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 패러독스-31화 (3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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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회는 새벽까지 계속 되었다.

머리도 식히고 이제 정말 엘킨과 같은 공간에 있기 싫어 밖으로 나올라치면 히아신스가 나를 잡았다.

“어디가?”

“다들 정신 없는 것 같아서, 시내에 나가 아침으로, 모두의 빵이라도 사올까 하고요.”

“흐음.”

이건 사실이다. 이왕 나가는 거, 칼미온 사람들이 좋아하는 빵집에 다녀올까 생각했다. 그런 나를 히아신스가 빤히 바라본다. 바라보더니 갑자기 내 뒤로 시선을 빗긴다. 왠지 불길한 예감에 뒤돌아 보면, 엘킨이 있다.

“대장! 하영과 저, 아침을 사러 시내에 갈 예정인데, 대장도 함께 가시겠어요?”

“!”

“양이 많아서요! 도와주십시오!”

이, 더럽게 허물없는 칼미온 같으니.

히아신스도 아예 노선을 나에 대한 응원으로 돌렸나보다. 누가 가르쳐준건지는 모르지만, 오늘부터 그 자식은-아무래도 미실랭이 유력하다- 내 원수다.

거절하길 바라며 슬금슬금 눈치를 보면 엘킨은- 아무래도 나를 피하지 않기로 결심을 한 것 같다.

“그럴까요?”

*

시내로 나왔다.

새벽의 공기는 시원하게 폐부로 스며든다. 하루종일 환영회로 복작복작했던 만큼 기분 좋을 만한데, 나는 나는 아주 죽기 일보직전이었다. 오른쪽에 히아신스, 왼쪽에 엘킨. 참 멋진 양날개다.

나는 덜덜 떨며 터미네이터처럼 걷고 있다. 그런 나에게 히아신스가 팔짱을 낀다.

“요 앞에 완전 맛있는 빵집이 있던 거 기억하지?”

“히아가 맛있다고 하는 걸 보면 몹시 달겠군요.”

“엘킨 대장도 얼른 그 맛을 알아야 하는데 말입니다.”

“단 건 싫어하지 않아요. 다만, 폐하는 싫어하겠군요.”

“아- 맞다.”

히아신스의 녹빛 눈동자가 나를 향해 생기있게 반짝인다.

“...”

설마.

“조만간 깜짝 놀라게 해줄게요, 기대해주세요.”

“으...”

무슨 생각인지 알겠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알게 되었으니 자신의 반려를 소개시켜주겠다는 그 이야기인 것 같다.

“저...?”

“내 반려, 소개 시켜준다고 했잖아요?”

역시나였다.

싫다. 대체 셀리안을 만나서 어쩌자고. 그건 나잖아. 나인가?

엘킨이 말리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그는 나를 완전히 히아신스의 친구로 인정했는지 흐뭇한 얼굴이다. 그 얼굴에 또 두근거린다.

미치겠다.

*

광장을 지나 검은 머리카락의 두 미인이 미남과 걷고 있다. 에피룬의 동상이 있는 광장에는 아침에도 제법 사람이 많았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우리의 모습은 제법 시선을 끌었다.

힐끔거리는 시선 속에서 히아신스가 빵꾸러미를 한 봉지, 내가 한 봉지, 엘킨 대장이 다섯봉지를 들고 걷고 있다.

빵은 평범하게, 칼미온 사람들이 선호하는 아침식사용으로 사고, 히아신스가 먹고 싶어하는 달콤한 케이크는 미리 먹고 왔다. 입안에서 달콤한 향이 난다. 그녀는 의외로 대식가라 가게의 케이크를 종류별로 시켜서 다 먹은 것이다. 나도 최선을 다 했지만 3조각이 한계였고 엘킨은 한 조각정도. 나머지는 히아신스가 전부 처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행히 엘킨과 함께 있는 시간이 오랠수록 ‘심장박동’과 ‘메슥거림’에 익숙해졌다. 여기서 포인트는 익숙해지는 거지 괜찮아졌다는 게 아니다. 그냥 내 병에 익숙해진 거다.

“특히 바나나 초코렛 케이크 맛있었어. 안에 오독오고 씹히는 건 아몬드였나?”

“꿀에 절여 버터에 볶은 호두였어요.”

“꿀에 절인! 어떻게... 칼미온의 디저트로 나올 수 없을까- 혹시 하영은 케이크 만들 줄 알아?”

“케이크요?”

케이크라, 지온에서 산의 생일에 초코 케이크는 만든 적이 있지만.

문득 산이 생각났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나를 좋아한다고는 했지만 어차피 아카인 영애와 결혼하는 건 수년 뒤다.

나도 없겠다, 아카인 영애는 운명대로 그에게 구애를 하고 있을 것이다.

“뭐, 잘 만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초코 케이크는 만든 적이 있네요.”

“못하는 게 없군요, 하영은. 흐음, 좋은 신부가 될 것 같아.”

히아신스의 눈이 슬금슬금 엘킨을 바라본다.

제발 그러지 좀 마.

문제는 이상하게도, 이 이상한 응원이 미실랭과는 달리 귀여워보인다는 것이다. 귀여운 사람이다.

셀리안이 히아신스를 사랑했다면 좋았을 텐데.

“히아신스님이 더 좋은 신부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렇게 사랑스러운 걸요.”

그런 감상을 나도 모르게 이야기하면 히아신스가 눈을 둥그렇게 뜬다.

“...하영.”

그리고 나를 꼭 껴안았다.

“우왓-”

“나를 꼬시면 어떡해, 나 두근거리잖아.”

사랑스럽다.

그래, 히아신스는 이렇게 달콤하게 사랑스럽다. 이런 사람이 왕비가 되면 얼마나 행복할까. 이 나라도, 셀리안도.

나는 히아신스를 껴안은 채 엘킨을 보았다.

‘그렇다면 저 사람도 행복할 텐데.’

푸른 눈에 내가 담기자 얼굴이 달아오른다. 심장이 뛰기 시작해, 그를 더 이상 볼 수 없어 좀더 힘껏 히아신스를 껴안는다. 히아신스는 그게 좋은지 좀더 나를 꼭꼭 껴안았다.

‘히아신스가, 이런 히아신스가 죽을 리 없잖아-?’

이렇게 따뜻한 걸.

쿵, 콰직-

그때였다. 단단한 것이 추락해 부서져 토마토가 뭉개지는 듯한 그 소리가 들린 건.

우리는 에피룬의 동상이 있는 그 광장에 서 있다.

*

쿵, 콰직- 하는 소리에 히아신스가 고개를 돌리려 했다. 방향은 광장의 동상 쪽이다. 나는 그녀를 붙잡는다. 꽉 껴안는다. 돌아보지 않게. 나도 모르게.

“하영?”

히아신스가 놀라서 물었지만 나는 동상쪽을 바라본다.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든다. 희미하게 붉게 뭉개진 것이 바닥에 흩어진 게 보였다. 밤색 머리카락이다.

히아신스가 아니다. 히아신스는 내 품에 있다.

“...하영, 숨 막혀요.”

히아신스를 꼭꼭 껴안는다.

괜찮아. 따뜻해. 히아신스는 여기 있어.

부들부들 떨면서도 동상 밑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면 푸른 망토가 내 시야를 가렸다. 어느새 내 시야는 엘킨으로 가득 찬다.

방금까지 히아신스를 생각했는데 엘킨의 모습에 황홀함을 느끼기 시작하는 게, 마치 그게 당연한 것처럼 점멸하는 감정에 절망스럽다. 이 품에 있는 히아신스의 따스한 체온은 안도이자 저주처럼 나를 옭아맨다.

뛰는 심장이 멈추고 그저  눈앞이 흐려져, 견딜 수 없이.

“당신은...”

“결국 해버렸네.”

언제 나타났는지 류가 옆에서부터 중얼거렸다.

*

“키스톤 경?”

히아신스가 놀라 나로부터 떨어졌다. 작정하고 미는 그녀를 붙잡을 수 없다. 나는 멍하니 그녀로부터 떨어졌고 히아신스의 시선이 동상 쪽을 확인했다. 엘킨은 계속 내 시야를 가려주고 있다. 그녀가 동상을 바라본다. 바라보고 나를 본다. 녹빛 눈과 내 눈이 얽힌다. 그녀가 다시 나를 껴안았다.

“미안! 하영, 나 때문에...”

“키스톤 경, 죄송합니다만, 하영 양을 왕궁으로 데려다 주시겠습니까? 히아.”

“네 대장.”

히아신스는 나로부터 떨어져 물끄러미 나를 보았다.

“정말 미안해요. 하영. 설마 이런 일이.”

“...”

“다정하네. 하영은. 보지 않게 해준 거죠?”

그녀가 말이 없는 나를 다시 한 번 꼭 껴안고 류에게 나를 맡긴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시 한 번 시선을 주면 동상은 이제 사람들이 모여 있다.

류가 나를 데리고 걷기 시작하면 히아신스와 엘킨이 그쪽으로 달려간다.

‘죽었어.’

나는 류가 데리고 가는대로 따라 걸으며 차마 뒤돌아보지 못한다.

에피룬의 동상에서 떨어진 밤색 머리카락의 여자가 시작. 앞으로 5개월간 계속되는 연쇄 추락사건, 그리고 히아신스가 죽는 건-

5개월 뒤이다.

‘죽고 말았어.’

5개월 뒤, 히아신스는 죽는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생각한다.

그러나 이미 달려가는 히아신스를, 붙잡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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