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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오늘은, 어땠나요?”
칼미온으로 돌아가는 복도에서 히아신스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의 녹빛 눈동자가 기대감으로 반짝인다. 엘킨도 관심이 있는듯 내게 귀를 기울였다.
황제의 방에서 나온 히아신스 에이나와 엘킨 다이브, 그리고 하녀인 윤하영이 왕궁의 붉은 융단을 나란히 걷고 있다. 이상한 광경이다. 하지만, 당사자인 둘이 신경쓰지 않는다.
“하영-“
“아.”
조금 멍해있었다. 그녀의 물음에 간신히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는다. 정신적으로 피로한 것도 있지만, 약간 몸이 으슬으슬한 것 같기도 하다.
티타임은- 가벼운 이야기와 농담이 몇번이고 오갔으며, 히아신스 취향의 달콤한 케이크와 셀리안이 먹기 위해 단 맛을 줄인 과자, 향이 좋은 홍차를 곁들여 향기롭게 진행되었다. 구성원들은 하녀인 나따위에게 더없이 호의롭고 친절했다.
“즐거웠어요.”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대답하자, 히아신스가 조금 부족한 표정을 짓는다.
“다행이야, 하지만… 내가 궁금한 건 사실, 음...”
“?”
”그!! 말이야~ 둘이 함께 있었잖아. 리안, 아니 폐하는 어땠어요?”
“…”
히아신스는 시험성적을 기다리는 학생과 같은 시선으로 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마음에 들지 않았어도, 입에 발린 칭찬밖에 돌려줄 수 없는 질문이다. 상대는 황제인 걸. 그녀도 알고 있을 것이다. 황제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졌어도, 나쁜 인상을 가졌어도 상대에게 부담스러운 질문이라는 걸. 그걸 알고 있지만 히아신스는 물을 수밖에 없다.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호의를 가진 상대가 어찌 생각하는지 궁금했을 테니까.
그 모습이 사랑스러웠고, 대답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진심을 담은 이야기로.
“제가 감히 폐하에 대해 함부로 평할 수는 없으나, 정말로- 훌륭하고 상냥한 분이셨습니다.”
정말로 훌륭한 왕이었다. 상냥하고, 엘킨만큼이나 고결하고 히아신스만큼 강하고 올곧은 그런 사람이었다.
‘비참하구나.’
엘킨을 실제로 처음 만나, ‘내’가 그를 사랑한다고 착각하고 절망했을 때와 비슷한 비참함이다. 다만, 그때의 감정이 격렬했다면 지금은 그저 고요하게 참담하다. 그가 내 안에 있는 그와 다르다는 걸 안 순간부터-
참담한 기분으로 생각을 반추하면 문득 엘킨과 눈이 마주친다. 그 푸른 눈이 나를 담고 흔들거린다. 그냥 내 시야가 흔들리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버릇처럼 나는 시선을 피했다. 지금의 나는 너무 ‘윤하영’답지 않다.
“기쁘네.”
“…”
“기뻐. 하영이가 폐하를 좋게 봐줘서, 그리고 리안도... 하영이를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아.”
히아신스가 웃는다.
“하영이랑 폐하는 닮은 부분이 있으니까, 맞을 줄 알았어.”
“그런 송구스러운.”
송구스러운 이야기다. 셀리안 크레이누와 닮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화가 날 것 같았지만 이번만은 그저 고요했다. ‘그’ 셀리안 크레이누는 내 안에 없다. 그런 훌륭한 남자는 내 안에 없었다.
머리가 핑그르 돌았지만, 내색하지 않는다. 몸살이 오는 걸지도 모르지만, 참을만 하다.
“약간 분위기가 비슷해.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으음... 그것과 별개로... 사실- 좀 걱정한 것도 있어요. 폐하가 저래봬도 좀... 짖궂은 데가 있어서.. 혹시나 하영에게 엉뚱한 말을 했을까 하고 말이에요.”
“아니에요.”
“앞으로 하영도 알게 될 걸. 저는 말이에요. 처음 폐하를 뵈었을 때 놀랐어. 지고의 마법왕이라고 존경했는데 갈수록 얼마나 엉뚱한지... 아, 엘킨 대장 앞에서 이런 말 하면 안 되는데...”
“폐하가 엉뚱하다는 데는 히아의 말에 찬성입니다.”
엘킨이 공감한다는 듯이 웃는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입가에 심장이 한 번 거세게 뛴다. 그의 웃음이 내 심장을 움켜쥔 것처럼, 가뜩이나 안 좋은 몸 상태가 휘청 흔들릴 것 같다. 조금 주먹을 쥐고, 이 지긋지긋한 연정의 착각을 참아낸다.
“처음 만났을 때라... 저의 경우도... 설마 한나라의 왕께서 혼자 몸으로 나타나실 줄이야.”
“아, 알아요. 용병단에서 엘킨 대장을 데려오라고 했지, 설마 마을에 직접 갈 줄은 몰랐어요.”
“...”
첫 만남의 이야기다. 영주의 병사를 앞질러 용병들이 습격한 마을에 혼자의 몸으로 등장해 엘킨과 조우한 셀리안 크레이누.
걸음을 멈추지 않고 도란도란 이야기가 오간다. 윤하영을 사이에 두고 엘킨과 히아신스가 미소지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그것을 머나먼 과거의 그림처럼 바라보고 있다.
“폐하는 말이야, 멋대로 잠행을 나가거나 사고를 일으키고. 사람 놀리기를 좋아하고 충동적이고!”
“그렇군요. 저한테 이야기하지 않고 일단 행동하고 보는 것도 조마조마하죠.”
“...”
“죄다 엉뚱한 짓이면서 마치 계획한 것처럼 멋진 결과만 내는 것도 분해요.”
“조언을 할 수가 없죠.”
사랑받고 있다. 사랑받을 만한 왕이 그의 반려와 부하에게 사랑받고 있다.
이것으로 충분했는데.
*
“그럼, 내일 봐, 하영.”
돌기만 하면 칼미온이 나오는 모퉁이, 나는 시내에 나가 장을 봐야 했기에 반대쪽으로 돌아가야 했다. 히아신스가 가볍게 손을 흔들고, 엘킨이 고개를 숙인다. 히아신스는 아쉬운 표정이었고, 엘킨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등을 돌렸다.
모퉁이에서 헤어지는 터라 두 사람은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반대쪽으로 돌아 걷기 시작했다.
해가 떨어져 태양은 새빨갛게 부서지듯 저물어간다.
‘셀리안의 눈동자 색 같아.’
피처럼 진득하게 바라본다고 생각했던 붉은 눈동자는 그저 마지막의 잔상일 뿐, 현재의 그는 태양처럼 붉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현재 셀리안의 눈동자 같은 석양에 눈을 빼앗긴다. 눈물이 날 것 같다. 이게 그리움인지, 혐오인지 잘 모르겠다.
“어라?”
태양이 빙글빙글 돈다. 눈이 빙글빙글 돈다. 태양으로부터 시선을 떼면 바닥이 빙글빙글 돈다.
혼자 남아, 멍청한 생각을 하다보니 본격적으로 몸살 기운에 잠식당하는 것 같다.
‘장봐야 하는데.’
최근에는 본의 아니게 게으름을 부리게 된다.
정신과 몸을 다잡으려 했지만 의지와는 다르게 점점 서있기도 버겁다. 바닥이 꺼질 것처럼 눅눅하게 녹아들어 나를 옭아맬 것처럼, 붉은 융단과 붉은 석양 빛에 감싸여 옴싹달싹도 할 수 없게 된다.
[윤하영]
내 이름을 부르는 셀리안 크레이누의 목소리-
‘나’는 셀리안 크레이누의 연장선이며 내가 가진 셀리안 크레이누는 이 시절의 셀리안 크레이누를 잃었다. 잃어버린, 빛나던 시절의 ‘그’를 마주해 비참해지는 건 ‘윤하영’의 감정이 아니다.
‘나는 ‘셀리안 크레이누’가 아닌데. 윤하영이잖아.‘
기울어지려는 몸을 추슬러야 하는지, 점점 잠식되는 정신을 먼저 다스려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일단 주의하듯 나 자신에게 대뇌인다. 하지만, 잡아먹혀 간다. 몸도, 마음도.
이 붉은 석양에- 셀리안 크레이누에게-
셀리안 크레이누를 만나고, 윤하영은 윤하영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셀리안 크레이누’는 나와 함께 이곳에 있으니까. 하지만, 그 셀리안 크레이누가 내가 품은 셀리안 크레이누가 아니라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히아신스를 죽도록 하고, 엘킨을 무너뜨린 죄는 온전히 ‘나’만의 것이었다.
“흐윽-“
비틀거리는 몸은 기어이 땅으로 기울어진다. 내 그림자가 점점 나에게 다가오는 것 같은 착각 속에서 나는 쓰러지고 있었다. 그것이 슬로우 모션처럼-
“…이번에는 제대로 제가 잡았네요.”
“!”
바닥 바로 앞에서 몸이 끌어올려졌다. 무너진 몸은 땅에 부딪치지 않고 남자의 손에 안겨 있다. 길고 섬세한, 무인의 손은 차갑다. 차가운 촉감에 정신이 든다.
엘킨 다이브, 청명한 푸른 눈동자가 걱정스러운 듯 나를 보고 있다. 그 투명한 물속에 비친 건 흑발흑안의 윤하영이다.
“엘킨…”
“괜찮나요? 몸이... 뜨겁습니다.”
엘킨이라니, 님이라고 불러야 하는데. 대장님이라든가, 엘킨님이라든가-
‘엘킨이라고 부른 건, 윤하영이야, 셀리안이야.’
멍하니 눈을 깜빡인다. 석양 속에서 온통 붉은 세상 중 단 하나 청명하게 꿈처럼 현실처럼 빛나고 있다.
“역시 열이 있네요. 계속 안 좋아보여서, 걱정했습니다.”
“...”
“...당신은-”
그는 눈을 찌푸리며 나를 본다. 광장에서 떨어진 히아신스, 아니 떨어진 누군가에 나도 모르게 히아신스를 껴안았을 때- 푸른 망토로 나를 보호하며 보였던 그 눈빛이다. 당신은- 이라고, 그때도 이야기했지.
‘류가 끼어들어서 듣지 못했어.’
그다음, 동상 앞에서 나를 만류했을 때도 당신은-이라고. 뒤는 듣지 못했다. 셀리안을 만날 줄은 몰랐으니까.
“...일단, 칼미온으로 돌아가죠.”
“당신은… 뭔가요?”
“네?”
“당신은- 뒷이야기요. 두번이나 못 들은 것 같아요.”
“큭.”
“아, 웃었다.”
엘킨이 웃는다. 허를 찔린 듯 그 푸른 눈을 깜빡이다 웃는다. 나는 그에게 지지된 채 그의 웃음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거세게 쿵쿵 뛰는 심장도, 아마 달아올랐을 얼굴도 그대로일 텐데. 이상하게 그의 차가운 손으로 인해 머릿속이 시원해진다. 그냥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당신은- 그 뒤를 알려주세요.“
그 뒤를 알려줘. 엘킨 다이브- 셀리안 크레이누가 사랑했던 엘킨 다이브가 윤하영에 대해 생각한 걸 말해줘. 그러면,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나’로 있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 작품 후기 ============================
지난 화에서는 지지난화의 오프닝과 겹치는 엔딩으로, 지루하지 않게 해보고자 시간 배열을 바꿔봤는데... 혼란만 가중시켜드렸드아...
일본으로 출장 다녀오신 동료가 준 말차케이크를 오물거리며 일하는 목요일이었습니다. 녹차 따윈...이라고 생각했지만 맛있어서 어느새 1,2,3... 그렇게 오늘도 제 살은 불어갑니다. 또르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