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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나 패러독스-23화 (23/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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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이 시작될 무렵 양파깎기가 끝이 났다. 배에서 꼬르륵 거리는 걸 신호로 마지막 양파를 바구니에 던져 넣는다.

확실히, 양이 줄어서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은 것 같다.

산더미 같이 쌓인 양파 껍질과 알맹이를 바라보니 뿌듯하기도 하고. 그 뿌뜻함이 새삼 이상하다. 이것도 이제 끝이기 때문일까. 왕궁에 들어가서도 양파를 깎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미묘한 기분이었다.

‘기획서를 완성하고 뿌뜻해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미묘한 기분으로 기지개를 켜고 류에게 눈짓한다. 이제 끝났으니 나가, 라고.

도와준 사람에게 점심이라도, 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귀족이니 알아서 맛있는 거 먹겠지 뭐.

“응. 안 그래도 가려는 참이야. ‘세류 키스톤’은 생각보다 바쁘더군.”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양파냄새가 나는 단검을 털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문이나 창문이 있는 방향에 내가 있다면 모르지만 그것도 아니라 가볍게 흘긴다.

“가라니까.”

“간다니까. 근데, 양파만 깎으면 넌 우네.”

“당연하잖아.”

아무리 줄었어도 엄청난 양의 양파다. 양파를 깎을 무렵부터 눈물이 차오르더니, 내 눈은 이제 눈물 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건 아무리 양파를 깎아대도 나아질리 없는 생리적인 반응이었다. 반면 류는 양파를 깎을 때마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있다. 언제나 언제나.

‘실눈이라 양파 향이 잘 안 들어가나.’

부러움 반,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 반으로 바라보면 그가 단검을 들고 있던 손 그대로 내 눈가를 어루만진다. 양파 향이 가득 묻은 그 칼이다. 보면 훈훈한 칼이긴 하고, 요령좋게 날은 밖으로 빼고 손등으로 눈물을 어루만지는데. 요령은 둘째치고 이건 뇌가 없나.

“죽을래?”

이 상황에 양파 냄새 나는 칼을 눈에 들이대다니. 베일까봐 무섭고 양파 향이 짜증난다.

“네가 울면 뭔가 찔려. 내가 안 도와줬을 때 울어서 그런가봐.”

“뭐래. 그보다 그 칼 역시 신경 쓰여.”

“왜?”

문질문질, 눈가를 문지르는 손을 잡아채 다시 확인하면 역시 멋진 칼이다. 이 양파향, 씻는다고 빠지긴 할까. 어쩐지 이제는 완전히 부엌칼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그 미인이 한 말, 아무래도 걸려.”

“신경 쓰지 말라니까.”

“난 너랑 달라서. 그만큼 멋진 검이기도 하고.”

“...”

나는 그로부터 한 발자국 물러나 내 책상으로 다가갔다. 서랍을 열어 포장된 평범한 식칼을 꺼내 류에게 던졌다. 며칠 전 시장에서 산 거다. 식사는 몰라도 이래저래 보답이라고. 류는 깜짝 놀란 듯 나를 보았다.

“나 주는 거야?”

“응. 이제 그걸로 깎아.”

이걸로, 미인한테 찜찜할 이유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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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나 무시하냐?”

“응?”

류가 감자를 깎다가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 징하게도, 칼미온 입성 3일 전까지도 야채깎기는 건 내 일이었고, 류는 내가 준 칼은 어디다 버렸는지 또 그 검으로 감자를 깎고 있다.

“너 이 새끼, 싸구려 식칼은 못 쓰겠냐?”

“아니야, 여기 있어.”

그는 어울리지 않게 당황한 표정으로 품에서 식칼을 꺼내든다. 뭔가, 고급스러운 가죽 칼집에 담겨 있다. 저 가죽은 본 일이 있다.

“...돈이 썩어나?”

수도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이 병원은 귀족들부터 천민까지 모든 사람을 수용한다. 다만, 천민계급에게는 자선사업, 중인이하까지가 고객이며, 귀족들의 경우 고객이상으로 대우하고 있었다. 구분이 확실해 건물부터 사용하는 정원, 시설까지 다 다르다. 어쨌든 규모가 규모이니 만큼 일도, 사람도 많았다.

그리고 최근 입원했던 대공의 아들이 자랑했던 칼집이 저거다. 미노타우르스의 가죽으로 만든 칼집- 어떤 가죽인지 보는 능력이야 나에겐 없고 브랜드(?) 문양이 그 문양이었다.

대공의 아들은 히아신스를 짝사랑해 히아신스와 내가 티타임을 가지는 날, 친히 내 방에 찾아왔다. 찾아와 제 차를 자랑하는 골빈 부잣집 남자처럼 칼집부터 시작해 제 소유물들을 자랑해댔다. 가끔 나에게는 찡그린 얼굴을 했고 히아신스가 없을 때 찾아왔다가는 ‘순수한 에이나 영애에게 접근하지 마’라고도 했었다.

어제 퇴원했나. 여튼.

“식칼을 왜 거기다가 넣어?”

내가 알기로 저 가죽 칼집이 중인 주택 10채 값이라고 한다.

이 귀족 놈이...

“네가 줬으니까.”

“야채 깎으라고 줬지.”

“아냐, 네가 줬으니까, 처음은 진짜 대단한 일을 할 때 쓰기로 했어.”

야채 따위 말고. 라고. 그럼 그 훌륭한 단검은 야채 따위를 쓸어도 되는 거냐.

“엄청 대단한 일로 첫 날을 그을 테니 기대해.”

“...”

싫다.

내 식칼이 류 놈 기준으로 대단한 일을 하는 것 따윈 보고 싶지도 않다. 게다가 그 하루드의 고문 담당에, 게트룬의 수족인 키스톤이 하는 대단한 일을 하는 식칼. 마음이 불편한 일임에 틀림없다.

“기대고 자시고 됐거든.”

“왜? 엄청 잘 할 자신이 있어.”

“그냥 야채 깎아라, 그게 나와 그 식칼, 그 미인, 단검... 거의 세계평화수준으로 그게 최고거든.”

거절하고 계속 대단한 일에 쓴다고 하면 차라리 검을 뺏을까, 계속 설득을 할까, 고민하며 입을 열려고 하는데 류가 고개를 갸웃한다. 갸웃하며 나를 지나쳐 문을 향해 다가갔다.

“...뭔가 오는데?”

“응?

“굉장히 명확한 악의네. 저급하고.”

그가 킥킥 웃으며 나를 본다. 나를 보고,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우연처럼 한 무리의 사람들이 문앞에 다가와 있다. 갑자기 문이 열리자 그들의 눈이 놀란 듯 크게 떠졌다.

*

“키스톤 공작?”

“키스톤...!”

낯익은 얼굴은 내게 야채더미와 짐들기를 안겨주는 리나 테일, 낯익지 않은 얼굴은 그때 리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병원의 책임자. 그 둘 뒤로는 전에 내가 운반했던 향신료꾸러미를 장정 2명이 들고 있고, 다시 그 뒤로는 구경꾼으로 보이는 하녀 몇 명... 다시 뒤로는 왕실의 문양이 적힌 유니폼을 입은 경비병들이 서 있다.

‘오늘인가.’

리나 테일이 향신료 이야기를 언제 꺼낼까 했는데... 오늘이었나 보다.

칼미온 입성 3일 전이라니, 굉장한 타이밍이었다. 바로 전에 일을 일으키는 게 효율적이라고 여긴 건지, 심술인지.

"흠흠. 설마 키스톤 경이 있을 줄은 몰랐지만."

병원 책임자가 목을 가다듬는다. 키스톤 가는 미룬의 허울뿐인 공작가-게트룬은 남작이었지만 상업 도시 미룬은 계급이 지위를 나타내지는 않았다-, 병원 책임자는 저래봬도 대대로 키오스에서 재상을 지내는 멜튼 공작가의 삼남이었다.

그와는 안면도 없고 셀리안에게도 그닥 중요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순전히 주워들은 소문에 근거하면, 능력도 없고 더러운 추문만 많은 남자였다. 공작가에서 고작 자선사업을 겸해 하는 병원의 책임자로 올려놓은 남자- 그러나 자존심만은 굉장한 걸로 알고 있다.

그는 류를 보고 놀란 듯 했지만 얼른 폼을 잡으며 자세를 가다듬는다. 상업이나 하는 소국의 공작가 차남에게 밀리기 싫은 눈치였다. 미룬에서 계급이 거의 무너졌고, 있는 계급조차 돈으로 산 경우가 많다는 건 공공연한 비웃음 거리였다.

“죄송합니다만, 도둑을 연행해가야 해서... 실례를 양해 부탁 드립니다.”

“도둑?”

류가 힐끗 나를 본다.

"그녀가, 귀한 향신료를 훔쳤습니다. 시쿤의 최고급 향신료죠. "

*

시쿤의 향신료는 드워프들이 직접 만든다. 사실 평범한 식용 향신료는 아니다. 왠만한 잔병은 고칠 수 있는 약재에 가까웠다. 부유한 자들이 영양제처럼 음식에 넣어 먹는 향신료였으며 그 효능 때문에 굉장히 비싼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짜게 식은 나와 눈이 맞자 리나 테일은 조금 의기양양하게 나를 보았다. 창녀니 도둑질이니 이런 걸 매우 더럽다고 생각하는 철 같은 여자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에고, 저 속없는 표정이라니.’

아마 그녀는 대쪽 같은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엄청 싫었던 거였나 보다고.

"명세서와 수량은 맞았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라고...  물론 그런 시시한 말로 무마될 수 있는 일이 아니란 건 알고 있다. 그냥 해본 말이다.

갑자기 내가 끼어들자 책임자의 눈썹이 꿈틀 찌푸려진다.

“감히 천민 주제에 귀족 앞에서 먼저 입을 열다니... 과연 기고만장하군.”

"제가 이야기해도 될는지요.“

“아아, 그렇게 하도록.”

책임자는 리나 테일에게 눈짓을 한다. 더러운 창녀하고는 말도 섞고 싶지 않은 듯 하다.

”수량은 맞았지요. 다만 교묘하게 무게가 빈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당신이 열심히 하길래, 저도 믿고 비싼 향신료를 운반하는 일을 맡겼던 겁니다."

“...”

“게다가, 인정하긴 싫지만... 당신은 ‘히아신스 에이나’님의 신뢰를 받는, 칼미온 소속이 될 사람이었으니까요. 어떤 의미로는 가장 믿을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이 병원에는 다 연기자 지망생만 있나.

"너 같은 여자가 칼미온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란 게 증명되었군."

이야기도 섞고 싶지 않아하더니 병원 책임자가 혀를 찬다.

"에이나 님이 어떤 동질감을 느끼고.“

그가 내 머리카락을 힐끔 바라보았다.

“신뢰를 느끼셨는지 모르지만, 그 분도 기사. 싸움만 하실 줄 알았지 사람보는 눈은 없었던 것 같군.”

“...”

무례하다, 무례하지만 멜튼 공작가와 에이나 공작가는 동급이었다.

그리고, 그는 히아신스 에이나에게 한 번 청혼을 했다가 차인 경험이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이지만 ‘그 고귀한 혈통과 품성’을 존중한다는, 꽤 유명한 프로포즈였다. 최악의 프로포즈로...

어쨌든.

‘역시, 리스크가 큰 일은 혼자 안 하는 거야.’

리나 테일은 결정적일 때 터뜨리고 싶어했겠지만, 너무 시간을 많이 줬다.

나는 그때 혼자서 향신료를 들지 않았고, 리나 테일의 찜찜한 행동을 봤을 때부터 조용히 떡밥은 깔아놓은 상태였다.

이 함정?을 해결할 때 가장 큰 문제는, 나를 도왔던 그녀들이 내 편을 들어줄까,였지만. 그것도 뭐.

‘애초에 당연히 들 수 밖에 없어.’

그런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한 거였다.

일단 내게 도움을 준 그녀들은 내 탓만 하고 빠져나오기엔 참 입장이 좋지 못했다. 나만큼은 아니지만 그들도 이 병원에서는 멸시받는 약자였던 것이다. 그래서 난 굳이 그녀들을 도우미로 택한 거다. 참작은 되겠지만 공범자가 되겠지. 시켰다고 울부짖어도 죄는 피하기 힘들 것이다.

그럴바에는 칼미온이 보장된 내 편을 드는 게 낫다. 약자이긴 하지만 그녀들은 다수니까, 뭉치면 살 수 있고. 이런 일이 터지기 전에 보험 삼아 그녀들에게 그날에 대해 이야기를 받아둔 터였다. 몇가지 서면의, 평범하게 보면 친목을 다지는 내용의 소녀들의 쪽지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리나 테일에게도 그녀들에게도 족쇄가 될 쪽지였다.

최고는 상점의 주인에게 보증을 받는 거였지만, 몇 번 개인적으로 상점을 방문했으나 내게 향신료를 넘겼던 주인은 나를 피하고 있었다.

‘욕심을 내면 안 되겠지.’

어쨌든 지금부터는 내가 가진 패를 어떻게 이용하는지가 중요할 것이다. 히아신스도, 최대한 이용해 어떻게든-

"유감스럽게도 저는-"

"도와줄까."

그때 우리들을 바라보고만 있던 류가 문득 입을 열었다.

============================ 작품 후기 ============================

다음화로 병원편은 끝... 이제 칼미온 입성입니다. ㅎㅎ 버터링 쿠키를 먹으며 다음편을 썼답니다. 하나를 먹었는데 어느새 봉지가 비는 마술! ... 몸무게는 생각하지 않기로 합니다. 훌쩍훌쩍

선추코는 사랑입니다★ 선추코 남겨주시는 독자님들에게 치어스...>_0

에이리엘 님 // 뻘쭘한 고백을 관대하게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글구... 음... 연애란 건 뭘까요.0_0 연애게임이나 소설에만 있는 환상의 개념 아닌가요... 또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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