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르고 웨딩-52화 (52/52)

52화- 외전 2 / 외전 32017.12.29.

외전 2. 류재언, 그리고 하태랑

전국을 충격에 빠뜨리는 사건이 심심찮게 터지는 업계지만 그 건은 꽤 컸다.

반듯하고 모범적인 대배우 류태훈과 방송으로 널리 알려진 유명 교수 나미정의 이혼 소식.

‘유인엔터’ 류재언 대표의 부모로도 알려져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사이가 좋기로 소문난 잉꼬부부였고 그 이미지를 바탕으로 활동을 해왔기에 그 충격이 더 컸다.

자세한 결별사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혼 사실만은 분명했다.

류태훈의 젊은 여배우와의 불륜이나 나미정이 호스트바에 다닌다는 루머도 공공연했다.

루머는 루머였지만 몇십 년을 공들여 쌓아올린 이미지는 한순간에 처참히 무너졌다.

그만큼 ‘아무것도’ 아닌 허상이었다.

허상 때문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진심을 흘려야 했었는지, 그들 부부는 이제야 뼈아프게 깨달아가고 있었다.

류재언은 그 소식을 남아프리카로 떠나기 전, 공항에서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이런저런 소식들을 인터넷으로 확인하고 씁쓸하게 창을 닫았다.

시원하지도, 섭섭하지도 않았다. 모든 건 그들이 선택했고 그 결과에 그들이 책임을 져야 할 뿐이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도 자신만이 책임질 수 있을 뿐.

무거운 책임감으로 살아가야 할 날들이었다.

누군가에게 고마운 마음, 그리운 마음, 행복한 마음, 아픈 마음, 이 모든 것들을 다 표현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그런 상대가 생긴다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그때는 조금 덜 아프게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조금 덜 받아도 좋으니 조금 더 많이 내어주면서.

조금 더 후회하지 않고.

그렇게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할 수 있는 날이 언젠가는 올 수 있겠지, 하고 생각했다.

류재언은 처음으로 스스로 마음을 다독이는 연습을 하며, 많은 것들을 내려놓고 비행기에 올랐다.

남아프리카로 떠나는 길이었다.

◇ ◆ ◇

정 기자(이하 정): 촬영은 다 끝났고……, 태랑 씨. 남아프리카 갔던 얘기 좀 더 해주면 안 될까? 잡지에는 안 넣을게.

하태랑(이하 하): 그건 너무 개인적인 건데. 진짜 정 기자님 믿고 하는 거예요. 오프 더 레코드.

정: 당연하지. 이 바닥에서 입 무거운 걸로 나 빼고 누구 있어? 걱정하지 마. 내가 사실 남아프리카 그 로보스레일 타는 거 완전 로망이었거든. 신혼여행으로 엄청 가고 싶었는데, 남편이랑 막판까지 의견차 있어서 못 갔었어. 그런데 태랑 씨 갔다 왔단 얘기 듣고 깜짝 놀랐잖아. 어떻게 간 거야?

하: 사실 내가 가고 싶어서 간 거 아니고, 그냥 누구 따라간 거예요.

정: 누구?

하: 그것까지 얘기하긴 좀 그렇고.

정: 그래서.

하: 들키고 싶지 않긴 했는데, 그냥 몰래 간 거라서. 그런데 그게 식사하는 칸도 같고 해서 만날 수밖에 없더라구요. 결국 들켰죠, 뭐.

정: 거기까지 따라간 거 보면 태랑 씨가 좋아하는 사람이었어? 근데 왜 들키면 안 돼? 혹시 커플인데 따라간 거야?

하: 아뇨오! 절대 커플 아니었어요!

정: 왜 정색을 하구 그래. 그냥 물어본 거야.

하: 그 사람도 혼자였는데. 내가 좋아하는 건 모르니까……. 뭐, 이왕 그렇게 된 거 좋은 추억이라도 만들어볼까 했더니, 열차가 럭셔리하면 뭐하고 풍경이 끝장나면 뭘 해요. 남자가 아주 철벽을 치다 못해 철갑을 둘렀는데. 세상에, 뭘 찔러도 바늘 하나 안 들어가게 절대 틈이 없어, 틈이.

정: 그 정도였어, ㄹㅠ……, 아니, 아무튼, 그 남자는 어떻게 태랑 씨 같은 초미녀한테도 안 넘어가는 거야? 이해가 안 되네?

하: 그건 나도 정말 이해가 안 되네요. 그 남자 전여친을 좀 알거든요. 요즘에는 진지하게 전화해서 물어보고 싶다니까요. 그땐 어떻게 넘어갔었는지?

정: 그러게. 그 여자랑은 결혼까지 하려고 했었잖아.

하: 그러니까요! 아니, 헤어져놓고는 다시 만나달라고 무릎까지 꿇었다더……, 정 기자님, 그 남자가 누군지 아세요?

정: 응? 아니? 누군지 전혀 모르겠는데?

화보촬영이 끝난 후에도 하태랑은 찝찝한 기분을 떨치지 못했다.

정 기자는 분명 하태랑이 얘기하는 상대를 알고 있는 듯했는데,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으니 먼저 말할 수도 없고.

괜히 여행 얘기를 꺼내면서 말을 더 시키는 바람에 대답을 하다, 엉뚱하게 흘러가고 말았다.

되도 않는 짝사랑을 하다 보니 가슴이 꽉 막힌지라 기회만 되면 어디든 털어놓고 싶은 심정이 화근이었다.

하태랑은 스튜디오 내의 대기실로 촬영의상을 갈아입으러 들어갔다.

그 사이 류재언은 임 실장과 함께 하태랑의 잡지 화보촬영이 있는 지하 스튜디오로 내려왔다.

“어머, 대표님이 다 직접 와주셨네요.”

“마침 시간이 맞아 들렀습니다. 촬영 끝나셨습니까.”

“네, 일찍 마무리했어요.”

화보 진행을 총괄하던 에디터 정 기자는 촬영현장을 정리하다가 이내 류재언에게 다가가 물었다.

“저번에 휴가 남아프리카 가셨었다면서요. 로보스레일, 좋으셨어요?”

“네.”

“그 열차 안에서 통유리 천장으로 밤하늘 별 보는 게 진짜 죽인다던데.”

“네. 좋았습니다.”

‘유인엔터’ 직원에게 스치듯 들었던 얘기였다. 류재언 대표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휴가를 갔었다는 얘기.

그런데 방금 들은 하태랑의 이야기와 연관 짓게 되면서, 하태랑의 짝사랑 상대가 류 대표라는 건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걸 확인하고자 정확히 묻는 말이었다.

하태랑이 진짜 류 대표를 따라갔었구나, 하고.

그렇다고 뭘 어떻게 할 생각은 아니었다. 하태랑과의 약속대로 ‘오프 더 레코드’는 지켜줄 마음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당장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철벽을 치다 못해 철갑을 두른 남자라는데.

여배우의 짝사랑이 기삿거리나 되나. 그렇다고 조롱거리로 만들 수는 없지 않나.

“대표님, 태랑 씨 사진 보실래요? 너무 예뻐요. 아니, 어쩜 뭘 먹고 저렇게 예쁘지?”

하태랑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정 기자가 커다란 모니터를 가리켰다.

이왕이면 기삿거리로 무럭무럭 자랄 때까지 지원군이 되어주리라 마음먹으면서.

“참 나, 마음씨 착해, 성격 털털해, 얼굴 예뻐, 몸매 끝내줘, 연기 잘해, 신이 이렇게까지 불공평해도 되는 걸까요? 태랑 씨한테 어쩜 이렇게 다 줄 수가 있죠. 정말 너무해요.”

류재언이 영혼 없는 얼굴로 정 기자의 칭찬 세례를 듣고 있을 때, 대기실에서 나온 하태랑 역시 황당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무슨 속셈인지는 몰라도 저건 좀 과하다, 생각하면서.

하지만 줄곧 이어지는 정 기자의 칭찬을 계속 듣고 있던 류재언이 입을 열었다.

“압니다.”

“네?”

“우리 배우, 여신이죠.”

정 기자가 하태랑을 보며 ‘헐, 들었어?’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하태랑은 아랑곳하지 않고 도도한 얼굴로 지나쳤다.

세상 사람들이 다 여신이라고 해도 꿈쩍 안 하다가, 류재언이 말해주는 여신 소리에는 한 방에 바로 녹아내리는 게 분명한데도.

스튜디오에서 밖으로 나왔을 때 류재언의 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임 실장은?”

“유소리 픽업 갔어.”

다른 배우를 챙기러 갔다는 소리에 괜히 하태랑의 입술이 삐죽 나왔다.

“그래서 대표가 대신 모셔다준다는데 그게 또 불만이고?”

“아니, 뭐. 꼭 불만은 아니지만.”

꿩 대신 봉황이었다.

류재언은 기사도 보내고 직접 운전석으로 갔기에 하태랑도 조수석에 앉았다. 이렇게 하니 마치 데이트를 하는 느낌이라 기분이 묘했다.

일이 끝나고 데리러 온 남친 같잖아.

“아니, 정 기자님은 왜 그렇게 쓸데없는 소리를 많이 하시는지 몰라. 류 대표 앞에서 별 소리를 다 하고.”

운전하는 류재언을 힐끔 보며 하는 소리에 그가 말했다.

“난 진심이었는데, 왜.”

우리 배우, 여신이죠, 하는 소리를 말하는 것이었다. 하태랑의 얼굴에 열이 차올랐다.

“뭐, 뭐래. 류 대표 안 하던 짓 하면 빨리 죽어, 왜 그래.”

“잊었나본데, 나 원래 칭찬 잘해.”

떠올려보니 그랬다. 좋아하게 된 후로 새삼스럽게 느껴져서 그렇지, 류재언은 원래 칭찬과 격려에 인색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니 짝사랑하는 자신이 그저 오버하고 있을 뿐.

하태랑은 얼굴이 더욱 화끈 달아올랐다.

차창을 조금 열어 바람을 맞으니 열기가 식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며 류재언이 옅은 미소를 머금는 건, 고개를 돌린 그녀가 알지 못했다.

“대본 새로 들어온 거 보냈으니 읽어봐. 이미지 바꾸는 데 좋을 것 같아.”

“뭔데. 밉상?”

하태랑은 창을 올리고 물었다. 지난번에 얘기한 대로 정말 밉상 역할이 찰떡이라 찾아주려는 건가 싶었다.

“……밉상보다는 귀여운 역할이 좋겠는데.”

“뭐? 귀여운? 누가? 내가?”

아무리 봐도 자신이 귀여운 스타일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아주 잘할 것 같다.”

귀여운 걸 잘할 것 같다니 그게 뭔 뜻이지.

도대체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자꾸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창문을 열어 또 바람을 맞았다. 머리가 헝클어지며 대역죄인이 되는 것 따위 상관없는 것 같다. 열감으로 얼굴이 터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게 낫다.

사랑에 빠지면 자신이 귀여워지는 타입이라는 걸 하태랑 스스로도 잘 모르고 있었다. 제대로 사랑을 해봤어야 알지.

“류 대표. 밥이나 먹고 가자. 안 사줄 거면 우리 집에 가서 저녁 먹고 가든가.”

아무 말이나 내뱉고.

“싫으면 말든가.”

금방 철회하고.

“류재언, 대답 안 할 거야?”

재촉하고.

“창문 열고 나 소리 지른다?”

협박하고.

밥 한번 먹자며 오만 가지 다 하는 천하의 절세미녀에게 넘어가지 않을 방도가 없었다.

신호에 걸려 정차한 류재언은 운전대에 손을 올린 채 하태랑을 바라보았다.

말랑하게 녹은 공기.

“지금 밥 먹으러 가는 거야. ‘곁’ 예약해놨어.”

하태랑이 좋아하는 레스토랑이었다.

“그러니까 창문 열고 소리 지를 생각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

신호가 바뀌었다.

류재언이 고개를 돌렸다.

“출발한다.”

두 사람을 태운 차가 다시 출발하였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 그들의 ‘곁’으로.

외전 3. 잠시 후 행복한 울음을 터뜨렸지.

하와이 마우이섬.

키헤이 해변에 위치한 하얀 집.

바다를 향해 활짝 열린 구조로 지은 집은 무척 시원스러웠다.

커다란 테이블이 있는 오션뷰 명당자리에 마주 앉은 엄마와 다섯 살 아들은 그림을 그리는 중이었다.

주제는 바다에 나간 아빠와 누나였다.

서핑보드 옆구리에 딱 끼고 나간 부녀의 모습을, 다섯 살 아들 해온이는 제법 사람의 모습답게 잘 그려내고 있었다. 배경까지도. 파도의 결마저 표현해내면서.

“어머 얘, 너 다섯 살이잖아…….”

‘이건 사기야, 말도 안 돼.’라는 생각으로 소현은 아들의 그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심하게 정교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다섯 살 그림이라고 하기도 어려웠다.

반면 마주 앉은 자신의 그림은 비루하기 짝이 없었다.

셋째를 임신 중이다. 태교 삼아 그려볼까 했는데 역시 괜히 했다. 흥미는 재능을 따라갈 수 없는 것이었다.

저렇게 천재 DNA를 뒤집어쓰고 태어난 사람들 사이에서 그림을 그리려고 한 내가 죄인이지.

“엄마. 엄마 그림도 보여줘.”

그림은 당차게 잘 그려놓고 말투는 아직 아기 같은 아들 해온이 고개를 쑥 내밀었다. 소현은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팔로 자신의 드로잉 북을 가렸다.

“하하하, 엄마는 그림 못 그려.”

아빠랑은 다르단다.

하지만 해온이 상상도 못 할 말을 쏟아냈다.

“괜찮아, 엄마. 세상의 모든 그림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 거랬어.”

“……뭐?”

“그러니까 엄마 그림도 각자의 의미가 있어. 괜찮아.”

발음도 분명하게 안 돼서 ‘의미’도 아닌 ‘이미’라고 말하는 주제에! ‘있어’도 아닌 ‘이떠’라고 하는 주제에!

“아우우우. 넌 진짜 누구 닮아서 이렇게 귀엽니이이이.”

소현은 해온의 양 볼을 잡고 예뻐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때 바다에서 놀던 정한과 일곱 살 딸 다온이 집 쪽으로 돌아왔다.

“엄마아!”

“다온아아, 추워?”

“웅! 조금!”

소현은 비치타월을 얼른 다온의 몸에 감싸주었다.

“정한 씨, 이거 봐. 해온이가 자기랑 다온이 그린 거. 완전 대박이지.”

그리고 아들이 그린 그림을 남편에게 자랑했다. 물론 자신이 그린 그림은 재빨리 덮어두었다.

“우와, 우리 해온이 멋있다. 여기 사람 얼굴…….”

그렇게 출발해서, 몸, 색깔, 바다, 하늘, 등등 그려놓은 것보다 훨씬 더 깨알같이 자세한 칭찬이 시작되었다.

매우 구체적이었다. 아이가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친절하고, 성취감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상세하게.

아빠의 칭찬을 듣는 동안 해온은 내내 신이 나 있었고, 무척이나 뿌듯한 얼굴이었다.

날이 갈수록 해온의 그림 실력이 느는 건 재능도 큰 바탕이지만 저런 교육도 무시할 수 없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해온의 나이 때부터 정한을 따라 바다에 나가 서핑보드에 올라타기 시작한 다온은 이제 거의 날듯 바다 위를 보드로 활보했다.

확실히 어린아이일 때 몸으로 습득하는 속도가 빨랐다.

매년 여름마다 두 달씩 하와이에 와서 지내는 동안 그렇게 지내왔다.

“앤디 삼촌이랑 애주 이모랑 여기 또 안 와?”

“여기 말고 서울 가면 만나기로 했잖아, 다음 달에.”

“빨리 또 만났으면 좋겠다. 그때는 에이미도 오는 거지?”

“그럼.”

앤드류와 애주는 결혼하여 딸 에이미를 낳았고 현재 뉴욕에서 살고 있었다. 네 살인 에이미는 다음 달에 처음으로 서울에 방문하기로 해서 다온과 해온이 잔뜩 기대를 하는 중이었다.

처음 정한에게 프러포즈를 하겠다며 소현이 해수에게 배웠던 플라워 케이크도 이후로 톡톡히 써먹으며 아이들에게 자주 해주었는데, 에이미가 오면 만들어주자며 다온이 설렘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소현 씨, 이거 해온이 그림 새로 붙일게요.”

정한은 아들의 그림을 벽에 붙이기 위해 가져갔다.

집 안 한쪽에는 가족들의 그림들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다.

그중에는 어머니의 그림도 있었다. 그립고, 또 그리운 이름.

“할무니. 할무니 보고 싶다.”

“나두. 할머니 보고 싶어.”

어느새 다가온 해온과 다온이 손을 뻗어 어머니의 그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머니는 작년에 작고하셨다. 병원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오래 지내다 가신 셈이었고, 편안히 눈을 감으셨다.

결혼식에는 오실 수 없었지만, 정한과 소현의 결혼식 사진을 보시며 곱다 곱다 중얼거리셨다.

소현의 부케 사진을 보며 한참을 들여다보고 또 쓰다듬으셨다.

다온이, 해온이 모두 품에 안아보셨고 ‘할머니’ 소리도 들어보셨다.

왜 그렇게 불리는지 모르시면서도 좋아서 함빡 웃으셨다.

손주들을 예쁘다고 품에 안은 채 훌쩍훌쩍 눈물도 흘리셨다.

아무것도 모르셔도, 전혀 모르셔도, 모든 게 사라져도 마음은 남아 있었다.

맞잡은 손의 온기도 남아 있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따뜻한 눈빛도 남아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리움이 가득 남았다.

“그래, 아빠도 어머니 보고 싶다.”

정한도 가만히 아이들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 어머니의 그림을 쓰다듬었다.

“나두요.”

어머님 보고 싶어요.

소현이 다가와 또 그 위에 손을 겹쳤다.

네 사람의 손이 차곡차곡 포개졌다.

그리움이 쌓이고 또 쌓였다. 서로를 의지하고 아끼고 사랑하며 슬픔이 아닌 웃음도 쌓였다.

“할머니께서 우리 식구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잘 살고 있으라고 하시는 거야.”

다온이 의젓하게 말하고 해온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한도, 소현도, 또 배 속의 새로운 생명도 모두 동의했다.

그날 밤.

다온과 해온을 토닥토닥 재우고 난 소현과 정한은 나란히 누웠다.

까만 밤을 헤치고 멀리서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매년 이맘 때 이곳에 와서 들을 수 있지만 일상적이지 않아 더 소중한 음악이었다.

정한의 품에 폭 파묻힌 채 소현이 조용히 물었다.

“정한 씨, 혹시 그 그림 알아요? ‘잠시 후 행복한 울음을 터뜨렸지(Forward She Started with Happy Cry).’라는 제목. 아까 책에서 봤는데.”

“조지 엘가 힉스(George Elgar Hicks)요.”

“어, 맞아요. 화가 이름은 낯설어서 잘 기억이 안 나는데, 그림 제목이 인상적이었거든요.”

그림을 보면서 얘기하는 게 아니라, 침대 위에 누워서 보았던 그림을 떠올리면서 하는 대화.

검은 밤 속에서 자주 두 사람이 나누는 즐거움이었다.

“집 안이 그려져 있고, 오른쪽에는 문이 있는데 그 문으로 목발인가 지팡이를 짚은 남자가 들어오는 중이잖아요. 왼쪽에는 그 소리를 들었는지 아기를 안은 여자가 막 뛰어나오고 있고.”

“만나기 직전의 모습이었죠?”

“맞아요. 그래서 제목이 ‘잠시 후 행복한 울음을 터뜨렸지’구요. 그게 두 사람이 재회를 해서 여자가 감격해 정말 행복한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보다 더 큰 울림이 있었던 것 같아요.”

아름다운 가족의 모습에 소현은 수없이 감동했다.

그림을 꾸준히 보게 된 이유였다. 따뜻하고 아름다움이 녹아 있는 그림들이 참 많았다.

남편이나 아이들처럼 그리는 데 소질은 없으니 보는 것으로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행복은 어디에나 있었다.

“나한테 가족보다 더 소중한 건 없어요.”

소현은 불의의 사고로 부모를 잃고 혼자가 되었지만, 정한과 결혼해 새로운 가족을 만들게 되었다. 그건 정한도 마찬가지였다.

서로가 서로를 선택해 가족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그 그림을 보는데 가슴이 좀 짠하더라구요. 우리 살아가면서 그렇게 행복한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들이 참 많겠구나, 하구요.”

기다림 끝에 서로를 만나는 그 모든 순간들.

아주 사소한 순간들까지도.

사실은 전부 행복한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들이었다.

“정한 씨, 나랑 결혼해줘서 너무 고마워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한이 깊게 입을 맞추었다.

달콤하고 사랑스럽게.

그리고 한참 후에야 입술을 떼고 소현을 소중하게 감싸 안으며 속삭였다.

“나야말로 소현 씨, 여보.”

“…….”

“이렇게 나한테 와줘서 고마워요.”

순간마다 고마움으로.

순간마다 소중함으로.

그렇게 순간마다 행복한 울음을 터뜨리며.

어제를, 오늘을, 내일을 살아간다.

사랑하기에 아름다운 날들을.

-라르고 웨딩 끝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