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 패러독스-19화 (19/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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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더이상 무례한 짓을 하면 잘라버리겠습니다.”

나도 예절선생도 굳는다. 나타난 건 히아신스, 그녀의 등장도,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에도 놀라고 만다. 단정한 얼굴을 한 기사는 우아한 말투와 모습으로, 우아하지 못한 말을 한다. 예절선생이 멍하니 그녀를 보다가 갑작스럽게 무릎을 굽히고 이야기했다.

“제 불찰입니다!”

“...”

얘 뭐야.

“기록을 봤으면서도 멍하니 있다가 유혹당해서, 결국.”

“...”

“하지만 창녀에다가 도둑질까지 한 여자, 저도 이렇게 되었습니다만... 왕궁에 들어가면 어떤 폐를 끼칠지...”

“...”

“그게, 예절선생이자 평가관으로서의 제 소견입니다.”

남자는 연극조로 이야기를 끝마친다. 마치 그가 비극의 히로인 같다.

“...”

화가 난다. 저따위 말을 들어야 하는 것도, 히아신스가 온 것에 내심 가슴을 쓸어내리는 나도, 결정적으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노예상’의 모습과 남자의 모습을 겹치며 두려움에 떨었던 것도.

마음 같으면 지금이라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싶지만, 남자가 비극의 히로인이라면 나도 비극의 히로인이 되어야 할 것 같다.

‘우는 게 좋을까.’

히아신스는 내게 호감이 있고 지금도 예절선생을 향해 주의-주의 치고는 말이 강렬하긴 해도-를 주며 들어온 것이다. 우는 게 좋겠다고, 울면서 가련하게 호소하자고 마음을 먹으면, 히아신스가 척척 걸어가 예절선생의 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 파격적인 행동에 생각하던 게 모두 흩어져버린다.

“영애?!”

“선생, 가만 안 있음 벱니다.”

“?!”

히아신스는 당황하는 예절선생에게 날카롭게 이야기한다. 최근 내게 보이는 모습이 프릴과 디저트뿐이라 잊고 있었지만 그야말로 늠름한 기사의 표정과 말투였다. 단순한 위협이겠지만 눈이 단호해서, 진짜 같기도 하다. 움직이면 벤다고.

곧 그녀가 선생의 옷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건-”

“?”

한순간 그녀는 꺼내든 것을 들고 내게로 다가와 내 손을 꼭 잡는다.  그녀의 녹빛 눈이 나를 본다. 방금까지 무표정했던 게 거짓말 같은 따뜻한 시선이다.

“하영, 하영은 로랑 선생을 유혹했나요?”

“...아니요.”

“왕궁에 누를 끼칠 건가요?”

“아니요.”

“좋아요.”

그리고 꽃처럼 웃은 뒤 선생에게서 뺏었던 종이를 박박 찢었다. 찢어진 종이가 바닥에 떨어진다. 선생이 눈을 깜빡이며 종이를 보고 곧 놀란 듯 히아신스를 본다.

“영애, 이건 대체...”

“말 그대로입니다.”

“!”

히아신스의 단호한 말에 그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그 시선에 서리는 건 당혹스러움과 증오다. 나를 향하는 증오에 나도 모르게 흠칫 하면, 히아신스가 내 앞을 지키듯 가로막았다.

“다시 한 번 말하죠, 당신은 그녀의 예절선생에서 해임입니다.”

그 종이는 임명장이었다.

“그런... 그런... 이, 로랑 클로센이... 영애, 영애는 그딴 창녀 도둑 계집의 말을 믿...”

“말 조심하세요.”

“영애?!”

“그리고 그거랑 신뢰가 무슨 상관이죠?”

“그게 무슨...”

“그런 건, 의미가 없어요. 그녀는 내 친구니까요. 친구가 창녀든, 악마든, 흡혈귀든, 하루드든 전혀 관계없습니다.”

아니, 그건 아니지. 뭔가 편을 들어주는 것 같은데 미묘한 이야기였다. 애초에 난 창녀도 도둑도 아니다. 하지만 기록에 대한 부정은 ‘일단은’ 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나는 입을 다무는 걸 택했다. 택했건만.

“그리고 도둑질이라면 저도 해봤어요.”

그녀는 이번엔 나를 보며 이야기한다.

“...”

히아신스 에이나가 도둑질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나는 그녀가 하려는 게 무슨 이야기인지 알았다. 그녀가 어린 시절, 저를 검은 머리라고 멸시하던 영애들의 소중한 물건을 훔쳐서 부숴버린 건 유명한 일화다.

굳이 저 이야기를 하는 건.

“저는 하영에 대해 몰라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이 기록이 무슨 의미인지도. 하지만...”

“...”

“만약 이 기록이 사실이라도, 그건 제가 했던 도둑질과 같은 의미가 아닐까 하고...”

“...”

나는 내가 살기 위해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는데, 실상 히아신스에게 이해 받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는데. 그녀가 얼마나 나를 위해도.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건만.

그런데도-

“기뻐요, 저 같은 걸 믿어주시다니.”

나는 결심했던 눈물을 글썽거리며, 생각해둔 연기를 시작했다.

그녀는 왜 나를 좋아하는 걸까. 같이 솜사탕을 먹고 프릴을 나누고 그래서?

그건 너무 가벼운 이유였지만, 만약 내가 결국은 ‘셀리안 크레이누’이기에 비정상적일 정도로 호감을 가져준 거라면 그것도 너무 비참했다. 마치 정해진 운명처럼 끌린다. 그것은 끔찍한 일이라고 문득 생각한다.

“당연하죠. 저는 당신을 좋아하는 걸요.”

그녀는 또다시 꽃처럼 미소 지으며 나를 긍정했지만 내 기분은 점점 우울해졌다.

*

“그 계집은 불길한 계집이에요...”

가만히 있던 예절선생이 자신감 없이 말했다. 참 끈질긴 사람이었지만,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내가 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기분이 그랬다.

그의 시선이 내 검은 머리와 눈동자를 머뭇머뭇 바라본다.

“나도 그래요. 검은 머리카락- 그래서, 하영이 마치 내 동생 같아요.”

“...”

오히려 히아신스는 기뻐보인다.

“그러니까, 앞으로... 날 언니라고 부르면 좋겠어요.”

?

“사실, 나보다 1살 어린 것도 기뻤어요.”

?!?

“언니라고 불러 주시면 기쁠 거예요.”

그녀의 눈이 반짝인다. 왠지 급반전한 상황에 나는 다른 의미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면처럼 흘리고 있던 눈물과 울먹임이 쏙 들어간다. 연기를 하려면 언니라고 부르는 편이 좋을까. 하지만, 하지만-

“...어떻게 제가 감히.”

“명령입니다.”

29살에 21살 언니가 생겼다.

*

예절 선생은 잘렸다. 그 후 내 예절을 누가 가르치게 되었냐면...

“이게 왕실 예절이에요.”

히아신스다.

뭔가 남성 예절과 황후가 되기 위해 배워야 하는 예절이 짬뽕 된데다가 피하기로 한 그녀와 점점 친해지고 있었지만 불가항력이었다.

“우아하세요. 히아신스님.”

“언니!”

“...언니.”

총체적 난국, 여기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어제 히아신스로부터, 내가 칼미온의 하녀로 결정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황제폐하한테 직접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역시... 셀리안 크레이누는 내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 오늘부터는 검도 가르칠 거예요. 칼미온은 만만치 않답니다.”

“...”

됐어, 이제 다 끝났어.

정해진 것을 바꾸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걸 깨닫는다. 곧 칼미온의 대장 엘킨을 수시로 만나게 될 것은 자명한 이치.

그에 대한 내 32가지 마음의 동요를 물리칠 수 있는, 64가지 방법을 마저 정리하는 게 더 효율적일 것 같다.

*

"오늘은 이걸 가져오도록 하세요."

"네."

칼미온에 들어가기로 하고 바뀐 게 하나 있다면 주변의 태도였다. 시선이 바뀌지는 않았지만 태도가 바뀌었다. 게다가 그 히아신스 에이나가 적극적으로 나를 감싸고 예절선생 로랑을 해고한 게 소문이 나서, 그들은 나를 유난히 조심스럽게 대했다. 심지어 나에게 잘 보이기 위해 무언가를 주거나 일을 도와주려는 사람도 생겼다.

물론~ 나는 뻔뻔해서, 알랑거리는 사람들에 대해 ‘저 혼자 알아서 할게요. 괜찮아요.’ 같은 대사는 하지 않았다. 증거가 남기 때문에 주는 건 받지 않아도, 도움은 받고는 했다.

"오늘 건 유리병에 담긴 향신료니까 조심하도록 해요."

다만, 처음 내게 장식품으로 따져댔던 그 하녀, 리나 테일이라는 여자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다른 허드렛일이 많이 줄었지만 그녀가 주는 야채 다듬기와 시장에서 짐을 운반하는 일은 거의 그대로였다. 대부분이 경멸하면서 나와 얽히기 싫어한 반면, 그녀는 나를 어떻게든 부려먹고 싶어서 안달난 시어머니 같이 굴고는 했다. 대놓고 욕을 하진 않았지만 꼬투리를 잡고 싶어 했고 그건 요즈음도 별로 변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뭐, 나름대로 대쪽 같은 걸까. 좋게 생각하면 일관된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나는 그녀가 건네준 명세서를 받아 들었다.

*

'그래도, 이 향신료는 너무 비싼데. 무겁고.'

이런 비싼 걸 들컹들컹 운반하는 건... 솔직히 리스크가 많이 크다. 도둑 맞을 수도 있고, 실질적으로 내가 천하장사도 아닌데 1.5L 패트병 10개급을 무슨 수로 들어.

‘괴롭힘이네.’

나는 리나 테일이 사라진 자리를 흘긴 뒤 부엌으로 향했다. 모친이 천민으로 칼미온을 동경한다는 허드렛일 담당 하녀들- 병원에서 나만큼은 아니지만 멸시 받은 사람들로, 내가 칼미온에 발탁되었을 때 제일 태도가 바뀐 자들이다.

동경하거나 우러르는 게 아니라, 뭔가 콩고물이 떨어질까 아양을 떠는 사람들. 칼미온에 간다 해도 나는 그들에게 창녀에 도둑질이나 하는 천민이다. 자기들보다 밑인 건 변하지 않는다. 알랑거리면서도 그들의 눈빛이 증명했다.

‘그러니 나도 이용해야겠지.’

유감스럽게도 착한 아이가 아니라서.

*

‘팔 아파.’

오늘따라 내방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당근 꾸러미들이 원망스럽다.

향신료는... 도움을 받긴 했지만 역시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렇게 많은 향신료를 혼자 들라니, 역시 심술이다.

다행이라면 나름 자신을 ‘격이 높은 전문여성’으로 생각하는 리나 테일이 병원의 천민들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 도움을 받은 걸 알았다면...

‘야채가 늘어났겠지.’

내 방에 누구를 들이는 건 싫으니까 이건 온전히 내 몫이다.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으면 옆 창문이 드르륵 열리고 베이지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왠지 반갑다는 게 분하다.

"..."

“...”

류는 꽤 많은 양의 양파와 당근 꾸러미를 보며 어깨를 으쓱한 뒤, 예의 멋드러진 붉은 손잡이의 단검을 꺼내 들고 내 옆에 자리를 잡는다. 도와주기로 결정했나 보다. 한 번 도와주면 끝까지 도와주기 때문에 그 점은 나쁘지 않았다.

“나중에 일할 때 도움이 될 거야. 섬세하게 깎는거라든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변명하듯 이야기하며 힐쭉 웃는다.

“뭘 깎는데.”

“응?”

“일할 때 도움이 된다며.”

일을 하다니, 의외다. 물으면 그는 고민하듯 고개를 갸웃한다.

“섬세하게 뭘 깎아야 하는 일이야? 요리? 뭘 깎는데.”

“음...살...이라든가?”

“...”

말 건 내가 바보지.

그는 아마도, 만약에 일을 한다면 많이 나쁜 일이 직업이 아닐까 하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기 시작한 건 꽤 되기도 했지만.

‘싸이코패스에게는 딱이네.’

떠오르는 뒤숭숭한 직업과 살깎기를 매치시키며 한숨을 쉰다.

============================ 작품 후기 ============================

류 싫어요?;ㅁ; 류무룩...

그래도 류는 제가 사랑하니까 계속 나올 예정입니다. 독자님들도, 하영이도 괴롭혀줄거임...ㅎㅎ

lokoko 님// 그런 말 하시면 저의 청개구리 심뽀가...ㅎㅎ(<<) 그리고 TS는 사도입니다. 장미는 장미요, 백합은 백합입니다.

맛꼬마 님 // 류는 키가 작습니다. 여자보다는 큰데 일반 남자 평균 신장은 못 되는... 루저에 외토리죠.

라올 님 // 아마 여주랑 셀리안이랑 만날 즈음 나올 것 같습니다. 그게 아직 멀어서요.ㅜㅜ

엘류드 님 // 히아신스입니다. 그렇네요. 히어로네요.;ㅁ; TS물로의 전환은 사도죠. 여자와 여자로서 덴져러스하고 순수한 부서질 것 같은 소녀들의 사랑을 이뤄내야 하는 겁니다.(20대 소녀들의 사랑...)

에이리엘 님 // 엘킨을 많이 등장하게 하고 싶은데 워낙 고고한 엘프기사님이라 혼자 놀아요... 주인공하고도 놀아줘.ㅠㅠ(라고 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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