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르고 웨딩-36화 (36/52)

36화– 삐뚤어진 악의(惡意)2017.11.03.

앤드류는 소파에 앉아 잡지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위층에 있는 정한이 궁금해서 점점 더 몸이 근질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직전에 그리던 그림을 마무리하고 있을까, 아니면 새 그림을 시작했을까.

사실 무엇이든 상관없다. 라르고가 그리고 있다는 게 중요하니까.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면서 항상 작업을 할 수 있게끔 집과 작업공간을 완벽하게 세팅해두었던 스스로가 대견할 지경이었다. 물론 라르고의 그림에서 나오는 비용으로 충당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마음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기특한 자신을 속으로 칭찬하며 혼자 뿌듯해하다가 소현이 주방으로 향하는 걸 보고 앤드류는 벌떡 일어나 따라갔다. 그녀가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올라가자.”

앤드류는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정한 씨 내려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면서요.”

“못 기다리겠어. 궁금해서.”

“기다리겠다고 한 지 십 분도 안 된 것 같은데.”

“변덕이 내 매력이야. 빨리 올라가자.”

웍에 다진 야채들이 들어 있는 걸 보니 소현은 요리를 하던 모양이었다.

“난 올라갔다 왔어요.”

인덕션 전원을 누르며 하는 말은, 난 됐으니 너 혼자 가라는 소리였다. 앤드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전원을 끄고 소현의 등으로 갔다.

뒤에서 어깨를 잡고 밀자 소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한 발 한 발 앞으로 갔다.

“같이 가야지. 올라가자, 얼른.”

앤드류는 그녀의 뒤에 숨어 잠입하겠다는 호기로운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밀지 말아요. 갈게요, 가.”

등 떠밀린다가 딱 맞는 표현이었다.

황당하지만 거절은 하지 못하는 소현이 앤드류에게 밀려 계단을 올랐다.

덩치는 산만 한 남자가 조그맣게 몸을 말고 숨어서 살금살금 발을 옮기는 모습이, 마치 토끼 뒤에 숨어 호랑이굴에 몰래 들어가는 사자와도 같았다. 누가 누구 뒤에 숨는 건지.

“나한테 왜…….”

의지하느냐는 소리겠지.

하지만 앤드류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말했잖아. 한은 작업할 때 들어오는 거 안 좋아한다니까. 근데 넌 특별하니까.”

“그러다 싫어하면 어떡해요.”

괜히 소현도 말소리를 낮추어 소곤거렸다.

“너 들어오게 해줬다며. 싫으면 싫다고 면전에다 얘기했을 거야. 아닐 거 같지? 부드러운 얼굴에 속지 말라니까? 알고 보면 매정한 구석이 있다고. 너 탐미재 허락 안 해줬던 걸 생각해봐.”

“그러네요.”

“한은 싫은데도 억지로 참고 나중에 딴소리하는 그런 사람 아니야.”

앤드류의 말에 앞에 선 소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한의 앞에서는 계산할 필요도 없다는 걸 잊었던 모양이다.

언제나 배려와 존중으로 사람을 대했고 거절할 때도 예의가 있었다. 겉과 속이 다르거나, 앞과 뒤가 다르지도 않았다.

오랜 시간 곁에서 지켜봐서 알지만, 서정한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믿을 수 있도록 해준 사람이었다.

담백하고 깔끔하기에 저의를 파악해야 할 부담도 없었다. 그러니 대하는 데 편안했다. 온갖 의도와 계산으로 가득 찬 세상 안에서 그는 나무 그늘처럼 시원하고 편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작업실에 올라와 소현의 등 뒤에서 서서 정한을 보았을 때, 앤드류는 온몸에 스치는 미세한 전율을 느꼈다.

……진짜 돌아왔구나, 라르고.

앤드류는 벅찬 마음에 긴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심호흡을 하며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먹먹해졌다.

「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

「앤디는 왜 숨을 쉬어?」

「……어?」

「나한테는 그 질문이랑 비슷해.」

살아 있으니까.

다른 이유가 없다고 했다.

흐르는 강물 위로 바람결에 떠가는 배처럼 그는 그저 살아 있으니 그릴 뿐이라고 했다.

그런 정한이 몇 년이나 그림을 놓았으니 그의 기준으로는 숨을 쉬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괜찮다 한들 정말 괜찮을 수 있었을까. 고민 하나 없어 보이는 정한의 삶도 깊게 들여다보면 온통 상처투성이였던 것을.

게다가 현재진행형이다. 날마다 잔인한 현실과 마주해야만 했다. 피할 수도 없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더 이상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머니를 향해 웃고 또 웃으면서, 정한의 속은 이미 헤질 대로 헤져 있었다.

그러니 정한이 다시 붓을 잡은 사실이 앤드류는 벅차고 기뻤다.

단순히 돈이 되는 작가고 작품이라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정한이 다시 살아 숨 쉬는 순간이 왔음을 알았고, 가슴 뛰게 행복해졌다.

서로 다른 인종과 나이, 각자의 삶을 건너 기적처럼 만난 인연, 친구의 이름으로.

“앤디, 왔어?”

앤드류를 발견한 정한이 웃으며 인사했다.

가만히 서서 바라보던 앤드류는 터벅터벅 걸어가 팔을 뻗어 정한을 힘껏 안았다.

“어어, 물감…….”

“그게 대수야?”

정한의 작업용 에이프런에 잔뜩 묻은 물감이 자신의 명품 셔츠와 바지에 데칼코마니처럼 묻겠지만 앤드류는 개의치 않았다.

그를 그저 더욱 힘껏 안을 뿐.

코끝이 찡했다.

“앤디, 숨 막혀…….”

“좋아서 그래, 내가.”

정한을 놓아주지 않고 꽉 안은 채 기쁜 마음을 계속 표현했다. 그러다 두 사람의 사이를 파고들어 양옆으로 가르는 조그마한 손이 있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소현이 하하, 하고 어색하게 웃으며 두 남자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쯤 하면 되신 것 같은데……, 물감도 묻고……, 정한 씨가 숨도 막힌다고 하고……. 하하…….”

떨어져 나온 정한의 앞을 막아서며 소현이 귀 뒤로 머리를 야무지게 꽂으며 말했다.

“무엇보다 이제 제 남자라서요.”

“설마 너 지금 질투를 하는 거야? 나한테?”

어이가 없어진 앤드류가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하지만 사랑꾼 소현의 대답은 더욱 가관이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에 질투를 느끼는데요.”

내 남자는 내가 지킨다는 자세로 입술을 앙 다문 소현 앞에서 앤드류는 기가 찬 표정으로 정한을 보았다.

“……그만 보도록 하자.”

괜히 봤다.

정한은 소현이 마냥 사랑스럽다는 듯 머리카락을 정돈해주며 청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를 보니 앤드류의 마음 깊이 회의감이 밀려왔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여길 와서 이걸 보고 있나.

“나 갈게. 좋은 시간 보내…….”

돌아서는 앤드류를 두 사람이 붙잡으며 웃었다.

“앤디, 장난이에요.”

“그래, 가긴 어딜 가.”

장난은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잡아주니 봐줬다는 심정으로 앤드류는 새침하게 몸을 돌려 의자에 앉았다.

“나 아침으로 먹을 거 준비하고 있었거든요. 내려가 있을 테니 얘기해요.”

자리를 피해주려는지 소현은 싱긋 웃으며 말했고, 정한이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

“소현 씨가 무슨 아침 준비를 해요. 하지 말아요. 힘든데.”

“에이, 괜찮다니까요. 누가 보면 엄청 아픈 줄 알겠네.”

“그래도 그냥 쉬어요. 소현 씨 또 쓰러지면 어떻게 해요.”

둘이 또 뭐 하는 건지.

“안 쓰러져요. 내가 쓰러지면 정한 씨만 힘들 텐데. 이제 그럴 일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요.”

“내가 내려가서 해줄게요. 소현 씨는 그냥 앉아 있…….”

“야!”

급기야 앤드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깜짝 놀란 두 사람이 초식동물처럼 연약한 얼굴로 동시에 돌아보았다.

으르렁거리던 앤드류가 돌연 현자가 되는 시간이었다.

“……너희 다 나가 있어. 나 혼자 있고 싶어.”

사랑에 빠진 너희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니, 외로운 내가 죄인이지 싶었다.

◇ ◆ ◇

“그렇게 좋아?”

결국 소현이 아침식사를 준비하겠다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캔버스 앞에 서서 그림을 보던 앤드류는 심하게 화사한 정한의 얼굴이 새삼 신기했다.

데이트는 많이 했던 앤드류도 진짜 사랑에 빠지는 게 어떤 감정인지 잘 몰랐다. 저렇게까지 좋을까 얼른 이해되지 않으면서도 부러운 마음이 더 컸다.

“좋지.”

안 그래도 잘생긴 얼굴이 더 활짝 피어났다. 정한이 저렇게까지 행복해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그의 작품이 처음으로 천문학적인 금액으로 팔려나갔을 때도 마치 남의 일처럼 덤덤하게 ‘그런 일도 있구나.’ 했었는데.

대단한 마법이었다, 사랑은.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앤드류는 다시 캔버스로 시선을 돌렸다.

정한이 뉴욕을 떠나기 전까지 그리고 있던 그림이었다. 다시 그리는 걸 보니 마무리를 할 셈인 듯했다.

캔버스 안에 쏟아지는 빛은 아마도 정한의 안에 자리한 은소현이리라.

그녀와의 사랑은 정한에게 영감을 주고 있는 게 분명했다.

“서울로 돌아가야지. 이건 마무리 단계니까 조만간 완성 보러 올 날을 잡아야겠고.”

가로 3미터가 넘는 대형 작품, 캔버스 크기로는 500호였다.

그러니 작업하던 걸 서울로 가져가서 이어 그릴 수도 없었다. 결국 뉴욕에 돌아와 완성까지 하겠다는 말에 앤드류는 기쁜 음성으로 물었다.

“정말? 완성하려고?”

“그래야 되지 않을까.”

정한의 말에 앤드류는 깊이 안도했다. 그가 다시 붓을 잡은 건 일시적인 충동이 아니었다. 소현에게 고마운 마음마저 들었다.

“뉴욕에 왔다 갔다 하면서 그릴 수도 없을 텐데.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은 있고?”

물론 갑작스럽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작업을 계속하겠다면 혹시 생각해둔 바가 있을까 해서 물었다.

뜻밖에도 정한은 이미 청사진을 그리고 있었다.

“돌아가서 서울 근교에 작업실을 만들까 해. 어쨌든 한국에는 계속 있어야 하니까.”

병원에 계신 어머니 때문이다.

“탐미재는?”

“계속해야지. 지금처럼 탐미재에 있으면서 그림은 작업실에 가서 그리면 되니까. 이제 돌아가면 본격적으로 준비해봐야겠어.”

정한의 생활에 큰 변화가 오고 있었다.

그게 다 사랑 때문이라니. 얼마나 큰 위력이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림만 봐도 느껴졌다.

이전에는 그저 섬세하고 온유한 느낌이었다면, 지금 정한이 그리고 있던 작품은 좀 달랐다. 오늘 새로 손댄 부분들로 완전히 달라진 그림이었다.

잔잔함 속에 격정이 느껴졌다.

새로 덧입힌 색들이 눈부신 빛처럼 쏟아지며 벅찬 환희를 드러냈다.

여전히 라르고였지만, 전혀 다른 라르고였다.

“이거 공개되면 반응이 꽤 좋겠다. 이전과는 좀 다른 느낌이기도 하고 전보다…….”

“안 내놓을 거야.”

“어?”

앤드류가 놀란 얼굴로 정한을 돌아보았다. 이 아까운 걸 왜? 하는 표정으로.

하지만 팔짱을 낀 채 그림을 바라보는 정한의 눈빛에 감히 질문을 보탤 수가 없었다.

이내 나직한 음성으로 그가 말했다.

“선물하고 싶어.”

처음이었다.

라르고임을 밝힌 것도, 작업실에 들인 것도 처음.

그리고 정한이 그림을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어 하는 것도 모두 처음이었다.

커다란 아치형 창문으로 가득 쏟아지는 햇살에 사랑의 기운이 가득하였다.

◇ ◆ ◇

“그런데 은 실장은 어디 갔나 봐. ……어디 갔어?”

마진혜는 그냥 지나가는 말인 것처럼 슬쩍 물어보기로 했다.

“아, 언니요? 뉴욕에 가 있어요.”

“뉴욕? 왜? 무슨 일 있어?”

잠시 멈칫한 애주가 대답했다.

“그냥 쉬러 갔어요.”

“무슨 뉴욕이 휴양지도 아니고, 거길 쉬러 가?”

“여름휴가도 제대로 못 갔고, 여행할 겸 간 거예요.”

대답을 듣는 마진혜는 어딘가 모르게 찝찝했다.

애주가 얘기하는 게 사실의 전부는 아닐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뭘 감추고 있긴 하네.

왠지 자신을 경계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누가 뭘 어떻게 한대? 오바하고 있어.’

차를 준비하는 애주의 등을 노려보던 마진혜는 그녀가 돌아서자 표정을 바꾸어 웃어 보였다.

“고마워. 어머, 쿠키 귀엽다.”

마진혜는 칭찬을 하며 애주가 테이블에 내려놓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런데 자기만 사무실 지키고 있는 거야? 은 실장은 뉴욕에 놀러 갔는데.”

“저는 틈틈이 잘 놀아요. 소현 언니가, 아니, 우리 은, 대표, 님이 맨날 고생이죠.”

티 나게 ‘은 대표’ 호칭에 힘을 주는 애주를 보고 마진혜는 속으로 웃었다.

고개를 돌리면 한눈에 금방 들어올 정도로 작은 규모의 사무실이었다.

고작 이거 하나 내놓고 사업자에 이름 올려놨다고 대표라니, 애잔했다.

“우리 차 실장 고생이 많겠다. 환경이 열악한 거야 뭐 그렇다 쳐도, 맨날 상담만 하고 실제로 계약 이어진 건 많이 없다면서. 실속도 없이 바쁘게 일만 하고…… 그러다 몸이라도 축나면 어떻게 해. 차 실장 딱 봐도 여리여리해서 몸도 약할 텐데. 많이 힘들지?”

“아뇨. 저 통뼈예요.”

애주는 생긋 웃어 보였다.

세상살이가 편하고 좋기만 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보통 이렇게 공감해주면 사람들은 괜히 서러움 폭발해서 자기가 뭐가 힘들고, 또 뭐가 힘들고 늘어놓기 마련이었다.

마진혜는 사람의 속을 보듬는 척 그렇게 찔러놓고서 흘러나오는 불행의 산물을 흥미로운 시선으로 보고는 했다.

때로는 본인의 약점이 되기도 하고, 다른 이를 향한 공격이 되기도 하는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늘어놓는 사람들을 한심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마진혜는 안심이 되기도 했다.

마치 남의 불행이 제 삶의 결핍을 채워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힘들다는 사실에 저도 모르게 안정감을 느꼈다.

그런데 자신이 아무리 관심을 가져주고 걱정을 해줘도 이렇게 경계심을 보이는 사람이 간혹 있다.

많이 힘들겠다는 걱정에 딱 잘라 자긴 통뼈라 괜찮다고 대답하는 차애주가 그중 하나였다.

전에는 안 그렇더니만 은소현의 뒤를 따라다니더니 제 앞에서 자주 말조심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기분 더럽게.

안 그래도 은소현이 선을 긋는 걸로는 으뜸이었는데.

그럴수록 마진혜는 애주에게 더욱 친절해졌다.

“다들 걱정해. 회사 그렇게 나갔으면 더 잘되어야 하는데, 몇 년째 고생만 하는 것 같다고. 차 실장이 이런 데서 고생할 사람이 아닌데.”

“고생하는 거 없어요. 어떻게 첫술에 배부르겠어요. 하다 보면 잘되는 날도 오겠죠.”

은소현이 뭐라 흉보고 욕했겠지 싶었다. 분명했다.

자신을 조심하라느니, 말을 섞지 말라느니.

그러지 않고서야 애주가 저렇게까지 마음의 담을 쌓다시피 하진 않을 것 같았다. 신입 때부터 자신을 얼마나 잘 따르던 차애주였던가.

근거 없는 추측은 마진혜의 마음속에서 사실로 굳어졌다. 그런 생각에 빠질수록 자신의 기분만 더욱 나빠진다는 걸 인식하지 못했다.

“그런데 여기, 건물은 삐까뻔쩍한데 사무실은 좀 그렇다. 여기만 그렇지? 월세는 얼마나 해?”

“저는 잘 몰라요.”

“모를 수가 있나……. 흠, 기획사 사무실 있는 건물이라 연예인은 많이 보겠네, 그치? 여기 배우 중에 누가 제일 잘생겼어?”

모른다는 뻔한 거짓말이 스스로 찔렸는지, 애주는 자신이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나오자 얼른 대답을 했다.

“그렇지는 않아요. 기획사 있는 층들은 일반 사무실 있는 층이랑 엘리베이터를 아예 따로 쓰니까요. 어쩌다 로비나 주차장에서 가끔 마주칠까, 그 정도죠.”

“엘리베이터도 따로 있구나.”

“네. 우리도 기획사 사무실로 들어가려면 아예 1층 가서 엘베 갈아타고 올라가야 해요. 거긴 층마다 보안도 철저하고.”

마진혜는 애주의 말에 흥미로운 사실이 있어 되물었다.

“거긴 왜 가는데?”

“네?”

“여기 ‘유인엔터’에 자기네가 갈 일이 뭐 있는데?”

약간 당황한 듯 애주의 눈이 살짝 커졌다.

“거기 대표가 여기 건물주잖아요. 관리하는 사람들도 다 그 안에 있고. 저희는 월세 내는 입장이니 갈 일이 종종 있기는 하죠. 뭐 이런저런 일들로.”

마진혜가 그렇구나,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애주의 눈빛에도 안도감이 어렸다.

뭘 저렇게 긴장하는 거지. 물어보지 못할 걸 물어본 것도 아닌데.

이 정도는 친한 사람들끼리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부분들 아닌가.

자신의 질문들이 상대방에게 얼마나 중압감을 주는지 알지 못하는 마진혜는 괜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이어 물었다.

“그러니까 은 실장 전 남친이 ‘유인엔터’ 대표면서 여기 건물까지 갖고 있는 거였어? 대단하다, 정말. 전보다 훨씬 더 성공한 거 아니야?”

“……그렇죠.”

“헤어지고 일만 더 해서 그런가. 그 남자는 결혼은 안 한대?”

“그것까진 제가 모르구요.”

“하긴, 은 실장이 워낙 예쁘고 똑똑하니까 잊기 힘들기도 하겠다.”

마진혜는 웃으며 차를 또 한 모금 마셨다.

“은 실장 얼마 전에 레스토랑에서 보니까 다른 남자 만나더라. 너무너무 잘생겼던데, 나이는 좀 더 어린 것 같더라고. 차 실장도 봤어?”

“아, 네.”

“이젠 연하까지 따라다니고, 남자복도 진짜 많아. 부럽다. 뭐, 내가 남자라도 은 실장 같은 여자 그냥 안 두긴 할 것 같지만. 근데 그래도 전 남친 보기 좀 아깝지 않을까? 인물에, 배경에, 능력에, 어디 하나 흠잡을 수 없는…….”

“요즘 대세는 그쪽이 아닌걸요. 남자는 역시 영 앤 핸썸, 앤 스윗이 진리죠.”

“그래, 뭐……. 스윗하긴 하더라.”

그때 애주의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은 그녀의 얼굴이 자못 심각해졌다.

“……얼마나요? 아아……, 네, 네. ……네, 내려갈게요.”

짧은 통화 끝에 전화를 끊은 애주가 서둘러 일어서며 말했다.

“지하주차장에서 후진하다가 누가 제 차를 박았대요. 내려가야겠어요.”

“어머, 어떡해. 많이?”

“모르겠어요. 내려가서 봐야 알 것 같아요.”

“그래, 갔다 와. 주차장 사고는 그렇게 심하진 않더라. 다들 천천히 움직이니까.”

경황이 없는 애주가 휴대폰과 지갑을 챙기며 물었다.

“팀장님은……?”

애주가 무슨 뜻으로 묻는지 당연히 알았다. 하지만 마진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소파에 붙인 엉덩이를 절대 떼지 않고 말했다.

“다녀와. 난 여기 있을게. 왜, 내가 같이 가줄까?”

“아니에요. 금방 다녀올게요.”

더 길게 이야기할 새도 없기에 애주는 서둘러 사무실에서 뛰어나갔다.

마진혜는 아까보다 훨씬 여유로운 시선으로 사무실 안을 둘러보았다. 여기 이렇게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생길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뜻밖의 기회였다. 마진혜는 소현의 책상 쪽으로 다가갔다. 서류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책상 서랍이 잠겨 있는 걸 보니 그 안에 다 넣은 모양이었다.

“누가 뭘 어쩐다고 이렇게 꽁꽁 숨겨놔?”

조그맣게 투덜거리며 마진혜는 소현의 컴퓨터 전원을 툭 눌렀다.

사고 처리를 하러 갔으니 애주가 바로 올라오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 여유가 조금 있었다.

「그야, 제가 지금 진행하는 신부님이, 원장님 특별 제작 드레스를 입으실 예정이니까요.」

그때 소현이 쏘아올린 작은 공이 지금 마진혜를 컴퓨터 앞에 앉아 있게 하였다.

“궁금해서 그러는 거야. 그냥 궁금해서. 내가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게 아니라.”

부팅이 끝나고 시스템 계정 로그인 화면이 떴다.

“그게 뭐 별거라고 말도 안 해주면서 잘난 척만 하는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궁금해서.”

스스로 그렇게 읊조리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죄책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살짝 보기만 하는 거라고.”

연이어 로그인 비밀번호가 틀렸다는 메시지가 뜨자 마진혜는 슬슬 부아가 치밀었다. 결국 신경질적으로 0을 네 번 눌렀을 때, 거짓말처럼 잠금이 풀리고 바탕화면이 떠올랐다.

“와, 0000이었어? 바보네, 바보야. 똑똑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소현이 조금만 더 똑똑했다면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까.

사무실에 옛 상사가 들어와 몰래 컴퓨터를 켜고 로그인을 해서 자료 폴더를 뒤지고 메일을 열어보는 일이, 조금만 주의가 깊었더라면 정말 생기지 않았을까.

“헐, 뭐야…….”

과연 소현이 바보라서, 똑똑하지 않아서, 부주의해서 생긴 일이었을까.

아니면, 애주가 혼자 사무실 밖을 나갔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을까.

“이게 진짜야……?”

아니.

쏘아올린 작은 공도.

그저 공이 날아가는 모습만 보고도 기분이 상한 이가 있다는 사실도.

감추어왔던 비밀이 허무하게 풀려버린 순간도.

모든 건 소현이나 애주의 탓이 될 수는 없었다.

“신부가…….”

어떤 상황에서든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하태랑이었어?”

그건 삐뚤어진 악의가 반드시 책임져야 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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