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날카로운 칼끝의 방향2017.11.27.
“해수 부탁으로 왔어요. 아, 케이크샵 신해수 대표요. 미리 연락 받으셨죠?”
“아, 네, 안녕하세요.”
소현은 벌떡 일어나 김유리 변호사를 맞이했다.
일전에 신해수 대표가 혹시 법무상 조언을 구할 일이 있다면 변호사를 소개해주겠다고 했었다.
덕분에 류재언이 부르겠다는 변호사를 고사할 수 있었다.
그는 시종일관 냉랭한 태도였지만 할 수 있는 한 모든 걸 다 해주려는 모습이었다. 고마운 마음과는 별개로, 재언의 도움은 역시 거절이 답이었다.
김유리 변호사는 명문대에 대형로펌 출신으로 로 카페(law cafe)라는 생소한 법률카페를 운영하다가, 현재는 부부가 함께 인권 쪽 업무를 보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신해수의 띠동갑인 남편과 고등학교 동창이라 했으니 사십 대 초반의 나이였다.
하지만 그 나이와 배경이 무색하게도 엄청나게 세련된 도시 미인이 들어섰기에 소현은 조금 놀랐다.
「언니가 업무 일찍 당겨서 처리하고 오후 중으로 찾아간다고 했어요.」
「그분 바쁘실 텐데 무리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저녁시간이 더 나으시면 그때 잠깐 뵈어도 되거든요.」
「저녁엔 시간이 안 돼서 일찍 들르려고 하는 것 같아요. 유리 언니가 딸만 셋이라 저녁에는 빨리 들어가려고 해서요. 집이 아주 전쟁터거든요.」
딸만 셋이라며.
소현은 사기를 당한 기분이었다. 어딜 봐서 애를 셋이나 낳은 몸이라고 볼 수 있단 말인가.
물론 김유리 변호사가 미스코리아 출신이고 엄청난 자기 관리를 하는 스타일이라는 걸 몰랐기에 더욱 놀라울 뿐이었다.
“일단 두 사람 잘 들어요. 세상엔 인간 같지 않은 것들이 넘쳐나거든요. 진짜 입에 담지 못할 쓰레기짓 하는 것들도 정말 많아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해결해야 할 일을 일깨우며 김유리 변호사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마음 단단하게 먹어요.”
소현은 네,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겉만 보고는 몰라요. 주변에 무조건 좋은 마음으로 대하는 사람들만 있는 거 아니니까. 오히려 알고 지내던 사람이 더 위험할 때가 있어요. 면식범이 더 무섭다는 말도 있잖아요, 그쵸?”
면식범이라니.
그게 진정 이 상황에 적합한 단어인지는 모르겠으나 소현과 애주는 일단 동의했다. 김유리 변호사의 포스가 그만큼 강력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그럴 사람이 아닌데 왜 그랬을까 고민할 것도 없고. 내가 혹시 뭘 잘못해서 나한테 이러나 자책할 것도 없어요. 그건 그냥 그놈이 나쁜 놈이고, 그년이 나쁜 년이라 그런 거예요. 남이 나쁜 걸 왜 내 탓을 해. 왜 내가 힘들어야 해. 아니에요, 그럴 필요 없어요.”
애주가 내 말 맞죠, 나도 저렇게 얘기했었죠, 하는 표정으로 뿌듯하게 소현을 보았다.
소현도 한결 마음이 편해진 얼굴로 마주 보고는 끄덕였다.
네 덕분에 이만큼 버텼다면서.
“나한테 한 짓을 애써 용서해줄 필요도 없고, 이해하려고 할 필요도 없어요. 왜 나 스스로를 괴롭혀가며 그 사람을 편하게 해줘요? 누구 좋으라고?”
소현을 흔들었던 아픈 질문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상대방은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도 모르고 뻔뻔하게 구는데.”
법적 조언을 해주러 온 ‘언니’는 그렇게 마음을 단단하게 다져주는 데 더 많은 공을 들였다.
변호를 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을 어루만지는 사람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성껏. 그러나 워딩은 세게.
“하여튼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지들이 인성 쓰레기니까 남들도 다 그런 줄 알고 몰아가지. 그런 사람들이 하는 소리에 휘둘리지 말고, 우리 은 대표님은 이 험한 세상에 정신 똑바로 차리고 제 갈 길 가는 거예요, 알겠죠?”
“네, 똑바로 차릴게요.”
왠지 용기가 생겼다.
내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데, 하고 억울함으로 가슴을 치던 순간들을 힘겹게 지나왔다.
칼이고 창인 줄 알았던 날카로운 소리들은 알고 보니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었다.
결코 자신을 해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날아든 비수는 근처에도 오지 못하고 땅으로 떨어졌다. 무시하면 그뿐인 허상이었다.
진실이 아니기에.
그러니 억울해하지 않아도 괜찮다. 제 잘못이 아닌 것까지 감당할 필요도 없었다.
속사정이 밝혀진다 해도 분명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도 물론 있으리라. 그러나 그들을 안고 가기 위해 스스로를 혹사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계속 잘못을 뒤집어씌우는 사람들도 역시 사라지지 않으리라. 그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의미 없는 발버둥을 치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대로 살아가면 될 뿐이다.
그들은 그들의 끔찍한 지옥에서.
나는 나의 따스한 세상에서.
그렇게.
소현은 다지고 또 다져낸 마음이 더욱 단단해져가는 걸 느꼈다.
김유리 변호사의 조언들도 깊이 와 닿았다.
마진혜가 한 일을 밝혀낸 후에 무너질 멘탈을 미리 염려해 해주는 말들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진실을 밝혀내는 일에 더 곧게 다가갈 수 있었다.
소현과 애주는 김유리 변호사에게 상황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메모를 해가며 들은 김 변호사는 이내 정리가 된 듯 말했다.
“그 사람이 한 일은 형사처분 받게 될 거고 구형이야 검사가 할 몫이니, 은 대표님은 참고인 조사 요구받으면 잘 응하면 돼요.”
“처벌이 가능한 범위 맞나요?”
“그럼요. 보안업체에서 분석 끝낸 자료를 전달 받아야 더 명확하게 말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현재까지 얘기들은 걸로도 충분해요. 특히 ‘그냥 우연히’ 보게 된 자료가 아니라, 일부러 컴퓨터 비밀번호를 해제해가면서까지 접근했던 증거가 확실하게 나오면 그건 문제가 커요.”
“사실 비밀번호가 되게 쉬웠거든요. 사무실 컴퓨터라서, 여긴 애주와 저 둘만 있으니 딱히 신경을 못 썼는데…….”
“비밀번호가 간단해서 쉽게 해제된 건 상관없어요. ‘고의성’이 핵심이에요.”
단호한 어투에 안심이 되었다.
“게다가 로그인을 몇 번 시도했었는지 그 기록까지 다 나온다면 ‘고의성’을 밝히는 건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고, 그건 엄연히 비밀침해죄에 해당해요.”
“아, 비밀침해죄.”
“‘형법 제 316조 1항. 봉함 기타 비밀장치한 사람의 편지, 문서 또는 도화를 개봉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2항. 봉함 기타 비밀장치한 사람의 편지, 문서, 도화 또는 전자기록 등 특수매체기록을 기술적 수단을 이용하여 그 내용을 알아낸 자도 제1항의 형과 같다.’ 쉽게 말해, 자기 집에 배달되어 온 남의 우편물만 뜯어봐도 벌금형을 선고받은 판례가 있거든요. 그러니 일부러 사무실에 잠입해 컴퓨터를 뒤져 비밀을 알아내 유포까지 했다? 이건 뭐 끝장이지.”
손날을 세워 목을 찍 긋는 시늉을 하는 그녀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곧 엿파티 벌어지고도 남겠네요. 누가 억지로 먹인 게 아니라, 지 스스로 주워 먹은 엿으로 아주 잔치를 하겠죠. 불쌍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자업자득이니까. 셀프엿 얼마나 맛있겠어요.”
밀려들 풍파가 눈에 보였다.
“그런 사람과 한 직장에서 같이 지냈었다니 진짜 끔찍해요.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까지 나쁘지. 그래놓고 뻔뻔하게 전화해서 겉으로는 걱정해주는 척까지 실컷 하고. 으으. 생각할수록 소름 끼쳐요.”
애주가 인상을 찡그리며 씁쓸한 듯 이어 말했다.
“그런데 이런 건 실제 처벌수위가 많이 약하겠죠? 흉악 범죄 같은 것도 아니니…….”
그게 더 속상했다. 사실 마진혜가 저지른 짓은 보이지 않는 칼로 목을 베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정신적인 고통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니 과연 그만한 벌을 받을 수 있을지 의문도 들었다.
“하태랑 소속사와 은 대표님이 웨딩플래닝 계약을 할 때, 결혼사실 및 예비신랑에 대한 사항을 발설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있었잖아요. 그리고 그런 사항들을 대외비로써 은 대표님은 컴퓨터에 보관했었던 거고. 그런데 문서를 불법적인 경로로 빼내서 인터넷에 소문을 내듯 유출까지 한 건 명백한 범죄고, 또 그에 따른 막심한 손해가 있었으니 배상까지 확실히 받아내야 하는 일이에요.”
그리고 김유리 변호사는 덧붙였다.
“기본적인 형벌은 나라에서 주겠지만, 우리도 죗값은 물게 해야겠죠?”
“어떻게요?”
“저쪽이 아무리 인간 같지 않아도 우린 교양 있는 인간답게, 법대로, 합법적으로.”
싱긋 웃으며 김 변호사가 이어 말했다.
“은 대표님 힘들었던 거 반의반의, 또 반의반이라도 보상은 받아야지 않겠어요? 형사재판 받는 거랑 별도로, 민사로 걸 수 있는 건 싸그리 다 걸어서 인생 실전이란 걸 보여주자고요. 어딜 감히 불여시같이 농간질이야. 그것도 세상을 상대로.”
다행이었다. 김 변호사가 와주어서.
“아마 형사, 민사 재판으로 고통 받는 거 외에도, 여론 때문에 더 힘들 거예요. 딱 자기가 준 괴로움만큼만 본인도 느껴보라고 하죠. 그쪽은 억울하진 않겠네, 직접 한 짓들이니.”
태산처럼 든든한 언니였다.
말만으로도 보상을 받는 기분이었다. 힘들었던 시간들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모든 게 밝혀지지 않아도 좋다.
세상 모두가 자신을 완벽하게 이해해주길 바라는 건 욕심이다.
이렇게 본의를 알아주는 사람 몇 명만 곁에 있어도, 인생은 더없이 값지고 아름다웠다.
나락으로 곤두박질치지 않도록 굳게 손을 잡아주고 사랑으로 가득 채워주는 정한.
믿음이 꽉 찬 눈빛으로 늘 곁을 지켜주는 애주.
그리고 다가와 도움을 주고, 마음을 써주는 사람들이 있으니 충분했다.
그것만으로도 넘치게 행복했다.
이대로 좋았다.
감사하고, 또 감사하며 소현은 다가올 시간을 준비했다.
이제부터 괴로움은 온전히 죄를 지은 자의 몫이어야만 했다.
◇ ◆ ◇
결혼설의 시작이 애초에 실체도 없는 입소문일 뿐이라 인터넷상의 유포자를 찾는 것이 사실상 의미는 없다고 했었다. 처벌 여부가 모호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판세는 단번에 바뀌었다.
소현의 컴퓨터 접속기록, CCTV 기록 등의 증거를 토대로, 결혼설과 ‘마크 윤’에 대한 신상을 처음 퍼뜨린 이를 찾아 처벌해야 하는 이유가 명확해졌다.
점점 모든 퍼즐 조각들이 하나로 딱 맞춰져갔다.
날카로운 칼끝의 방향이 돌아갔다.
바로, 마진혜에게로.
하지만 어리석음이 눈앞을 가렸기에 당사자는 자신을 옥죄어오는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여기야! 진혜야, 여기!”
“꺄아, 안녕! 너네 되게 일찍 왔다?”
마진혜는 고등학교 동창 세 명과의 여행을 위해 공항에 도착했다. 출국장이 있는 층에서 만난 그녀들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진혜는 안 된다고 하더니 그래도 어떻게 시간을 잘 뺐네?”
“당연히 가야지.”
모두 사회인이라 날짜를 맞추기가 어려웠지만 이번에는 이직 중이라, 혹은 전부터 계획한 휴가로, 이래저래 상황들이 잘 맞아떨어졌다.
친한 무리 중 세 명이 가능한 일정이라, 함께 싱가포르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이었다.
그중, 한창 결혼식 성수기인 가을철이라 절대 못 갈 거라고 했던 마진혜가 어찌 된 일인지 갑자기 일정을 조정해 함께 가겠다며 나섰다.
미리 예약해둔 비행기나 호텔 등을 모두 인원을 추가하거나 변경해야 했지만 다들 번거롭게 느끼지는 않았다.
속사정을 알 리 없는 친구들은 그저 마진혜의 합류를 기쁘게만 반겼다.
“다행이다. 마진혜 없으면 재미가 없단 말이야.”
“당연히 내가 있어야지. 근데 너네 사실대로 말해. 너희끼리 가서 내 욕만 실컷 하다 오려고 그랬지?”
“오구오구, 우리 진혜, 그랬구나아, 귀가 간지러워서 왔구나아.”
“그러게, 진혜 빼고 우리끼리 갔으면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고 왔을 텐데! 좋은 기회 놓쳤네, 아깝다!”
다들 마진혜의 괜한 염려가 귀엽다는 듯 가볍게 농담하며 받아넘겼다.
물론 마진혜는 진심이었지만.
지나치게 일찍 온 탓에 체크인 카운터도 아직 준비 중이라 그녀들은 줄을 선 채로 못다 한 수다를 이어나갔다.
가장 가까운 친구 사이의 편안함. 그리고 여행을 앞둔 설렘이 기분 좋게 섞여 다들 들떠 있었다.
“뭘 그렇게 봐? 일할 거 많이 남았어?”
중간중간 마진혜가 휴대전화 창을 계속 확인하는 걸 본 한 친구가 고개를 쑥 내밀었다. 마진혜는 얼른 휴대전화를 내렸다.
“아니, 그냥. 내가 얘기한 후배 말이야. 시끄러운 일에 말린 게 걱정이 되어가지고. 아직도 기사들이 난리네.”
마진혜가 넌지시 꺼낸 말에 화제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아, 맞아. 너희 회사에서 일하다 나갔다던 그 후배?”
“진짜 깜짝 놀랐어.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어놓은 애가 진혜 바로 밑에 있던 후배였다니. 세상 정말 좁다.”
하태랑과 억만장자의 결혼, 그리고 그걸 퍼뜨린 웨딩플래너의 이야기는 요즘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도 가장 핫한 주제였기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아는 사람이 엮여 있으면 친분이라는 미명 아래 많은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으니 관심은 더욱 증폭되었다.
그녀들도 마진혜를 통해 실시간으로 ‘그 후배’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어왔었다. 더불어 다른 곳으로부터 들은 말들을 끊임없이 옮기기도 했다.
“도는 소문에 의하면, 마크 윤이 가만히 있진 않을 거라고 하던데.”
“하긴, 엄청나긴 하던데. 손채린까지 하루가 멀다 하고 인터넷에서 떠들어대니 마크 윤도 열 받겠지, 안 받을 수가 있나.”
“맞아. 그 여자도 처음에는 조금 불쌍했는데, 지금은 이거 이용해서 다시 어떻게든 나와보려고 애쓰는 게 너무 눈에 보이니까 좀 짜증나더라. 슈퍼관종인가 봐.”
“그럼 그 결혼 완전 파투난 거지?”
핑퐁처럼 주고받은 말들은 마진혜에게로 가서 멈췄다. 뭔가 확실한 대답을 기다리는 듯 반짝거리는 눈빛을 보니 마진혜는 마치 자신이 공신력 있는 매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웨딩플래너 때문에 그 사달이 났으니……, 결국 깨졌지 뭐.”
마진혜의 대답에 다들 거봐, 거봐, 안 한댔지, 나라도 안 한다, 하며 말을 이어갔다.
“그 후배 직업 바꿔야겠다. 웨딩플래너가 아니라 웨딩브레이커로.”
깔깔 웃음이 섞였다.
“어우 야, 우리 진혜 기분 나쁘겠다. 후배라고도 부르지 말자. 직장 후배가 뭐 언제까지 후배야, 회사 나간 지가 벌써 몇 년이라는데.”
“그래, 웨딩브레이커 좋네. 걔 입방정 때문에 몇 사람 인생이 망한 거니? 하여튼 그런 셀럽 상대하면 지가 뭐라도 된 양 설쳐대는 것들 보기 싫더니, 걔가 딱 그 짝이었네.”
마진혜는 손 안 대고 코 푸는 심정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친구들이 알아서 은소현을 밟아대니 그 실체가 눈앞에 보이지 않더라도 제법 후련했다.
마치 인터넷상에서 보이지 않는 창칼에 난도질당하는 걸 지켜볼 때처럼.
그것만으로도 개운하고 고소하기까지 했다.
어차피 자신이 잘못한 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은소현이 말하고 다니지 않았다는 증거는 또 어디 있나. 어디서든 충분히 말하고 다닐 수도 있는 사실들이었다. 그래서 마진혜는 애초에 없는 얘기는 하지도 않았다.
사실에 헛소문이 더해진 건 자신의 입을 통한 게 아니었다. 제멋대로 부풀린 다른 사람들 탓이지.
거짓은 스스로마저 속였다. 무엇이든 진실로 탈바꿈할 수도 있다.
마진혜는 점점 더 그것들이 모두 은소현이 진짜 떠벌린 것인 양 느껴졌다.
자신의 얼굴과 심장이 얼마나 보기 싫게 일그러져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마진혜는 콘크리트 같은 거짓을 들이부어 죄책감을 덮어버렸다.
“그런 애 어떻게 데리고 있었냐. 진혜 너도 진짜 고생했겠다.”
“너 모르는구나. 진혜가 걔 진짜 잘해줬었잖아. 근데 배은망덕한 것이 고객도 빼앗아가고, 무슨 기획서 내고 그런 것도 대표한테 가서 자기가 원래 했던 거라고 해서 진혜한테 개망신 주고. 기껏 다 가르쳐서 키워놨더니 그 아래 후배들한테 지가 더 생색내고.”
물론 전지적 마진혜 시점으로 구성한 이야기들이었다.
“헐, 정말? 아주 미친년이었네. 그러니 이런 대형사고도 치지.”
“너무 그러지 마. 걔도 뭐 그러고 싶어서 그랬겠어. 그래도 겉으로는 되게 온순해 보였는데.”
마진혜는 은근히 은소현을 감쌌고 친구들은 앞다투어 말했다.
“진혜 니가 너무 착해서 그래. 못된 년들한테는 잘해줘 봐야 호구만 된다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말 안 듣고 정 주고 마음 주고 그러더니.”
“에휴, 마음이 너무 착해도 세상 살기가 힘들다니까. 그 말 몰라? 요즘에는 병신보다는 썅년이 살기 편하다고.”
“맞아. 착하게 살 필요가 없어.”
호호호, 쉴 새 없이 웃음이 퍼져나갔다.
분명 누군가의 불행을 이야기하는 중인데도 마치 잔칫집처럼 요란하고 흥겨움이 가득했다.
“암튼 잘됐다. 그런 애들은 아주 제대로 혼이 나봐야 해. 마크 윤이나 하태랑 회사에서 걔 가만 안 두면 좋겠다. 손해 본 것도 많을 텐데 다 물어내라고 하면 어마어마하겠네.”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그러게 누가 그렇게 입을 함부로 놀리고 다니래? 이렇게 될 줄도 모르고 떠들고 다녔나 봐, 멍청하게.”
“그렇게 머릿속에 뇌 대신 우동사리를 넣고 다니니까 남자도 생각 없이 막 꼬시고 다니지.”
체크인 카운터가 열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대화는 점점 가지를 치고 살이 붙어나갔다.
“헐, 남자까지 후리고 다녔어? 가지가지 한다.”
마진혜는 조용히 장작만 넣을 뿐이었다. 불은 알아서 타올랐다.
“응, 지난번에 나 진혜랑 같이 저녁 먹으러 갔다가 실물도 봤었잖아. 맞지? 걔였지?”
“맞아. 그때 네가 우리 회사 앞으로 왔을 때 레스토랑에서 봤던 애.”
마진혜의 맞장구에 친구는 신이 나서 말을 보탰다.
“고객이었던 신랑 꼬셔서 결혼 파투날 뻔해, 전남친한테 들러붙어 꽃뱀처럼 벗겨먹어, 게다가 이젠 지보다 어린 남자까지 꼬셔서 옆에 딱 끼고 돌아다니더라고. 뭘 먹였는지 잔뜩 홀려놨던데, 보기엔 그렇게 안 생겨가지고 아주 여시가 따로 없나 보더라. 우리 그때 재수 없어서 밥도 안 먹고 그냥 나왔잖아. 그걸 다 보고 견디고, 진혜가 보살이야, 보살.”
남을 헐뜯는 데 감정과 시간을 소모했지만 그것이 정의라 믿었다.
은소현이 벌을 받는 것이 바로 그 정의를 구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믿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들이 시끌벅적 떠들며 체크인이 시작된 창구 쪽으로 안내 받아 가려던 때였다.
웬 남자들이 앞을 막아섰다.
순간 불길한 기운을 느낀 마진혜의 몸이 오싹해졌다.
“뭐예요. 왜 새치기를 해.”
아무것도 모르는 친구들은 기분 나쁜 듯 비켜가려는데, 남자들 중 하나가 정확히 누군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마진혜 씨.”
자신의 이름이 이토록 소름 끼치게 들리는지, 그녀는 태어나 처음 알았다.
태연한 듯 눈에 힘을 주며 떴지만 손끝이 가늘게 떨려왔다.
“서에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나온 경찰들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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