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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에 감싸인 듯 멍했던 시야가, 아니 정신이 조금 맑아진다. 그래도 역시, 자는 도중 깬 것처럼 혼미한 느낌이 남아있다. 이상하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상황을 확인하면 류가 붉은 단검으로 소년의 이마에 꿀밤을 먹인다. 누가 봐도 명검인 그 단검으로 딱- 하고. 그 정도로 소리가 나게 때렸으니 꿀밤 수준은 아닌 것 같지만.
“무슨 짓이야! 류!”
아이가 이마를 문지르며 울먹인다. 울먹이며 류를 바라보면 류는 등을 돌려 내게로 다가온다.
‘여전히 좀 이상한데.’
맑아졌다고 생각했지만 조금이다. 여전히 멍한 느낌이 든다. 이상하다. 이상한데 뭔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다시 아이 쪽으로 시선을 주면, 아이는 이마를 문지른 채로 나를 보며 미소 짓는다.
‘...모르겠어.’
모르겠다. 다시 ‘무언가’에 통째로 먹히는 것 같이, 다른 건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기 시작한다. 그럼 무엇이 좋은 걸까. 그 부분에 무언가가 덮어써진다. 아이의 흑요석 같은 눈동자에 윤하영이 있다. 아니 윤하영의 ‘영혼’이 투영되고 있다.
“윤하영-”
“응?”
류가 내 시선을 차단하듯 가로막았다. 소년이 부루퉁하게 항의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아랑곳 않고 그대로 몸을 숙였다.
류는 남자치고는 키가 작았지만 나보다는 컸다. 내 키는 여자 키로는 간신히 평균이었으니까. 그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나와 눈을 마주했다. 평소에는 감은 것 같은 실눈이 살짝 떠져 날카로운 금빛 눈이 나를 바라보았다.
“렌- 너-”
“뭐!”
“적반하장은- 작정하고 박아넣었군.”
“그야, 내 걸로 만들 생각이었으니까, 적당히 하면 말이 안 되지.”
“쯧-”
가볍게 혀를 찬 류가 붉은 단검을 들어 자신의 팔목을 근다. 촤악, 하고 피가 나오기 시작했다. 아이가 다시 한 번 탄식하듯 한숨을 쉰다. 투덜투덜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라고 이야기했고 류는 ‘한 번만 더 얘한테 이러면 버릴 거야’ 라고 경고했다. 영문 모를, 씨도 안 먹힐 것 같은 말이었건만 그 말을 끝으로 아이는 입을 다물었다.
“류?”
내 앞에 류의 팔이 있다. 체구는 작아도, 그는 다부진 몸을 가지고 있었다. 근육이 붙은 단단한 팔에서 붉은 피가 흐르고 있다.
히아신스 말로는 세류 키스톤은 굉장한 실력자라고 했다. 키스톤가의 무술은 자신의 몸을 지키는 정도일 텐데 스스로 훈련한 거라면 놀랍다고 칭찬했던 기억이 난다.
“먹어.”
이러니 저러니 해도 머리에 문제가 있으시니 칭찬이 아까워지지만.
“...싫어.”
“왜!?”
아니,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그는 답답하다는 듯이 씩씩 대며, 내 앞에서 뻐금거린다. 뭔가 이유를 말할 것처럼, 하지만 이유를 말해도 그의 피를 먹도록 설득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설득 당하지 않을 테니까!
“이 애랑 아는 사이지?”
“아아? 아는 사이지. 그보다 너 어디 가는 거야?”
“어린애를 혼자 보내기 그랬는데 너랑 아는 사이라면 됐지. 난 가볼게.”
뭔가 이상하게 길이 새버리긴 했지만, 들어가봐야 한다. 앤에게 연락을 하긴 했지만 늦어도 너무 늦었다. 머리도 멍한 게- 졸린 것 같기도 하고 내일을 위해서는 가서 쉬는 편이 좋겠다고.
돌아서려고 하면, 류가 다시 내 팔을 잡았다. 뭐냐고, 따지려고 하는 순간 그가 그대로 나를 붙잡아 자신의 코앞까지 바싹 끌어당긴다.
“무슨, 짓이야!”
“정말 안 먹어?”
“왜 먹어야 하냐니까.”
“그야- 으으. 난 설명 약하단 말이야!”
“설명만 약하냐!”
전반적으로 상식에 다 약하겠지!
“놔, 나 갈 거라고!”
“아 진짜-”
버둥거렸지만, 그는 아랑곳 않고 나를 붙잡고 고민하고 있다. 고민할 거면 날 좀 보내줘-
“...으음...”
“야, 이 자식아, 놓으라니까.”
“귀 웅웅거리잖아. 조용히 해봐.”
“미쳤냐.”
“조용히... 아.”
류는 나를 붙잡은 채 고민하며 조용히 하라고 연호했다. 연호하다가 문득 내 입을 보고, 무언가 떠올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 났어.”
“뭐?”
자신의 팔에 입을 대고 주욱 빨아들이는 게 순식간. 그대로 머금은 채 점점 얼굴이 가까워오는 게 또, 어차피 가까워서 금새 코앞이다.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구상에 소름이 끼친다.
“잠깐- 스톱! 안 먹어!”
도리도리, 머금은 채 그가 고개를 젓는다.
“아니! 먹지 않을 거야! 그리고 그런 식으로 먹을 생각도 없어!”
고개를 갸웃- 이 가증스러운 놈.
“...이, 입으로 옮기려고 하는 거 아니야?”
이게 설레발이면 이불킥이다. 그런데 설레발이면 좋겠다.
불행히도 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싫어-읍!!”
강력하게 거부의사를 밝히려는 내 입으로 류의 입술이 부딪쳐왔다. 허리는 단단히 붙잡혀 저항할 수 없다. 자유로운 손으로 때려봤자 씨알도 안 먹혔다.
‘무식하게 힘만 세서는!!’
말캉하고- 입이 닿는 순간, 벌어진 입 속으로 혀가 파고 들어온다. 눈앞에는 가늘게 떠진 금색 눈이 보이고, 그의 혀가 그대로 입천장을 따라 주욱 미끄러져 목젖을 건드린다.
“흐읍!”
“...”
꿀꺽- 하고 목구멍 안으로 불쾌하게 뜨거운 액체가 미끄러지듯 삼켜진다.
“아아.”
아쉬워하는 듯한 소년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렸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다. 거부할 수 없다. 그의 악력이 강한 건 알고 있었다. 손이 얼얼할 정도로 강하게 나를 붙잡는다. 떨어질 수 없다. 괴로움에 허덕이면 그의 눈이 고양이처럼 날큼하게 나를 보았다.
피를 먹인다- 는 소기의 목적이 이루어졌지만 류는 떨어지지 않았다. 다른 의미를 가지고 그의 혀가 내 입안을 돌아다니고 있다.
애 앞에서 무슨 짓, 아니 내게 무슨 짓, 이 자식 이건 또 무슨 짓- 대체 뭐냐고!!
뿌옇게 휘저어진 것 같았던 머릿속은 어느새 완전히 맑게 갠다. 대신 분노와 황당함으로 정신이 어질어질할 지경이다.
“뭐하는 짓입니까.”
그때, 조금 억눌린 듯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
“...아, 따라다니던 1개...”
줄곧 아쉽다는 듯 탄식하던 소년이 재미있다는 듯 키득거렸다. 류에게 붙잡힌 채 설마설마 하며 옆을 보면 엘킨이었다. 엘킨이 가면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그 푸른 눈동자에 류와 키, 키스하는 내가 그대로 비치고 있다. 아니 무효! 이딴 건 키스가 아냐, 첫키스가 이런 놈과!! 그것도 엘킨 앞에서!!
뻔뻔한,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류새끼는 여전히 나를 껴안고 입을 맞춘 채 엘킨과 눈을 마주한다.
“...떨어지십시오.”
다시 한 번, 억눌린 목소리가 들린다. 억눌린 건 비슷하지만 조금 종류가 다르다. 그 목소리에 류가 내게 입을 맞춘 채 킥킥 웃더니, 항복선언을 하듯 내게로부터 떨어진다.
바깥공기가 공급되자, 나도 모르게 크게 한숨을 쉬었다.
“엘킨 님 아니십니까.”
류가 실실 웃으며, 엘킨을 불렀다. 여전히 허리는 끌어안은 채다.
“떨어, 지십시오.”
“전부 다 이야기하시는 거였나요.”
“...”
엘킨의 푸른 눈이 서늘하게 류를 노려본다. 류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나를 떼어놓았다. 그리고 엘킨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나를 보며 이야기했다.
“이제 안심해.”
“뭐?”
그로부터 떨어진 채 숨을 몰아쉬며, 나는 류를 노려보았다. 엘킨의 등장으로 심장이 빨라졌지만, 그것과 이 새끼에 대한 분노는 별개였다.
“...이건 뭡니까.”
따지던지, 때리던지 무언가 하려고 할 찰나 엘킨이 류의 옆에 있는 소년을 가리킨다. 그의 눈은 여전히 차갑고 날카롭기 그지없다. 류에 대한 적의도 사라지지 않았지만, 소년을 향한 눈에는 적의만 담긴 게 아니다. 찌릿하게 날카로운 느낌이 팔에 소름을 돋게 한다. 이게 뭔지 알고 있다. ‘살기’라는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