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 패러독스-44화 (44/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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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뭡니까."

엘킨의 말에 소년은 조금 뾰로통한 표정이 되었다. 아니 엄밀히 말해서는 그냥 기분을 헤친 것 같지만 아무래도 외관이 있다보니 뾰로통해 보인다.

귀여울 법도 하건만 위화감이 든다. 아이는 엘킨의 살의를 느끼지 못하는 걸까, 화가 난 건 알겠는데 지나치게 가벼운 반응이었다.

살기, 살의- 그 현실감 없는 개념을 알게 해준 건 류다. 그가 때때로 셀리안에 대해 품는 적의에 살의가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엘킨으로부터 소년을 향해 똑바로 내뻗어지는 것도 분명히 살기다. 다만, 류의 살의가 악의와 짜증을 품은 반면 엘킨은 고요했다. 그 푸른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아 고요하게 위압한다.

"진짜, 오래 살고 볼 일이라니까요. 고작 어린 하프엘프에게 '이것' 취급이나 받게 되다니."

위화감이 명확해진다. 어린 꼬마가 저런 대사를 해봤자, 망상을 입에 낸 것에 불과한 게 상식이었지만 이 세계에서는 저게 헛소리도 망상도 아니란 걸 안다.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

'평범한' 어린애에게 엘킨이 엄청난 살기를 향할리가 없다. 누구에게나 예의바른 그가 '이것'이라고 비난 하듯 이야기할리도 없지.

저 아이와 만난 후로 이상하게 머릿속이 멍해져 아이의 응석을 받아주고 있었다. 류가 나타난 후에도 계속 되던 멍함은 그의 피를 먹는 순간 신기하게도 사라졌다. 정신이 돌아왔다. 그 방법의 열받는 정도와는 별개로 저 아이가 내게 무언가 한 것만은 알 것 같다.

류와 아는 사이인, 이상한 힘을 쓰는 어린아이, 저 애도 보통 애가 아닌 것이다.

“뭐냐고 물어도 말이야..."

툴툴대는 소년이나 심각해보이는 엘킨과 달리 류는 아무래도 좋다는 얼굴을 했다. 기계적으로 엘킨의 말에 곰곰이 고민하는 낯을 하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소년을 향해 묻는다.

"이름 알려줘도 돼?”

"싫어! 이 시대에 내 이름을 알아도 되는 건 너랑 누나랑...어쨌든 일단은 둘뿐이야.”

아이는 도리질치며 입술을 살짝 깨문다. 깨물고 나를 본다. 저 아이가, 아니 아이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에게 괘씸한 무언가를 하려 했다는 건 이제 알았다. 그렇지만, 나를 보는 그 시선에는 영문 모를 애정뿐이다. 애정과, 지금은 약간 울 것 같은-

“그렇다는데요?”

“이름 따윈 관심 없습니다. 어떤 요물이냐고 묻는 겁니다.”

“픕-!”

"...보는 눈도 없나?"

엘킨의 이야기에 류는 폭소했고 소년은 불쾌한 듯 투덜댄다. 불쾌해했지만 엘킨을 향한 비웃음도 섞여 있다. '그것도 모르냐'는 오만한 시선이었다.

엘킨은 흔들리지 않고 소년을 바라보았다.

"당신의 근원이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만. 기운이 탁하군요."

"..."

“이런 탁한 기운을 가진 존재는 ‘요물’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지 않을까요.”

“...너.”

소년의 오만했던 시선에 분노가 스민 건 한순간이다. 분위기가 일변한다. 그 전까지 뾰로통하다던가, 기분이 나쁘다던가의 수준이었다면 그는 이제 이를 갈며 엘킨을 노려보고 있었다.

위험하다- 고 직감한다. 엘킨이 위험하다. 엘킨도 느꼈는지 자세를 바로 잡고 검을 꺼내든다. 류는 흥미로운 듯 관망한다.

"같잖은 선의 잣대로 나를 판단하지 마라. 하프엘프."

"설마, 키오스에서 목숨을 걸고 요물을 쓰러뜨리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쓰러뜨려? 너따위가?"

"애초에... 세류 키스톤이 중간에 난입하지 않았다면 베어버릴 생각이었으니까요, 어떤 요물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경의를 갖고 상대해 드리겠습니다."

"...입만 살아서-"

바로 전까지 기쁜 듯 내 옆에서 웃던 천진한 미소가 사라지고 소년의 검은 눈동자가 날카롭게 엘킨을 바라본다. 엘킨 역시 물러나지 않고 그와 눈을 마주했다. 짜릿하게 스파크가 튀는 것 같은 긴장감.

엘킨이 진다-? 그런 건 모른다. 베어지는 건 정말 소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친다. 이대로라면 엘킨이 크게 다치고 만다.

'이 즈음, 엘킨이 크게 다치는 사건 따윈 없어.'

그럼 왜-? 당연히 나때문이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나에게 흥미를 가진 꼬마- 그리고 나때문에 화를 내는 엘킨.

'나를 위해'

그 말이 갖는 위력은 달콤하기 그지없다. 나를 위해 화를 낸 엘킨이 나를 위해 싸워 나 때문에 피를 흘린다. 그것은 얼마나 황홀한 일인가.

*

"누나?!"

나는 엘킨과 아이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갑작스러운 난입에 둘 사이에 흐르던 긴장감도 흩어진다.

팽팽하게, 주위를 압도하던 기운이 흩어지는 순간 느껴지는 건 미지근한 밤의 봄바람 뿐이다. 하늘을 한 번 바라보면, 어째 더 캄캄해진 것 같다. 시간은 더 지나고 지나 한밤중이다. 드문드문 지나가던 사람들도 자취를 감춘 밤.

'어째, 쪽팔리네.'

원래세계의 매체들을 떠올려보면, 싸우는 두 사람, 두 남자- 이 경우 한 명은 어린애지만- 사이로 끼어드는 이야기는 많은 편이다. 지어낸 이야기는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나마 보았던 로맨스 소설의 경우 주인공은 사랑을 위해, 망설임 없이 싸움을 말린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다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이기도 했고, 때때로 싸움 자체를 싫어하는 상냥한 성품의 증명이기도 했다.

나는 어떨까. 적어도 끼어드는데 아무런 의욕도 신념도 없다는 건 확실하다. 그래서 이 상황이 민망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제는 셀리안 크레이누의 사념인지 윤하영이 하는 사랑이 그런 모습인지도 구분이 안 가게 된 그 감정. 그가 '나 때문에' 다칠지도 모른다는데 달콤함을 느끼다가, 그 감정에 대해 혐오감을 느껴 몸을 움직이는 여자라니.

'진짜 싫겠다.'

아마 그런 여자가 있다면 최악이다. 그런 여자에게 사랑받는 남자가 불쌍할 지경이다.

구원이라면 윤하영은 매우 약해, 최강의 기사라 불리우는 엘킨 다이브에게 미세한 상처조차 입히지 못할 거란 점이다.

나는 엘킨을 외면하고 아이만 본다. 지금 엘킨을 본다면 그가 나 때문에 화낸 것에 감격해서 어떤 얼굴을 하고 그를 바라볼지 나도 모르겠으니까.

‘그럼- 무슨 이야기를 하면 좋을까.’

흑안흑발의 인간이 아닌, 나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던- 류의 지인. 사실 나는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정적으로 피해를 본 게 없었기 때문에 유야무야 넘어가고 싶다.

굳이 이야기하면 류에게 애 단속 좀 잘 해라 정도로- 내 안전에 대한 확신을 받고 싶은 정도일까

"비켜주십시오."

하지만, 엘킨은 그런 식으로는 넘어가주지 않을 것 같다. 단호한 목소리가 뒤로부터 들려온다. 그는 여전히 무언가 참는 것 같다.

조금 이상하다. 엘킨 다이브는 대군을 상대로도 항상 침착하며, 어떤 비열한 자를 앞에 두고도 흔들리지 않는다.

내 행동이 그로서는 답답해보일지 모르지만, 그가 조급해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역시 누나는 엘킨 다이브를 좋아하는 거야?"

"뭐?"

고민 하는 사이 끼어든 건, 약간 가라앉은 소년의 목소리다.

이 꼬마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아니, 처음 본 꼬마에게도 들킬 정도로 티가 났던 걸까.

확실히 엘킨만 오면 빨간 불이 되는 내 얼굴을 생각하면 들켰을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반대야!"

"그래?"

뜬금없이 반대를 외치는 소년을 향해 되물은 건 류다. 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외라는 듯이 묻는다.

"하영이가 가야 할 길은 엘킨 다이브의 첩 아니었어?"

뭐시...?

"그건 누나가 누나인지 몰랐으니까 그랬지. 인간 여자 생물 중 첩이나 되는 여자는 품격이 떨어지는 거야."

"그래? 네가 그런 말을 하다니, 의외네. 닳는 것도 아니잖아."

"류!!"

소년이 버럭 소리를 지른다. 새하얀 뺨이 새빨갛게 변한다. 아이는 참기 힘든 얼굴로 씩씩 댄 뒤, 나에게 눈을 맞춘다.

보기에 마음이 움직일 것 같은 안타까운 표정이다. 표정이지만.

"..."

뭐랄까, 지금 뭔가 퍼뜩 머리를 스친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류가 빙그레 웃는다.

"얘야, 내 친구."

"그 친구?"

"응, 그 친구."

"..."

표정 관리가 잘 안 된다. 조금 싸해진 얼굴로 아이에게 눈을 맞추면 소년의 얼굴이 절망스럽게 변한다. 변했지만, 그 천진한 어린 표정이 어째 가증스럽게 느껴진다. 인간이 아닌 생명체의 나이는 외관으로 가늠할 수 없다고 한다. 크게 와닿지 않는 내용이었지만 실제로 보니 뭔가...

더군다나 그런 천박한 이야기를 하던 '친구'가 진짜 저 애라면...

"...크...윽...."

나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던 소년이 휙 고개를 돌려 엘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음산하게 중얼거린 뒤 가볍게 발을 구른다.

"누나한테 손 대면 죽을 줄 알아, 하프엘프."

발을 구르는 동시에 아이는 어둠 속에 녹아들듯 모습을 감췄다.

============================ 작품 후기 ============================

으허어 월요일이다. 배고프고 졸리고 힘든 월요일입니다. 월요일부터 좀비상태인데 이번주 어쩜 좋아요.ㅜ_ㅜ//

**스빈 버블티가 너무 맛나서 좋아요. 특히 딸기요거트 버블티가 진짜 굿맛, 존맛, 꿀맛... 그런 이야기입니다.

뱅구리님, 블루바라님! 후원쿠폰 감사 드립니다. 행복한 한주 되세요>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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