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 패러독스-32화 (3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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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실제 엘킨 다이브를 만나고 왕궁에 들어온 후부터 셀리안의 꿈은 적어졌다. 그것은 다행이었다.

그래도 빈도가 줄은 것뿐이지 나의 꿈은 대부분 셀리안 크레이누의 과거였다. 그것은 언제나 그렇듯 거의 엘킨 다이브와의 편집적인 추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엘킨 다이브가 어떻게 웃고 어떻게 날 성가셔 하고 어떻게 나에게 동정하고.

셀리안 크레이누는 병적이기까지 할 정도로 그에 대해 생각하고 생각했다. 기억하고 기억했다. 생각하고 싶어 했고 기억하고 싶어 했다.

정말 싫은 남자였다. 그리고 내가 그런 남자라고, 결국 내 사랑도 그와 닮은 게 필연이라 생각하면 나는 끔찍함에 몸을 떨었다.

게다가 나는 정말로 엘킨 다이브를 좋아하게 되었으니까.

거의 만나지 못할 때도 가끔 멀리서 그를 보기라도 하면 나는 심장이 뛰고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고, 그가 내게 여유로워지기 시작한 그제부터는, 사실 숨도 못 쉴 정도로 두근거리고, 머리가 아팠으면서도 좋았다. 메스꺼우면서도 그 메스꺼움을 기꺼이 받아드리고 싶을 정도로 좋아서.

남이 나를 좋아할 때 생기는 메스꺼움은 그렇게 싫었건만.

내 마음이 강할수록 나는 죽을 것 같이 괴로웠고. 그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실제 그가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았다.

그랬다.

어제 추락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나는 히아신스를 걱정했고 그러면서도 엘킨에게 눈을 빼앗겨서.

역겨운 일이다.

어제가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다. 류에게 인도 되어 칼미온에 도착하고 사정 이야기를 들은 앤은 나를 방에서 쉬게 해주었다.

방에서 나는 꿈을 꾼다. 셀리안의 꿈은 아니다. 이번 꿈은 조금 다르다. 꿈인지 잘 모르겠다.

“히아신스 님?”

나는 멍하니 중얼거린다.  히아신스가 곁에 있다-고 생각한다. 몸은 이상하게 굳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무겁게 짓눌린다. 가슴에 올라탄 듯한 무게, 히아신스의 머리카락은 기니까 그녀의 머리카락인 듯 한 것이 얼굴을 간지럽힌다.

‘히아신스는, 돌아온 걸까. 어떻게 되었을까.’

새털처럼 가볍게 내 목을 감싸는 듯한 따뜻한 촉감에 안도한다. 살아 있어, 아직은 괜찮아 라고.

그런데 그 따뜻한 것은 액체 같다. 따뜻하고 질척하게 나를 감싸온다.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 없는데 눈만은 조심스럽게 떠진다.

어쩌면 떠진다고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희미한 눈꺼풀 사이로 검은색 머리카락이 내 얼굴을 간지럽힌다. 같은 검은색이라고는 하지만 그녀의 머리카락은 밤의 강물처럼 고혹적인 색이었다. 그저 검은 내 머리카락과는 다르다.

그, 강 같은 머리카락이 물에 젖어 있다.

물에 젖어 있다.

‘물이 아냐. 피다.’

검은 머리카락이 붉은 피에 젖어 있다. 잘 보면 왼쪽 머리가 함몰되어있다. 그 탓인지 얼굴은 새하얗다.

나는 그녀를 확인한다. 내 몸 위에 히아신스가 엎드려 널부러져 있다. 널부러져서 나를 보고 있다.

언뜻 본 것보다 더 새하얗고, 눈동자는 머리카락 사이로 희미하게 보인다. 다행히 충혈되거나 그렇지는 않다.

내 위에 올라탄 히아신가, 머리가 부서진 채 어둠이 입을 벌린 것 같은 진녹색 눈동자로 멍하니 나를 바라본다.

눈동자에는 아무 감정도 없다.

언제나 생기 있게 빛났는데.

‘아.’

나는 문득 그녀를 부르고 싶다고 생각했다.

“...히아-”

셀리안 크레이누가 부르던 애칭으로,

사랑하진 않았지만 좋아했던- 엘킨과는 달랐지만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던 이름을.

그 이름을 부르는 순간 정말로 눈이 떠지고 날이 밝은 걸 깨달았다.

*

“괜찮아?”

빨래를 하고 있으면 류가 내게로 다가왔다. 그 일이 있고 하루가 지난 아침이었다. 더 쉬어도 된다고 했지만 나는 고집을 부려 일을 하기로 했다.

“무슨 일이야?”

“어제 완전 얼굴이 새파랗게 되어서 방까지 왔잖아. 괜찮나 하고.”

“내가 신호등이냐. 파란색이면 다가오게.”

심드렁하게 이야기하며 빨래를 문지른다. 그가 내 옆에 앉아 빨랫감을 든다.

“빨래도 하게?”

“응. 이런 거 처음이야.”

“아, 좋겠네.”

그가 함께 빨래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양파깎을 때와 마찬가지다. 힘이 있어서 그런지 나보다 속도가 빠르다. 나쁘지 않은 도우미이다. 묵묵히 빨래를 문지르며 시간이 흐른다.

“내가 괜찮은지 않은지 왜이렇게 관심이 많아.”

그것도 새파랗게 질렸을 때만. 성폭행 당하려고 할 때도 안 구했으면서.

“응, 죽을까봐.”

“얼굴 새파래진다고 죽냐?”

“시체들하고 비슷해서 얼굴색이.”

“죽는 건 걱정 되나 보지.”

지난 번에도 그랬지. 죽지 않게 하는 게 구원이라고.

“응, 난 네가 제법 흥미로운데 죽으면 없어지는 거잖아. 아쉽지.”

“아쉬워서?”

“응, 아쉬우니까.”

뭔지 모르겠다. 이해하기도 싫어서 빨래를 북북 문지르면 그가 입을 연다.

“아 재미있는 이야기 해줄까.”

“...”

밑도 끝도 없다고, 심드렁하게 무시하고 빨래에 전념한다. 류는 기대하란 듯이 싱글싱글 웃었다.

"또 죽었다던데."

그 말에 흠칫 놀라 그를 본다. 그가 나를 본다.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일부러 빨래에 전념하고 류에 대해 평소처럼 불평하며.

정말 사람을 허무하게 만드는 남자다.

“난 니가 날 볼 때 좋더라.”

“...”

“크레이누의 동상에서 오늘 아침에 또 사람이 떨어졌다고 해. 이번에는 다리부터 떨어져서 허리까지 뭉개지고 머리는 멀쩡했다고 해.”

킥킥 웃으며, 잔인한 이야기를 태연하게 했다.

“하하, 기분 좋다. 황제도 기분이 더럽겠어. 자기 동상에서 사람이 떨어지면 완전 기분 나쁠 테니까.”

“...에피룬의 동상이잖아.”

내가 지적하자 그가 의외라는 듯이 바라본다.

“그게 그거잖아.”

“달라. 셀리안 크레이누랑 에피룬 크레이누는 다른 사람이잖아.”

“똑같은 거야.”

“...달라.”

“...이상한 걸로 물고 늘어지네?”

그는 드물게 나를 향해 불쾌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나도 불쾌하다. 이런 걸로 따지는 나도 싫고, 무신경한 말을 하는 류도 싫고, 분명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이 남자 이외에도 있을 거라고 생각되자 토가 나올 것 같다.

*

앞으로 5개월간 키오스의 수도를 떠들썩하게 만들 연쇄 추락 사건. 매일 매일 떨어지기도 하고 1달의 공백 후 떨어지기도 하는 추락사건은 5개월간 계속 된다.

광장에 있는 거대한 초대황제의 동상에서 여자들이 떨어져 죽는 이야기, 무슨 재주로 올라갔는지 올려보내졌는지는 모르지만 초대의 동상에서 여자들은 아침 혹은 정오 즈음 춤을 추듯 몇 번 정도 빙글빙글 돌다가 고꾸라진다.

머리가 콰드득 철벅 소리를 내며 깨지고, 그 소리에 사람들이 나와보면 머리가 깨진 여자의 시체가 선황제의 동상 앞에 널부러져 있다.

때로는 창녀, 때로는 귀족 아가씨- 비율적으로는 창녀가 많다고 한다.

"처음 여자는 어느 병원의 하녀였다고 해. 얼굴이 뭉개져서 이제야 밝혀졌다는데?“

“...병원?”

그는 불쾌해했지만, 동상 이야기가 어지간히 즐거웠는지 금새 기분을 풀고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사람의 죽음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얼굴을 하고 남자는 웃는다. 웃고는 있지만 실눈 사이로 황금빛 눈동자가 무기질적으로 빛난다.

“이번엔 다행히 얼굴을 멀쩡해서 누구인지 금방 밝혀졌다고 해.”

“...”

“귀족 여자라고 하더군. 황제도 곤란하겠어. 큭-"

귀족 여자라는 말에 흠칫한다.

'그럴리가 없지.'

그럴 리가 없다. ‘아직’은 아니다. 역사가 뒤틀려도 그럴 리는 없지.

지금이라면 셀리안은 그녀를 구할 테니까.

“하영, 있어요? 어라, 키스톤 경.”

멍하니 반추하고 있으면, 히아신스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녀가 빨래방의 문을 열고 내게로 다가온다.

“괜찮나, 해서 보러 왔어.”

“...”

문득 어젯밤 꿈에서 본 공허한 눈동자가 그녀의 녹빛 눈동자로 겹쳐졌다.

금방이라도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핏방울은 떨어지지 않고, 그녀의 단정한 얼굴은 다친 데 하나 없다.

머리 한쪽이 함몰되거나, 텅빈 눈으로 나를 멍하니 보지 않는다. 생기 있는 복숭아색 뺨.

“하영?”

걱정스러운 듯 고개를 기울인다.

그녀는 멀쩡하다. 그런데도 몸이 굳는다. 심장이 굳고, 마음이 멈춘다. 그녀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윤하영을 잃었다.

셀리안 본인은 신경도 쓰지 않는 기억인데 왜 나만, 하는 야박한 생각 속에서 무시했다. 무시하겠다고 생각했다.

당신의 죽음을, 무시하려고, 도망치려고 했어.

“고마워요. 언니. 걱정되어서 보러 와준 거죠?”

나는 애써 그녀를 향해 미소지었다.

히아신스는 5개월후, 이 추락사건의 마지막 희생자가 된다- 나는 다시 한 번 역사를 곱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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