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그리움은 깊어지고2017.12.22.
탐미재를 휴관했다. 정한은 마음을 추스른 후로 어머니의 곁을 더 자주 찾았다.
상처는 가라앉고 물이 흐르듯 모든 게 자연스러워졌다.
긴 밤이 이어졌지만 어둡지는 않았다.
빛이 스미어 오히려 따뜻했다.
아른아른, 은은히 비추는 빛이 오래도록 머물렀다.
소현과 같이 어머니의 병원에 들렀던 날, 이모의 집에서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식사를 마치고 정한이 잠시 통화를 하는 사이 이모는 차를 준비하며 소현에게 말했다.
“인연이 참 신기하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녁.
쌀쌀한 바깥공기와 달리 실내에는 훈훈한 기운이 감돌았다.
“하와이에서 그때 언니랑 봤던 아가씨가 지금 이렇게 정한이랑 연이 되어서 같이 있다니. 난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신기해요.”
“저도 그래요.”
이모의 말에 수긍하며 소현도 웃었다.
그 때문에 오해도 생겼었고, 그로 인해 다시 사랑도 하게 되었으니, 인연은 정말 알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정한이, 많이 외로운 앤데……. 이렇게 소현 씨가 옆에 있어주니 얼마나 다행인지.”
창문 너머에서 통화를 하고 있는 정한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이모는 울컥 감정이 치솟는 듯했다.
“병이라는 게 그래요.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집안 망가지는 건 순간이잖아요.”
어머니의 병 앞에 이모가 제 인생을 얼마나 많이 희생해야 했는지,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이만큼 견디고 버텨올 수 있던 시간이었다.
아무리 이모가 원해서 한 일이었더라도, 정한이 이에 느낀 부채감 또한 막대할 것이다.
“우리 정한이가…… 겉으로는 괜찮아 보여도, 속은 만신창이일 거예요.”
이모는 자신보다도 정한을 더 걱정하고 있었다.
그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서로 얼마나 건강하게 사랑하며 살아왔는지를.
“이제 소현 씨가 옆에 있으니까 내가 마음이 좀 놓여요. 우리 정한이, 잘 부탁해요.”
이모는 소현의 손을 꼭 맞잡았다.
닿은 손의 온기로 그 마음이 가득 전해졌다.
“제가 잘해야죠. 이모님, 걱정 마세요. 그리고 말씀도 편하게 하세요.”
“더 자주 볼 테니까, 앞으로 차차.”
눈물이 글썽 맺힌 눈으로 이모는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 ◆ ◇
“꼭 가야 해요?”
소현은 어제까지 부리지 않던 투정을 부렸다.
한파가 몰아닥친 겨울의 끝자락, 공항 출국 게이트 앞이었다.
정한을 들여보내기 싫어 손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괜한 투정이라는 걸 알아서인지 정한은 웃음을 머금고 물었다.
“너무 순순히 보내주면 내가 서운할까 봐 소현 씨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죠?”
“음…….”
들킨 것 반, 그리고 진심 반이었다.
그림 작업을 하러 미국에 간다고 하기에 알았다고는 했는데, 막상 떨어지려고 하니 새삼 심장 반쪽을 뚝 떼어놓는 것처럼 허전해졌으니 말이다.
그래서 여태 아무렇지 않게 정한의 출국 준비를 돕다가, 이제 와서 딴소리를 하는 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기약도 없이 가는 건 좀 그렇잖아요…….”
그야 당장 작업일정이 어떻게 될지 확답을 할 수 없어서라고는 하지만.
물론 다 이해는 하지만.
처음부터 다 알고 보내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뉴욕이 옆 동네도 아니고 보고 싶을 때마다 날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우와.”
정한이 조그맣게 감탄하며, 커다란 두 손으로 소현의 양 볼을 잡았다.
“이 얼굴 못 보고 그냥 갔으면 정말 서운할 뻔했네.”
입술이 삐죽 나온 그녀가 새삼 예뻐 죽겠다는 듯 정한은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나 지금 장난 아니라구요. 정말.”
소현은 자신의 속도 모르고 농담하듯 여유롭게 구는 정한이 얄미웠다.
자긴 청혼하려고 몰래 플라워 케이크까지 배워가며 준비했었는데.
그 노력은 허무하게 다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난데없이 장거리 연애까지 하게 되었으니 앞으로 보고 싶은 마음 어떻게 달래면서 살아간단 말인가.
그렇다고 앞길을 막을 수도 없고.
“얼른 들어가요. 나 진짜 이러다 정한 씨 못 가게 여기 대자로 누워버릴지도 몰라요.”
불퉁하게 내뱉는 소현의 얼굴을 마냥 쳐다보다가, 아까워서 어쩔 줄 모르는 듯 그냥 계속 쳐다보다가, 꿀을 잔뜩 바른 눈빛으로 그렇게 쳐다보다가, 정한은 그녀의 입술에 쪽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다시 쪽, 또 쪽.
지나가던 사람들이 보거나 말거나 길게 쪼오옥.
“……빨리 돌아올게요.”
잠긴 목소리.
“내가 죽을 것 같아서라도 빨리 올 거니까. ……기다려줘요.”
제게로 곧게 향한 눈빛.
소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정한의 허리를 꽉 안았다.
그의 가슴에 얼굴을 폭 파묻고 한숨을 삼켰다.
잠깐의 이별도 견딜 수 없는 듯 아쉽고 또 아쉬워하면서.
그 사랑의 간절함을 마음껏 만끽하였다.
◇ ◆ ◇
“여기 완전 아늑하고 좋네요. 이렇게 꾸며놓으니까 느낌이 또 달라.”
애주는 새 보금자리가 마음에 들었다.
사무실을 새로 옮긴 곳은 웨딩산업의 중심지도 아니고, 호화롭기로 소문난 지역도 아니었다. 그저 적당히 교통이 편하고 접근성이 용이한 곳일 뿐.
대신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지역이라 활기차고, 골목 안쪽 반지하 공간을 사무실로 개조한 곳이라 월세도 저렴했다.
두 사람이 직접 페인트칠을 하고 발로 뛰어 마련한 소품들로 꾸며서 사무실은 이전보다 훨씬 사랑스럽고 편안한 느낌이었다.
소현과 애주가 꿈꾸는 모토는 한결같았다. ‘스토리가 있는 웨딩’, 이제는 그에 조금 더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신부님들 다이어리가 반응이 괜찮은 거 같지?”
“네, 엄청.”
이소미 신부의 결혼식 날짜가 다시 봄으로 잡혔다. 준비가 재개되면서 소현은 그녀의 결혼식 진행사항을 회사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했었다.
형식적인 업데이트가 아니었다.
때로 수필처럼 담담한 어조로 그려내기도 하고, 때로는 그날에 어울리는 명화나 시를 곁들여 올리기도 했다. 글과 사진에는 감성과 애정이 담뿍 묻어 있었다.
인생에서 단 하루뿐인 소중한 날을 준비하는 신랑신부들의 설레는 감정이 곳곳에 가득 느껴졌다.
공장에서 찍어내듯 똑같은 절차로 결혼하기보다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소현과 애주였다.
결혼식의 판타지에 현실적으로 어려운 부분이 있다면 이렇게 진심으로 함께해주는 사람이라도 있는 게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이 신부들의 가슴으로 전해졌다.
선순환이었다.
점점 예약이 늘기 시작했다.
특별한 결혼식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한 명 한 명 모두가 특별하고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걸 잊지 않고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할 때 비로소 진짜 특별한 결혼식이 완성되었다.
소현이 바라고 또 바라던 날들이었다.
앞만 보고 바쁘게 달려가던 때가 아니라, 오히려 걸음을 늦추고 천천히 돌아보자 원하던 순간들이 찾아온 것이다.
그 사이 소현의 내면을 가득 채운 건 모두 사랑, 그 덕분이었다.
“언니, 정한 씨는 언제 돌아와요?”
“아직 정해지지는 않았는데. 곧 오겠지.”
“많이 보고 싶겠다. ……그쵸?”
“웅.”
짧게 마친 대답에 많은 감정이 담겼다.
소현도 새 사무실을 꾸미고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나름 시간을 알차게 보내고 있었지만, 그리운 마음이야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예술작업이라는 게 단번에 맺고 끊는 게 어디 그리 쉬울까 싶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애주는 정한이 화가라는 사실을 모르니, 한국에 정착하기 위해 미국생활을 정리하러 간 줄로만 알고 있었다.
자신이 뉴욕 여행에서 돌아오자 바통 터치하듯 떠난 걸 아쉬워하기도 했다.
“내 걱정하지 말고 이제 너도 얼른 애인 만들어야지. 일 조금만 자리 잡으면 남친 사귈 거라면서.”
“아휴, 전 이제 됐어요.”
“왜, 마음이 바뀌었어?”
애주는 자신의 걱정을 하는 소현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연애는 무슨. 그냥 이대로가 좋아요. 이제 일도 한창 재밌는걸요.”
생긋 웃으며 돌아서는 애주의 마음에는 소현에게 차마 털어놓지 못한 뉴욕에서의 일이 남아 있었다.
여행 가서 만났던 외국인이 있었다.
잠시 스쳤을 뿐인 그가 한국에 돌아오고 나니 왜 이렇게 아른거리는지.
그때는 가까이 다가오려는 남자가 겁이 나 철벽을 치며 얼른 자리를 벗어나고 말았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면 그리 나쁜 남자는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세상 천지에 나쁜 남자라고 얼굴에 쓰여 있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친절한 모습을 가장해 접근하는 범죄자나 바람둥이일 수도 있었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알은체를 하는 모습이 그랬다.
‘그렇게 뺀질거리지만 않았어도…… 참 괜찮았는데.’
그래서일까. 연애상대로 평생 생각도 해보지 않았던 외국인 남자가 이후 계속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이었다.
그 남자가 특별한 걸까. 다른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별로인데, 그 남자만큼은 묘하게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그래봤자 다시 볼 수도, 어차피 인연이 될 수도 없는 사람, 꿈은 꿔서 뭐하나 싶어 애주는 얼른 생각을 떨쳤다.
일이나 열심히 해야지.
그런 의미에서, 여행을 가서 평생의 인연을 만났던 소현이 새삼 대단하고 부럽게 느껴졌다.
“언닌 좋겠어요. 복 받은 거지만.”
“응? 뭐가?”
애주는 소현에게 쪼르르 다가가 팔짱을 끼고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웃었다.
그런 게 있어요, 다정히 소곤거리며.
◇ ◆ ◇
비어 있는 탐미재에 소현이 대신 종종 들렀다.
정한이 부탁한 건 아니었지만 휴관 중이더라도 책이나 나무, 꽃이 잘 있는지 살피고 싶어서 스스로 간 것이었다.
정한의 어머니 병원을 찾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내켜서. 우러나서. 딱 하고 싶은 만큼만.
그래서 알아달라 표현하지 않아도 충분할 만큼만 움직였고 그걸로 소현 자신도 행복했다.
정한의 빈자리를 대신해서 채우고 느끼고 함께 하면서 그를 그리고 기다렸다.
겨울이 지나고 그렇게 봄날은 찾아들고.
커플들의 결혼식으로 부지런히 보낸 주말 밤을 마무리하며 소현은 탐미재에 들어섰다.
고즈넉한 탐미재.
둥근 달이 걸린 나무 아래 평상에 소현은 가방을 내려놓았다.
이틀 전에 들러 청소를 해놓고 가서 평상이나 서가는 모두 깨끗했다.
“하아, 좋다.”
발랑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면 이보다 더한 천국은 없었다.
적당히 기분 좋은 바람, 고요 속에 퍼지는 나뭇잎 소리.
옆에 정한이 있으면 금상첨화겠지만.
이렇게 일상 속에서 여유를 찾게 된 것도, 그리고 급히 서두르지 않고 내실을 다지게 된 것도 모두 정한의 영향이었다.
또한 이곳, 탐미재의 영향이기도 했다.
탐미재 중정에 있는 나무 그늘 아래에서 보내는 시간이 마치 그의 품속처럼 따스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렇게 떨어져 있으니 그와 함께 있던 시간이 꿈처럼 느껴졌다.
그와 나누었던 수많은 약속들이 떠올랐다.
자전거 여행을 가자고 했었다. 마드리드에 있는 소로야의 집에도 가자고 했었다. 키헤이에도 다시 가자고 했고, 많은 날을 함께하자고 했다.
“그러니까 빨리 와요…….”
보고 싶어 죽겠단 말이야.
소현의 한숨이 조그맣게 흩어졌다.
“나 이제 케이크도 완벽하게 잘 만드는데.”
플라워 케이크와 함께 주려고 했었던, 하지만 아직 전해주지 못했던 청혼 반지가 소현의 가방 속에 내내 잠들어 있었다.
그리움은 깊어지고 또 깊어졌다.
◇ ◆ ◇
다음 날 아침.
어젯밤 탐미재에서 집으로 돌아왔던 소현은 아침에 일어나 막 씻고 양치를 하고 나오다 정한의 전화를 받았다.
언제라도 반가운 목소리였다.
“정한 씨. 오늘 작업 끝났어요? 이제 자려구요?”
뉴욕은 지금 밤이다.
- 음, 일단 오늘 작업이 끝나긴 했어요.
“응?”
- 소현 씨는 쉰다고 했죠? 월요일이라서.
이제 주말에는 본식 진행으로 한창 바쁘게 지내다 보니 애주와 함께 월요일 하루나 화요일까지 이틀을 휴일로 보내고는 하였다.
“네, 오늘 쉬어요.”
- 뭐 하면서 쉴 거예요?
“그냥 집에 있는 거죠, 뭐.”
- 날씨도 좋고 구름도 예쁜데, 밖에 안 나갈 거예요?
“어, 오늘 날씨가 정말 좋긴 하…….”
문득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던 소현의 행동이 멈추었다. 화창하고 푸른 하늘에 구름이 두둥실 떠가고 있었다.
뉴욕에서 서울 하늘이 어떻게 보이지?
“정한 씨, 지금 어디…….”
말을 하다 말고 소현은 자신도 모르게 베란다 쪽으로 뛰어나갔다.
저 아래, 거짓말처럼 차에 기대선 정한이 있었다.
전화기를 꼭 쥔 채로, 위쪽을 올려다보며.
못내 그리워 참을 수 없었던 얼굴로.
- 나, 여기 있어요.
눈앞에 진짜 그가 있었다.
소현은 잠옷 차림으로, 머리에는 곰돌이 세안 머리띠를 하고 있는 것도 잊은 채로 당장 뛰쳐나갔다.
계단을 정신없이 뛰어 내려가 정한의 앞에 서자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언제 온 거예요. 내가 얼마나…… 얼마나.”
고작 말아 쥔 주먹으로 정한의 가슴을 쳐봤자 아프지도 않다는 걸 알면서도, 손이라도 닿자 진짜라는 게 실감이 났다.
갑자기 말도 없이 나타난 그가 야속하고, 또 놀랄 만큼 벅차고 행복해 소현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정한이 숨을 삼키며 그녀를 품에 가득 껴안았다.
“나야말로 돌아버리는 줄 알았어요.”
안고 싶었던 만큼 실컷 안으며 인사했다.
견딜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보고 싶었어요.
사랑 앞에 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 ◆ ◇
“가는 곳이 어딘데요……?”
소현은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고 옅게 화장을 하고 나왔다.
처음에는 익숙한 길이라 정한의 어머니 병원으로 향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중간에 다른 쪽으로 빠지고 있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소현은 정한이 운전하는 차 안에서 의아한 얼굴로 재차 물었지만, 도착할 때까지 편하게 있으라는 말만 할 뿐 그는 자세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곧 차는 한적한 도로로 접어들었고 큰 호숫가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와, 여기 너무 예쁘다.”
햇살이 물 위로 부서지며 아름다운 빛이 퍼졌다.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빛을 보며 소현이 감탄하고 있을 무렵, 어느덧 차가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차는 도로에서 안쪽으로 꺾어 들어가 멈추어 섰다.
지대가 높아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어느 저택 앞이다.
현대적이고 세련된 외관이 돋보여 무슨 건축상이라도 받았을 것만 같은 훌륭한 집이었다.
“이런 데가 다 있었네? 근데 여기 좀 비쌀 것 같아요.”
고급 펜션이나 부티크호텔 같은 곳인가 싶었다.
서울에서 이렇게나 가까우면서도 이만한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 있다니, 다음에 애주도 한번 데리고 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잔디밭을 지나 현관 앞까지 와서 정한이 진지한 얼굴로 소현의 손을 잡고 말했다.
마치 다짐을 받듯이.
“내가 너무 앞서 간다고, 소현 씨 입장 제대로 생각 못 했다고 혼내도 좋아요. 다 괜찮아요.”
무슨 말인지 모를 말을 계속 이어갔다.
“진도 안 맞는다고, 내가 너무 빠르다고. 이런 거 조금 황당하다고.”
“…….”
“아무리 뭐라고 해도 정말 다 괜찮아요. 소현 씨가 기다리라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요. 뭐든지 소현 씨가 원하는 대로 다 할게요. 그런데.”
“…….”
“도망만 가지 말아요.”
간절하게, 아주 간절하게 그가 말했다.
소현은 다시 의아한 얼굴로 정한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소리지?
“약속한 다음에 들어가요.”
“……알았어요. 도망 안 가요.”
가라고 등을 떠밀어도 절대 안 갑니다, 안 가요.
소현은 그러니 어서 현관문을 열라는 눈짓을 했다. 그제야 안심한 표정으로 정한이 도어락을 해제했다.
그렇게 문이 열리고.
저택 안에 들어선 소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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