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 이야기 그 전 51. 삼청동]
완연한 봄이 되었다. 정용의 집 주변은 조금만 나가면 온통 꽃밭이다.
삼청동 주변은 북악산 줄기에 둘러 싸여 있어서 예로부터 경치가 좋은 지역이었다.
게다가 삼청공원을 지척에 두고 있으니 봄이 되면 온통 꽃 천지가 된다.
개나리로부터 시작한 주변의 꽃들은 가로수로 심겨진 벚꽃까지 피는 4월이 되면 아예 주변에 꽃으로 흐드러진다.
물론 60년대의 서울은 오늘날처럼 깨끗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세검정 지역과 삼청동 지역은 예로부터 봄이 되면 많은 상춘객들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었다. 그만큼 경치도 좋았다.
정용의 가족은 드디어 서울에 입성하였고, 게다가 이젠 삼청동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의 가족이 모두 삼청동에 정착할 수 있게 된 것은 당연히 삼청동 마나님의 역할이 가장 크다.
정용은 두 번의 이사, 즉 부천에서 서울 명륜동으로의 이사와 서울에서의 또 한 번의 이사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게 되었다.
역시 삼청동 마나님은 대단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정용의 가족이 명륜동으로 이사하자 마나님은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지, 그의 엄마가 마련해 두었던 그들의 셋집에 임신으로 인해 무거운 몸을 이끌고서도 이미 먼저 와서 대기하고 있는 정도였다.
나중에 어떻게 알았느냐고 정용이 마나님에게 묻자 예의 신비한 미소를 띠며, “난 다 아는 수가 있지 --”하며 함구해 버린다.
사실 정용의 일거수 일투족은 모두 오래 전부터 다 마나님의 안테나 아래 있었다.
마나님이 사실상 유일하게 사랑하는 남자이면서도, 수양아들인 정용을 자신의 무릎 아래 두려는 노력이 마나님의 심중에 암암리 내재하여 있었기 때문에, 마나님은 어떤 무리한 수를 두어서라도 정용의 소식은 자신의 정보망 아래 두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종로통에 있는 동안에는 아무래도 마나님의 통제 아래 있다고 봐야 맞는 셈이다.
그러나 그가 부천으로 나가는 경우, 그것은 마나님의 시선 밖으로 사라지는 셈이 된다.
따라서 마나님도 그의 행동 전체를 알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삼청동 마나님은 그가 와야 할 날자와 시간을 예상하여 움직일 수는 있었다.
정용이 어제, 그제 서둘러 삼청동 집을 나가면서 ‘이사를 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으니, 하루를 정리한다고 하면 삼 일 째 되는 날 오전에 서울에 도착할 것이 분명했다.
집도 셋집이니 이삿짐도 그리 많지 않을 터이고, 여동생이 중학교 입학을 했으니 그 아이를 중심으로 움직일 것이 뻔해 보였다.
그렇기에 마나님은 임신으로 몸이 무거우면서도 명륜동 집으로 살짝 발걸음을 한 것이었다.
명륜동 집을 알아 둔 것은 오래 전 일이었다.
실제로 그녀가 ‘사랑하는 연인’인 그의 집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삼청동 마나님의 정보력을 얕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정용의 가족이 시골에서 이사를 오는 날인데, 그녀의 집 앞에서 택시 한 번 타면 올 수 있는 길을 오지 않는다면 삼청동 마나님 자신의 마음도 편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녀의 발길을 명륜동으로 돌리게 한 것은 ‘정용의 엄마’란 여인의 존재였다.
과연 어떤 여자인지 마나님은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또 삼청동 마나님은 아무래도 정용의 엄마인 정혜를 알고 지내야 할 것 같았고, 그렇다면 선수를 쳐서 적극적으로 먼저 맞아들이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 생각되었다.
그리고 앞으로 그녀와 사귀고 살아야 할지, 아니면 도움을 줘야할지, 혹은 도움을 받을 여자인지 등의 정보를 수집하려면 직접 그녀가 몸을 부딪치고 겪어봐야 알 것 같았다.
그러려면 그녀를 먼저 알아야 그녀의 생각을 알아내고 거기에 대처하기 쉬울 것 같았다.
어차피 그녀는 정용의 아이를 임신함으로써 그들은 헤어지지 못할 사이가 되었으니, 육신의 친엄마인 그녀를 잘 알아 두는 것이 지혜로운 일임에 분명하였다.
말하자면 실제적으로는 ‘시어머니’ 아닌가?
그러면서 그녀는 속으로 ‘픽’하고 웃었다.
시어머니가 어째 며느리보다 더 나이가 적어?
그녀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멋쩍은 웃음을 띄었다.
그러나 마나님은 면전에서 그녀를 만나보자 그만, 그녀가 너무 젊은 데 깜짝 놀랐다.
정혜는 삼청동 마나님이 생각한 나이보다도 훨씬 젊었다.
아니 그녀의 눈에는 어리다고 봐야 할 정도였다.
삼청동 마나님의 나이는 이제 거의 마흔 줄에 들어서는 데, 정용의 실제 엄마인 정혜는 이제 겨우 서른 줄에 들어서는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아니 그보다도 훨씬 더 젊어 보였다.
어찌 보면 ‘아직 처녀인가?’하고 생각하게 만들 정도로 그녀는 앳되고, 어려보였던 것이다.
실제로 정용의 엄마인 정혜는 이제 겨우 서른에 들어서고 있는 참이었다.
게다가 이북에서 피난을 나왔지만 사변 통에 나온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전에 서울에서 공부를 하던 오빠이면서 남편과 함께 이북을 탈출하면서 나왔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고생을 조금 덜하였다고 봐야 한다.
그러므로 정착하기도 쉬웠고, 또 남편이 미군부대 교관으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북에서 피란을 나온 사람들이 겪은 그 억센 고생을 하지도 않은 편이었기에 아무래도 당시 ‘이북피란민’들보다 편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빠른 나이에 두 아기를 낳고 단산(斷産)하였으므로 젊음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그녀는 단산을 하고 싶어서 단산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어린 나이에 아기 둘을 낳고 그만 두었으니 탱탱한 젊음을 고대로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육이오 사변’ 후 많은 사람들이 아기를 낳았다. 그래서 이 시대를 베이비 붐 시대라 하는데, 사실 이 땐 아기를 낳고 싶어서 낳은 게 아니라 그저 아기가 들어서니 할 수 없이 낳았던 측면이 더 강하다.
즉, 당시의 부모들은 아직 소파수술이나 피임에 적극적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베이비 붐 시대’란 말은 나중에 식자들이 이 시대를 특정 짓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일 뿐 그 시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따라서 당 시대 사람들은 ‘생기면 낳는다’ 혹은 ‘자기 먹을 것은 갖고 태어난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이다.
게다가 ‘육이오’가 가져다 준 엄청난 비극적 사실은 웬만한 비극은 비극 축에도 들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아기는 생기면 낳고, 안생기면 그만이었던 것이었다.
따라서 정용의 엄마인 정혜는 충분히 아기를 더 가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것은 다분히 그녀의 성생활과 관련이 있었던 것이었다.
당시 부인들은 아기를 많이 낳은 사람은 열 명도 낳았으니 이렇게 많은 아기를 낳고 육제적인 젊음을 그대로 유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 뻔하다.
게다가 정혜가 젊음을 그대로 유지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무엇보다 ‘헌원심법’을 익힌 두 남자로부터 정기(精氣)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할 것이다.
삼청동 마나님이 아기를 갖고도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정용이 ‘헌원심법’의 비결에 따른 추나술과 방중술(?)에 의해 효과를 본 것인데, 정혜 역시 암암리에 헌원심법을 익힌 두 남자의 여자였기 때문에 나이를 먹지 않는 젊음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녀 자신도 잘 모르는 일이었다.
하여튼 이런 저런 속사정을 잘 알 길이 없던 삼청동 마나님은 정용의 실모(實母)인 정혜의 젊음과 미모에 그만 은근한 시기심이 생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삼청동 마나님은 자신이 그런 감정을 갖고 있는 것조차 잘못될 수 있기 때문에 일찌감치 털어버리고 정혜에게 진심으로 다가가기로 작정하였다.
그것이 자신에게 가장 유리할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이사하는 날 삼청동 마나님은 다른 한 여자아이, 즉 그의 여동생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정용의 여동생 정아 그 여자아이도 보통이 넘는 아이였다.
어쩌면 시골 여자 아이 답지 않게 하얀 얼굴과 빛나는 이마와 차랑차랑한 머릿결과 오뚝 솟은 코에 날씬한 몸매는 서울아이를 뺨치도록 아름다웠다.
그녀가 본 여자 아이들 중 가장 이쁜 애가 은지였는데, 은지는 세련된 도회의 미모를 가진 아이라면 정아는 그런 도회적 세련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작고, 갸름하며 반듯한 얼굴에 총명한 눈과 오빠를 사랑하는 마음이 밖으로 나타날 정도로 희생적인 사랑이 돋보였다.
속으로 ‘저 애도 크면 한 가닥 하겠는걸 --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므로 삼청동 마나님은 정용의 집에 두 여자가 정용에게 대하는 태도를 유심히 살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정용은 부지런히 짐을 나르고 두 여자는 돕고, 어느 새 얼마 되지 않는 짐은 다 셋집으로 옮길 수 있었다.
삼청동 마나님은 그들의 짐을 다 나르도록 옆에서 지켜보며 도우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녀의 임신한 무거운 몸으로는 어쩔 수 없었고, 정용은 그녀가 짐을 만지지도 못하게 하였다.
결국 정용과 운전기사와 두 여자가 짐을 다 날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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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이사하던 날 아침, 정용은 일찌감치 일어나 부천에서의 마지막으로 목욕을 하였다.
이미 엄마와 여동생은 부엌에 딸린 욕실에서 먼저 목욕을 하였다.
정용은 엄마와 여동생이 아침 일찍 일어나 목욕을 한 것을 벌서 눈치를 채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나중에 나와 목욕을 하기로 했던 것이다.
엄마 정혜는 새벽 일찍 일어나 부엌에서 불을 지피고 물을 데워 두었다.
그녀는 어제 밤, 아들인 정용과 딸인 정아가 처음으로 치룬 방사로 인해 딸인 정아가 몸을 깨끗하게 할 것이 필요한 것을 이미 알았기 때문이었다.
정용은 그들의 눈치를 보면서 아마 모녀가 같이 목욕을 했을 것임을 짐작하였다.
분명 엄마 정혜가 딸인 정아를 씻겨 준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면서 정혜 엄마는 딸인 정아에게 뭔가를 단단히 일러둔 모양이었다.
그건 여자로서 필요하면서도 당연한 일일 것이었다.
이제 그들 가족은 부천 둔덕산 기슭을 떠나 서울로 이사할 것이었다.
그리고 서울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 영위해 나갈 것이다.
그것은 이들 가족에게도 한 시대를 접고 다시 새로운 시대로 향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정용은 그런 것들이 가슴 아팠다.
당분간 그가 이 둔덕산을 오를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도 이 둔덕산이 무척 그리울 것이다.
둔덕산은 움푹 파인 곳은 여자의 성기를 닮았지만, 전체적으로는 민둥한 것이 여자의 엉덩이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젖가슴을 닮은 것 같기도 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 것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60년대가 지나고 70년대가 되면서 부천이 군(郡)에서 시(市)로 성장하면서, 이 산의 이름은 슬그머니 아무도 모르게 춘덕산(春德山)으로 바뀐다.
그것은 아마 시에서는 둔덕산이란 이름이 아무래도 외설스러워서였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이 된다.
정혜는 아침 일찍 이삿짐을 나를 트럭이 오도록 준비하였다.
세 식구는 당분간 명륜동 셋집에서 살기로 하고 그 방에 들어갈 물건만 챙겨가기로 했다.
정용은 삼청동 마나님과 연락하여 새로운 집을 구입하는 대로 다시 이사하기로 하고, 당분간 이 집을 떠나 사는데 정아를 비롯하여 세 식구 모두 동의하였다.
아침 샤워를 마친 정용은 집과 별채와 퀀셋 도장을 꼼꼼하게 둘러보았다.
그는 혹시 자신이 놓친 것이 없나 싶을 정도로 조금이라도 수상한 곳이 있으면 땅을 파보기도 하고, 구석진 곳에 구멍이라도 있으면 손을 넣어 보기도 했다.
혹시 저번처럼 귀한 물건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였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사실 그들의 짐은 얼마 되지도 않는다.
그들은 이미 오래된 장롱은 갖고 가지 않기로 하였고, 부엌의 각종 집기도 도시 생활에서 쓸모없는 것은 그냥 그대로 두고 가기로 했다.
그들 집은 이미 문 앞에 “접근하면 발포함 부대장”이라고 쓴 팻말이 붙어 있기 때문에 문만 잘 잠궈두면 좀도둑이 들 염려는 현저히 적은 집이었다.
정용은 우선 퀀셋 도장의 문에 단단히 못질을 해두었다.
이 퀀셋 도장에는 앞문과 뒷문으로 두 개의 문이 있는데, 두 문에다가 십자 형태로 각목을 대고 못질을 철저하게 함으로 누구든지 문을 열지 못할 정도로 만들어 놨다.
물론 망치와 빠루로 문을 부순다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쉽게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살림집이 아니라 본래 별채로 만들었지만, 그들 식구들은 거의 쓰지 않고 버려둔 약 50평 규모의 시멘트 블록으로 만든 집은 그간 창고로만 사용했기 때문에 지저분한 것들이 많았다.
그런 것들은 모두 꺼내 타는 것들은 태워 버렸다.
정용은 이른 봄철에 집 마당에서 불을 지피며 생각에 잠겼다.
불을 지피는 그의 곁에 여동생 정아가 다가와 그의 손을 정겹게 잡으면서 시뻘겋게 타오르는 불을 바라본다.
정용도 그의 곁에 다가 온 여동생 정아의 하얀 손을 마주 잡아 준다.
그녀의 하얀 손에는 아직도 따뜻한 온기가 묻어나고 있었다.
정용은 그녀의 손길에서 엊저녁 처음으로 서로의 몸을 나눈 정겨움이 풍겨나고 있음을 느꼈다.
정용이 청소한 방들은 본래 이북으로 침투하기 전에 임시로 묵던 특공대원들이 묵던 안가(安家)에 속하는 방들이었기 때문에 별반 건질 것은 없었지만, 낡은 매트리스와 군용 모포가 있어서 그런 것들은 모두 다 태우는 것이 상책이었다.
잡다한 것들을 태우자 창고로 쓰던 별채의 방들도 깨끗해졌다.
그는 방 하나에 부엌 하나와 문 하나씩 달려 있던 문을 닫고 각목을 가져다가 망치질을 하니 누구도 들어가기 힘들게 되고 말았다.
문에 못을 박으면서 정용은 그 방들이 마치 소규모 합숙소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안채의 손질은 더 꼼꼼하게 점검했다.
안채는 언제든지 누구라도 오서 살아야할 집이기 때문에 부엌과 윗방, 아랫방, 연결 부위 모두 둘러보며 점검하였다.
그리고 모든 문을 각목으로 망치질하여 잘 막아 두었다.
그리고 모든 짐을 마루에 내다 놓고 트럭을 기다리면서 세 식구는 한 동안 회포에 잠겼다.
이윽고 트럭이 오자 정용은 트럭 운전수와 함께 짐을 트럭에 실었다.
짐을 실어준다던 부대에서 군인들은 오지 않았다.
정용은 그들이 오지 않는 것이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대신 정혜 엄마가 연락한 GMC 트럭만 한 대가 왔다.
당시에는 한국전쟁에서 사용되었던 GM에서 만든 트럭들이 민간에 불하되어 돈이 있는 운송업자라면 이 트럭 한 대를 구입하여 각종 사업을 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사람들은 ‘GMC’라고 하지 않고 ‘제무시’라고 불렀다.
이 ‘제무시’는 대부분 미군이 한국전쟁에 대량으로 투입되어 사용하던 군용차량으로서, 폐차 직전에 한국인들에게 불하가 되면 한국 사람들은 이를 두드리고 고쳐서 새 차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특히 신진자동차 같은 곳에서는 지프 엔진에 드럼통을 두드려 얹어 시발택시를 만들어 시중에 팔았다.
‘제무시’ 트럭은 힘이 좋아 미군이 불하하면 너도나도 구입하려 했다.
‘제무시’ 트럭을 한 대 갖고 있기만 하면 재벌 부럽지 않는 부자였던 셈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트럭을 갖고 운송업을 하려는 사람에게 ‘사고’는 원수나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운송업을 하던 사람들은 거의 보험을 들지 않아, 사고가 났다하면 ‘차주 무한책임’으로 차주가 쫄딱 망하는 게 다반사였다. 그래서 사고 때문에 운송업을 기피하기도 했다.
지금 사람들은 왜 그럼 그 때 보험에 들지 않느냐고 핀잔을 줄지 모르나, 호구지책(糊口之策)에 급급하던 당시 사정으로는 보험에 들기가 쉽지 않았을 뿐 아니라, 1960년대의 한국의 보험 산업은 공신력이 아예 제로였다.
또 60년대 보험 산업은 일부 재벌들에 독점되어 특정 정치권력의 자금 조달처로 사용되었고, 일반 국민들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국민들은 자연히 보험을 기피하게 되었고, 그럴수록 사고에 취약한 사업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차주를 겸한 운전사들은 제무시 트럭을 갖고 사업하는 것에 굉장한 자부심과 함께 돈도 잘 벌었다.
정용은 운전수와 함께 세 식구가 같이 트럭에 탔다.
그는 부천에서 서울로 이사 오는 길에 운전수를 옆에 두고, 비좁지만 자기가 사랑하는 두 여자와 함께 비비적거리고 함께 탔다.
여동생 정아도 비비적거리면서도 오빠랑 살을 맞대고 가니 뭐가 즐거운지 히히덕거린다.
정용은 두 손을 양쪽으로 벌리고 한 손으로는 엄마를 껴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정아를 껴안았다.
비좁은 트럭의 앞좌석이라 그렇게 가도 흉 될 것은 없었다.
사실 한국의 60년대 초에는 운송수단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트럭에도 사람들이 타기 일쑤였다.
특히 시골 오일장을 보는 장꾼들은 장삿짐을 싣고 장마다 돌아다니기 마련인데, 그러려면 새벽 일찍 일어나 짐을 싣고 장이 서는 마을을 향해 움직이기 마련이다.
그러면 짐과 함께 트럭에 사람들이 끼어 탄다.
운전석에는 대개 운전수와 그 트럭의 주인이 타게 마련이고, 짐꾼들이나 보조 상인들은 트럭 위에 짐 사이 공간을 만들어 비 집고 들어가 장이 열리는 마을로 움직인다.
물론 사고가 나면 인명이 상할 염려도 있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차비를 아끼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이삿짐을 나르는데 운전석에 몇 사람이 비집고 껴안고 타는 것은 그렇게 흉볼 일도 아니었다.
부천에서 아침에 출발한 제무시 트럭이 명륜동에 도착한 것은 점심시간 무렵이 되어서였다.
정용이 엄마와 여동생과 함께 차에서 내리자 그들을 반겨 준 것은 삼청동 마나님이었다.
어떻게 알고 나타났는지 모르지만 삼청동 마나님은 그들의 셋집 앞에 무거운 몸을 이끌고 서 있었다.
정혜는 이 여인을 보자마자 아들 정용이 신세를 진다는 삼청동 마나님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하얀 얼굴과 광채나는 이마와 예쁜 얼굴의 모습에서 보통 인물이 넘는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게다가 은근한 카리스마가 있는 것이 마치 여장부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는 주름이 전혀 없이 팽팽하여 도대체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대학생 딸을 둘이나 두었다면 분명 아무리 적어도 사십은 됐을 터인데, 정혜의 눈에는 그녀가 그만한 나이로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오히려 이제 갓 서른이나 되었을까?
아무래도 정혜 자신과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청동 마나님은 정혜에게 아주 공손하고 예의바르게 대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정혜도 그녀를 쉽게 대하지 못하고, 겸손하게 예의를 차려가며 대화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 정용은 그녀가 명륜동 집을 어떻게 알고 찾아왔느냐고 묻자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였다.
“얘, 네가 있는 곳은 난 어디든 다 알어 --- ”
마나님이 그렇게 말할 때마다 정용은 그녀의 앞을 내다보는 안목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마나님은 알뜰살뜰하게 그의 짐을 챙겨 주었다.
그 후에도 그녀는 자신이 마치 정혜의 큰 언니라도 되는 양, 살갑게 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정용 자신과 그의 엄마에게 셋집에서 나와 따로 새집을 마련하는 것이 어떠냐고 먼저 말했다.
정용과 그의 엄마 역시 서울에서 집을 마련할 생각이 있었으므로 삼청동 마나님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정혜 엄마는 정용과 상의를 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이 상의를 하기도 전에 삼청동 마나님은 이미 복안을 갖고 있었다.
“얘, 우리 뒷집이 오래 전부터 복덕방에 집을 내놨거든 - 그런데 임자가 안 나타나고 있어 -- ”
삼청동 마나님은 아예 자기 뒷집으로 이사를 오라는 것이었다.
정용도 삼청동 마나님 댁 뒷집이 복덕방에 내놓았다는 소문에 침을 꿀떡 삼켰다.
그 집을 구해서 같이 살면 엄청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집은 자기네 세 식구가 살기에는 너무 큰 집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집은 저희들로서는 너무 클 것 -- 같은데 --- ”하며 망설였다.
그리고 그런 큰 집을 살려면 구입 자금도 문제였다.
당시 60년대 말 시세로 한참 개발이 시작된 화곡동 지역이 건평 오십 평에 삼십 평 정도의 집은 약 백오십 정도가 되었다.
그러므로 종로구 지역인 삼청동은 그 곱절은 되었는데, 물론 오백 이상이 있으니 집을 사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돈을 다 쓸 수는 없었다.
그러자 마나님은 돈 걱정은 말라고 한다.
그러나 정용과 그의 엄마인 정혜는 서울의 집을 마련하는 데, 마나님의 자금 지원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자 마나님은 묘한 제안을 한다.
먼저 그 집과 붙어 있는 마나님 댁이 붙어 있는 담을 헐어 버리면 두 집 사이에는 엄청 큰 마당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나님 댁의 북쪽 담과 그 집의 남쪽 담을 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두 집이 한 집으로 합해질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그 집의 북쪽 면은 도로에 접해 있으므로 그쪽 담을 약간 헐면 충분히 하나의 가게 터가 나온다는 것이다.
거기에 냉면을 파는 집이나 아니면 칼국수를 파는 장사 집을 만들면 아주 잘 팔릴 것이란다.
본래 마나님이 그 집을 사서 그런 일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정용의 엄마가 나이도 젊고 음식을 만들어 본 경험이 풍부하므로 추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 이북 출신이니 냉면집을 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한다.
지금 마나님이 대는 자금은 그렇게 장사하면서 갚으면 충분할 것 같다고 말하면서도 은근히 동업할 것을 제의하는 것이었다.
정용은 마나님과 동업을 하면 금상첨화로 생각되었다.
자신의 친엄마인 정혜 엄마는 미군 부대에서 그동안 식당일을 계속해 왔으므로, 식당 운영과 음식의 조리에는 어느 정도 노하우가 있다고 할 수는 있지만, 본격적으로 이 동네에서 영업을 하는 것은 아무래도 터줏대감 노릇을 하던 마나님의 영향력을 따라갈 수 없으니 함께하면 두 사람이 윈윈할 수 있는 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정용 그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아무래도 마나님의 임신이었다.
그가 부천 집에서 올라오고 나자 마나님의 배는 여간 부풀어 오른 것이 아니었다.
이미 7개월에서 8개월로 접어들고 있던 마나님의 배가 남산만해져서 아무래도 식당일을 하기에는 무리였다.
그래서 식당일을 하는 것은 정혜 엄마에게 일임하고 애를 낳고 나서 식당일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동안은 먼저 동사무소와 구청을 찾아다니면서 식당에 필요한 절차를 밟고, 허가를 내는 데 주력하였다.
사실 60년 당시에 식당을 내는데 허가를 받고 식당을 내는 사람은 드물었다.
왜냐하면 먹고 살기 힘든 시대였기 때문에 일단 무허가로 가게를 내고 단속을 나올 때까지 버티는 것이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일에 사리가 밝은 마나님은 1963년에 음식점 허가 기준이 완화된 사실을 알고 있었고, 최소한의 위생시설만 갖추면 허가를 쉽게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굳이 허가를 받지 않고 음식점을 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그녀가 남편의 정치적 위치를 이용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 당시 정부에서는 공무원이 요정이나 고급 술집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공무원 출입금지 식당을 정했는데, 청운동의 청운각 등 모두 18개 업소가 출입 금지 업소로 지정되어 이 요정이나 술집들은 매상에 타격이 커 불만이 많았다.
그러나 정용의 가족과 마나님이 계획하고 있는 식당은 이런 요정이 아니라 전형적인 냉면집이었다.
정혜 엄마의 고향은 연백이지만 연백이란 고장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므로, 바로 앞 지역이 해주이므로 ‘해주면옥’이라는 옥호까지 마련하였다.
삼청동 마나님은 임신하여 몸이 무거운데도 진두지휘를 해가며 이 일을 해냈다.
그녀는 본래 김포에서 양조장하던 집의 딸로서 아직도 그의 아버지는 김포 인근에서 ‘별주’라는 술을 공급하고 있는 성주 이씨 가문의 여장부였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 집 부근에 작은 음식점을 낼 생각을 오래전부터 계획해 왔다.
그런데 자기 집과 붙은 이웃집이 다른 곳으로 이사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 집을 매수할 계획을 오래 전부터 해왔는데, 그만 아기를 가져 차질이 빚을 것으로 생각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마침 정용의 친엄마와 가족들이 이사해 온 시기가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더욱이 더 좋은 일이 된 것은 정용의 엄마가 마침 솜씨 좋은 식당에서 주방을 경험해 본 여자란 점이었다.
게다가 미군부대 식당에서 일을 해 봤으니 식당의 계량화(計量化)에도 눈을 뜬 점이 마음에 들었다.
미군 식당이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식당과 다른 점은 철저한 계량화에 있다.
당시 미군이 먹던 모든 음식은 계량화에 의해 1인분의 식사가 정해진다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정용의 모친인 정혜가 미군 식당에 근무한 경험이 있다는 것은 이런 레시피에 의해 음식을 만드는 경험이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물론 정혜는 한국 여인이니 한국식으로 음식을 만들 줄도 아는 것은 당연했다.
특히 그녀는 냉면에 대해서도 정통하였다.
냉면은 딱 두 가지 요인으로 맛이 구별된다.
그 하나가 면이고, 다른 하나는 육수이다.
대부분의 평양식 냉면은 메밀과 밀가루 반죽을 약 7:3의 비율로 반죽으로 하고 반죽 후 적당한 시간의 숙성과정을 거쳐 제면을 한다.
여기서 쫄깃한 맛을 내는 면발을 뽑기 위해 얼마 동안 숙성하는지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많은 냉면집에서는 이른 숙성과 쫀득거리는 감촉을 위해 식용 소다를 넣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게 하면 면발에 쫀득거리는 탄력은 생기지만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그래서 익반죽이란 기법을 쓰는데, 그것은 메밀가루를 많이 쓰는 냉면의 특성상 글루텐 성분이 많지 않아 점성이 있는 반죽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뜨거운 물을 부어 점성을 더하므로 반죽에 탄력을 만들어준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평양식 냉면의 점도가 거의 모든 반죽을 고구마 전분으로 만든 함흥냉면처럼 질겨지지는 않는다.
냉면의 두 번째 비밀은 육수에 있다. 대부분의 냉면 육수는 무로 만든 동치미 국물과 소고기나 닭고기 등을 우려낸 육수를 브렌딩하여 쓴다.
이 비율은 각 집마다 철저히 비밀로 붙여지는데 바로 여기에서 냉면 맛이 좌우되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평양냉면의 육수는 맛이 슴슴한 것이 특징이다.
이런 점을 잘 알고 있는 정혜야말로 삼청동 마나님이 찾던 사람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