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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소녀를 놔주십시오.]
줄곧 꿈에서만 존재하던 전생의 엘킨이 바로 내 뒤에 있다.
여기가 그 세계고 현재는 셀리안 크레이누의 전성기, 장소도 아셀란 숲이라고 생각하면 충분히 마주칠 수 있겠지만-
심장이 아프다, 그 감각은 저릴 정도로 달콤하고 지옥처럼 끔찍했다.
*
눈을 뜨면 모르는 천장이다. 꽃무늬 같기도 하고 나뭇잎 무늬 같기도 한 아름답지만 기하학적 느낌이 드는 무늬들로 수놓여 있다. 전체적으로는 베이지색이었다.
‘베이지색...’
지금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여기는 어디지, 같은 멍한 고민 와중에 천장 색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되게 흔한 색인데, 왠지 열받는다. 베이지색 머리카락에 평범하기 그지없는 얼굴에 작디 작은 눈을 가진 완전 작은 키를 가진 싸이코 자식.
“어, 눈 떴네.”
반사적으로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
“잘 잤어?”
그래, 이 얼굴이다. 기묘하게 허물없이 느물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걸고는 하지.
“뻔뻔한 새끼.”
방금 떠올린, 천장과는 다른 베이지색이 실제로 보이자 나도 육성으로 욕을 내뱉어준다. 베이지색 머리카락에 흔남 중의 흔남 같은 얼굴- 가느다란 실눈.
“아, 거지 같은 새끼가 또 왔어.”
“험한 입도 건재하고.”
류, 라고 기억하기 싫은 이름이지만 너무 불러대서 자연스럽게 머리에 떠올랐다. 분하다. 분하고 영양가 없고. 그 따위 이름을 생산성 없이 부르고 불러 거절당했다. 아니 거절당했는지도 애매하다.
위급 상황에 지인에게 버림받는, 지인도 자신의 비겁함을 인식하는 그런 평범한 ‘버리고 버림받는 상황’이 아니었다.
‘...미친놈하고는 역시 안 가까워지는 게 정답이었어.’
내가 눈을 깜빡이다 휙 외면하자, 류가 내 위로 올라온다. 기민하게 올라와 저항할 틈도 없이 덮치는 모양새가 된다. 미친놈이 위로 올라타니 얼굴을 볼 수밖에 없다.
“이런 미친놈.”
“난 니 눈이 참 좋아. 목소리도 좋고... 건강해서 기뻐.”
미친 놈이 빙글 입가를 휘며 웃는다. 정말로 안심했다는 얼굴에 속이 뒤집힌다.
‘손 움직이나.’
조금 뻐근한 거 같긴 하지만 움직일 수 있을 것 같다.
“있잖아, 지혈되기 전에 피 한 번 더 먹어봐도...우왓!”
“...좀 맞아라.
멍하니 내 얼굴을 보던 새끼를 향해 기습적으로 주먹을 질렀는데 재빠르게 내 손을 잡는다. 느리긴 했지만, 내가 낼 수 있는 최대의 스피드였는데.
“엥? 난 맞는 취미 없어.”
그는 잡은 내 손을 빤히 바라본다. 철창을 죽어라 잡고 있어서 긁혔고 피가 났었다. 지혈은 된 것 같지만 여튼 그랬다.
“먹으면 죽인다. 너 흡혈귀냐?”
그런 종족이 이 세계에 있던가. 마수 중 피 먹는 애들이 있긴 했다. 흔남이긴 해도, 황금빛 눈도 기묘하고 생각도 발랄 미친 것 같은 게 인간이 아닐 수도 있겠다 싶다.
“설마, 그냥 한 번으로는 잘 모르겠어서, 확인 하고 싶어. 아참, 죽는 취미도 없어.”
“아냐, 있는 것 같아. 일단 맞는 취미가.”
나는 주먹을 슬쩍 펴 손가락 사이로 남자의 손을 꼬집으며 이야기했다. 잘 안 꼬집힌다. 굳은 살이 어찌나 박혀 있는지.
“그래?”
“?”
문득 미친놈이 내 손을 탁 놓는다.
“뭔데?”
“시험해 보게. 난 맞는 취미 없지만 혹시 모르니까...”
“...”
이 또라이... 무슨 마인드 맵을 거치면 그런 결론이 나는지는 모르지만, 거리도 가깝겠다 손도 놔줬겠다 사양 않고 내뻗기로 했다.
퍽, 하고 경쾌한 소리가 고막을 파고든다.
*
“윽.”
“하하하.”
오랜만에 제대로 웃었다. 힘이 없어서 코뼈를 부러뜨린다든가, 응 그것까지는 못했지만 붉게 달아오른 코를 보니 100년 정도 묵은 체증이 단번에 사라지는 것 같다.
아니, 사라지지 않았다. 시원한 건 한순간이고 더 열받는다. 나는 그렇게 단순한 사람이 아니다. 눈앞에 없는 새끼를 가지고 아득아득 이를 갈 정도로 열정적이진 않지만 눈앞에 나타나면 아득아득 이를 갈게 된다. 그러니까, 내 정신건강을 위해 꺼지든지, 더 맞아라.
손을 다시 내뻗으려고 하면 다시 덥썩 잡으며 투덜거린다.
“역시...없는 거 맞아.”
“아, 그래”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지만 이건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다. 지가 맞는 취미가 없다는 이야기다.
“한 번 더 맞아보면 있다는 걸 알게 되지 않을까, 이왕 확인하려고 했으면 좀더 관대하게 되어봐.”
“아니, 거절할게. 나보다는 네가 때리는 취미가 있는 것 같네.”
없거든.
아니다, 너 때리는 취미는 생겨도 좋을지도.
‘아니, 몇 대만 더 때리고 네 새끼랑은 인연을 끊겠어.’
나는 아예 때리기 쉽게 자세를 틀어 잡았다. 트는 순간 뼈마디가 욱씬 거렸지만,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으로 다른 주먹을 뻗는다. 그런데 이 미친놈은 내 심혈을 기울인 또다른 펀치를 요령 좋게 얼굴을 기울여 피했다.
“...”
“잇...”
미친 듯이 주먹질을 했지만 소용이 없다. 짜증난다.
포기하지 않고 나는 주먹을 뻗고 그는 가볍게 내 한 손 주먹을 쥔 채 피해나간다.
“저기.”
“...”
“혹시 너 화났어?”
“!”
사람에게는 손만 있는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발을 뻗어 고자킥을 날려준다. 그것도 기묘하게 피하긴 했지만 자세가 자세라 정확하게 정강이를 가격할 수 있었다.
침대에서 굴러떨어지길 바랐는데 내 위에서 미간만 찌푸린다.
“아얏. 아.음... 화났구나.”
“죽을래?”
나 지금 되게 추하겠다. 남자에게 덮쳐진 자세로 다리랑 주먹을 버둥거리며 오로지 미친놈을 때리는데 집중하고 있으니까.
그래도 상관없어.
나는 박치기도 해보기로 했다.
*
“진짜 화났구나.”
그는 누운 나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벽에 붙어 중얼거렸다. 일어서서 패줄까 했는데 미친놈한테 일어서기까지 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박치기를 맞고 제 발로 침대에서 멀어져 준 것만으로도 큰 성과다.
이마가 벌겋게 달아오른 것도 통쾌하다. 내 머리도 아프긴 하지만.
“이제 꺼져라.”
“...”
진심, 그리고 다신 나타나지마.
사실 내 몸, 정상이 아니다. 아카인 영애랑 그 호위에게 맞았지, 노예상에게는 범해지기 일보직전까지 함부러 다뤄졌지, 승차감 안 좋은 마차에 하루 꼬박 타고 있었지.
“왜 화났어?”
아, 일어서서 팰까?
“음, 난 그런 건 잘 모르겠어. 왜인지 가르쳐줘.”
미친놈은 곤란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머리를 긁적인다.
“꺼지랬지.”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너는 꽤 마음에 든 편이라.”
실눈을 슬몃 뜨고 그 황금빛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행동은 당혹스러운 듯 기가 죽어 보이는데 눈동자는 여전히 아무 감정이 없는 것 같다. 잘 보면 파충류 같기도 하다.
“가능하면 시정할게.”
“꺼져.”
“흐음... 나는 이런 데 약한데...”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겁도 없이 다시 내게로 다가왔다.
“내 친구가 말이야. 예전에 그랬는데, 인간은 자신의 말을 안 들어 주면 화가 난다던데.”
이번엔 덮치거나 만질 생각은 없는 것 같다. 그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재차 고개를 갸웃한다.
“내가 니 말을 안 들어준 게 뭐가 있나, 했더니...”
“...”
“네가 나에게 ‘도와줘’라고 했었지. 혹시 그거 안 들어줘서 그래?”
힘이 빠진다. 진짜 얘 좀 어디 보내면 좋겠다.
짧은 만남이지만 이 남자는 성가신 점이 있었다. 설명하긴 힘든데. 미친놈인데, 가끔 뭐라고 할까.
“...”
딱 피하고 상종도 하기 싫은 놈이란 건 변하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상대가 내가 피하고 싶다고 피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거다.
그는 기본적으로 거역할 수 없는 압력 같은 걸 기묘하게 내고 있다. 인정하고 인정하지 않고를 떠나 그것은 조금 위험한 감각이었다. 사실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긴장감이 든다.
그래서 더 싫고, 기운이 빠진다.
“말했잖아. 넌 구원받을 거라고.”
내 기분은 당연히 모르는 거처럼 그는 칭얼거리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받았잖아?"
그렇지 하고. 말 섞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어서... 말의 의미를 반추했다. 마차가 멈추길 바랐고 곧 아셀란의 숲에서 마차가 멈췄다. 도움을 요청했고 곧 엘킨 다이브가 왔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았는데?”
“그야... 말했잖아. 그 남자의 실에 걸려 있다고. 그 마차는 지온에서 출발할 때부터 지긋지긋한 황제놈의 주박에 걸려 있었는 걸.”
“주박?”
“그래, 그것도 딱 네가 마차로 들어올 때였어.”
“내가?”
“그 여자, 누구였더라.”
그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아카인의 노인네 딸 말이야.”
“앨리자베스?”
“응?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기도 해. 정말, 애들이 문제라니까.”
그는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노인네가 다 알아서 마차에 손을 써놨는데 멋대로 사용하니까 황제의 감시망에 들어가버렸잖아.”
“...감시망?”
“그래, 몰랐어?”
“...황제의...”
황제라면, 이 세계에서 황제라는 호칭을 달 수 있는 사람은, 셀리안 크레이누 뿐이다.
아니, 아니 그보다.
나는 기억을 더듬는다. 아카인 가는 셀리안과 함께 번성한다. 워낙 기반이 탄탄했고 산이 그와 인연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카인 후작 개인은 파멸한다. 후작은 어떻게 파멸했지.
‘정말, 이 쓸데없는 전생 같으니.’
정치적인 일이나 정말 내게 필요한 기억은 마치 아주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리듯 일일이 생각해내야 한다. 엘킨 다이브는 가만 있어도 떠오르는데.
‘쳇.’
순간 눈을 뜨기 전 실제로 봤던 엘킨 다이브가 떠올랐고 심장이 다시 아파졌다. 눈을 떴을 때 엘킨이 나를 보고 있지 않은 게 새삼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기억에 골몰했다.
이 시기가 언제즈음이었지...
============================ 작품 후기 ============================
마나가 있다고 했지, 짱세져서 마법 부린다고는 안 했...
주말이 끝나갑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ㅁ<
그리고 지난 화 오타, '오래를'을 발견하고 다른 분들이 지적하기 전에 고치려 했는데 잉여킹123님이 코멘으로 먼저 다셨습니다...제 쿠크다스가 감사하다고 전하래요. 부끄부끄ㅎㅎ
@를 붙여주신 리코멘을 원하는 분들을 위한 코멘트 갑니다~>ㅁ<
홍월빈 님 // 셀리안이랑 여주는 외관은 전혀 안 닮았습니다. 여주가 청순가련 동안 스탈이라면 셀리안은 아폴론+아레스 같은 이미지라고 생각해주심 감사여. 근데 실제 나올 때까지 묘사는 없어여. 거울 안 보면 자기 얼굴 안 보이니까요. 데헷★
백와 님 // 여주에게 마나는 있습니다. 마나 '만' 있습니다. 로맨스는 어떻게 여차이차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귤푸딩 님 // 나중에 제가 쓰다가 가장 애정가는 애랑 이어줄 겁니다.(진지)
루시아티 님 // 정주행 감사 드립니다. 둘이 만나면 OOO가 OO하게 됩니다. 뒷 이야기는 물어보셔도 제 입만 간지럽습니다.ㅎㅎ
ㄱㄹ 님 // 만약 제가 애들 중 류에게 가장 애정이 가서 그 아이가 남주가 된다면...(될까;;) 완결 즈음일테니 안심해주세요!(읭?)
흑단장미 님 // 여주는, 친구가 제 사심이 너무 들어갔다고 하더라구요. 29살에 20살로 보이는 여자가 어느나라 연예인이냐고. 주인공보정입니다.(단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