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르고 웨딩-45화 (45/52)

45화– 함부로 하지 마세요.2017.12.04.

소현의 전화벨이 울렸다.

액정에 뜬 번호를 보는 그녀의 낯빛이 밝지 않았다.

“어딘데요?”

애주가 슬쩍 봤지만 저장이 되어 있지 않은 번호였다. 갸웃거리는 애주에게 소현이 대답했다.

“마진혜 변호사.”

“네에? 그쪽 변호사가 왜요?”

“지난번에도 왔었는데 탄원서를 써달라고 하더라고.”

“헐, 무슨 탄원서? 마진혜 위해서 그런 것까지 해달라는 거예요? 미친 거 아니에요?”

애주만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소현도 어이가 없었기에 딱 잘라 거절하고는 전화를 끊은 바 있다.

그런데 어찌나 끈질긴지 변호사가 아니라 거머리 같았다. 그쯤 되면 변호사도 극한직업이려니 싶었다.

휴대전화 진동이 그치는가 싶더니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아예 꺼두려던 소현은 다시 전화하지 말라는 말이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선생님! 은 선생님이시죠? 안녕하세요, 저는…….

“제가 뭘 가르쳐드린 적은 없는 것 같은데요.”

호칭부터 기가 막혔다.

언제 봤다고 선생님이야, 선생님은.

- 아니, 은 선생님. 딱 한 번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제 말 끝까지 들어보시고…….

친절한 변호사도 보았고, 사무적인 변호사도 보았다. 냉철한 변호사도 보았고 정의감이 넘치는 변호사도 보았다.

하지만 이렇게 구질구질한 변호사는 참으로 낯설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아무리 변호사도 서비스직이라지만 이건 너무 가련하지 않은가. 그래봤자 마진혜를 변호하는 사람이니 오죽하련만.

- 오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무 때나 은 선생님 편하신 시간에 찾아주십시오!

웨이터도 아니고.

소현은 혀를 차며 전화를 끊었다.

“뭐래요?”

“지금 골목 앞 카페에 와서 기다리고 있대. 여기까지 들어오진 않겠으니 나와서 한 번만 만나달라고.”

“여기까지 쫓아왔어요? 와, 뭐 그런 안하무인이 다 있어요? 언니가 탐미재에 있는 것도 알아보고 온 거예요?”

“응, 그런가 봐.”

소재를 파악한 건 놀랍지도 않았다.

마진혜를 통해 한 다리만 거쳐도 다 아는 사람들이니까.

첫 통화 이후 전화도 제대로 받지 않는 소현이 어디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변호사는 꽤 고생을 했으리라.

이렇게까지 해서 탄원서를 받으려 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마진혜에게 유리한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해서였다.

그렇다고 하여 피해자에게 가해자의 감형과 선처를 구하는 탄원서를 내놓으라고 하는 건 기가 막힌 일이었다.

하지만 돈을 보고 움직이는 자들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부분이었다.

소현은 적어도 자신이 경험했던, 김유리 변호사와는 너무도 상반된 족속이라 생각했다. 같은 직업군인데도 사람이 어쩜 그리 다를까.

스스로 옳다고 믿는 일, 남에게 해를 주지 않는 일, 약한 자를 돕는 일을 하는 사람은 그런 비굴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법의 보호가 필요한 이들을 위해 진정한 도움을 주는 이는 그렇게 졸렬하게 행동하는 법이 없었다.

돈을 위해 가해자의 편에 서지 않았다. 당당하게 살아갔다. 적어도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응당 그래야만 했다.

그러니 소현에게 있어 그 변호사는 짐승이나 마찬가지였다.

“언니, 같이 갈까요?”

“아니 뭐 굳이. 혼자 갔다 와도 괜찮아, 요 앞이니까 얼른 다녀올게.”

소현은 시간이 오래 걸릴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막무가내로 기다리겠다고 하는 사람을 지척에 그냥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두면 곧 여기까지 쳐들어올 것 같으니 얼굴 보고 물러가라 한마디는 해야 할 것 같았다.

“생강차는요?”

“다녀와서 마신다고 해줘. 빨리 갔다 올게!”

소현은 얼른 탐미재를 나섰다.

겨우 한마디 하고 오는 게 뭐 얼마나 오래 걸릴까 해서였다.

하지만 탐미재가 있는 골목을 빠져 나와 초입에 있는 조그만 카페에 들어섰을 때, 예상치 못한 인물을 만나게 되었다.

◇ ◆ ◇

“아가씨가, 우리 진혜가 그렇게 입술이 닳게 칭찬하던 소현 씨구나. 이리로, 자, 어서 앉아요.”

“아, 네……. 안녕하세요.”

정장을 입은 남자 옆에 체구가 작은 한 중년 부인이 앉아 있었다. 부인은 서둘러 일어서서 소현을 반갑게 맞이했다.

“은소현입니다.”

“알죠, 알죠. 난 진혜 엄마예요. 아유, 어쩜 이렇게 뽀얗고 이쁠까. 뭐 마실래요?”

위화감이 들 정도로 살가웠다.

선입견 때문일까, 변호사의 눈빛이 너무도 교활해 보였다.

저 사람이 만든 자리겠지.

마진혜의 어머니를 전면에 내세웠다. 어떤 전략인지 눈에 빤히 보였다.

기어이 탄원서를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카페 여주인은 소현을 자주 보아왔기에 탐미재 책방 주인의 여자친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주문받은 커피를 준비하면서 소현과 두 남녀를 힐긋 바라보았다.

그 사이 소현은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이 자리에 나온 건, 제 뜻을 분명하게 전하고 싶어서예요. 변호사님이 말씀하셨던 거, 저는 해드릴 생각 없어요. 기대하지 않으셨으면 좋겠고, 또 저한테 더 이상 전화도 하지 않…….”

“커피도 안 나왔는데 뭐가 그렇게 급해요. 숨 좀 돌리고 우리 천천히 얘기해요.”

마진혜 모친은 테이블 위로 손을 올려 덥석 소현의 손을 맞잡았다.

소현은 당황스러운 눈빛을 감추지 못했지만, 그녀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꽉 잡은 손은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힘이 가득 실려 있었다.

억지로 그 손을 빼낸 소현은 조금 물러나 앉았다.

하지만 마진혜 모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작정을 단단히 한 모양이었다.

“우리 딸 후배니까 나한테도 딸이지. 처음 봤을 때부터 남 같지 않았어요. 눈매가 아주 선하고 이뻐서 보기만 해도 기분까지 좋아지네. 변호사님 요즘 아가씨들 중에 이렇게 참하고 인상 좋은 사람 드물지 않아요?”

“그럼요! 제가 막냇동생이 올해 장가만 안 갔어도 당장 소개시켜주고 싶은 그런 분이죠.”

“호호, 그러게요. 나도 아들만 있었으면 며느리 삼고 싶네.”

경계심을 무너뜨리기 위해서인지 무차별 칭찬 공격을 퍼부었다.

하지만 가식적인 칭찬에 소현의 마음이 더욱 차갑게 얼어만 갔다.

이내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소현이 커피에 손도 대지 않고 앉아 있는데, 마진혜 모친은 다시 입을 열었다.

“진혜가 참 곤란한 상황이더라구요. 내가 우리 딸이라서가 아니고, 진혜가 참……, 애가 참 착해요. 지금까지 속 한 번도 썩이지 않고 잘 컸거든요. 아픈 아빠 대신에 몇 년이나 생활비 쓰라고 월급을 통째로 집에 갖다 주기도 했었고. 애가 그렇게 마음이 깊어요.”

“…….”

“그런데 이런 일이 생길 줄 몰랐지 뭐예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따로 없어요. 어떻게 우리 애가 구속까지 돼서…….”

마진혜 모친은 주섬주섬 손수건을 꺼냈다. 이제 슬슬 울 준비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멀쩡하게 잘 다니던 회사도 하루아침에 잘리게 됐어요.”

누구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건지.

갖은 욕을 먹으며 계약까지 줄줄이 파기 당한 건 소현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소현 쪽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는데도.

“거기다가 실형 떨어지면 이제 나와서 무슨 일이나 할 수 있을지…….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소현은 대꾸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 마크 뭔지 하는 사람은 소송을 크게 건다고도 하고.”

마크 윤뿐일까. 소현 쪽에서도 소송을 걸 예정이었다.

형사로도, 민사로도, 마진혜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탄원서는 써줄 수 없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면죄부를 소현의 손으로 어떻게 주란 말인가.

“하루가 멀게 기사는 난리고, 댓글은 입에 칼 문 사람들만 쓰는 건지 끔찍해서 내 볼 수가 없어요.”

타이밍 좋게 마진혜 모친의 눈에 글썽 눈물이 맺혔다.

과장된 몸짓으로 훌쩍 코를 삼키며 손수건을 올렸다. 눈물을 찍어내는 척하면서 소현의 눈치를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아주 잠깐, 소현은 마진혜가 부러워졌다.

엄마라는 이름.

자식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듯, 생판 모르는 이 앞에서도 기꺼이 ‘악어의 눈물’이라도 흘리는 저 마음.

삐뚤어졌을지언정 그건 가족의 사랑이었다.

지금 소현에게는 없는 것.

부재가 뼈아프게 느껴지고 결핍이 고통스럽게 파고들었다.

정한에게 안겨 울기 전까지만 해도 소현은 죽을힘을 다해 참았었다.

인내심이 강해서가 아니었다. 그땐 울음을 받아내 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혼자였기에.

답답해 가슴을 쳐도 소용이 없었기에.

참고 싶어 참은 것이 아니었다. 곁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랬구나, 내가 그렇게 외로웠구나.

엄마와 아빠가 돌아가시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곁을 지키며 우리 딸, 우리 딸, 하고 다정하게 불러주고 안아주었더라면.

조금 덜 아팠을까.

사람들이 날 힘들게 해요, 하고 서러움을 토로하며 목 놓아 울 수 있었을까.

행여 걱정하실까 부모님을 피해 울음을 삼켰더라도 그렇게까지 가슴이 무너져 내릴 듯 아프진 않았을 것이다.

없었다. 지금 제겐 저런 부모가 없었다.

마진혜는 갇혀 있는 와중에도 소현의 가장 약한 곳을 찾아 정확히 찌르고 있었다.

“우리 애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실수였대요, 실수. 사무실에 놀러 갔다가 어쩌다 보니 컴퓨터에서 보게 된 거고, 다 아는 얘기인 줄 알고 그냥 인터넷 게시판에 쓴 거라는데, 나 같은 사람은 뭐가 뭔지도 모르겠고 겨우 그 여배우 결혼한다는 얘길 알게 돼서 말했다는 거 때문에 우리 애가 왜 이런 고초까지 겪어야 되는지…….”

하지만 모정이라고 다 옳은 것만은 아니다.

“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어요. 그건 우리 애가 아니었더라도 누가 말해도 말했을 얘기인데.”

마진혜를 대신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친은 변명을 늘어놓았다.

“다들 알고 있는 얘기, 그냥 막 하잖아요. 소문이야 자고 일어나면 쉽게 퍼지고 그런 거지, 그게 이렇게까지 감옥에 끌려가고 회사에서 잘리고 이럴 일은 아니잖아. ……아니, 내가 우리 애 실수를 마냥 감싸려고 하는 게 아니구요.”

소현은 무감한 시선으로 마진혜의 모친을 바라보았다.

화도 나지 않았다.

그냥 슬퍼졌다.

“잘못한 거에 비해 벌이 너무 크지 않느냐는 얘기예요. 우리 애 인생은 이제 어떻게 해요. 옥살이하고 나와서 취직은 어떻게 하고, 결혼은 어떻게 하고, 나중에 애는 어떻게 낳는답니까. 아무리 그래도 인생을 이렇게까지 말아먹을 정도로 큰 잘못을 한 건 아니잖아요. 아가씨. 아가씨가 조금만 너그럽게 생각을 좀 해줘 봐요. 우리 애 어떡해요, 우리 애.”

마치 마진혜의 인생을 말아먹은 게 소현이라는 듯 원망 어린 얼굴로 사정을 했다.

삼십 대 중반인 딸에게 ‘우리 애’ 소리 붙여가며 동정심을 자아냈다.

“아주머니.”

가만히 듣고 있던 소현이 결국 입을 열었다.

“그래요, 말 좀 해봐요. 아가씨.”

“모두 본인이 저지른 일이에요.”

용서를 구하는 게 먼저가 아니었을까.

선처를 바라는 게 아니라.

그뿐 아니라 마진혜 모녀는 스스로 지은 죄까지 외면하여 소현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고 있었다.

“아가씨, 무슨 말을 그렇게 모질게 해요. 아가씨가 그 일 때문에 힘들었다고 듣긴 들었는데, 그렇다고 감옥에 끌려가고 회사에 잘리고 그렇게까지 힘든 건 아니었잖아요. 이렇게 할 건 아니지.”

“그걸 똑같이 얘기하시면 안 돼요, 아주머니. 저는 그럴 만한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죄가 없긴 뭐가 없어, 그렇게 중요한 비밀이었으면 서류 관리를 그렇게 허술하게 해서는 안 되지, 아무나 다 보게 해놓고 이제 와서 그러면 안 되잖아요. 우리 애는 대체 덫에 걸린 것도 아니고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눈물도, 동정심 자극도 먹히지 않자 마진혜의 모친은 마음이 상한 듯 도리어 소현의 탓을 하기 시작했다.

변호사는 당황한 듯 마진혜 모친의 팔을 잡았다.

이러면 곤란해요, 납작 엎드리셔야죠, 하는 얼굴로.

그제야 이성을 찾은 듯 마진혜 모친은 다시 불쌍한 표정으로 소현에게 말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아가씨, 우리 애 실형 살면 안 돼요. 아가씨가 조금만 애써주면 그렇게 큰 벌 안 받을 수도 있대요.”

“아니, 어머니.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일단 최선을……, 감형은 좀…….”

변호사가 우물우물 덧붙이는 말도 내치며 마진혜의 모친은 벌떡 일어섰다. 소현의 팔을 붙잡고 몸을 숙였다.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까요? 여기서, 내가 꿇을게요. 아가씨, 내가 무릎 꿇을 테니까 나 좀 봐서라도 어떻게 안 되겠어요?”

말리기라도 바랐던 듯 움직임이 그렇게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소현이 가만히 있자 내뱉은 말이 있으니 마진혜 모친도 결국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변호사는 옳지, 하는 얼굴로 보았다.

차디찬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그녀는 소현을 올려다보았다.

애절함과 수치심, 창피함이 뒤섞인 복잡한 표정이었다.

“아가씨, 어른인 내가 이렇게까지 하잖아.”

무릎을 꿇었지만 진심 어린 사과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저 받아내야 할 것이 있으니 어서 내놓으라는 태도였다.

“아가씨가 다시 한 번만 잘 생각해줘요. 응? 내가 이렇게 사정할게.”

서촌 골목 초입의 작은 카페.

통유리로 되어 있어 바깥 도로에서도 안이 훤히 보였다.

사람들이 젊은 여자를 향해 중년의 부인이 무릎을 꿇고 매달리는 모습을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예 멈추어 서서 구경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어나세요.”

당황한 기색도 없이 소현은 낮은 음성으로 담담히 말했다.

이런 모습까지 보고 싶지는 않았다.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어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그걸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걸 얻어내는 상황에 순순히 엮여 들어가기는 싫었다.

“아주머니 이렇게 하셔도 소용없으실 거예요. 괜한 고생 하지 마시고 그만 일어나세요.”

그리고 변호사를 향해 말했다.

“제 뜻은 충분히 전한 것 같아요. 저는 탄원서 써드릴 생각 전혀 없고, 마진혜 씨가 어떤 벌을 받게 될지 이제 전 관여하고 싶지 않아요.”

내 인생에 그만 끼어들라고.

더 이상 오염된 물을 튀기지 말라고.

그렇게 나직한 경고를 하고 일어서려던 때였다.

표독스러운 음성이 가슴을 아프게 때렸다.

“부모 없이 자라서 이렇게 싸가지가 없지.”

무릎을 펴고 일어선 마진혜의 모친이 분한 듯 소현에게 폭언을 퍼붓기 시작했다.

“어디 배운 게 있어야 인정을 베풀고 살 텐데, 가족도 없이 멋대로 지냈으니 이렇게 이기적이겠지. 내가 그걸 깜빡 잊었네. 아가씨 세상천지에 아무도 없고 혼자라지? 가정교육이 중요한데 그거 몰라? 얘기가 통할 줄 알고 이렇게까지 한 내가 바보지, 바보야.”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내 말이 틀려? 가정교육 해줄 부모도 없고 가족도 없으니까 아가씨가 이렇게 매정한 거 아니야?”

어머니, 아버지가 계셨었다.

저렇게 안하무인은 아니었다.

자식의 잘못에 눈을 감고, 도리어 다른 이를 탓하는 분들도 아니었다.

잘못한 일은 끝까지 반성하고 용서를 구할 수 있게 하셨다.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바로 알게 하고 뉘우치게 하셨다.

어질게 살도록 가르치셨다.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고도 하셨다.

적어도 이렇게 자신의 안위를 위해 그릇된 방식으로 남을 속이는 건, 소현의 부모님은 가르친 적 없으셨다.

감히 누가 누구 앞에서 가정교육을 들먹인단 말인가.

“아무리 그래도 엄마 마음이 그런 게 아니야. 내가 오죽하면 딸보다 어린 아가씨한테 이렇게 사정하고 무릎까지 꿇고 하겠어. 아가씨도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하면 나 같은 어른한테 이렇게 싸가지 없이 굴면 안 되지. 저기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한테 다 물어봐, 내가 너무한가, 아가씨가 너무한가. 아가씨 진짜 해도 해도 너무 심해, 이건 경우가 아니지!”

소현의 꽉 말아 쥔 작은 주먹이 테이블 아래에서 바들바들 떨렸다.

숨이 막히고 머릿속으로 피가 쏠리는 기분이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칼날로 심장을 후벼 파는 통증에 소현은 금방이라도 왈칵 피를 토하며 고꾸라질 것만 같았다.

어른이라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감정을 학대하는 이가 더없이 끔찍하고 역겨웠다.

“사람이 어디 세상 혼자 살 수 있는지 알아? 서로 도와가면서 사정도 봐주고 그렇게 사는 거지. 가족도 없이 혼자 산다고 꼭 티를 내요, 티를 내. 무슨 칼로 무 자르듯이 툭툭 쳐내면 똑똑해 보이는 줄 알고. 이따위로 살다가 아가씨도 어디 큰코 한번 다쳐봐, 그때 주변에 아무도 없으면 누가 도와주…….”

그때였다.

“일어나요.”

여린 팔목을 낚아채 일으키는 힘이 느껴진 건.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다 듣고 있어요.”

눈앞에 정한이 있었다.

든든한 가슴이.

내리쬐는 햇살처럼 따듯한 눈빛이.

일으킨 소현의 몸을 당겨 한쪽 품에 꽉 차게 안은 힘이.

모든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여긴 어떻게 왔냐고 물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서러움이 밀려들었다.

“누, 누구길래 어른이 말하는데 끼어들어서 감히…….”

“은소현 씨 가족입니다.”

자신에게 그토록 포근한 품이었지만, 머리 위에서 선선히 흩어지는 그의 음성은 이제까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차갑고 싸늘하기만 했다.

그런 음성으로 그가 가족을 말했다.

“가족? 이 아가씨 고아랬는데 가족은 무슨 가…….”

“남편 될 사람.”

아프게 헤쳐진 소현의 심장이 거짓말처럼 아물었다. 그리고 다시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가족, 그리고 남편.

“그러니 제 사람한테 함부로 하지 마세요.”

“…….”

“화나면 정말 무섭거든요, 제가. ……눈에 보이는 게 없을 만큼.”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