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 이야기 그 전 20, 영등포 외출]
아침에 일어난 정아는 자기 옆에 자고 있는 엄마와 오빠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이 이상했다.
그래서 엄마와 오빠가 일어나지 않으면 자신이라도 일어나 부엌에 나가 아침밥을 하려고 생각하고 방을 나서는데, 그만 홑이불만 덮고 엎드려 자는 엄마의 발을 밟았다.
그런데 엄마는 정아에게 발을 밟혔어도 ‘끄응-- ’하며 일어나지도 않는다. 정아는 엄마가 아픈 것이 아닌가 싶어 걱정이 되어 엄마가 덮은 홑이불을 들치는데 그만 엄만, 아무것도 입지 않고 홀딱 벗은 채 잠이 들어 있는 것이었다.
정아가 이불을 들쳐도 엄만 죽은 것같이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아는 엄마가 너무 곤히 잠든 것 같아 깨우지 않고 오빠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런데 오빠도 그냥 널부러져 자고 있는데 역시 거의 홀딱 벗은 몸 같았다.
겨우 이불로만 아랫도리를 가리고 있는 것이었다. 본래 남자들이야, 팬티와 런닝 차림으로 잠을 자는 것이 일상적인 습관이지만, 그래서 오빠가 벗은 것은 잘 모르겠는데, 왜 엄마와 오빠가 감기가 들도록 이 십이월의 겨울 그것도 불을 뜨끈하게 땐 저녁도 아닌 이 새벽에, 저렇게 홀딱 벗고 자는지 궁금했다.
그래도 정아는 효성이 지극한 딸이어서 주무시는 엄마와 오빠를 깨울 생각을 하지 않고 부엌으로 나가 불을 지피고, 물이라도 데워 놓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방을 나섰다. 그러나 뭔가 조금 이상하여 뒤를 자꾸 돌아본다.
엄마 정혜는 정아가 자기 발을 밟는 바람에 눈을 떴다.
정아가 자기 이불을 들치자 얼마나 놀랐는지, 그만 당황하여 소리를 낼 뻔 하였다.
모르는 척 눈을 감았지만 가슴이 두근 반, 세근 반 한다. 정용과 새벽녘에 엄청난 굿판을 벌릴 때, 그녀는 누가 듣는지, 듣지 않는지도 신경 쓰지 않고 마구 소리치며 박아댔는데, 이 딸이 그걸 보거나 들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뭐 봤어도, 들었어도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건 엄마의 비밀인 채로 있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서 딸은 그런 걸 알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마침 정아가 부엌으로 나가는듯한 소리가 들려 엄마인 정혜는 얼른 벗어 놓은 옷을 찾아 입는다.
팬티를 입는데, 정용 녀석이 엄마 보지에 얼마나 많이 싸 놓았는지, 그만 알량한 보지털이 다 꾸덕꾸덕하다.
속으로 말한다.
‘으이구 -- 빨랑 -- 씻어야겠네!’
정혜가 옷을 다 입고 부엌에 나가니 정아가 가마솥이 걸린 큰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아마 식구들 모두가 씻을 물을 데우는 모양이다.
“우리 딸, 물 데우는-- 거야?--- ”
“응, - 엄마! ”
이제 이 딸은 다 컸다. 이제 국민학교 6학년인데, 얼마나 성숙한지 밥도 잘하고, 반찬도 잘한다.
엄마가 부대에 가고 나면 혼자 집안 청소도 하고 공부도 혼자 한다.
오빠처럼 전교 수석은 아니어도, 자기 반에서는 최상위 성적을 늘 받아온다. 정혜는 아들과 딸이 너무 자랑스럽다. 비록 아버지가 없어도 티 내지 않고, 꿋꿋하게 자라는 것이 대견하고 고마웠다.
오빠를 닮아 키도 늘씬하고, 엄마를 닮아 예쁘기도 하다. 문제는 이 딸아이에게는 친구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엄마가 또래 친구를 사귀라고 하면 “에이, 엄마 걔네들은 애기야! 애기!”하며 웃고 만다.
정혜는 그것이 바로 딸 정아의 문제라는 생각도 든다. 아예 자기 또래 아이들은 상대도 하지 않으려 한다.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지만 “엄마, 최소한 오빠 나이는 되어야 나와 비슷한 정신 연령을 지니는 거야!”라고 오히려 엄마를 가르치려 한다.
6학년 초, 최초의 멘스가 오자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이 딸 아이는 스스로 엄마를 찾아와 의논하였다.
“엄마, 나 -- 이제 멘스를 시작하는 것 같아 -- ”
엄마인 정혜는 벌써 딸이 이렇게 숙성했는지 모르고 있던 차에 먼저 찾아와 이야기하자 깜짝 놀랐다.
“엄마, 난 다 알아 --- 괜히 호들갑 떨지마!‘
알고보니 이 딸 아이는 이미 국민학교 5학년 때부터 초경에 대해 준비를 했었다고 한다.
“엄마, 나 젖도 엄청 커졌어 --- 엄만 몰랐지? --”
남편의 행불 사건 이후 슬픔에 잠겨 있던 정혜는 정신을 수습한 뒤 부대에 나가 돈을 벌고, 또 정용의 중학교 입학시키느라고 정아에게 관심을 덜 쏟아 미안한 터에 이 딸 아이는 마치 미루나무처럼, 포플러처럼 스스로 쑥쑥 자라주었던 것이었다.
그것이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부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정아가 큰 아궁이 앞에 치마를 바짝 홀쳐매고 쪼그리고 앉은 채 장작불을 지피고 있었다.
아마 양동이로 물을 이미 길어다 부은 무양이다.
연탄불이 있는 작은 아궁이에도 물이 든 양은 솥이 걸려 있긴 하지만 세 식구가 모두 씻으려면 아무래도 가마솥에 물을 데워야 충족될 것이다.
가마솥에는 세 양동이는 길어 넣어야 하는데, 아마 정아가 이미 물을 길어 솥에 부어 놓은 모양이다.
정혜는 불을 때는 정아 곁에 가 자기도 같이 쪼그리고 앉는다.
딸 아이의 긴 다리가 일렁이는 장작 불빛에 환하게 빛나고 있다.
정아가 엄마가 곁에 앉자, 머리를 그녀의 가슴에 기댄다.
정아의 단발머리가 찰랑찰랑 엄마 정혜의 가슴 안으로 부서져 내린다.
정혜는 가만히 예쁜 정아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아궁이의 장작 불빛으로 인해 정아의 얼굴에 빨간 홍조가 피어오른다.
엄마 정혜의 얼굴에도 따뜻한 장작불로 인해 얼굴이 달아 오를 것이다.
정혜는 예쁜 딸, 정아의 볼을 가만히 쓰다듬어 본다.
정아도 엄마의 몸에 기대어 엄마의 냄새를 맡는다.
엄만 늘 좋은 냄새가 났다. 향기로운 냄새와 젖 냄새가 섞인 듯 달콤하면서도, 비릿한 냄새였지만 언제나 그 냄새는 엄마의 냄새였다.
두 모녀는 장작불이 타오르는 아궁이에 서로 기대고 앉아 말없이 물이 데워지기만을 기다렸다.
‘치익’ 소리를 내며 가마솥 뚜껑에서 물이 또르르 굴러 떨어진다.
물이 끓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젠 다 데워진 셈이다.
오히려 물이 끓게 되면 찬물이 더 필요하기 때문에 힘들어진다.
“너부터 먼저 씻어라”
정혜가 딸 정아에게 먼저 씻으라고 한다.
“아니 엄마부터 해”
그러자 정아는 엄마에게 양보한다.
“아냐, 엄만, 좀 더 많이 씻어야 하니깐 너부터 해!”
엄마가 물을 많이 쓸 것처럼 이야기하자 정아가 먼저 양동이에 데워진 물을 담아 펌프 옆으로 가지고 간다.
펌프에서 물을 길어 뜨거운 물과 적당히 섞어 머리부터 감는다.
마침 12월의 겨울 아침이라도 이미 햇살이 퍼진 상태인데다가 날씨까지 푹해 머릴 감아도 괜찮을 날씨였다.
정아는 오빠가 온 것이 너무 좋아 오빠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었다.
오빠가 시내로 외출이라고 하자고 할지 몰라 빨랑 머리감고, 세수하고 예쁜 옷으로 갈아 입어야 할 것 같아 마음이 설렜다.
엄마인 정혜도 마음이 급했다. 새벽 댓바람에 아들과 생각하지도 못한 이상한 관계를 가졌지만, 그녀는 조금도 후회하거나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왜 이제까지 안했지?’하는 의문이 남을 정도로 그녀에게는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그러다보니 아들 정용이 너무나 좋은 것이었다.
오늘 아침에 가장 먼저 할 일은 몸을 씻는 일이었다.
‘아니 이젠 진짜 정신을 차려야겠어! 새벽처럼 까무룩하게 잠이 들면 어떻게 해?’
그녀는 새벽에 그만 잠이 든 것이 너무 위험했다고 생각이 든다.
오늘 아침 눈치를 보니, 딸은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다.
‘아직 정아 얜, 새벽에 내가 - 용이와 뭘 했는지 알지 못하는 것 같은데, -- 이왕 모르는 거, -- 모르게 해야지, 알게 하면 좋을 거 뭐 있어?“
그렇게 정아와 엄마 정혜는 각자의 기대를 걸고 아침에 분단장을 했다.
정혜는 딸, 정아가 아침내내 불을 피워 데워 놓은 가마솥의 물을 부엌에 빨간 고무 다라에 잔뜩 퍼서 적당하게 온도를 맞춰 놓곤 옷을 홀라당 벗고 그 안으로 쏙 들어 갔다.
부엌이 욕실 겸 목욕탕이 되고 만 셈이다.
정혜는 찰박찰박 몸을 씻었다. 보지부터 먼저 씻었다.
겨울이라지만 따뜻한 날씨 덕에, 또 물을 잔뜩 데워 커다란 다라에 몸이 잠기도록 부어 놓고 씻으니 몸이 다 풀어지는 것 같았다.
‘우리집도 욕실을 만들어야 할 것 같아 ---- ’
그녀도 정용과 똑같은 생각을 한다. 이번 겨울 아들인 용이가 집에 있을 때 공사하는 것을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정용은 오랜만에 집에서 아주 늦은 기상을 하였다.
방문을 열자 밝은 햇빛이 이미 해가 중천에 떠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얼핏 새벽에 일어났던 일이 생각나 엄마를 찾으니 그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의 몸은 방 아랫목에 눕혀져 있었고, 옷도 가지런히 입혀진 상태이다.
분명 엄마와 함께 홀라당 벗고 잔 것으로 생각나는데, 어찌 보이지 않을까?
누이 동생 정아도 보이지 않는다. 엄마랑 둘이 어딜 나갔나? 그럴 리가 있나?
자리에서 일어난 앉아 멀뚱멀뚱하고 있는 찰라, 누이동생 정아가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방으로 들어온다. 아마 머릴 감은 것일까?
“오빠 이제 -- 일어났어? 뭔 잠을 그렇게 오래 자?”
정아가 수건으로 머릴 문지르며 윗목에 놓인 작은 앉은뱅이 저울 앞에 앉으며 말한다.
“응, -- 피곤했던 모양이야! 그런데 넌 -- 아침에 머릴 감았어?”
정용은 거울 앞에 앉아 빗질을 시작한 동생의 모습을 보며 묻는다.
“응, 오빠랑 --- 어디 가려고?, 안 갈 거야? --”
여동생 정아는 감은 머리를 수건과 함께 빗질하며 외출하자고 조른다.
“엄마는? --- ”
정용은 자신도 이젠 일어나 뭔가 해야 할 것 같아 건성으로 묻는다.
“응, 부엌에 있어”
정아는 빗질을 하면서 대답한다.
정용은 일어나 바지를 꿰어 입으며 세수할 준비를 한다.
“오빠 솥에 물이 가득 있어 --- 따뜻해 -- ”
여동생 정아가 아침에 자신이 데워놓은 것을 알아달라는 듯이 말한다.
“고마워 --- ”라고 말하며 용은 바지를 꿰어 입고 짧은 반팔 티만 입은 채 방문을 열고 마루로 나선다.
아침 햇살이 마루 앞의 댓돌까지 다가와 있었다.
겨울 날씨치곤 푹하고 따뜻한 날이다.
이 정도면 뭐 반팔 티만 입어도 살겠다 싶어 부엌으로 간다.
부엌의 나무문을 열려는데 문이 안에서 잠겼다.
문틈 사이로 안을 들여다보니 뿌연 김이 서려 있다.
자세히 보니 커다란 고무 다라 안에 하얀 엄마의 알몸이 보인다. 아마 아직 목욕이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안되겠다 싶어 펌프가 설치된 우물가로 간다.
거긴 정아가 쓰고 난 대야와 양동이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펌프로 양동이 가득 물을 긷자 하얀 김이 나온다. 아, 겨울은 겨울이구나!
대야에 물을 퍼 두 손으로 얼굴에 찬물을 끼얹는다. 그리고 잽싸게 손을 놀린다.
“푸푸 --- 푸푸 -- ”
비누로 얼굴을 씻고, 머리에도 비누칠을 한다. 차가운 기운이 온몸을 스치고 지나간다.
정용은 개운하게 세수를 했다. 세수하고 난 대야의 물을 마당에 확 끼얹는다.
어느새 동생 정아가 곁에 다가와 새 수건을 오빠의 손에 건네 준다.
정용은 수건을 들고 얼굴의 물기를 닦아낸다. 눈을 들어 여동생을 보니 찰랑거리는 단발머리가 예쁘다.
‘어느새 얘가 이렇게 컸나?’싶었다. 키가 훤칠하고 날씬한 것이 엄마 닮았다. 원래 딸은 엄마 닮는다.
이렇게 예쁜 정아를 보니 뽀뽀라도 해주고 싶다. 얼굴을 닦은 수건을 든 채 둘이 함께 방안으로 들어간다.
그 짧은 순간에도 정아는 오빠와 떨어지고 싶지 않은지 오빠의 손을 잡으며 슬며시 묻는다.
“오빠, 오늘 어디 안가? -- ”
은근히 자기와 함께 외출하자는 얘기다.
“응, 난, 어디 안 가는데 --- 너랑 같이 -- 나갈까?”
방학하고 바로 돌아온 날 아침에 동생과 외출하지 않으면 어디 갈 데가 있겠는가?
“와, --- 난 그럼 너무 좋지 ---- ”
정아가 환호성을 지른다.
“어딜 갈까? -- ”
“응, 오빠, 영등포에 --- 가지 않을 꺼야?”
“그래? --- 그럼 오늘 -- 아침 밥, 먹고 우리 영등포에 나가보자!”
오누이가 이렇게 도란도란 이야기 하는 사이에 엄마가 밥상을 다 차렸는지 부엌에서 소리가 들린다.
“얘들아, 상 가지고 들어가라!”
“예, --- ”하며 정용이 마루로 나갔다. 반찬이 풍성한 아침 밥상이 거기 차려져 있었다.
정용은 밥상을 번쩍 들고 방 안으로 들여온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아직 젖은 머리에 수건을 질끈 동여맨 엄마 정혜가 뒤따라 들어 온다.
정용은 뽀얀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며 빙긋이 웃었다.
“너, 왜? 웃어 -- !” 하면서 밥상을 들고 들어가는 정용의 등을 탁 친다.
“어이쿠 -- ”
정용은 마치 밥상을 엎기라도 하는 듯 소리를 지른다.
깜짝 놀란 정혜가 그를 붙든다.
“헤헤 ---- ”
정용은 밥상을 들고 들어가며 그냥 웃는다.
“얘! -- 니가 밥상-- 엎는 줄 알고 놀랬잖아! --- ”
“엎기는요? -- 엄마가 너무 예뻐서 쳐다보다가 문지방에 걸렸는 줄 알았어요! -- ”
빈말이라도 어떤 여자든 ‘예쁘다’고 하는 말은 듣기 좋은 법이다.
더욱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듣는 말은 더 좋은 법이다.
새벽에 한바탕 씹을 하고 난 후 남녀 간의 정이 새록새록 묻어나는데, 바로 그 정(情)을 통한 아들이 하는 말은 더욱 듣기가 좋기 마련이다.
“얘는 --- ”하면서 그의 등짝을 더 쎄게 친다.
진짜 밥상을 앞을 것 같다. 그러나 정용은 엄마의 그 정도 등짝치기는 꿈쩍도 안한다.
세 식구가 도란도란 둘러 앉아 맛있게 아침 식사를 같이 한다.
정아가 엄마에게 오빠랑 외출하겠다고 말한다.
엄마가 외출하는데 ‘돈이 필요하냐?’고 묻자, 정용은 ‘그 정도는 있다’고 말하자 ‘잘 다녀오라’고 하며 정아에게 용돈을 꺼내 준다. 정아는 얼른 받아 챙겼다.
어차피 엄마는 오류동 부대로 출근해야 한다.
낮 시간에는 엄마와 같이 있을 수 없으니, 방학을 두 오뉘간에 함께 돌아다니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정용도 여동생 정아와 함께 외출하는 것은 처음인 것 같다. 아니 둘 다 처음이다.
정아는 마음이 설레었다.
너무도 사랑하는 오빠! 그는 여동생의 우상이었다.
그녀도 오빠랑 같이 서울에서 공부하는 것이 꿈이었다.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해서 자신도 서울에 있는 k 여중을 가보고 싶었다.
‘오빠는 가는데 왜 나는 못가?’ 그런 생각을 하였지만 그녀는 정작 k 여중이 어디 붙어 있는 줄도 모른다.
둔덕산 기슭에서 경인로 큰 길까지 걸어 나가는 것만 해도 삼십분은 걸린다. 거기서 직행이든 완행이든, 영등포 가는 버스를 타고 나가면 그것도 한 시간은 걸린다.
두 오뉘는 아침을 먹고 늦은 출근을 하는 엄마와 함께 집을 나섰다.
둔덕산 기슭에서 한 25분 정도 걸어 나가면 경인로 큰 길이 나온다. 경인로에 도착해야 간이 버스 정류장이 있다.
정류장에만 집이 몇 채 있을 뿐, 그 주변은 다 논이고 밭이다. 거기 정류장에서 오류동을 경유하여 영등포로 나간다.
영등포는 서울 본토박이들에겐 이방지대나 다름없다.
사실 그 당시에 사대문 안에 살던 본토 서울 사람들에게 영등포는 ‘강 건너 아련한 불빛’ 아래 남의 동네였다.
그러나 인천이든지, 강화든지, 혹은 개성 등의 이북에서 피난을 내려온 실향민들에게는, 또 충청도나 전라도에서 올라온 시골뜨기들에게 영등포는 삶의 전쟁터였다.
그땐 전쟁으로 다 부서진 영등포 역사가 2층 콘크리트 건물로 겨우 세워졌던 무렵이었다. 사람들은 영등포 역사가 아주 크게 잘 지어졌다고 말하곤 하였다. 그런데 그건 영등포 역뿐이었다.
그래도 영등포 역 부근의 시장골목들은 비가 오면 질척거리기 일쑤였다. 겨울이 되어도 질퍼덕거렸다.
그런데 경기도 안양이나 소사 사는 사람들에게 영등포는 환락의 도시이기도 했다. 서울까지는 들어가지 못할망정 영등포만 가도 먹을 것, 입을 것, 볼거리가 넘쳤다. 더욱이 젊은이들은 영등포 2류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영등포 시장골목 주변 음식점에서 술과 음식을 먹었다.
경기도 시흥, 안양, 소사, 부평 등지에서 살던 사람들은 영등포로 몰려들어 장사도 하고, 돈도 벌어 다시 밤이 되면 자기네 동네로 나갔다.
영등포는 그래서 교통의 요지이기도 했다. 80년대가 되어 영등포-인천 간에 총알택시가 처음 생긴 곳도 바로 이 영등포역 앞이다.
정용은 버스를 타고 누이동생과 함께 영등포로 나왔다. 인천 - 영등포 간 버스는 언제나 승객들로 만원이었다.
버스 차장은 ‘오라이’하며 버스 몸통을 탕탕 두드리는 것으로 운전사에게 출발신호를 보냈다.
그러면 운전사는 언제든지 출발하면서 운전대를 좌로 한 번, 크게 흔들었다가 다시 우로 한번 크게 흔들면 승객들은 이리저리로 쏠리면서 밀착되곤 한다.
정아는 버스 안에서 자신의 몸이 크게 쏠리는 것에 개의치 않는다. 그저 오빠의 손을 꼭 붙들고 있으면 된다.
그래도 소사를 지나서 타면 오류에서 어느 정도 손님이 내리면 완행이라도 자리가 생기는 수도 있다.
오류에서는 더 많은 손님들이 탄다. 주로 부근의 군발이들인데, 얘네들이 아주 말썽을 많이 피운다.
대부분의 다른 부대 군인들은 말썽이 덜한데, 특무전대 애들만 말썽을 부린다.
영등포 시장골목에서도 군인이 술 먹고 행패를 부린다 싶으면 십중팔구는 오류동 특무전대 애들이다.
정용과 정아는 영등포 역에서 내렸다. 둘은 손을 꼭 잡고 시장통을 누볐다. 역에서 골목길을 통해 영등포 시장 골목으로 나오면 주변엔 온갖 음식냄새가 진동한다.
그리고 시장 앞에는 극장이 보인다. 영보극장을 지나면 경원극장, 경원극장 앞엔 길 건너 연흥극장이 있다.
마침 연흥극장에서는 홍콩에서 들어온 영화 ‘방랑의 결투’가 계속 상영된다고 한다. 무예에 소질이 있고 혈기 왕성한 정용은 홍콩 무협 영화를 꼭 보고 싶지만 누이 동생 때문에 주저한다.
“오빠,-- 우리 저거 같이 보자!”
반대로 정아는 ‘맨발의 청춘’ 같은 멜로 영화가 보고 싶지만, 오빠가 보고 싶은 건 저런 무협 영화일 것 같아 먼저 자기가 제안한다. 정용은 정아의 마음을 알지만 자꾸 영화에 끌린다.
정아가 보고 싶어 하는 ‘신성일’ 나오는 영화는 나중에 보기로 약속하곤 정아의 손을 이끌어 연흥극장 쪽으로 향하였다.
정아는 오빠의 점퍼 안에 자기 손을 집어 놓고는 따뜻한 오빠의 체온을 음미하고 있었다. 정용 오빤 어깨를 끌어안아 주거나 허리에 손을 둘러주며 언제나 자신을 그의 몸 가까이로 오게 하였다. 자연히 둘의 몸은 밀착한 상태로 움직였다.
둘은 극장 앞에서 표를 끊고 들어갔다.
사실 이 영화는 보통 거의가 다 ‘연소자입장불가’의 멜로 영화와는 달리 ‘중학생 이상 입장가’의 영화여서 둘은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들어갈 수 있었다.
아니 뭐 그 당시 연흥극장 같은 변두리 극장에 청소년들이 극장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면 장사가 되겠는가?
어떤 영화관도 사실 다 들어갈 수는 있었다. 그런데 학생주임 같은 사람에게 걸리면 그게 낭패였을 뿐이었다.
정용은 홍콩 무협 영화를 보면서 영화에 푹 빠져버렸다. 그는 영화를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손짓발짓을 해댔다. 나중에 정아는 엄마에게 그 이야기를 하며 오빠를 놀려대곤 하였다. 두어 시간 영화관에서 장철 감독의 신나는 액션영화를 본 두 오뉘는 뱃속이 출출하여 음식점이 있는 곳으로 발을 옮겼다. 영등포는 극장 옆 골목만 들어가도 떡볶기, 오뎅, 만두 파는 데로부터 순대와 족발, 그리고 중국집 짜장면까지 없는 게 없었다.
누이 동생에게 뭔가 좀 고급스러운 음식을 먹이고 싶은 정용은 그래도 의자도 있고, 홀도 있는 그럴듯한 중국음식점을 찾아 들어 갔다.
당시 중학교 학생에게 짜장면, 짬뽕 등의 중국음식은 최상의 음식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손꼽히는 맛있는 음식이었다. 정용은 정아와 함께 간짜장과 군만두를 시켜 맛있게 먹고 있는데, 음식점 저편에 뭔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알고 보니 군인 몇이서 음식과 술을 잔뜩 시켜 놓고, 실컷 먹고, 실컷 취한 뒤 돈이 없다고 뻗대는 것이었다.
정용이 자세히 보니 아니나 다를까 오류동 특무전대 깡패 군인 놈들이었다.
세 놈인데 술에 취해 손을 흔들고 탁자를 탕탕 내리치고 가관이었다. 정용은 아버지도 이 부대 교관이었지만, 이렇게 막무가내는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놈들은 유난히 더했다.
“야이, 씨팔, 주인 나오라구 해 -- -!
“좆같이 -- 우린 다 한 방에 갈 놈들이거든 ---- -- ”
정용은 아차 싶었다. ‘아이, 저쪽에서 떡볶이나 먹고 갈걸!’ 잘못했다간 이놈들의 행패에 말려드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사실 정용은 이놈들이 “다 한 방에 갈거거든 -- ”이란 말에서 혹시 실미도로 훈련 받으러 들어가기 전에 외박이나 단기 휴가를 나온 놈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훈련 중에 외박을 보내는 녀석들은 다 공군특무전대에서 다시 새로운 교육을 받으러 실미도로 들어가는 녀석들에게는 외박을 주어 마음을 풀어 준 다음에 보내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서 오류동 패거리들은 웬만해서는 영등포로 나오지 않지만 나오기만 하면 말썽을 부렸다. 그래서 영등포 음식점 사장님들도 오류동 패거리들이 오면 비상 연락망을 갖추어 놓고 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외출 할 때 대부분 사복을 입게 마련인데, 쫄병들은 그럴만한 처지가 못되어 그냥 군복을 입고 나온다.
대부분 이들은 병이지만 외출 나올 땐 마이가리(前借)해서 하사관 계급장을 달고 나온다.
분명 계급 사칭이지만 오류동 부대에서는 의례 그러려니 그런 것엔 신경도 안 썼다.
영등포 음식점 사장님들도 이젠 그런 관례를 다 안다. 군복을 입고 나온 놈들이 개판을 치면 아예 인근 깡패를 불러 오히려 군인들을 죽사발 나도록 두들겨 패주고 그냥 쫒아내 버린다.
아니면 경찰을 불러 헌병대로 보내기도 한다. 깡패들은 사실 영등포 인근의 태권도장이나 권투 도장에 다니는 녀석들이 많다. 낮엔 그런데서 몸을 풀고, 움직이다가 밤이 되면 슬슬 기어나와 온갖 못된 짓을 하는 놈들이 태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