
“...또 바닥인가요?”
“...네-넷?"
엘킨의 표정을 궁금해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바닥을 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와 마주보는 게 슬슬 한계였던 것이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지만 이번에는 엘킨의 얼굴을 빗겨 그 옆의 허공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따갑다.
'어쩔 수 없단 말이야~'
불만스럽게, 화가 나서 나를 보는 엘킨- 그를 쳐다보지 못하는 나, 달래지도 못하고 원인도 파악하지 못하는 나라니.
'위 아파.'
하지만, 불가항력이라고 해야 할까. 엘킨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건 이 마음이 식었을 때나 가능할 것이다. 식으면 좋을 텐데.
“아, 어딘가 했더니... 폐, 폐하의 정원이었네요.”
“...공간 마법은 원래 단거리 정도만 이동하는 마법이니까요.”
“그, 그런가요?”
물론 안다. 공간 마법이라고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화포나 마법공격을 피해 적지에 침투하는 걸 목적으로 사용된다. 그마저도 마법전일 경우 방어마법을 펼치긴 하지만. 그래도 셀리안의 정원이라니-
이제야 깨달은 게 바보 같을 정도로, 여전히 존재감이 강한 정원이었다.
“폐하도 설마 여기로 올 거라고는- 물론 생각하시겠지만 왕궁 내 다른 어떤 장소보다 나중에 도달하시겠죠.”
“엘킨님도, 참-”
의외로 대범하다니까, 셀리안을 피해 셀리안의 정원으로 들어와 있다. 셀리안 자체라고도 할 수 있는 정원이건만, 그저 마나를 채워놓은 것뿐이지 그는 여기까지 감시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누구도 제 몸을 누가 감시하지는 않으니까. 제 등잔 밑은 모른다는 이야기다. 물론 그 등잔 밑을 허락한 자는 한정되어 있었다.
“늦게 오시면 오실수록 부끄러워하시는 얼굴을 볼 수 있겠군요.‘
"그렇네요."
대화가 이어질수록 엘킨의 표정이 풀어진다. 정정. 아마 풀어졌을 것이다. 남이 보면 정말 이상한 광경이겠지만 난 여전히 허공을 보고 있었다. 허공을 보며 맞장구를 치고, 웃기도 하며 그에게 대응하고 있다. 그의 목소리가 누그러져 있어 풀어졌다고 안심하는 한편, 엘킨도 고생이겠다 싶다.
'...역시 허공을 보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살짝 시선을 빗겨, 바닥은 아니고 그의 신발에 시선을 고정한다. 그가 참지 못하고 신발만 볼 거냐고 물을 때까지는 신발에 의지하기로 해본다.
*
엘킨의 신발은 검은 군화였다. 새것 같다거나 깨끗하지는 않았다. 그처럼 많이 일하는 남자가 깨끗하게 닦인 구두를 이 시간까지 유지한다면 그편이 이상하다.
군화는 낡았고, 흙이 묻어 있었다. 그의 신발이 밟고 있는 것은 정자의 대리석바닥이었기에 정자를 벗어난 정원의 흙바닥을 바라본다. 이 정원 흙은 아니다. 붉은 흙, 공사장에서 건물을 올리기 위해 쓰는, 그런 종류의 흙이었다. 흘끔 시선을 내 구두로 옮기면 역시 같은 흙이 묻어 있다. 그것이 수도 변경 지역 공사장에서 묻어온 흙이라고 문득 깨닫는다.
[너를 따라다니던 게 ‘둘’ 있었지.]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셀리안으로부터 듣지 못했다. 대답은커녕, 의미 모를 짓궂은 장난을 시작했으니까.
‘쫓는 게 둘...이라고 했지.’
나는 둔하지는 않다. 엘킨 앞에서는 평상시보다 둔해지곤 했지만 이 상황까지 와서 모르지는 않는다. 알고 있다. 모퉁이에 서 있던 엘킨, 장난치는 셀리안 크레이누- 답은 알 수밖에 없다.
가슴이 술렁거린다.
[우리 칼미온의 철벽 수장님이 점심, 저녁으로 열심히 나가신다고 해서, 게다가 오늘은 멋대로 하루를 비우고 말이야- 아아, 난 또 드물게 새로운 놀이에 눈을 떴나 했더니- 흐음, 이런 놀이일 줄이야. 좋은 놀이야. 드디어 너도-]
이제 와서? 그래, 이제 와서. 그 앞에서 나는 평상시와 달리 냉정하지 못하니까.
그제라면, 뻔하다. 셀리안은 의미심장하게 이야기하며 놀리긴 했지만 선후관계를 언급하지 않았을 뿐이리리라. ‘먼저’ 아카인 영애의 끄나풀이 내 뒤를 쫓는 걸 보고 걱정되어 따라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그가 나를 따라온 것도 이해가 된다. 엘킨은 다정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니까- 엔실렌 일도 있으니 나를 걱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셀리안이 아카인 영애와의 관계를 이야기해줬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아카인 영애의 뒤, 하루드를 쫓는 건 엘킨이니까. 알만한 이야기다.
“엘킨 님은... 오늘 저를 따라오셨던 건가요?”
흙이 묻은 그의 구두를 바라보며 묻는다. 심장이 뛴다. 여태까지도 계속 뛰었던 심장이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른 의미로, 처음 이 정원에 왔을 때와 비슷한 감각 같기도 하다.
무섭다-
왜?
대답을 기다린다. 걱정할 필요 없다. 걱정은 필요하지 않다. 이제 곧 그가, '당신이야말로 왜 자주 나가시는 건가요, 걱정됩니다.’라고 이야기해줄 텐데. '몸살이 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고 꾸짖을지도 모른다.
왜 나가는거냐고 계속 물어도 답이 곤란해질 뿐이지만- 그게 차라리 낫다고.
“...”
“...”
“...”
침묵이 계속 된다.
침묵이 내리깔릴 상황이 아닌데 싶어, 이상하게 불안해져 고개를 들었다.
“!”
그가, 엘킨 다이브가- 얼굴을 붉히고 나를 보고 있었다. 엘프의 피 때문에 비교적 색소가 없는 얼굴의 홍조는 확연이 두드러져서.
“에, 엘킨님?”
“...”
“엘-”
“다-”
한 번 더 그의 이름을 부르려 하면, 엘킨이 고개를 돌린다. 마치 나처럼, 여전히 붉은 채로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시선을 피했다.
“당신이야말로 왜 자주 나가시는 건가요, 걱정됩니다.”
그래, 이 대답을 원했다. 하지만-
“...여기 온 것도 사실 그 이야길 묻기 위해서였어요.”
다시 시선이 딱 맞는다. 맞았다가 엘킨이 슬쩍 시선을 내린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붉다. 붉지만, 해야 할 건 해야겠다는 결연한 표정이 된다. 고지식하다. 역시 엘킨 다이브. 역시 엘킨이지만.
“최근, 계속 나갔죠. 점심시간이랑 저녁시간에. 오늘은 하루종일.”
“네.”
“폐하께서 언뜻 이야기하신 것 같습니다만. 당신을 쫓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엘킨님께서 도움을 주셨다고 드,들었어요, 감사합니다.”
우리는 마치 정해놓은 대사를 하듯이 이야기를 나눈다. 엘킨은 얼굴이 붉어진 채, 나로부터 약간 시선이 벗어나 있고. 나는 드물게 엘킨을 빤히 보고 있었다. 얼굴을 붉힌 채로.
이상한 광경이었다.
있어선 안 될 광경이다, 그렇게- 한 번도 느꼈던 적이 없던 죽음에 가까운 감미로움과 살아 있기에 맛볼 수 밖에 없는 메스꺼움의 경계 속에서 혼란한다.
“...”
“...”
이야기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나도 엘킨도 입을 다문다. 뒤가 더 있다. 더 이야기 할 게.
엘킨은 왜 나가냐고 묻고, 나는 내일까지만 나갈 거라고 변명하고, 엘킨이 걱정하고 추궁하고, 나는 당혹하고-
그게, 자연스러운 거잖아?
그때 어깨에 손이 얹혀졌다. 마치 구원처럼.
“이번엔 내 차례인가, 엘킨-”
“-”
셀리안 크레이누였다. 그의 황제는 제 등잔 밑도 챙기는 사람이었고 엘킨과 셀리안은 서로를 너무 잘 알았다. 다시 한 번 시야가 하얘진다. 엘킨이 일어서려 했지만 나는 내 어깨를 붙잡은 셀리안의 손을 꼭 잡는다.
셀리안의 눈에 약간 의아함이 감돈다. 엘킨의 얼굴은 볼 수 없다.
보고 싶지 않았다.
*
셀리안이 나를 데려온 곳은 왕성 서쪽 구역의 옥상이었다.
“...흐음.”
“...”
나는- 입을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머릿속이 차갑다. 속이 울렁거린다. 역겹다. 당장 토할 수 있다면 토해버리고 싶다. 모든 걸, 그래 모든 걸.
눈 앞에는 엘킨도 없고, 엘킨이 없는 이상 마음은 차갑게 식어갈 뿐이건만, 두통까지 시작되었다.
머리가 아프다.
“이건 또 예상외군.”
그는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손을 번쩍 들어 주변을 인으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무래도 엘킨이 넘어오는 걸 막는 것 같다.
“...왠만한 결계는 엘킨 님이라면 넘어오지 않을까요?”
“엘킨이 오지 않으면 좋겠어?”
“...”
“흐음.”
그가 고개를 갸웃, 하더니 손을 탁탁 턴다.
“걱정마라, 여길 억지로 비집고 열려고 하면 나도 엘킨도 내일부터 3일동안 고열이야.”
"나라... 망하겠네요."
"괜찮아, 고열 속에서도 엘킨은 일할 테니까."
"...폐하는요?"
"원래 나는 별로 일하지도 않아."
거짓말쟁이- 그 허세에 기가 막힌 한편 안심하며 간신히 난간에 몸을 기댔다. 두통은 심해지고 있었지만, 엘킨이 오지 않는다면 그럭저럭 참을 만하다.
'착각이야.'
생각을 멈추기 위해 부러 난간 위로 시선을 줬다. 서쪽 구역의 옥상은 하늘과 가장 가까웠다. 새까맣지만 깊게 새파랗기도 한 기묘한 분위기의 아름다운 밤 하늘에는 보석처럼 별들이 흩뿌려져 있다.
봄이긴 해도 약간 쌀쌀한 느낌에 팔을 감싸면, 셀리안 크레이누가 자신의 겉옷을 나에게 걸쳐준다. 이게 다 이 남자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 별말 없이 옷을 여미자 그가 킥킥 웃는다.
“엘킨이 그대에게 관심이 많아.”
생각을 몰아내고 있는데, 눈치도 없는 남자다.
“다정한 분이시니까요.”
생각하고 싶지 않다. 떠올리고 싶지 않다.
다정하고, 상냥하고 잔혹한 엘킨- 그의 그 다정함이 셀리안 크레이누를 미치게 한다. 그리고 그 다정함에 나 역시 다시 미치고 있었다. 과거 속에서 미래의 내가 과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것이 끔찍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보다 끔찍한 게 있을 줄은 몰랐다. 차라리 그 편이 나았다고 생각한다.
나를 걱정해 따라다니던 엘킨, 이동한 즉시 나를 보던 그 시선, 나를 보며 얼굴을 붉히는 엘킨.
“...흐음.”
“...”
“그대는, 생각보다 복잡한 여자군.”
셀리안이 턱을 매만지며 나를 보았다. 복잡하다고 말했지만, 이 거지 같은 기분까지는 이해 못했는지 가볍게 이야기했다. 마치, 흔한 사랑에 대한 조언을 하듯이.
“뭐, 좋지. 사랑이란 때로는 애태우고, 오해하고, 멈춰서고 그런 거니까.”
“...사랑 같은 게 아니에요.”
그게 또 참을 수 없다.
“호오- 무슨 의미인지 물어도 될까?”
“사랑 같은 게 아니에요...이건 착각이에요.”
좀더 강하게, 언젠가 엘킨에게 했던 말과 같지만 좀더 강하게 이야기한다.
"착각이라고?"
"그래요. 착각이에요."
나는 물론 당연히 엘킨도, 착각이다. 그가 날? 그럴리 없다. 아마, 엘킨에게 너무 사랑받고 싶었던 셀리안 크레이누가 만들어낸 소망이나 환상이 분명했다. 그래, 셀리안 크레이누, 당신 때문에- 윤하영의 사랑은 순전히 셀리안 크레이누로부터 기인한 착각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그냥 사랑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님 그건가? 착각에서 시작하는 사랑이라든가, 확실히 엘킨은 네 진짜 나이를 모르니까. 너를 소녀라고 착각하고 있다면 착각인 건가.”
셀리안은 가볍게 웃는다. 가볍게 웃으면서 내 초조한 마음을 무시하고 기정사실로 만들고 있었다. 어쩌면 엘킨이 윤하영을, 이라는 지독한 농담을 사실처럼 이야기하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셀리안이, 그 셀리안이-
아, 아니었지. 그는- 그는 사랑을 모르는 젊은 셀리안 크레이누다.
“...폐하는 아직 사랑을 모르시니까 그런 말을 하시는 거예요.”
셀리안의 첫사랑은 엘킨이니까, 아직 그의 첫사랑은 시작되지 않았다. 사랑을 모르는 셀리안 크레이누, 나는 이렇게 괴로운데, 상관도 없는 윤하영이 이렇게 미쳐가는데 셀리안 크레이누만이 올곧게 사랑에 휩쓸리지 않고 태평하게 웃을 수 있는 것이다.
비겁해. 비겁하다.
"폐하는 비겁해요."
"..."
"비겁해, 비겁하고 치사해..."
화풀이, 지금의 그는 이해못할 화풀이.
“흐음-”
“뭐하는 짓이에요?”
날카로운 말이 나갔는데, 그로서는 황당한 말을 짜증스럽게 중얼거리고 있는데 남자는 내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래, 착하다. 착해."
"지금 무슨..."
커다란 손이 스윽스윽 하고, 윤하영과는 다른 커다란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의외로 셀리안 크레이누의 손은 체온이 높았다. 따뜻한 손이었다.
“정말이지, 나보다 나이 많은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게 될 줄이야.”
“그럼 떼요.”
하지만 셀리안 크레이누는 한동안 손을 떼지 않았고, 나 역시, 반발하면서도 멍하니 그 손길을 받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1. 왜 용량이 극악해지는가.
- 쓰다가 기절해서요.ㅜㅜ 요즈음 왤케 일이 많져...ㅜㅜ 죄송합니다으.
2. '면' 많이 쓰는 문체 좀 어떻게...
- 요즈음 일이 너무 많아서....ㅜㅜ 습관인지라 고치려면 하나하나 다시 봐야하는데 제가 기력이...ㅜㅜ;; 직장을 죽입시다. 근데 직장을 죽이면 굶어야 하기 때문에 죽이면 안 되어여...ㅜㅜ 이제 곧 월급날인데... 또르르...
3. 떡밥 좀 빨리 풀어.
- 떡밥은 조미료고, 이 소설은 로맨스니까요. 떡밥 따위 신경 쓰지 마세요.(라고 이야기하다가 맞고 끌려간다.)
후원 쿠폰 주신 티셰님은 오늘 제가 꿈에 나타날 예정입니다. 티셰님, 제 꿍꼬또요?/ㅁ/(퍽) 감사합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 이 떡밥만 무성한 로맨스 같지 않은 미완성의 소설과 함께 해주시는 사랑하는 독자님들! 정말 정말 사랑해요!>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