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 패러독스-36화 (36/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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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의 움직임으로, 어느새 엘킨과 히아신스를 만나기로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음을 깨달았다. 정원에는 지고의 황제와 단 둘 뿐, 황제의 눈은 태양처럼 자애로운 빛을 띠고 있었다. 이제 내 눈에는 더 이상 그의 눈이 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느낄 수 없었다. 그저 태양처럼, 루비처럼 빛나게만 보인다.

그것이 절망적이라고.

“도와다오.”

올곧은 눈빛으로 거짓없이 청하는 젊은 황제의 모습에, 나는 울고 싶어졌다.

35

셀리안과 나는 꽤 긴 시간 이야기했다. 다만, 그가 미리 엘킨과 히아신스에게만 기별을 넣어 실제로는 문제가 없었다. 약속장소는 정원이 아니라 티룸이었고 시간도 살짝 늦춰져 있었다. 황제는 나와 단 둘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함께 히아신스들에게 가는 순간 이야기해주었다.

셀리안이 바꾸었다는 약속장소인 티룸에 도착하면 히아신스와 엘킨이 미리 와있었다. 나와 셀리안이 함께 들어서자 히아신스의 시선에는 의아함이 감돈다.

“하영과 리안...아니, 폐하가 같이 올 줄은 몰랐어요.”

“질투하는 건가. 그럼 기분은 좋은데.”

히아신스가 놀라며 다가오자, 셀리안이 씨익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히아신스가 얼굴을 굳힌다. 얼굴을 굳히긴 했지만 쑥스러워 하는 거다. 나도 알고, 셀리안도 아는 버릇. 실제 셀리안은 그런 그녀가 귀엽다는 얼굴을 했다.

“폐하는 장난만 치고! ... 하영? 무슨 일 있어?”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물끄러미 그런 둘을 바라본 뒤 고개를 저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저-

나는 셀리안 크레이누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

셋이서 갖는 시간은 소박했다. 히아신스는 여전히 이상한 지지를 계속하며 엘킨 옆에 나를 앉혔고, 셀리안은 키들키들 웃으며 히아신스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히아신스는 셀리안을 반려로 내게 소개했고, 나는 마치 처음 안 거처럼 연기한다. 그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이 셀리안이 바라보았다.

이야기 중간중간 옆에 앉은 엘킨과 어깨가 부딪히기라도 하면, 나는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한숨처럼 숨을 들이켰으며 얼굴이 빨개진 채로 자리에 앉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에 히아신스와 셀리안이 웃고, 엘킨은 곤란한 웃음이었지만 한결 다정해진 미소로 나를 바라보았다.

미친듯이 두근거리는 심장, 새빨개진 얼굴- 엘킨을 보고 싶은 마음과 보고 싶지 않은 마음에 시선을 피하고 피하는- 그런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그리고 그 모습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셀리안과, 히아신스- 그런 상황이

당연한 것처럼 이어진다.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시간, 역겹도록 지리한 시간이었다.

*

셀리안은 ‘살고 싶다’는 내 소망을 들은 뒤, 아카인 영애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것은 역사에는 없는 이야기였으며, 당연히 수도에서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벅찼던 윤하영은 모르는 이야기였다.

지온에서 사라진 흑발흑안의 윤하영은 돈과 개중 비싼 축에 속하는 장식품 몇 개를 가지고 도망쳤다. 제 약혼자에게 그런 추잡한 짓을 하고 달아난 윤하영은 사라지면서 편지 따윈 남기지도 않았다고 한다. 사라진 돈도, 장식품도, 편지도- 누가 꾸몄는지는 대충 짐작이 갔지만.

‘이상하게 화 나지 않네.’

셀리안의 말을 들으며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산도 아마 도둑에 창녀에 도망자 같은 그런 여자에게는 질렸을 거다.

하지만, 셀리안이 이어 하는 이야기는 내가 기대한 것과는 달랐다.

산은 돈과 장식품이 없어진 걸 알았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그저 나를 찾았다고 한다. 다만 어떻게 알았는지-뻔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도둑은 결국 도둑이라며 혀를 차고 산을 위로했다.

산은 그런 말에 화조차 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나의 흔적을 찾고 지온에 내가 없다는 걸 확신한 뒤 떠나기로 했다. 자신이 나고 자란 마을을 말이다.

산의 결단은 앨리자베스를 조급하게 했다. 거짓말도 진실도 산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산은 윤하영이 어떤 사람이라도 찾는다- 먼 도시를 이야기하면 산은 먼 도시로 가볼 기세다. 결혼을 했다고 해도 아마 확인하기 전까지는 안심하지 않는다.

결국- 그녀는 그나마 산과 함께 할 수 있는 진실을 이야기하기로 한다. ‘윤하영’이 수도 ‘휴론’에 있다고. 산이 나를 열심히 찾는 걸 걱정해 자신도 찾아봤다고 덧붙인다. 수도에서 ‘윤하영’이란 여자를 봤다는 사람이 있다고.

그러니까, 함께 수도에 가자고.

*

“산은 거절했지. 엘킨과는 다른 타입이지만 우직한 녀석이니까. 장소를 알려줘서 고맙다, 찾는 건 내가 하겠다. 아마, 자신을 좋아하는 여자에게 과도하게 신세를 질 수 없다고 생각한 거겠지.”

“...”

“참고로, 지금 이야기는 ‘사실’과 ‘추측’이 섞여 있으니, 감안해서 듣도록 하거라.”

셀리안이 권한 자리에 앉아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내 신분으로 그와 같은 눈높이의 자리에 앉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황제 본인이 허락한데다가 이 정원에는 우리 이외에는 없었다.

“그럼 산은...”

“일주일 뒤에 아카인 영애와 함께 오지.”

셀리안이 씨익 웃는다. 씨익 웃으며 다시 부러 눈을 맞춘다. 나도 사양하지 않는다. 다시 말없이 시간이 흐른다.

“...”

“...”

나는 산과 아카인 영애의 이야기에는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오히려 질려버렸다. 또다시 사랑이- 도망치고 싶었던 산의 사랑도 아카인 영애의 사랑도 이 수도로 오고 있다는 게 지긋지긋해서.

오히려 이야기 하는 틈틈이 확인하듯 셀리안의 눈을 들여다았다. 그의, 루비 같기도 하고 태양 같기도 하고 피 같기도 한 붉은 눈동자- 이상하게도 그 눈을 계속 보게 된다.

빨려들어가 그 깊은 곳에서 확인한다. 내가 아는 셀리안 크레이누를, 몇 번이나. 그리고 나를, 몇 번이나.

“여기까지의 이야기 중 모순이라고 생각하는 점이 있나?”

“있어요, 아카인 영애의 호의를 거절한 산이 아카인 영애와 ‘함께’ 온다는 게 걸리네요. 방향이 같다는 이야기는 아니신 것 같고. 뭔가 사정이 있나요?”

심드렁해진 것과는 별개로 나는 그의 물음에 착실히 대답했다. 질리는 이야기이긴 해도 내게 중요한 이야기라는 걸 알겠다.

“그래-”

내 대답에 그는 만족한듯 고개를 끄덕이고 시시한 사정이지만, 이라고 덧붙인다.

“아카인 영애가 산을 지키다 다쳤다는군.”

“?”

“산이 마을을 떠나다가 노예잡이들에게 습격당했거든.”

“...유치한...”

“호오. 노예잡이랑, 아카인을 바로 연결 시키는 건가... 너에게 확인해야 할 게 는 것 같은데.”

“...”

셀리안이 흥미를 가진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애매하긴 하지만, 노예잡이라니, 듣자마자 헛웃음이 나왔다. 토할 만큼 우스운 이야기였다.

고전 로맨스에나 나올법한, 자기가 습격 당하게 한 뒤 제가 구해주는 상황- 진짜 그런 상황을 만들다니, 귀족 아가씨의 얕은 생각일까. 그렇다 해도 이건 심했다.

‘그 아가씨는 노예마차와 노예잡이 같은 껄끄러운 것들을, 아카인에서 부릴 수 있는 하녀나 하인 정도로 생각하는 걸까.’

똘똘한 아가씨라고 생각한 걸 정정해야겠다. 어리다 정도로 생각했는데 멍청하기 그지없었다. 계속되는 그녀의 돌발행동으로 셀리안 크레이누는 완전히 아카인의 꼬리를 잡은 것 같다.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그 멍청한 사랑에 혐오감마저 느낄 무렵, 셀리안이 농담처럼 말을 건넸다.

“너무 그러지 말거라, 첫사랑은 소중한 거라고들 하지 않느냐.”

“...”

“흐음, 엄청난 표정이군. 극단적이긴 해도 이해의 범위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해 못 하거든요.”

자기도 이해 못한다는 얼굴을 하고. 후에 그가 엘킨을 아카인 영애만큼이나 지독하게 사랑한다는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뭐- 여기서 핵심은, 그 유치한 행동 자체가 아니라, 그녀가 진짜 다쳤다는 거지만 말이다.”

“?”

“아카인이 고용한 노예잡이들이 산을 습격했다. 아카인 영애의 처음 계획은 아마도, 조금 만 다치게 해, 산을 간호하며 함께 수도로 간다- 였을 확률이 높아.”

아픈 그를 간호하면 그도 조금은 자신을 봐줄지도, 의지해줄지도 모른다, 고.

셀리안은, 거기까지 말하고 안경을 벗었다. 더 이상 문서에 의존할 이야기는 없다는 듯이, 이야기는 끝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 아가씨가, 산이 노예잡이들에게 두들겨 맞고 있는 와중에 뛰어들고 말았다-”

“...”

“아마, 실제 산이 맞는 걸 보니 견딜 수 없었던 걸까.”

“바보 같은.”

“그래, 바보지. 노예잡이들도 참 운이 없는게, 예상 못한 복병이 제 아가씨일 줄은 몰랐다는 것과- 이 예상치 못한 상황이 제 아가씨를 영원히 불구로 만들었다는 걸까-”

셀리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아카인 영애가 오른쪽 다리를 못 쓰게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

“...”

다시 침묵이 내려앉는다. 이번에 나는 그의 눈을 보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강하게 느꼈던 아카인 영애에 대한 혐오감도 오히려 잠잠해졌다.

“통쾌하진 않은 것 같군.”

“...지금 산은...”

“아카인 영애의 하인이 되었더군. 죄책감을 느끼고 그녀를 평생 모시기로 했지만, 마음은 받아줄 수 없다는 입장...이 아닐까 싶은데.”

그는 어깨를 으쓱한다.

“...”

아카인 영애는 오른 다리를 못 쓰게 되었어도 그걸로 만족하지 않았을까- 지금은, 전혀 그녀를 이해 못하는 셀리안이 ‘과거에’ 아니,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그럴 것처럼.

어쩐지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더 이상 그녀에 대해 혐오감조차 들지 않는다.

‘이 남자도 미래에, 미래에...’

엘킨을 사랑하게 된 미래에- 그저 옆에 둔 것만으로, 기뻐서, 기대할 수 있어서. 옆에 두면 언젠가는- 이라고. 멀어지려는 엘킨을 손에 넣은 것만으로도 만족해서.

‘그래서 히아신스를 죽도록 한 거야.’

제 다리가 부러져도, 사랑하는 사람을 옆에 둔 것으로 만족했을 아카인 영애처럼. 제 일부와도 같은 히아신스를 잘라냈던 것이다.

============================ 작품 후기 ============================

이거 로판이랍니다>ㅁ 마지막에 누구랑 이어질지 정하지 않은 것뿐이지 생각해놓은 로맨스한(?) 장면도 있습니다. 언제 어떻게 나올지 저도 알 수 없어 문제일 뿐이죠... 또르륵...

뱅구리님, 너무너무 감사합니다.ㅎㅎ 계속 열심히 써나가겠습니다!>ㅁ//

에이리엘 님 // 산뜻하다는 말씀에 너무 기분이 좋네요. 다들 아카인 영애에 대해 사이다...를 원하시는 것 같은데 제 글이 좀.;ㅁ; 덜 사이다 사이다 해서, 죄송스럽네요.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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