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꿈같은 황홀에 하염없이2017.10.23.
벗은 어깨가 수줍게 떨렸다. 붉은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흩어졌다.
진주알처럼 매끄러운 살결 위로 고운 눈물이 한없이 내리었다.
서로 더 깊게 매달리고 서로 더 짙게 새겼다.
오롯이 하나가 되던 순간에 그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바라보고 또 바라보며, 쓰다듬고 또 쓰다듬으며, 입을 맞추고 또 맞추었다.
격정 앞에 무너져 녹아내릴 때 그녀의 온 세상이 정한으로 가득했다.
이토록 충만한 밤.
몹시 사려 깊은 밤.
서러움 없는 눈물이 그저 환히 빛나던 밤.
소현은 그를 품고, 정한은 그녀를 품은 채, 꿈 같은 황홀에 하염없이 물들었다.
애틋한 눈빛에 젖은 시간.
오직 사랑.
모든 것은 그 밤, 달빛 아래 나릿하게 흘러갔다.
◇ ◆ ◇
“……지금은 하나도 안 아파요, 나.”
차마 눈을 뜨지 못하고 소현이 소곤거렸다.
자신의 이마를 짚는 따스한 손길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얼마나 염려하고 있는지.
“일어났어요?”
웃음기가 배인 음성.
더 이상 아프지 않다는 소현의 말에 안심하면서도, 잠에서 깬 그녀가 마냥 사랑스럽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네.”
“그런데 눈은 계속 그렇게 감고 있을 거예요?”
맨살에 닿는 이불을 꼭 쥔 채로 소현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눈을 꽉 감은 어둠 속에서도 그의 눈빛이 느껴졌다. 지금 그가 자신을 어떤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을지 소현의 눈앞에 그려졌다.
바로 가까이에서 들리는 목소리로, 그 역시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고 아직 옆에 누워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침이 되자 괜히 부끄럽고 민망했다.
덮쳐도 자신이 덮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막상 열기가 피어오르자 짙은 숨결에 잠식당하고 말았다. 숨이 막히고 눈빛에 녹아버렸다.
침대 위에서 제게로 거침없이 곧게 다가오던 정한은 평소와 또 달랐다.
깊어가던 밤, 그는 강인하고 아름다웠다. 소현의 심장을 세게 쥐고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토록 뜨겁던 밤이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에 소현은 아직까지 가슴이 터질 듯 뛰었다.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예쁘다, 눈썹.”
움찔, 하고 어깨가 떨렸다.
소현의 눈썹에 그의 손가락 끝이 닿았기 때문이었다.
겨우 손끝인데도, 견디기 어려울 만큼 강한 전류가 스치듯 배었다.
“코도 예쁘고.”
눈을 뜨지 못하는 소현을 놀리기라도 하듯, 무방비한 얼굴 위로 정한의 손가락이 느리고 부드럽게 유영했다.
“입술도 예쁘고, ……귀도 예쁘고.”
눈썹으로, 코로, 입술로, 귀로, 손끝을 따라 뜨겁고 짜릿한 전류가 옮겨갔다. 닿은 건 일부인데 온몸이 미칠 듯 움찔거렸다.
눈을 감고 있으니 귓가에 닿는 정한의 음성이 더욱 선명했다. 몸의 감각은 세밀하게 살아나 그녀를 괴롭혔다.
참지 못한 소현은 짧은 숨을 터트리며 눈을 떴다.
그 순간 깨달았다. 차라리 눈을 감고 있을걸.
옆으로 누운 정한이 한 손으로는 머리를 받친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한 손은 제 얼굴에 그림을 그리는 붓처럼 섬세히 닿아 있었다.
옅은 미소를 담뿍 머금은 그의 얼굴은 온 정성을 들여 빚고 깎은 듯 완벽히 아름다웠다.
아침 햇살 아래 푸른 나뭇잎처럼 맑고 청쾌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뿐일까. 밤사이 나른한 색기까지 더해졌다.
사랑하는 여자를 끝까지 몰아붙여 절정을 안기던 힘이 그에게 가득히 배어 있었다.
그렇게 소년의 미소와 남자의 기운이 묘하게 어우러지는 정한이 바로 코앞에, 한 침대에 있었다.
“나, 아무래도 전생에 우주를 구했나 봐요.”
소현은 겨우 입술을 열어 말했다.
너무 좋아서.
이 행복이 너무도 과분하게 느껴져서.
서정한이라는 남자가 자신을 향해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서.
“소현 씨는…….”
정한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부드럽게 넘기고 쓸어주며 대답했다.
“지금 날 구했죠.”
낮게 깔리는 음성이 가슴을 울리며 스며들었다.
“내게 와줘서.”
“…….”
“날 살게 했으니까.”
오직 소현만이 자신을 숨 쉬게 하는 듯 정한이 깊게 입을 맞추었다.
이 순간.
사랑을 알고 사랑을 하고 사랑을 나누는 이 순간이 인생이었다.
◇ ◆ ◇
“와……. 클림트 그림 처음 봐요.”
소현은 하얀 원피스를 입고 서 있는 소녀의 그림 앞에 멈추어 서서 설레는 목소리로 말했다.
실제로 처음 본다는 뜻이었다.
미술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어디서든 몇 번쯤 듣고 보았을 이름, 구스타프 클림트.
클림트라면 황금빛 화려한 그림이 먼저 떠오르는데, 지금 보고 있는 작품은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스타일은 딱 클림트였지만 색감이 너무도 사랑스러운 분홍, 보랏빛이다.
소현도 본 적 있는 그림이었다.
누군가의 공책에서, 누군가의 우산에서, 인터넷이나 책의 스쳐가던 한 페이지에서.
그렇게 어디선가 보았던 유명한 그림의 실물을 마주하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생생하게 보이는 클림트의 사인을 실감할 수 없었다. 클림트의 손이 직접 닿았을 바로 그 흔적을 지금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있다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클림트를 후원하던 부부의 딸이에요.”
소현의 관심이 머문 그림 앞에서 정한이 조용히 말해주었다. 1912년에 그려진 ‘메다 프리마베시(Mada Primavesi)’였다.
“아, 실제 아이의 초상화였어요?”
“네.”
초상화에 대한 선입견이 있어서인지, 딱딱한 자세가 아닌 점이 의외였다. 클림트 특유의 분위기가 그대로 살아 있어 확실히 독특했다.
“엄청 야무져 보여요. 자세 좀 봐. 완전 걸크러시.”
소현은 그림 속 소녀가 귀엽다는 듯 미소 지었다. 다리를 어깨 넓이로 벌리고 선 채 당당한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소녀는 무척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아홉 살이었던 소녀가 100년의 시간을 거쳐 지금도 그림 속에 선연히 살아 있다니, 그 앞에 선 소현은 묘한 기분이 들며 더불어 가슴도 콩닥거렸다.
정한의 눈에는 그림을 바라보는 소현의 눈빛이 마치 꿈꾸는 듯 아름답게 비춰 보였다.
그림은 하나도 모르겠어요, 하고 어색해하던 모습이 옛일처럼 느껴졌다. 보는 미술에도 낯설어하던 소현은 어느새 가까이 다가서 있었다. 정한이 원했듯 마음으로 고스란히 느끼면서.
오늘 오전, 느지막하게 일어난 두 사람이 다정히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바람을 쐴 겸 밖으로 나와 택시를 타고 도착한 곳이 바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었다.
여기 오니 뉴욕에 와 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정한이 어디 갈까요, 물어보고 소현이 그림 보러 가고 싶어요, 대답했다. 그리고 한 시간도 안 되어 지금 이렇게 클림트의 그림 앞에 서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유명한 미술관에는 처음 와본다며 소현은 눈을 반짝거렸다. 신기하다는 얼굴로 미술관에 들어선 그녀는 끝도 없이 나오는 예술품들을 설레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정한 씨는 모마(MOMA: Museum of Modern Art, 뉴욕현대미술관)도 여러 번 갔었죠? 거긴 유명한 작품 뭐 있어요?”
메트로폴리탄 구석구석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둘러보고 낯익은 그림을 발견하면 정한에게 물어보며 얘기를 듣던 소현은 뉴욕의 또 다른 미술관에도 관심을 비쳤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도 있고, 모네의 ‘수련’도 있어요. 앤디 워홀의 작품도 있고.”
보면 바로 알 만한 작품들이 그곳에도 많다.
“소현 씨, 모마에도 가고 싶어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더 많은 작품들을 보길 원하고 궁금해했다. 의욕이 충만한 소현이 너무도 귀여웠다.
정한은 그녀를 어디든 데려가고 싶어졌다. 묻는 모든 것에 대답해주고, 보고 싶은 모든 걸 보여주고 싶어졌다.
“가요. 언제 갈까요?”
“여기만 보고 바로 갈 수 있어요?”
몇 시간을 둘러봤으니 피곤해할 법도 한데, 뉴욕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으니 하루에 다 보길 원했다. 어차피 다른 관광을 하지 않으니 못 갈 것도 없다.
정한 역시 소현과 함께 미술관을 돌아보는 일이 새삼스럽게 즐거웠으니.
“그래요. 바로 가요.”
“정한 씨 덕분에 난 오디오 가이드 같은 것도 필요 없고. 옆에서 정한 씨가 다 얘기해주니까 더 재미있고 신기한 것 같아요. 어, 그…… 이렇게 설명해주는 사람을 뭐라고 하죠?”
“도슨트(docent)요.”
전시장에서 관람객에게 작품과 작가에 대해 설명을 하고 안내를 해주는 전문가를 지칭했다.
“맞아, 그거요.”
소현은 벅찬 듯 들뜬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도슨트에 버금가는 실력을 갖춘 사람과 함께 밀착관람이라니.
“생각해보니 나 완전 운 좋은 거 있죠. 만나도 어떻게 이런 남자를 만났을까.”
“내가 도슨트로 좋은 거예요?”
“뭐, 그게 전부는 아니죠.”
다 알면서 괜히 그런다는 듯 소현이 살며시 웃었다. 동시에 조그마한 주먹이 정한의 팔을 아무렇지 않게 콩 쳤다.
무척이나 친근한 몸짓이었다. 이렇게나 가까워졌구나, 느껴질 만큼.
하지만 사실 정한의 속은 완전히 편한 것만은 아니었다. 때때로 소현을 안고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침대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어도 좋을 것 같았는데, 자신의 욕심만으로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몇 번이고 더 입 맞추고, 오래도록 품에 안고 싶은 걸 꾹 눌러 참고 밖으로 나와 함께하는 시간도 물론 소중하기는 했다.
그러니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소현과 같이 있는 순간순간이 전부 좋다.
괜찮은 척 지내왔지만 그 시간들이 실은 힘들었나 싶었다. 외로웠기도, 버겁기도 했던 것 같다.
눈부신 미소를 마주하니 이제야 비로소 비어 있던 마음 한쪽이 온전히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림 보는 게 이렇게 재밌는지 몰랐어요. 서울 돌아가면 정한 씨 책방에서 다른 책들도 더 봐야겠어요.”
깊어지는 자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현은 온통 그림 생각뿐인 듯했다.
아마 그녀도 힘들었던 지난날을 위로받는 기분이 드는 모양이다.
메트로폴리탄에 모마까지 돌아보고 하루 내내 수많은 그림들을 접한 터라 지칠 법도 하건만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 중에도, 다시 집에 돌아와서도 소현은 여전히 설레는 눈빛이었다.
쏟아지는 빛 같고, 생동하는 새싹 같았다.
그녀를 향해 느리게 차곡차곡 쌓은 사랑이 자꾸만 폭발할 듯 가슴을 두드렸다.
“나, 소현 씨와 같이 가고 싶은 곳 있어요.”
“응? 어디요?”
“마드리드.”
“……마드리드면, 스페인이죠?”
정한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보자, 보자. 마드리드…….”
소현은 신이 난 얼굴로 휴대전화를 들어 검색을 했다. 알아가는 재미에 흠뻑 빠진 모습이었다.
선생님에게 묻기 전에 미리 조사하고 준비하는 학생처럼 즐거운 의욕이 느껴졌다.
“프라도 미술관? 여기?”
소현은 ‘마드리드, 미술관’으로 검색하면 제일 먼저 나오는 결과를 정한에게 보여주었다.
“프라도 미술관보다는 덜 유명하지만 가보고 싶던 곳이 하나 있어요. 호아킨 소로야(Joaquín Sorolla y Bastida)라는 스페인 화가가 있는데, 소로야의 집을 미술관으로 꾸며놓은 곳이에요.”
정한은 소현의 휴대전화를 받아 검색을 해주었다. 화면에 소로야의 그림들이 채워졌다.
“와, 예쁘다…….”
곧 소현이 휴대전화 속으로 들어갈 듯 집중하며 그림을 넘겨보기 시작했다.
부드럽고 따스한 터치라 보기에도 편안한 그림들이었다.
“바다에서 그린 그림이 많네요. 되게 예뻐요.”
“맞아요, 소로야의 회화는 유독 해변을 배경으로 한 게 많아요.”
벗은 아이와 우아한 여자, 바다에 한껏 어우러지는 이들의 모습.
그리고 주변을 가득 채운 활기찬 공기, 바람과 물결, 빛의 흐름까지 그대로 느껴졌다.
“정한 씨가 좋아하는 화가예요?”
소현의 질문에 그렇다고 할 수도,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늘 떠나 있던 아버지를 이해할 수도,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던 것처럼.
“……보고 싶은 그림들이죠.”
돌려 대답했다.
한 번쯤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던 그림, 하지만 지금까지는 스스로 발걸음하지 못했던 곳.
소현과 함께라면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서 보고 싶었다.
아버지는 왜 그렇게 소로야를 좋아했었는지.
소로야를 보면 아버지를 온전히 이해할 용기가 생길 것도 같았다.
“그림 속 이 사람들도 실제 인물들이에요?”
“……이 사람은 아마 소로야의 아내일 거구요, 그리고 이 그림에는 딸들, ……소로야는 딸 둘에 아들이 하나였대요. 딸들을 모델로 한 그림들이 많아요.”
“엄청 가정적이었나 봐요. 아빠가 아내랑 아이들을 이렇게 예쁘게도 그려주고. 이 가족은 너무 좋았겠다.”
그래서 소로야의 그림을 대하는 정한의 마음은 더 쓸쓸했었다.
세상은 모순으로 가득하였다. 아버지가 향해 있던 화가는 누구보다 가정을 아꼈고, 아버지는 정작 본인의 가족을 외롭게 했었다.
그건 아버지의 탓이 아니었다. 어머니도 아버지를 야속해했을지언정 원망하지는 않았다.
같은 그림을 보고도 서로 다른 꿈을 꾸듯, 정한은 그의 그림에서 따스한 가족을 보았고 아버지는 그저 아름다운 바다만을 보았을 뿐.
그리하여 정한에게 소로야는 어딘가 채워지지 못한, 가슴 아린 이름이었다.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한.
하지만 소현은 분명 자신과 같은 걸 보고 있었다.
그리움을, 외로움을, 쓸쓸함을.
구멍 난 빈자리를 메우고 싶은 아이처럼 그림 속에서도 사랑을 찾고 또 가족을 찾았다.
벼랑 끝에서도 절실히 살기를 원했던 것처럼, 소현은 자신과 꼭 같았다.
“그래요, 정한 씨. 우리 나중에 같이 가요, 마드리드에.”
소로야의 집.
붉은 벽 가득 걸린 소로야의 푸르고 하얀 그림.
시원하게 부는 바닷바람.
그곳으로, 함께 가게 되기를.
◇ ◆ ◇
밤이 깊었다.
새어든 달빛에 들뜬 잔열이 스몄다.
좋았다, 이대로 그냥. 소현은 말할 수 없이 좋았다.
이렇게까지 행복해도 되는 걸까.
솜사탕에 파묻힌 듯 포근하고 달콤한 이불 속도, 등 뒤에서 자신을 품에 가득 끌어안고 잠든 정한의 단단한 팔도, 안기고 또 안겨 어디로든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옭아맨 듯한 기분도.
무엇 하나 갑갑하지 않았다. 가득히 채워지는 느낌뿐이었다.
숨김없는 사랑에, 계산 없이 다가드는 걸음에, 어찌할 바 모르게 행복했다.
누군가를 아프고 힘들게 했다는 죄책감으로 이따금씩 가슴이 따끔거렸지만, 류재언의 마음을 알고 난 후 소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미안한 감정이 사랑은 아니기에.
외면도 이렇게 아픈 일임을 절감하며 소현은 눈을 감았다. 소중한 건 지금 이 순간이다.
얼마나 흘렀을까.
새벽인 듯 푸른빛으로 젖은 침실.
문득 잠이 깬 그녀는 무거운 눈꺼풀 사이로 옆을 돌아보았다.
“어…….”
없었다. 침대 위에 정한은 보이지 않았다.
소현은 몸을 일으켜 앉아서 침실을 둘러보았다.
씻고 있나 싶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적요한 공기만이 가라앉아 있었다.
“아직 좀 어두운데, 이렇게 일찍 어디 갔지……?”
불을 켜지 않아도 주변이 보일 만큼의 새벽빛은 있었다.
소현은 옆에 있던 로브를 맨살 위에 걸치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잠시도 떨어져 있기 싫은 사람처럼 자연스레 정한을 찾아 움직였다.
눈을 비비며 침실에서 나왔지만 넓은 집 어디에도 정한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소현은 고개를 살짝 들며 어딘가로 시선을 두었다.
위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푸른 새벽빛과는 다른 온도의 빛깔이 따스하게 퍼져 내리고 있었다.
“위에 있구나.”
소현은 걸어가 계단 아래 섰다.
빛이 퍼지는 위를 올려보니 마치 새로운 세상으로 이어지는 통로처럼 신비롭고 몽환적인 느낌이었다.
세게 끌어당기는 듯한 어떠한 힘까지 느껴졌다.
홀린 듯 소현은 한 발 한 발 계단을 올랐다. 왜인지 모르게 두근거렸다.
책을 좋아하는 정한인데도 아래층엔 책장이 보이지 않았었다. 위층을 서재나 휴식공간처럼 꾸며놓았을 거라 짐작했다.
잠이 오지 않아 이쪽으로 와서 쉬고 있나 보다, 하면서 마지막 계단에 올랐을 때.
꺾어진 벽을 돌아서 드러난 공간 앞에서 소현은 얼어붙은 듯 멈추어버렸다.
“……!”
심장이 가쁘게 뛰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앤드류의 갤러리에서 처음으로 라르고의 대작을 마주하고 섰을 때처럼, 소현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날아갔다.
일어선 사람의 머리를 뛰어넘을 만큼 높고도 거대한 스케일의 캔버스가 가장 먼저 눈에 보였다.
그 앞에 선 남자가 물감 묻힌 붓을 강하게 눌러 찍고, 또 섬세하게 그어 쳤다. 그런가 하면 송곳 같은 걸 들어 물감 자국을 긁어대고, 멈추어 서서 날카롭게 바라보기도 했다.
인기척조차 느끼지 못한 채 캔버스에 몰입한 남자의 손에서 끊임없이 색이 퍼졌다.
빛이 부서지듯, 별이 쏟아지듯.
라르고의 화풍이었다.
미완성인 그림이지만 알 수 있었다. 두말없이 분명 라르고였다.
소현은 이건 꿈이라 생각했다. 도저히 현실일 수 없었다. 말이 되지 않았다.
너무도 낯익은 뒷모습이라서.
“저기…….”
겨우 입술 밖으로 소리를 내었다. 캔버스 앞에 선 남자가 몸을 돌렸다.
느리게 도는 세상처럼 아주 천천히 그의 얼굴이 보였다.
“정한 씨……?”
믿을 수 없지만 사실이었다.
압도적인 캔버스를 배경으로, 붓을 쥔 정한이 돌아보았다.
그 자체가 그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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