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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에?”
“사실 걱정했습니다. 히아신스는 사실 사람에게 면역이 없어서요.”
“...”
그녀는 귀족들에게 멸시의 시선을 받았지만 올곧고 강하고 스스로 빛나는 여성이었다. 혼자 빛나기에 역으로 타인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지만 강한 사람인 만큼 한 번 믿으면 마음을 잘 줬다. 자신을 믿으니까 남을 올곧게 사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 그녀가 부러질까봐, 타의에 의해 상처입고 그 곧음이 부러질까봐 ‘나’와 엘킨은 항상 걱정이었다.
“이용이라거나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용하고 있어요!”
나도 모르게 외쳤다. 그렇게 답하면 안 되는데.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그렇게 이야기 한다.
연기해야 하는데. 심지어 히아신스 앞에서도 이런 적이 없는데. 왜 나는.
편하게 살려고 이용한다.
그녀가 죽게 방치할 거면서, 친하게 지낸다.
내가 편하기 위해.
죄책감이 있기 때문에 그녀가 다가오면 거절하지 못한다. 약한 주제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귀찮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서 감히 ‘히아신스 에이나’가 좋다고 생각했다. 좋은 사람이라고 호의를 가져버렸다. 뻔뻔하게.
이용하고 있다. 충분히.
“하하하.”
그런데 엘킨은 웃기 시작했다. 청명한 목소리가 복도를 울린다. 그 웃음소리에 나는 또 넋이 나가 그를 바라보았다.
“히아신스에게 좋은 친구가 생겨 다행입니다.”
“아니...”
“히아신스를 지켜줘서 감사합니다.”
엘킨 다이브가 나를 향해 다정하게 미소지었다. 미소지은 뒤 가볍게 다가와 내 뺨에 손을 뻗는다.
“실례.”
“...아.”
닿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닿지 않는다. 거리를 두고 그가 주문을 외운다. 치유 주문이었다.
“이제 아프지 않을 겁니다.”
“...읏.”
“세게도 때렸네요.”
그가 다시 한 번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
“이런...”
길을 잃었다.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갛게 변해 그대로 엘킨에게 인사를 하고 전력질주로 달아났는데... 성안에서 길을 잃은 것이다.
“빌어먹을.”
멍청이도 이런 멍청이가 없는 게, 아직도 심장이 뛴다는 것이다. 길을 잃고도, 해는 뉘엿뉘엿 지고 칼미온으로 가는 길도 모르겠는데 미친 듯이.
‘뛰어서 그런 거다. 그런 거야...’
조만간 난 심장마비로 죽을 것 같다. 역사가 뒤틀려 셀리안이 모르는 미래가 펼쳐진다 해도 이것만은 예언해도 좋다. 이대로 엘킨과 계속 마주치면 나는 죽고 말 거다.
“흐우.”
나는 옷의 앞치마로 얼굴을 감쌌다. 메슥거림이나 두통보다 두방망이질 치는 심장이 시끄러워서 숨도 못 쉬겠다.
한동안 내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고개를 들어올린다. 왕궁 복도는 다 비슷하구나 싶다.
“...어떡하지.”
*
왕궁 복도를 휘적휘적 걷는다. 휘적휘적 걸었지만 아는 길이 나오지 않았다. 어떡하면 좋지, 하고 멍하니 생각하며 걷고 걷는다.
그 하녀들이 빨래를 제대로 옮겼을지도 알 수 없는데다가, 이렇게 늦어서야 하녀 실격이다. 앤 설리는 상냥했지만 규칙에 한해서는 엄했기에 어째 무섭다.
이상하게 점점 인적이 없어지고 있었다. 같은 기둥들이 몇 번이고 계속되고 붉은 융단의 복도가 계속될수록, 점점 원래 다니는 곳과는 멀어지는 느낌이 든다. 왕궁은 넓고, 셀리안 크레이누의 기억은 그렇게 세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이상하게 깊고 낯선 길이 점점 낯익다고 생각된다. 그것이 무서워질 무렵 새하얀 천자락이 눈앞을 스친다.
“어라? 하녀?”
“?!”
벌꿀 같은 황금빛 머리카락이 곱슬곱슬하게 어깨 위에서 흔들린다. 흔하디 흔한 밤색 눈동자는 그녀의 눈에서는 마치 특별한 색마냥 반짝였다. 소녀같이 청순하고 순한 얼굴을 한 여자다. 그녀는 온통 하얀 옷을 입고 있어 마치 신전의 신녀같기도 하고 봄의 신부 같기도 했다. 조금 인간미가 없을 정도로 인형 같은 모습의 여자였다.
하지만 소녀가 아니다. 알고 있다.
그리고 그녀가 맞다면, 어쩌면 나만큼이나, 아니 나보다 더 동안을 간직한 여자였다.
“왜 이런 곳에 하녀가 있을까?”
그녀의 밤색 눈동자가 호기심을 띤 채 반짝였다.
“저 길을 잃어서...”
“길?”
고개를 갸웃, 장성한 아들이 하나 있다고는 믿기지 않을 순진한 모습이다. 나를 빤히 바라보던 그녀가 손뼉을 탁 치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그러고 보니 들었어요. 최근 칼미온에 흑발흑안의 새로운 하녀가 들어왔다고.”
내 눈동자를 살피듯 깊게 바라보는 시선에는 다른 감정이 없다. 그저 확인한다. 확인과 동시에 무언가 떠오른 듯 기뻐했다.
“정말 예쁜 검은색, 제 오랜 친구도 흑발흑안이었답니다.”
“그렇군요.”
이건 셀리안도 모르는 일이리라. 애초에 그녀와 셀리안은 평범한 대화를 한 적이 거의 없었고, 소문에 그녀는 결혼 전에는 줄곧 친가에 갇혀있다시피 지냈다고 하니까.
이상하네.
“길을 잃었다면 내가 안내해줄게요.”
“아.”
그녀는 자신의 신분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먼저 아는 척하는 것도 기묘한 일이리라.
“그럼, 따라와요.”
인도하는 천사처럼 그녀는 방긋 미소지으며 나에게 손짓했다.
그 모습만으로는 그녀가 현재 셀리안 크레이누를 미친듯이 숭배하고 있으며, 선왕을 경멸하고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하겠다.
아실리안 헤르티아, 이 나라의 정비되는, 셀리안 크레이누를 낳은 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