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침실이 하나라는 건2017.10.16.
재언의 심장이 부서졌다.
소현이 다른 남자에게 달려가 안기는 모습이 두 눈에 아프게 박혔다.
무수히 많은 감정들로 가득 차오른 그녀의 얼굴을 똑똑히 보고 말았다.
너무도 풍부한 빛의 향연.
그의 가슴속은 그만 폭탄이 떨어진 듯 단숨에 폐허가 되어버렸다.
분명 자신의 앞에서는 지극히 건조한 눈빛과 말투로 일관하던 소현이었는데.
「아니, ……안 될 것 같아. 네가 어떻게 해도.」
「류재언. 미안한데, ……나 너랑 이렇게 같이 있는 거 이제 좀 불편해.」
그렇게 건조하게 말하던 소현이 벅찬 표정으로 그 남자에게 바람처럼 달려갈 때, 그때의 심정은 충격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그런 단어만으로는 표현해낼 수 없는 강렬한 통증이 심장을 헤집고 조각조각 찢어놓았다.
누구도 원망할 수 없었다. 이 순간, 세월과 인연의 흐름이 재언에게는 한없이 잔인하게 닥쳐들었다.
오랜 날, 그녀를 아프게 했던 대가였다.
무너지고 또 무너져도 모자람만이 가득했다.
◇ ◆ ◇
문이 열리고 류재언이 나왔을 때, 정한은 각오를 하고 왔지만 막상 그의 얼굴을 보자 알 수 없는 불편함에 사로잡혔다.
그녀의 지나간 사랑.
어찌 괜찮을 수가 있을까.
사랑하는 이를 독점하고 싶은 욕망은 정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모든 일을 제쳐놓고 여기까지 정신없이 달려온 것이겠지.
자신을 본 류재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어떻게 여길 왔냐는 듯 바라보던 그와 대치하고 있을 때다.
잠깐의 시간이 억겁처럼 흐르고 찰나의 침묵을 깬 건 소현의 음성이었다.
“내 짐 왔어?”
새하얀 가운에 젖은 머리.
이제 막 씻고 나온 듯한 차림의 그녀가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정한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소현만이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그 공간에 류재언과 소현, 단 두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소현이 자신을 보는 애절한 눈빛, 그것만이 정한에게 의미가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듯한 얼굴로, 환희의 빛이 만연한 눈으로, 그리움의 기운을 담뿍 담은 몸으로, 소현이 달려오는 순간이 꿈처럼 느껴졌다.
온 세상의 빛이 품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안겼다.
사랑이었다.
다른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이 오직 제 가슴을 그득히 채웠다.
“소현 씨 찾으러 왔어요.”
걱정이 돼서, 보고 싶어서, 생각이 나서, 그리워서, 궁금해서, ……가슴이 터지는 줄 알았다.
“이제 더는 못 기다려요, 난.”
미치게 사랑한다는 말이었다.
세상 어느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다는 결의, 모든 걸 걸고 지키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녀의 젖은 머리를 손으로 받친 채 그 품에 폭발할 것 같던 마음을 깊게 묻었다. 아찔하게 멈추어 있던 정한의 시간이 비로소 다시 흘렀다.
그때 소현이 몸을 살짝 떨어뜨렸다.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누군가 복도에 캐리어와 가방을 가지고 와서 헛기침을 하고 있었다.
“아, 내 짐.”
소현이 머물고 있던 곳에서 옮겨온 짐인 듯했다.
그녀는 가방을 보더니, 옷을 입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듯 황급히 물러섰다.
방금 씻고 나온 상황에서 목 아래 뽀얀 살이 드러난 가운 차림으로 그에게 안겼다는 사실이 못내 민망해진 모양이었다.
자칫 앞섶이 벌어질까 불안한 듯 꼭 여민 채로 소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옷 좀 갈아입고 나올게요.”
마음 같아서는 옷이고 뭐고 그냥 소현의 손을 붙잡고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다.
이 정도도 기다릴 수 없을 정도로 인내심이 완전히 증발해버렸으니까.
하지만 두 남자 사이에서 난처한 표정을 짓는 소현을 무시하며 억지로 끌고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한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입고 나와요. 여기 있을게요.”
딱 이만큼만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소현의 손을 붙들고 나가는 순간, 기다림은 이제 끝이라는 상황을 그녀도 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금방 나올게요.”
소현이 아담한 캐리어를 가지고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남은 건 류재언과 자신, 그리고 불편하게 감도는 공기와 서걱거리는 침묵의 바람이었다.
여기는 그의 집이다.
정한은 자신이 류재언의 공간에 찾아온 불청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기에 그의 앞에서 제게로 달려와 안겨버린 소현을 두고 승리감 따위를 느낄 수는 없었다.
류재언의 기분이 어떨지 모르는 바가 아니기에.
동정은 아니었으나 그가 아직 소현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정한의 심장까지 따끔거리며 아팠다.
경쟁은 싫었다. 누군가를 밟고 올라가 우위를 차지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남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도 정한은 자리를 지키며 살아왔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싶은 만큼만 하면서.
그러나 때로는 존재만으로도 누군가에게는 박탈감을 줄 수 있고 상처를 줄 수도 있다. 결코 스스로 의도한 것이 아니라 해도.
“여긴 어떻게 알고 왔습니까?”
나직하게 묻는 류재언의 음성에 정한은 천천히 답했다.
“소현 씨가 쓰러진 갤러리에 문의해서 도움을 받았어요.”
더 자세히 말할 생각은 없었다.
자신이 제이 라르고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는 이상 설명할 수 없는 경위였다.
어차피 서로에게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다. 소현이 어디 있더라도 정한은 반드시 찾아갈 것이고, 류재언은 결코 이를 반기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변함없으니까.
“의사가 올 예정입니다. 은소현, 아직 움직일 수 없어요.”
핑계였다.
자신을 보고 소현은 뛰어오기까지 했었는데, 이곳을 나갈 수 없을 정도는 분명 아니다.
“어떻게 해서든 제가 데려갑니다.”
이제는 상처가 된다 해도 할 수 없다.
중요한 게 무엇인지 잊지 않고 있다. 류재언을 아프게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소현의 마음을 온전히 얻는 게 우선이었다.
그녀와 마주 보며 사랑을 하고, 눈빛과 마음을 나누며 행복해지고 싶었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이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은데 대체 누구의 사정을 봐준단 말인가.
“병원에 데려가든, 쉬게 하든, 서울에 돌아가든, 이제부터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마세요.”
매정하게 벽을 쌓아올리는 음성에 류재언의 눈빛이 흔들렸다.
서울에서 소현을 데리러 그녀 집으로 갔을 때, 건물 1층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 다 쓰러질 듯 약해 보였던 눈빛, 지금이 그때와 꼭 같았다.
그 역시 사랑 앞에 나약해지고 마는 남자인 것을.
그때는 왜 그랬을까.
「먼저 약혼하자던 나쁜 새끼가! 알고 보니 애초에 나랑 결혼할 마음, 털끝만큼도 없었고!」
소현을 처음 만났을 때 듣게 되어 정한은 많은 걸 알고 있었다.
10년을 만났다면서.
서로의 아름다웠던 시절에 꼬박 함께 있었다면서.
미래를 약속할 정도로 가까웠다면서.
그녀를 버리고, 그렇게 아프게 하고, 이제 와 놓지 못하겠다고 하면 어쩌란 말인가.
정한은 숨을 무겁게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공간 안에서 나른하게 부유했다.
곳곳에 배치된 회화와 조각품들이 보였다. 그중 자신의 그림이 몇 점 있다. 그 작품들 덕분에 이곳을 찾게 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전시상태가 훌륭했다. 실내 조도며 작품이 놓인 위치, 습도와 온도까지도 전문가의 손길이 느껴질 정도로 수준급이었다.
류재언은 단순히 예술품을 돈으로만 보고 수집하는 재력가가 아니었다. 작품 면면에 깃든 애정이 정한에게까지 느껴졌다.
진짜 컬렉터구나.
자신의 손을 떠난 작품이 누군가의 공간에서 이렇게 빛을 발하고 있다는 사실이 정한에게도 깊은 울림을 주었다.
하지만 이상하단 생각이 드는 점이 하나 있었다.
탐미재에서 소현이 엎은 커피에 화집이 망쳐진 날.
그날 정한은 똑똑히 보았었다. 모든 건 류재언이 일부러 테이블을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소현을 곤란하게 하기 위해서였는지 고의로 화집을 망치기까지 했던 사람이었는데.
그때는 이렇게까지 자신의 그림을 좋아하는 컬렉터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도 상관없단 말인가.
무언가 어긋나 있고, 애정의 방향이 조금 비뚤어져 있는 사람.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 표현하기 겁을 내는 사람. 이는 분명 아픔이었다.
그리고 결국 류재언으로 인해 소현과 만난 셈이었다.
3년 전, 그와 파혼했기 때문에 소현은 하와이에 와서 자신과 처음 만날 수 있었다. 류재언과 헤어지지 않았다면 신혼여행으로 온 그녀를 만났을지도 모르고, 그렇다면 이렇게 인연이 되지도 않았겠지.
게다가 소현이 처음 탐미재에 온 것 역시 류재언 때문이었다. 뉴욕에 와서 소현을 찾을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 때문, 아니 류재언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인생의 아이러니.
류재언은 이토록 촘촘히 맞물린 인연의 면면을 알고 있을까. 결국 불청객을 자신의 손으로 불러들였다는 사실을.
그때, 소현이 나왔다. 정한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가요.”
찬란한 빛을 가까이에 두고도 못 알아보는 그런 어리석은 짓 따위, 정한은 하지 않을 셈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소현이 걸음을 멈추었다. 돌아보니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다.
소현의 다른 쪽 손목을 잡은 힘 때문이었다. 류재언이 절실함을 담아 그녀를 붙잡은 것이다.
말이 없었지만 마음은 고스란히 전해졌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일 수도 있다. 전부를 쥐어짜낸 발악인지도 모를 힘.
소현이 가만히 숨을 삼키고 입을 뗐다.
“재언아.”
그녀는 정한과 잡고 있던 한 손을 잠시 놓았다. 그리고 자신의 손목을 잡은 류재언의 손을 포개어 잡았다.
그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떼어내는 움직임에는 피할 수 없는 아픔이 서려 있었다.
“나, ……갈게.”
잡지 말라는 뜻.
잡아도 소용없다는 의미였다.
소현이 정한의 손을 놓고 한 행동은 그렇게 류재언의 손을 느리게 뿌리치는 것이었다. 류재언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그녀는 자신이 잠시 놓았던 정한의 손을 다시 잡았다. 그리고 한 발 먼저 앞서 나갔다.
누구에게도 끌려가지 않고 스스로 선택한 길.
그녀에게서 완벽하게 거절당한 류재언은 가슴이 갈기갈기 찢긴 채 먹먹한 눈빛으로 서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어떤 것도 허락해주지 않았기에.
사랑에는 힘이 있었다.
상처를 줄 수도, 상처를 받을 수도 있는 힘. 혹은 주었던 상처를 되돌려받는 힘. 그리고 상처를 오롯이 치유하는 힘.
그 순간 소현의 사랑은, 그 사랑의 선택은 여지없이 정한이었다.
◇ ◆ ◇
오라 했었다.
정한은 제게 오라 했었다. 얼떨떨하면서도 더할 나위 없이 설렜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당장은 아니라고 했다. 그는 시간을 충분히 가지라고도 했었다.
신중한 그의 태도는 오히려 소현을 안달나게 했다.
그녀는 결국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고야 말았다.
천천히 시간을 두고 생각하던 마음이 완전히 폭발해버릴 때까지 그가 보인 인내심은 그리움과 함께 산화되었다.
이제 더 이상 참지 않겠다는 듯 그의 분위기는 이전과 조금 달라져 있었다. 몸에 배인 배려는 그대로지만 맞닿은 살결에 강인한 힘이 느껴졌다.
「이렇게 돌고 돌아 어렵게 만난 사람, 난 이제 쉽게 안 놓을 테니, 은소현 씨는 그래도 괜찮은지 끝까지 잘 생각해보고.」
「…….」
「와요, ……나한테.」
고백이 아니라 경고였나 보다.
오기만 하면 미친 듯이 직진할 예정이니 부디 신중하게 생각하라는.
택시 안에서 소현은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정한의 손을 말없이 내려보았다.
손가락이 길고 고우면서도 커다랗고 남자다웠다. 든든하고도 더없이 평안한 느낌이었다.
쉽게 안 놓겠다는 그 말.
내가 바라는 바예요.
소현은 고개를 기울여 정한의 어깨에 기대었다. 그가 제게로 기울어진 소현의 머리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마음 한구석에 부는 공허한 바람마저 사르르 달래는 손길이었다.
주변은 안온한 공기로 가득했다.
“어……, 여기?”
그렇게 얼마간을 달려 도착한 곳이 낯익었다. 택시에서 내린 소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정한을 돌아보았다.
자신이 라르고의 그림을 보다가 쓰러졌던 바로 그 갤러리가 아닌가.
“잠깐 들렀다 가요. 앤디 만나러 온 거예요.”
“앤디? 앤디가 여기 있어요? ……왜요?”
당황한 표정으로 묻자 정한은 소현의 짐을 챙겨주며 미소 지었다.
“앤디 풀네임이 앤드류 베이커예요.”
“네?”
앤드류 베이커가 뭐……?
소현은 정한이 눈짓하는 곳을 돌아보았다.
갤러리 초입, 동판에 멋스럽게 새겨진 글씨. ‘베이커 갤러리’였다.
◇ ◆ ◇
“나 여기서 보니까 엄청 반갑지!”
저 인간은 분명 수상한 금발, 앤디인데.
여전히 한국어 패치가 완벽해서 더욱 이상한 외국인, 앤디 맞는데.
“뭐야, 안 반가워? 아니면 아직도 아픈 거야?”
소현은 요란하게 인사하는 앤드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탐미재에서는 그 어떤 동네 백수보다도 ‘후리한’ 자세로 퍼져 있던 앤디가 아니던가.
시골쥐가 서울에 입성해 출세한 서울쥐 친구를 바라보듯 소현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이 엄청난 갤러리가 다 앤디 거라니. 말도 안 돼.
게다가 그 대단하다는 제이 라르고의 작품들을 에이전시처럼 전담 관리한다고?
라르고의 작품은 미술품 경매회사에서조차 이 갤러리의 오너인 베이커 부자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고 들었다.
“열쇠만 받아서 갈 거야, 앤디. 지금은 소현 씨 얼른 가서 좀 쉬어야 해.”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정한이 용건을 말했다.
“오! 둘이 거기서 지내려고?”
“열쇠나 빨리 줘.”
“오피스에 올라가봐. 수잔한테 있으니까 달라고 해.”
정한은 약간 불안한 눈빛으로 앤드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알았어. 조용히 있을 테니까 빨리 갔다 와.”
정한이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앤드류는 순순히 다짐했다. 그제야 정한은 금방 다녀오겠노라며 자리를 떴다.
“내가 우리 하니 언제든 뉴욕에 오면 지내라고 깨끗하게 관리해두는 집이 있거든.”
정한이 가자마자 앤드류는 환하게 웃으며 소현의 어깨에 자신의 어깨를 툭하니 슬쩍 부딪쳤다. 나 좀 멋있지? 하는 얼굴로.
“거기가 원래 우리 하니가 예전에 지내던 집이야. 우리 하니의 감성이 곳곳에 살아 있지!”
“탐미재처럼요?”
“느낌은 다르지. 탐미재는 퓨전 느낌의 한옥이고, 이 집은 뉴욕 그 자체거든.”
뉴욕에서의 앤드류를 보고 받은 충격에서 살짝 벗어난 소현은 여전히 변함없는 그의 수다에 점점 빠져들었다.
“집이면 집이지, 뉴욕 그 자체일 건 또 뭐예요.”
“보면 알아. 내가 말이야, 한국에 가서 우리 하니가 한옥에 책방 꾸민다는 말 들었을 때 놀라지도 않았다? 그게 뭐랄까, 애가 참 어디에든 잘 녹는다고 해야 하나? 파리에 있을 땐 프랑스에서 나고 자란 애 같았거든. 근데 하와이 있을 때 봤지? 그땐 또 뼛속까지 하와이언인 줄 알았잖아.”
어디에든 금방 적응하는 건 분명 능력일 것이다.
“사실 너도 알겠지만 우리 하니가 한국인 핏줄인데도 미국에서 태어나고, 또 어린 나이에 혼자 프랑스로 유학 가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고, 하와이에 가야 했고, 지금은 연고도 없는 한국에……. 그렇게 여기저기 옮겨다니면서 살았잖아.”
소현으로선 생각도 해보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한이 아주 예전에, 그러니까 지금은 아니고 어릴 때였는데, 이런 말 한 적이 있었어.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한 인생 같다고. 한국인도 아니고, 미국인도 아니고, 어딜 가나 외지인 같고, ……자긴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고.”
나무가 아닌 민들레 씨앗처럼 바람에 흘러다닌 인생.
하지만 정한은 스스로의 힘으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다.
적응력에 더불어 정한은 탁월한 감각을 바탕으로 어디서든 새로운 길을 찾아갔다.
불행이라면 불행이라 말할 수 있는 일들이 정한에게는 또 다른 의미로 기회가 되었다.
“그런데 지금 봐, 제멋대로 잘 살잖아? 내가 이래서 우리 하니 참 좋아해. 겉은 얌전해 보이는데 알고 보면 속은 용광로처럼 막 끓어오르고, 끊임없이 하는 일들 보면 일단 사람이 지루하지가 않거든. 세상 참 재미있게 사는 놈이야.”
양파도 어디 이런 양파가 있을까. 깔수록 새롭고 신기하다.
더 많이 알고 싶고,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은 사람.
앞으로 자신이 더욱더 많이 사랑하게 될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뉴요커의 집에는 며칠이나 있다 가려고?”
앤드류의 질문에 소현은 생각에 잠겼다.
류재언의 돈으로 온 뉴욕이다. 과분했던 퍼스트 클래스 비행기표는 지금이라도 취소할 수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돈이 얼마가 됐든 일단 출장비 명목으로 지불하는 금액 외에는 모두 갚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돌아가는 비행기표는 형편에 맞추어 다시 예약해야겠고, 지금은 주말이니까 좀 지난 후에…….
“이틀 정도는 머물러야 할 것 같은데요.”
그걸 묻는 이유가 혹시, 집이 협소해서일까 싶었다. 신세를 오래 지면 불편할 것 같아서 하는 말인가.
“그 집에 침실이 혹시 몇 개예요?”
알겠지. 앤드류는 아마 알 것이다.
그동안 대신 관리를 하고 있었다니 모를 리 없을 텐데, 소현은 스스로 바보 같은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침실?”
“네.”
앤드류의 눈이 가늘어지며 빛났다.
“침실은 하나지.”
땅값 비싼 뉴욕이니 암, 그럴 수 있지 하고 생각했다. 정한 혼자 지내던 집인데 그렇게 크진 않을 것이다.
베이커 갤러리의 오너이자 세계적인 아트 딜러인 앤드류 베이커가 친구를 위해 소유하고 있는 집이 잠자리를 걱정할 정도로 협소하지는 않을 텐데.
자신이 경험해보지 않은 건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인간답게, 소현은 자신이 아는 선에서 그 말을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있다는 듯 앤드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침실이 하나라는 건.”
“…….”
“침대도 딱 하나라는 얘기거든. 거긴 호텔 트윈룸이 아니니까.”
순간 소현은 멍해졌다.
침실이 하나.
침대도 딱 하나.
……볼이 가만히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